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 미래에 대하여 실제로 준비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 공부에도 '당일치기' 심지어는 '초치기'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우도 무엇인가를 미리 하는 적이 좀처럼 없습니다. 때가 되어서야 할 수 없이 밀려서 하게 되는 것이 이제까지의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물론 지나고 보면 좀더 일찍 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 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태하고 그래서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조급증을 키우며 사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조급한 상태가 되면 여지없이 '머피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약속시간보다 10분을 일찍 출발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경우에 따라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여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가 발생하여도, 그래서 약속시간을 조금 넘기게 되어도 그다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5분을 늦게 출발하면 모든 상황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5분을 늦는 것이 아니라 20분 정도 늦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마음이 여지없이 깨지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에 짜증이 나고,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고, 쉽게 화를 내게 되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심이 사라집니다. 한 마디로 여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여유 없는 사람, 몰인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우리네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케서린 하이드라는 작가의 실화를 각색한 '미리 갚으세요(Pay it forward)'라는 제목의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케서린 하이드가 몰고 가던 트럭에 갑자기 불이 붙자 어디선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도와주기 위해 뛰어옵니다. 하지만 당황한 하이드는 본능적으로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줄 알고 오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두 남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꺼주었고, 그녀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가버린 후였습니다. 결국 그녀는 감사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죄의식을 느낄 정도로 미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그녀는 이제부터 은혜를 '미리' 갚기로 했습니다. 즉 이미 입은 친절에 대해 빚을 갚을 수 없다면, 앞으로 살아가며 입을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을 미리 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과 도움을 베풀기 시작하고, 이를 내용으로 <<미리 갚으세요>>라는 소설을 씁니다.
영화 속에서 이 소설을 읽은 한 소년은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오라는 학교 과제로 '미리 갚으세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즉 자신이 세 명의 다른 사람에게 앞으로 질 빚을 갚는 호의나 친절을 베풀고, 그 세 사람이 각기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세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아홉 사람이 되고 아홉 사람이 스물일곱 명이 되고.... 그래서 누구든 '미리' 갚는 세상, 남보다 '미리' 친절하고, '미리' 도와주는 세상을 만드는 꿈을 갖고 소년이 열심히 캠페인을 벌여 간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에서는 실제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시작된 그 변화는 거대한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이상하게 여긴 한 기자의 추적으로 그 변화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한 소년의 사회 과목 숙제에서 시작된 일이 사회에 놀라운 변화의 원동력이 되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출발점이 되었던 트레버라는 소년을 마침내 찾았지만 막상 그 소년은 자신이 시작한 그 일 때문에 살해당하고 마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기독교 신앙이란 바로 영화가 보여준 '미리 갚으세요(Pay it forward)'의 삶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그 일을 하다 죽은 트레버라는 소년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생각해 보니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희생과 헌신의 삶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것이 곧 '미리 갚는'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 역시 '미리 갚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에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
성경은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고 각자의 행위대로 보응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유일한 곳인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미리 갚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곳에 등장하는 염소들과 양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살아 있을 때의 삶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을 때 자신이 언제 그 일을 했는지, 혹은 하지 않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분은 그들의 삶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삶이 결과적으로는 '미리 갚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만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미리 갚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것은 생각만으로도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그렇게 이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심화되는 빈부의 격차가 이 세상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추악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미리 갚는' 삶은 결정적인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미리'와 인연이 없는 사람도 '미리' 갚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그물망의 일원이 될 수 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자며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며 기도 많이 하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면서 '미리 갚는' 삶을 살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희생과 헌신의 삶이 아니라 '미리 갚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