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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입니다. <삼국유사(遺事)>가 있듯이 <하림유사(遺事)>도 있습니다. <하림유사>는 나의 고향 하림마을 및 함안조가의 역사, 집안, 인물, 풍습, 유물, 유적 등을 기록하여, 후손들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카페입니다. 오늘은 나의 증조부 이하 내 집안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이 글을 관계자 및 함안조가들에게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성래(1959년 하림태생) 올림
조성래(1959년 하림태생)의 증조부 조대규(趙大奎,1871-1921, 51세亡)의 장인은 정3품 문관 강성희(姜聖喜,1827-1914)였다. 강성희는 조선시대 진주 지역 최고의 명문집안 출신이고, 과거 문과시험에 5등으로 급제했으며, 관리들이 그 앞에서는 벌벌 떠는 사헌부(법무부) 장령(掌令, 중앙지검장+고등법원 법원장)이었다.
조성래의 증조모와 고조모는 두 분 다 그들 부친이 정3품 벼슬을 한 분이었다
몇 일 전에 나의 증조부 사촌 동생인 도무실(정확한 표기는 도움실이다) 할배(조종규)의 사진이 카페에 올라왔다. 그 할배의 족보를 번역하고, 그 할배에 대한 글을 작성한 뒤 오늘 아침에 나의 증조부는 족보에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한 번 살펴봤다. 족보를 보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실을 발견했다. 나의 증조부의 장인은 정3품 통훈대부이자 사헌부 장령이었던 강성희(姜聖喜,1827-1914, 과거 문과 5등 급제)였다. 강성희 사헌부 장령이 함안조씨 감찰공파 조대규를 그의 사위로 선택했다는 말이다. 선택할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족보를 살펴보니 나의 증조부 뿐만 아니라 고조부의 장인도 정3품 벼슬을 한 분이었다. 나의 고조부는 조성가(趙性家, 1844-1906, 63세亡)이다. 아래 조성가의 족보를 보면, "장인은 경주박씨이고, 도정(都正,정3품)을 지낸 박돈(朴燉,1863-1942)"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나의 고조모인 경주박씨 할매도, 증조모인 진양강씨 할매도 다 정3품 혈통이란 말이다. 그리고 내 고조부의 부친은 조사식 (司植, 매동) 할배가 아닌가? 족보에 조사식 할배는 벼슬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대학과 중용의 뜻을 꿰뚫어보았고, 경학에 대한 논문을 잘 썼으며, 현판과 주련의 글씨를 그 지방에서 가장 잘 해석해내는 분으로 기록돼 있다. 이 카페의 우측 상단의 검색창에 조사식을 검색하면, 그 할배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나의 증조부의 족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조성가(趙性家)의 외동아들 조대규(趙大奎, 1871-1921, 51세亡)
함안조가 27대, 감찰공파 조대규(趙大奎) : 자는 겸오(兼五)이고, 호는 정남(鼎南)이다. 1871년에 태어나서 1921년 5월 17일 51세에 별세했다. 風儀寬重(풍의관중, 풍체가 매우 크고, 중후했으며,) *寬(관): 넓을 관. 면적, 용적 등이 큼 言論峻整(언론준정, 언어가 정확하고, 논리정연했다.) * 峻(준): 준엄할 준. 엄하다. 薇亭有稧(미정유계, 채미정에서 함안조씨 종중회의나 유림회의를 할 때) 公實主刱(공실주창, 실제로 그가 모든 회의를 주도해갔다. 함안조씨 감찰공파의 족보에 수록돼 있는 함안조씨 18대 주부공 조영기(英沂, 1583-1648, 66세亡)의 묘비명에도 묘비명을 쓴 이만도(李晩燾,1842-1910, 정3품)가 "주부공 영기의 족질인 조대규가 찾아와서 묘비명에 들어갈 자신의 글을 들고 와서 묘비명을 써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하고 있다. 주부공 할배의 묘비명 중 일부에는 조대규의 글을 두드러지게 하여, 그대로 실어 놓았다. 그 한문 문장을 보면, 조대규의 한문작문 실력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증조부님의 한문실력이 좋았다는 것을 이전에는 몰랐다. 이만도는 경북 예안에서 출생하여, 1866년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동부승지(정3품)와 춘추관수찬관(정3품)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묘는 진양군 사봉면 부계리 덕광동 안쪽 골짜기인 어씨고개에 있고, 갑좌甲坐 방향이다. 하관할 때 부인의 유골도 함께 묻었다. * 부인은 7년 먼저 돌아가심
조대규의 부인은 진양강씨이고, 그녀의 부친은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강성희(姜聖喜,1827년생, 본관 진주晋州, 과거시험 문과 5위로 급제했다)이다. 강성희는 정3품 통훈대부였지만, 정4품직인 사헌부 장령掌令직을 맡아 일했다. (참고) 사헌부는 지금의 법무부이다. 사헌부 장령은 정원 2명인데, 이것은 암행어사, 즉 오늘날의 중앙지검장이 되기도 하고, 고등법원 법원장이 되기도 하는 직책이었다. 이것은 관리들의 비리에 대한 탄핵감찰권과 일반범죄에 대한 검찰권을 행사하고, 인사와 법률개폐의 동의권 및 거부권을 가지고 있어서 국정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직책이었다. 그래서 사헌부 장령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을 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과거 문과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자들이었다. 조대규의 부인 진양강씨는 1869년에 태어나서 1914년 윤5월 초3일 46세에 별세했다.
다음은 위의 번역문에 대한 한문원문이다.
性家(성가)
大奎(대규) 字兼五(자겸오)號鼎南(호정남)高宗辛未生(고종신미생)風儀寬重(풍의관중)言論峻整(언론준정)薇亭有稧(미정유계) 公實主刱(공실주창)辛酉五月十七日卒(신유오월십칠일졸) ○墓(묘)晋陽郡(진양군)寺奉面(사봉면)富溪里(부계리)德光洞內谷(덕광동내곡)魚束嶺中嶝(어속령중등)甲坐(갑좌) ○配晋陽姜氏(배진양강씨)父(부)行(행)通訓大夫(통훈대부)司憲府掌令(사헌부장령)聖喜(성희) 高宗己巳生(고종기사생)甲寅閏五月初三日卒(갑인윤오월초삼일졸) ○墓合窆(묘합폄)
(도움말)
1) 風儀(풍의)= 풍모(風貌)= 풍체(風體)
2) 寬(관) 넓을 관. 면적, 용적 등이 큼
3) 峻(준) 준엄할 준. 엄하다.
4) 薇亭(미정)은 채미정(采薇亭)의 준말이다. 이것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樓亭,누각+정자)이다. 채미정은 1698년(숙종24) 단종이 복위되고, 조려의 사당이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사액(賜額)되면서 창건된 것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1902년에 재건된 것이다. 1871년에 서산서원이 철폐된 이후 1983년까지 생육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5) 稧(계)= 계(契), 계모임. 여기서는 함안조씨 종중(宗中)회의나 지역의 유림회의를 의미한다. 그런 회의를 주로 채미정에서 했다.
6) 刱(창) 비롯할 창. 주도하다.
7) 嶝(등) 고개 등
8) “行(행)通訓大夫(통훈대부)”에서 "行(행)"은 높은 품계 사람이 낮은 품계 자리에 가서 일할 때 쓰는 말이다. 그 반대 경우에는 "守(수)"를 쓴다.
9) 강성희의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1827년생이다. 그는 과거시험 문과 5위로 급제하여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품계까지 올라갔다. 퇴직 후 진주시(진양군) 정촌면 봉동(鳳洞)에 있는 죽남정(竹南亭)에서 쉬었다. 강성희는 강감찬(장군, 고려, 948년생), 강희안(1417년생, 조선문인,화가), 강희맹(1424년생, 뛰어난 문장가, 24세 때 1447년(세종 29)에 과거시험 문과에 장원급제함. 예조정랑(정5품), 이조참의(정3품), 진헌부사 등을 역임함. 강희안의 동생임, 그의 이모부가 세종이다), 강세황(1713년생, 정조 때의 문인,, 예조판서(정2품), 화가) 등의 후손 내지 집안 사람이다.
9) 窆(폄) 하관할 폄. 合窆(합폄) : 부부나 둘 이상의 시신을 한 무덤에 묻음
(생각해볼 점) 저 조성래의 증조부이신 조대규의 장인은 정3품 통훈대부 강성희였다. 강성희는 앞에서 보았듯이 조선시대 진주 지역 최고의 명문집안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 아무리 품계가 높은 관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헌부 장령이었다. 조성래의 증조부 뿐만 아니라 고조부의 장인도 정3품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이 정2~3품 집안과 혼인하는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혼인은 집안 어른들끼리 결정했고, 집안 급수가 비슷해야 이루어졌다. 우리 직계 선조 중에서 고려말의 전서공 조열 할배는 정2품이었고, 생육신 조려 선생의 아들인 좌윤공 조금호(趙金虎)할배는 종2품 가선대부였다.
다음은 조대규의 자손 관계를 훑어본 뒤 그 인물들에 대해 기록한다.
조대규는 진양강씨 할매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가 있었다. 그들 중 첫째가 한짓골 왕고모님이다. 둘째는 장남인 조용태(鏞泰, 1893-1913, 21세亡)이고, 셋째는 마전 왕고모님이고, 네째는 댓실 왕고모님이다. 다섯째가 차남인 조용기(鏞奇,1907-1943, 37세亡)이다. 이들은 모두 부친의 머리와 외조부 강성희의 머리를 물러 받아 매우 총명했다.
1) 한짓골왕고모님, 팔도할매 조대규의 첫째 자녀인 한짓골 왕고모님은 인천이씨 이원석(李源錫)의 아들인 이수현(李洙賢)에게 시집가서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태균(李泰均, 머리가 대단히 좋았고, 일본에서 사업을 했다), 이태용(李泰用), 이태인(李泰寅)이고, 사위는 주영생(周永生)이다. 한짓골 왕고모님의 별명은 “팔도(八道)할매”였다. 한짓골 왕고모님은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듣거나 본 것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친정인 우리 집에 오면, 하림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들었다. 왕고모님이 들려주는 조선팔도의 풍물과 인물, 역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좋은 머리를 물려받은 사람이 나의 부친인 조임제(1932-2003)이고, 나의 의령고모님(조희제喜濟,1929년생, 1953년생 남기호, 1960년생 남기권의 모친)이고, 나의 누님인 조덕래(1955년생, 김경윤, 김경학의 모친)이다. 조덕래는 휴대폰에 가족과 친지의 전화번호를 입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번 들으면 어렵지 않게 그것을 다 기억하기 때문이다. 50~60명의 전화번호가 머릿속에 다 입력돼 있다. 나에게 한짓골 왕고모님은 아주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다. 아마 내가 5살 때쯤 돌아가신 것 같다.
2) 조대규의 둘째 자녀는 장남 조용태(趙鏞泰,1893-1913)이다. 그는 부산 모라동 조철래(1956년생)의 조부다.
3) 조대규의 셋째 자녀인 마전 왕고모님은 마전에 사는 이수해(李壽海)의 아들 이현아(李鉉阿)에게 시집갔다. 이수해는 재령이씨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후손이다. 마전 왕고모님은 1남1녀를 낳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마전 왕고모님의 아들 이경호(李慶浩, 마전아재,1919년생)님은 내 부친의 고종사촌형이다. 이경호 마전 아재는 어린 나이에 모친을 여의고, 외갓집인 우리 집에 와서 살았다. 그래서 평생 외가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사신 분이다. 마전 아재는 외가인 우리 집안을 대단한 집안으로 여겨서 93세에 돌아가시기 3년 전까지 당신 외조부 제사에 빠진 적이 없었다. 마전 아재는 당신 외조부이자 나의 증조부이신 조대규님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당신 외조부 산소에 비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내(조성래)가 꼭 그 산소에 비석을 세워주었으면 했다. 해주정씨 할매(나의 큰 집 할매, 매실댁)는 왜 시아버지 묘에 비석도 세워주지 않았는가?
호식(虎食), 그러면서 비석에 꼭 “호식(虎食)” 이야기를 넣어 달라고 당부했다. 내가 "호식"이 무슨 말인지 물었다. 나의 증조부께서 호랑이가 물고 가는 10살 된 아이를 빼앗아냈다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엔 큰집인 도무실할배 집과 우리 집은 함안 하림리 부상토(부상등父喪嶝) 큰 산소 밑에 있는 현재 검암아지매 집 밑의 안동댁 집 큰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다음은 마전 아재가 나에게 들려준 호식사건 이야기다. 가을 추수 철에 벼 탈곡을 다 마친 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조대규님이 봉곡할배 집에 가서 풍석(風席)을 빌려오다가 “으악”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타작 마당에 있던 10살 된 아이를 물고 손살 같이 집 뒤 쪽으로 달아났다. 그 때 타작 마당에는 챙이(키)로 나락을 까부는 등 10여명의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다. 타작 마당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혼비백산하여,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나의 증조부이신 조대규님은 옆에 있던 지게 작대기를 집어 들고 호랑이를 뒤쫓아 갔다. 호랑이는 집 뒤 쪽의 약 3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대 밭에서 아이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조대규님이 지게 작대기를 치켜 들고 고함을 치며, 호랑이에게 달려들자 호랑이가 그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그 아이는 도무실 할배(조종규)의 동생이었다. 조대규님은 그렇게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 사촌 동생 상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이 호랑이 사건은 1896년쯤 일어난 일이다. 그 때 도무실 할배는 16살쯤 되었고, 나의 증조부님은 23살쯤 되었다. 그 이후 도무실 할배는 7살 위의 사촌형인 조대규를 평생 특별한 분으로 모셨다고 한다.
마전 아재와 나는 대구 용암 할배(조용민趙鏞泯,1914생, 신산할매의 셋째 아들, 조영제, 조웅제, 조승제, 조백제 등의 삼촌)가 호식사건에 대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여, 호식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2003년 12월 5일에 대구 용암 할배 댁을 찾아갔다. 그 때 용암 할배는 90세였고, 마전 아재는 84세였다. 용암 할배가 10세경에 호식사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본인이 태어나기 약 20년 전의 일이라서 자세히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호식사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호랑이가 많았다고 했다. 한국 호랑이가 최후에 잡힌 것은 1970년에 함안군 법수면 강주리에서였다. 그 아이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꿈에 호랑이를 봤다고 하더니 그 날 그런 일을 당했다고 했다. 용암 할배가 말했다. “너의 증조부는 나에게는 봉도 아재였다.” “봉도 아재는 연세가 50살이 조금 넘어 돌아가셨는데, 그 때 내가 한 7살쯤 되었을 때이지.” “자세한 것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봉도 아재는 기골이 장대한 어른이셨다.” “하림 동네에서는 그러한 기골이 없었다.” “너의 증조부인 봉도 아재가 한 번은 넙실 ‘심’가를 불러서 호통을 치고, 잡아서 볼기(엉덩이)를 쳐야 한다고 했다. 근본도 없는 것이 자기 집 안에서 관을 썼다고 그랬던 거야.” “그 당시에는 양반이 아니면 관을 못 썼어.” “봉도 아재가 볼기를 치면, 아주 무섭게 쳤다고 들었다.” “너의 증조부는 군북면 내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어른이었지.” “또 너의 한짓골 왕고모님은 모르는 것이 없는 박사였다.”
일주일 전(2020. 6. 8일)에 도무실 할배와 청동 할배에 대한 글을 작성할 때,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마산에 사는 조희제(1940년생) 아재와 통화했다. 통화 중에 뜻밖에 호식사건 이야기가 나왔다. 조희제 아재는 옛날 그 당시에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자꾸 일어나서 선조들이 수백 년 동안 살아온 집을 팔고, 터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호식 이야기를 했다. 조희제 아재는 내 증조부가 호랑이에게서 아이를 빼앗아냈다는 사실은 모르고 도무실 할배의 동생이 호랑이한테 물려 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난 뒤 약 3일 뒤에 서울 총장 아재(1938년생, 조백제)께 여쭈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다. 통화 중에 나의 증조부인 봉도 할배(조대규)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봉도 할배는 체구가 장대하고, 매우 엄해서 무서운 분이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봉도 할배가 하인이나 사람들이 잘못해서 볼기를 치면, 아주 무섭게 쳤던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증조부 산소이장 이야기 내가 2016년에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던 8개의 조상 산소를 한 곳으로 이장할 때, 진주시(진양군)와 함안군의 경계 지점에 있는 어씨고개에 있던 증조부의 산소를 파서 유골을 습득할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는 그 산소의 흙이 특별했다는 것이다. 봉분을 파서 밑으로 들어가니 그 밑의 흙은 황금색 모래와 같은 흙이었다. 그 흙은 한 움큼 쥐었다가 놓으면 덩어리로 뭉쳐져 있지 않고 풀리는 그러한 흙이었다. 나는 평소 그 산소 자리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소 이장 작업을 하는 인부들이 유골 습득 작업을 다 마친 뒤에 "이 산소는 파내기가 좀 아까운 자리 같다"고 했다. 두 번째 놀라운 것은 매우 깊이 파고 관을 묻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유골이 나오지 않아서 지점이 잘못 되었거나 유골이 삭아 없어졌는 줄 알았다. 약 3미터 가까이 파고 내려가니까 유골이 나왔다. 합장을 한 부인의 유골은 다 삭아 없어졌고, 발가락 뼈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놀라운 것은 100년 전에 매장한 산소이지만 이 산소는 1921년에 매장했고, 2016년에 파내어서 하림 새터의 함안조씨 19대 징구(徵久) 선조의 산소 밑으로 이장했다. 증조부의 유골은 삭아 없어지지 않고 튼실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개골의 치아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박혀 있었고, 촛대뼈 등 다리 뼈가 매우 굵고, 길었다. 뼈대를 보니 체구가 특별한 분이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10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뼈 안이 꽉 차 있어서 매우 무거웠다. 족보에 왜 증조부의 풍체에 대해 “풍의관중(風儀寬重,풍체가 매우 크고, 중후했다)”으로 묘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산소는 20~30년이 지나면 뼈가 거의 다 삭아 없어져버린다. 이러한 뼈대, 이러한 체구를 물러 받은 사람이 나의 부친인 조임제(趙壬濟,1932년생)이고, 나 조성래(趙星來,1959년생)이다. 나의 부친은 키가 매우 크고, 힘이 세었다. 나의 부친은 1966년, 34세 때, 함안 하림에서 부산 사상으로 이주해왔다. 그 당시 사상 감전동에는 20살쯤 되는 청년들은 깡패가 많았다. 부친이 39세쯤 되었을 때다. 깡패 2명이 도로가에 있는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면서 고성방가(高聲放歌)를 했다. 부친이 "좀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들은 어른 말을 듣지 않고, 눈알을 부라리며, 덤벼들려고 했다. 부친이 바로 뛰어나가서 그들을 때기장을 쳐버렸다. 그 이후 감전동 깡패들은 고성방가를 하다가도 우리 집 앞을 지날 때면 조용히 지나갔다. 나는 하림초등학교에서 부산 사상초등학교로 3학년 초에 전학왔다. 하림초등학교에서의 별명은 키다리였고, 사상에서의 별명은 물소였다. 나는 사상초등학교로 전학와서 나를 건드리는 골목대장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모두 때려눕혔다. 그들의 형들이 나를 때리려 왔다. 난 그 형들도 다 물리쳤다. 싸우는 모습을 본 동네 형들이 나에게 '물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는 힘이 세었지만, 다른 애들을 괴롭혀 본 적은 없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나보다 2살 위 까지는 씨름을 해서 진 적이 없다. 그 때는 학교에서 반별 씨름대회를 많이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부산시 초등학교 육상대회에 출전하여 100m 달리기 종목에서 은메달을 땄다. 증조부의 뼈대를 물려받은 덕분이라고 본다. 함안조가 남자들은 조정(趙鼎)이라는 장수의 유전자를 물러 받아서 대부분 머리가 우수하고, 용맹하고, 운동을 잘 한다. 축구 선수 조광래(1954년 진주태생) 감독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광래 감독은 입학시험을 쳐서 지방 명문고등학교인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도 꽤 잘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축구선수 중에서 미적분 문제를 풀 수 있는 선수는 아마 조광래 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전 아재(이경호, 1919년생)가 83세쯤 되었을 때 돌아가시기 전에 외갓집 산소를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산소의 위치를 아는 내가 시간을 하루 내서 마전 아재를 승용차로 모시고 함안으로 가서 나의 고조부와 증조부, 조부 등의 산소를 다 둘러보면서 참배했다. 마전 아재는 명절 때 꼭 외숙모(나의 조모님, 세말댁)를 뵈어려 부산 감전동의 우리 집에 왔다. 그 때 마전 아재는 부산 덕천동에 살았다. 나의 조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 집에 오면, 당신이 가장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나의 부친보다 13살 많았다) 명절이 되면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외가인 우리 집을 찾았다. 나는 재령이씨가 정말 양반임을 알고, 우리 집안을 대단한 집안으로 여긴다는 것을 안다. 마전 아재의 아들은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부산은행에 취직하여, 두뇌가 명석하여, 부산은행 본부에 줄곧 근무하다가 지점장으로 퇴직했다. 지점장을 할 때 내가 은행으로 찾아가서 차를 한 잔 마신 적이 있다. 마전 아재 손자는 마전 아재가 돌아가셨을 때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돌아가시면서도 후손들이 자기 외가인 우리 집과의 관계가 끊어질까봐 많이 염려했다.
4) 댓실 왕고모님 조대규의 넷째 자녀는 댓실왕고모님이다. 댓실왕고모님은 안동권씨인 권오식(權五植)에게 시집가서 슬하에 권경영(權景瑛), 권경선(權景瑄) 등 두 아들이 있고, 이향규(李珦楏), 이안계(李安계?), 조병희(曺炳熙) 등 세 명의 사위가 있다. 나의 고종사촌인 남기호(1953년생) 형님이 당시 경북의 명문(당시에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중학교인 경상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상고(부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하여, 댓실 왕고모님의 사위인 이향규님의 아들의 입주과외선생으로 입주하여, 1년 이상 그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 때 그 사위는 중소기업은행 지점장이었다. 그 당시는 은행지점장은 매우 좋은 형편의 집에 해당했다. 내가 대학생 때 부친과 함께 망미동에 있던 그 집에 가본 적이 있다. 다들 못 살던 시절이었는데도 그 집은 정원이 큰 부유한 집이었다. 이 댓실 왕고모님의 첫째 딸은 자신의 외조부인 나의 증조부 제사에 여러 번 왔다. 그 때 그 분은 나에게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분은 댓실 왕고모님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나의 조모님도 그랬지만 댓실왕고모님은 도인의 마음을 지닌 분이었다. 댓실 왕고모님과 나의 조모님은 시누와 올케 사이인데도 너무나 잘 지냈다. 댓실 왕고모님은 늘 살림이 기울어진 친정을 많이 걱정했다. 댓실 왕고모님은 내가 6살쯤 되었을 때 친정에 와서 입고 있던 모직티를 벗어서 나의 조모님께 주고 가기도 했고, 돌아가시기 3~4년 전에는 친정에 와서 철래 형님의 형수가 어려운 살림에 수고한다고 가스레인지를 좋은 것으로 교체하라고 돈을 주고 가기도 했다. 댓실 왕고모님은 사리분별력과 이해심이 좋았고, 마음이 매우 따뜻했고, 인정이 많았다. 댓실 왕고모님은 눈이 부시는 100% 은발머리와 마치 풍산개가 짖는 듯한 깊고도 우렁찬 음성을 갖고 계셨다. 나에게 조부님과 증조부님이 어떠한 인품의 소유자였는 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 댓실 왕고모님이다. 댓실 왕고모님은 나에게 "경주 돌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옥돌인 것은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집안이 예사 집안이 아님을 말하기 위한 말이었다. 댓실 왕고모님의 큰 아들(권경영)은 1970~1980년대에 마산에서 동장(洞長)을 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설에 댓실 왕고모님을 찾아 뵈어러 마산 그 집에 간 적이 있다. 왕고모님의 49재 막재 때 의령고모님(조희제)과 함께 마산의 한 사찰에서 하는 막재에 참석하여 마지막 가는 길을 빌어드렸다. 댓실 왕고모님의 남편인 권오식의 부친은 권녕가(權寧可)이고, 그는 월암(月岩) 권용견(權龍見)의 후손이다.
5) 조대규의 막내는 차남 조용기(趙鏞奇,1907-1943)이다. 그는 부산 구서동 조성래(1959년생, 조덕래 1955년생, 조덕희 1961년생, 조정래 1963년생, 조상래 1966년생, 조선희 1969년생)의 조부이다.
조대규의 두 아들의 후손들
조대규 슬하에 조용태와 조용기 등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장남 조용태 슬하에 외동아들 조창제(1911년생)가 있었고, 차남 조용기 슬하에 외동아들 조임제(1932년생)가 있었다. 장남 조용태와 차남 조용기는 나이가 14살 차이 났고, 조창제와 조임제는 21살 차이 났다.
조대규의 장남 조용태(趙鏞泰,1893-1913), 조철래의 조부
아래 사진은 조대규의 장남인 조용태와 그 자손들이다. 조용태의 외아들인 조창제(昌濟,1911-1964, 53세亡) 슬하에 조철래(哲來,1956년생) 등 2남 2녀가 있었다. 아래 사진을 눌리면 확대되어 잘 볼 수 있다.
조대규의 장남 조용태(趙鏞泰,1893-1913)는 21세에 별세했다. 조용태는 자신의 부친인 조대규보다 7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슬하에 3살 된 아들 조창제(趙昌濟, 1911-1964)가 있었다. 만약 조용태 할배가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집안은 괜찮은 역사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의 조부님도 형님에게 살림을 받아서 분가해서 별 탈 없이 오래 살았을 것이다. 내가 대구 용암 할배를 찾아뵈었을 때 용암 할배는 "너의 집은 남자들이 단명하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었다"고 했다.
해주정씨 할매, 매실댁(조철래의 조모) 조용태의 부인은 해주정씨(海州鄭氏)이고, 택호는 매실댁이었다. 해주정씨 할매는 시집온 지 3년 째 되는 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생 사람들한테 매우 독하게 굴었다. 하림 동네 사람들이 "매실댁(해주정씨)이 앉은 자리에는 하도 독해서 잔디도 안 난다"고 말하곤 했다. 해주정씨 할매는 한 명 밖에 없는 시동생과 동서(조성래의 조부모)를 분가시켜주지 않고 독하게 부려 먹었다. 해주정씨 매실할매는 1963년에 부산 사상에서 돌아가셨다. 장례는 하림의 우리 (조임제, 조성래) 집에서 치루었다. 그 때 내가 5살이었는데, 장례 장면이 희미하게 기억난다. 다음은 해주정씨 할매 사진이다.
조창제 (昌濟, 1911-1964, 53세亡, 정수) 아재(조철래의 부친)
조용태(매실) 할배 밑에 29대 조창제(부인1. 청주한씨 한경순 1909년생, 1934년 26세亡. 부인2. 합천이씨 이우순 1915년생, 2009년 95세亡) 아재가 있었다.
위의 사진의 인물은 조창제다. 나의 5촌 당숙인 조창제 (정수) 아재는 머리가 좋고, 한학이 되고(하림에 이 연배에 한문이 제대로 되는 분은 압실 할배와 조창제 아재 밖에 없었다), 한문 붓글씨를 특별히 잘 썼다. 현재 내가 보고 있고, 사진을 찍어 이 카페의 글에 싣고 있는 갑오(甲午,1954년)족보는 6.25동란 이후 조창제(정수) 아재가 대구 내인 할배(신산 할매의 차남) 집의 청마루 밑에 굴을 파고 들어가서 3년간 숨어 사는 동안 쓴 것이다. 그 글씨를 한 번 보자.
(사진 1)
(사진 2)
위의 (사진 1)은 조창제 아재가 쓴 감찰공파의 족보이고, (사진 2)와 (사진 3)은 함안조가 다른 파의 족보이다. (사진 2)의 글씨도 다른 성씨의 족보에 비하면 잘 쓴 것이지만 조창제 아재가 쓴 족보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다. 우선 조창제 아재가 쓴 족보는 전체적인 디자인감각이 뛰어나다. 한 페이지에 대, 중, 소의 글자 크기가 있는데, 글자 포인트의 비례가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글씨도 차이가 많이 난다. 어느 한 획이라도 부족함이 없다. 글짜 꼴이 안정적이고, 각 획에 강약이 들어 있으며, 에너지가 충실하다. 그리고 글자 모양이 깔끔하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글씨다. 요즘 한국에서 붓글씨를 가장 잘 쓰는 사람도 이렇게 잘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한국 족보 중 제1등급 글씨와 디자인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조창제 아재는 하림동네의 좌익대장이었다. 좌익은 주로 소작농들이었는데, 하림에서 유일하게 지주계급이 좌익대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조창제 아재는 빨갱이로 몰려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혼자 대구로 도망가서 신산 할매의 둘째 아들인 내인 할배 집의 마루 밑에 굴을 파고 들어가서 3년간 숨어 살았다. 그 당시는 좌익은 잡히면 맞아 죽거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조창제 아재는 집안 사람(조웅제, 필동아재) 덕분에 맞아 죽지도 않았고, 감옥살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술로 그 많던 가산을 다 탕진했다. 그래서 하림 동네 사람들은 “창제는 (막걸리)사발에 망했다”고 했다. 조창제 아재가 46살에 둔 늦둥이 아들 철래도 중년에 술을 많이 마셨다. 조철래는 60세쯤에 직장암 수술을 받은 뒤 술과 담배를 끊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조창제 아재는 늦둥이 철래가 8살 때, 53세에 별세했다. 조창제 아재는 30대 때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대구 내인 할배 집에 피신해 있을 때도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 술 심부름을 많이 한 아이가 1940년생인 조희제 아재다. 그 때 조희제 아재의 가족(청동 할배)은 대구에 살았다. 조창제 아재는 고향 하림에 올 때 항상 흰 두루마기를 입고, 원북역에서 하림 마을로 약 15분 걸어 들어올 때 항상 술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서 기어오듯이 들어 왔다. 입고 있던 흰 두루마기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조창제 아재는 하림에 살 때, 하림 동네에서 가장 큰 기와집 2~3개 중 하나에 살았다. 신산 할매집, 조창제 아재집, 압실 할배집이 하림에서 가장 큰 기왓집이었다. 조창제 아재 집은 대감집 처럼 대문간이 별도로 있었고, 대문이 하림에서 가장 높은 나무대문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 사립문이었다. 집 안에는 아주 깊고도 좋은 우물이 있었다. 여름 철에 어름물 같이 차가운 물이 나왔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그 물을 길어 오이냉채국을 만들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6.25 동란 때 다른 집은 다 불탔지만 이 집은 빨갱이들이 불을 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창제 아재가 하림리의 좌익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집은 나의 증조부로부터 물러받은 집이었다. 하림리 8반에 있던 그 집을 하림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할 때 강정할매에게 팔았다. 강정할매가 돌아가신 뒤 그 집을 조판규(조정백의 부친, 대숲아제)님이 매입해서 슬라브집으로 재건축해서 살고 있다. 조창제 아재는 하림에서 20마지 논을 팔아서 1957년경에 부산 사상으로 이사왔다. 그 후 아재는 196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약 8년간 막걸리 사발만 대하다가 돈이 다 떨어지는 순간 돌아가셨다. 조창제 아재는 돌아가실 때까지 흰 두루마기만 입었다. 양반이 아니었고, 한학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조창제 아재가 돌아가신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그의 자녀인 조명자와 조철래는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다. 내가 6살쯤에 조창제 아재가 고향에 오면서 앉은뱅이 책상을 하나 등에 메고 왔다. 누나와 내가 공부하라고 마산에서 사왔다고 했다. 나는 그 책상을 좋아했다. 조창제 아재 부인인 정수 아지매는 제사상에 올리는 청주를 아주 맛있게 잘 담았고, 담배와 커피를 좋아했다. 정수 아지매는 나의 조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매년 명철 때 모라동에서 버스를 타고 감전동 우리 집으로 인사드리려 왔다. 나의 조모님이 정수 아지매보다 9살 많았다. 정수 아지매는 80이 넘은 연세에도 꼭 그렇게 했다. 이와 같이 정수 아지매는 옛날 법도를 중시했다.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들 조철래이다. 나의 6촌 형이자 나보다 3살 많은 1956년생인 조철래는 내가 잘 모르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사용했던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대화 중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정수 아지매는 양반 집에 시집와서 평생 고생만 하고 갔다.
조창제 아재의 부인, 정수 아지매 사진
조창제 아재는 슬하에 2남2녀가 있다.
장녀 조영래(1930년생, 남편 대산 사람 분성배씨 배효석 1924년생, 1남 배종선, 2남 배종무, 3남 배시국(서울대학교 졸업), 1녀 배연아, 2녀 배연희, 3녀 배연주, 4녀 배연숙, 5녀 배순안),
장남 조양래(1941년생, 미혼으로 29살 때 폐결핵으로 별세했다. 키가 크고, 얼굴도 넓적한 것이 좋았다. 구포극장에 영화 보려 갔다가 구포 깡패들과 싸움이 붙어서 그들의 이빨을 다 내려 앉혔다. 그래서 구속되어 추운 감방에서 폐병을 얻었다.)
차녀 조명자(1952년생, 남편 전주최씨 최석림, 장녀 최선미 1975년생, 차녀 최선영 1979년생, 아들 최연진 1982년생)
의자에 앉은 사람이 조창제 아재의 부인과 나의 의령 고모님인 조희제이다. 의령 고모님의 오른 팔 옆에 선 분이 조창제의 장녀인 대산 누님이고, 그 옆 사람이 나 조성래의 모친이다. 그 다음이 조창제의 차녀인 조명자와 그의 남편 최석림이다.
차남 조철래(1956년생, 부인 한양조씨 조남례 1959년생) : 조철래 형은 호텔 양식당의 요리사였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산 초량의 옐로우 하우스라는 양식당의 보이로 일을 시작해서 요리를 배웠다. 그 식당은 주로 서양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었다. 조철래 형은 조상제사를 정성껏 잘 모셨다. 조철래 밑에 1남2녀가 있는데, 세 명 다 착하게 잘 자랐다. 주변 사람들이 그 집은 자녀 셋이 다 잘 풀려서 조철래 내외의 인생 마지막은 성공이라고 말한다. 조상제사를 잘 모신 덕분이 아닌가 한다.
장녀 조현정(1979년생 교육행정직 공무원이다. 남편 김해김씨 김민수는 1977년생이고, 고등학교 교사다. 그의 아들 김백준은 2011년생이다.)
자 조현진(1982년생, 회사원, 홈마트의 농산물 전문가이다. 부인은 영천이씨 이경화이고, 1980년생이며,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2017년생 아들 조재혁은 어린 나이 때부터 할아버지 집에 오는 것을 좋아하고, 제사상에 절을 예쁘게 잘 했다.)
차녀 조현실(1985년생, 부산교대졸업 후 호남지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중이다. 남편 경주최씨 최봉석은 1984년생이고,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후 호남지역 고등학교에서 과학교사로 근무중이다. 딸 최효원은 2017년생이다.)
조철래의 환갑 때 찍은 가족사진. 곤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조철래다. 그의 1남 2녀의 부부들과 그 자녀들이다. 모두 행복한 표정이다. 잘 찍은 사진이다.
1989년 설에 감전동 우리(조임제) 집에서 차례를 모신 후 안방에서 찍었다. 앉아 있는 사람은 나 조성래의 부친인 조임제, 조철래의 아들인 조현진, 정수 아지매, 나 조성래의 모친이다. 모친은 나의 첫째 딸 조현주를 업고 있다. 모친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조율래(나의 10촌 동생)이고, 그 옆은 조철래 형님의 형수이고, 나의 처 김미향이다. 그 앞에 서 있는 아이가 조철래의 첫째 딸 조현정이다. 나의 처 옆에는 나 조성래가 서 있다. 그 옆이 조율래의 동생인 조함래이고, 그 옆이 조정래와 조철래이다. 조철래 앞의 꼬마가 조철래의 둘째 딸 조현실이다. 이 사진은 사진학을 전공한 나의 동생 조상래가 찍었다.
조대규의 차남 28대 조용기(趙鏞奇, 세말할배, 1907-1943. 8. 15, 37세망), 조성래의 조부 묘비석에는 1948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부인은 1907년생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1948년은 1943년의 오타이다. 부인 이증아는 병오생 말띠인데, 병말띠 여자는 혼인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출생신고를 할 때 한 살 낮추어서 신고한 것이라고 한다.
나의 조부 조용기는 재령이씨 부인 이증아(李曾兒, 병오생, 1906-2001. 6. 18일 96세亡, 진양군 동산리 출신)와 결혼하여, 슬하에 조희제(1929년생), 조임제(1932년생), 조정자(1938년생) 등 1남 2녀가 있었다. 나의 조부님은 1943년 추석날 밤에 전남 여수에서 열차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때 37세였고, 그의 아들 조임제는 12세였다. 서울의 총장아재(1938년생 조백제)가 그의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는 나의 조부님(조용기)은 머리가 좋아서 집안 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 밑의 사진 조각을 눌리면 조대규의 차남 조용기(조성래, 조정래, 조상래의 조부) 및 그의 자손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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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부님은 16살 때 결혼했다. 그 때가 1922년이었고, 나의 증조부 조대규님께서 돌아가신 지 일 년 뒤였다. 내년에는 분가시켜주겠지라고 생각하며, 15년을 기다려도 매실댁 형수는 분가시켜주지 않고, 몸종을 데리고 시집온 동서 세말댁을 종처럼 부려먹었다. 형수와 시동생의 나이 차이는 20살 정도 났고, 형수의 아들인 조창제와 조용기의 나이 차이는 불과 4살 밖에 나지 않았다. 형수는 그 많던 재산을 시동생에게는 조금도 떼어주지 않았다. 나의 조부님은 형수로부터 살림을 독립하기 위해 그 당시 진주에서 인삼당한의원을 하고 있던 처남을 통해 인삼 씨를 구해 하림 산에 여기 저기에 심었다. 하지만 그것은 별 소득이 없이 끝났다. 나의 조부님은 분가를 기다리다가 견디지 못 하고, 처가의 도움을 받아 가족들을 하림에 남겨두고 홀로 부산으로 가서 문현동에서 전매사업을 했다. 전매사업은 인삼과 담배를 전매청에서 받아서 가계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제법 기반을 잡았을 때 밤에 복면을 한 2인조 강도가 권총을 들고 들어와서 수금 해두었던 금고 안의 돈을 몽땅 다 털어갔다. 나의 조부님은 그 때 이후 그 곳에 더 이상 있기도 싫었고, 형수와 함께 사는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었다. 그래서 정처 없이 전국을 방랑하다가 추석날 밤에 전남 여수에서 열차사고로 돌아가셨다. 나의 조모님은 평생 매일 새벽에 아미타경 등 정토삼부경을 독송했다. 매일 꿈 속에서 듣는 할머니 염불소리는 극락세계의 음악이었다. 그 영향으로 나의 형제들은 모두 불심이 좋은 편이다.
동암(東菴) 이현욱(李鉉郁,1879-1948, 70세亡) 선생 나의 조모님의 부친은 동암 이현욱 선생이다. 동암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진주 지역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유학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한 번 보거나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인터넷에 동암 이현욱을 검색하면 많은 글이 올라와 있다. 이 카페의 우측 상단에 있는 검색창에 이현욱을 검색해도 몇 편의 글이 나온다. 그는 나라를 잃은 시대에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은거하여 학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중년 이후에 당시 영남학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면우 곽종석과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을 찾아가서 학문하는 방법을 묻는 등 지방의 석학들을 찾아가서 배움을 청했다. 1961년에 간행된 이현욱 선생의 문집인 <동암집> 9권이 있다. 이 문집은 한문으로 쓴 것이고, <한국역대 문집총서>에 수록돼 있다.
<동암집東菴集> 제1권의 목록과 서문이다. 이 문집은 제9권까지 있다.
후손들과 지방 유림들이 동암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89년에 진주시 진성면 동산리에 '아남재(牙男齋)'를 지었다.
아남재
1993년에 나의 부친을 모시고 나의 처와 어린 딸 2명을 데리고 동암 선생 제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동암 선생의 제자들인 수십 명의 지역 유림들이 모두 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제관으로 참석했다. 동암 선생의 아들은 진주에서 인삼당한의원을 경영했다. 내가 5살 쯤 되었을 때 인삼당한의원 원장이었던 나의 조모님의 오빠의 환갑 잔치에 조모님을 따라 간 적이 있다. 대문간에서 안채까지는 한 참 걸어 들어가는 그런 집이었다. 마루에 전화기가 있었다. 그 당시 하림 동네에는 전화기가 있는 집이 없었다. 현재 인삼당한의원(이동렬 원장)은 진주에서 3대째 계속하고 있고, 그 집안은 2개의 한의원과 함께 결혼식장이 한참 잘 될 때는 진주에서 큰 예식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동암 선생의 머리를 물러 받은 분이 나의 조모님이다. 나의 조모님은 90세가 넘었을 때도 수 십 명의 고향 사람들의 생일과 제삿날을 다 기억했다. 이러한 나의 조모님 머리와 조부님의 머리를 그대로 물러 받은 분이 나의 의령고모님인 조희제와 나의 부친인 조임제이다.
자수성가한 조임제 조용기의 아들 29대 조임제(趙壬濟, 1932. 12. 13 - 2003. 10. 1일 72세亡)는 협천이씨(陜川 李氏) 이진선(李鎭仙, 1936. 3. 22 - 2014. 5. 20일 79세 간경화로 별세, 친정부친은 이반성면 장안리의 이준동이다. 친정조카는 이원제, 이일제, 이기근 등이다)과 결혼하여, 슬하에 조덕래(1955년생,여), 조성래(1959년생,남), 조덕희(1961년생,여), 조정래(1963년생,남), 조상래(1966년생,남), 조선희(1969년생,여) 등 3남 3녀가 있다. 나의 부친인 조임제는 하림 골짜기에서는 자식들을 교육 시킬 살림이 못 되어서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즉 1966년에 나의 할머니와 초등학교 5학년인 덕래 누나와 나, 그리고 4살 된 정래 동생을 하림에 남겨두고, 나의 부모님은 돌을 앞 둔 상래와 6살 된 덕희를 데리고 부산 사상으로 이사 갔다. 당시 사상에는 조웅제 (필동) 아재의 논이 25마지가 있었고, 집터가 넓은 방 4개인 농가가 있었다. 그 농가에 살면서 필동 아재 논에 농사를 지어 5:5로 분배했다. 나의 부친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사료공장을 하고 있던 감전동 정미소에서 공장장을 맡아 밤낮 없이 부지런히 일했다. 그 때 공장장의 하루 일당은 450원이었는데, 이것은 꽤 높은 임금이라서 제법 큰 벌이가 되었다. 그 정미소의 60대 안주인은 함안조가였는데(그 안주인의 친정 오빠가 조명제이고, 감전동 부자였다), 나의 부친을 일가(一家)라고 무척 좋아했다. 그 분은 정미소 사료공장 파트를 책임감 있게 일을 잘 하는 나의 부친에게 완전히 맡겼다. 그 이후 그 정미소는 큰 사료 공장이 되었다.
부친은 벌어 들인 돈을 쓰지 않고 다 모았다. 그러던 중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1972년)에는 한국이 산업화가 되기 시작했다. 그 때 넓은 사상의 들판이 공업단지로 지정되었다. 기업을 하고 있던 사장들이 논을 사려고 사상으로 달려왔다. 필동 아제는 비싼 값으로 논을 팔았다. 그러나 공장을 지을 때까지 부친이 그 논에 농사를 계속 지었다. 그 때는 7:3의 비율로 우리가 매우 좋은 조건으로 농사지었다. 새로운 논 주인은 자기 친구 사장들을 데리고 와서 그 지역의 논 주인들을 알고 있는 나의 부친에게 논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부친의 부동산 중계업이 시작되었다. 필체가 좋고, 한자를 많이 아는 부친은 감전동의 뽀뿌라마치 버스 정류소 앞에 있는 중앙복덕방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계약서를 한자로 작성했다. 그 지역에는 나의 부친만큼 계약서를 잘 쓸 수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그 지역에는 한글도 못 읽는 논 주인도 제법 있었다. 한자를 많이 알고, 필체가 좋으면 사람들이 다 우대했다. 부친은 신용과 평판이 좋았다. 모두 다 부친을 믿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단위가 큰 부동산을 몇 건 중계했다. 내가 중학생 때 부친이 퇴근해 들어오면서 한 개에 1,500원 하는 아이 머리 만한 복숭아를 한 아름 사서 들고 들어왔다. 매우 비싼 복숭아였다. 그 당시에는 큰 수박 한 덩어리가 500원 정도 했다. 한 건 중계하면 집이 한 채 생기는 그런 큰 물건을 몇 건 중계했다. 그 때 우리 집에 전화가 들어왔다. 학교의 한 반에 60명 중에 집에 전화가 있는 집은 2~3집 밖에 없었다. 부친의 중계를 통해 주인이 바뀐 논은 대부분 부친이 농사 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63마지의 논에 농사를 지었다. 사상에서 가장 많은 농사를 지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주말이나 방학 때면 부모님과 함께 들에서 농사일을 했다. 땅값이 많이 뛰면서 사상 지역의 논이 다 팔려나갔다. 부친은 벌인 돈으로 김해 맥도에 논을 사서 소작인을 데리고 농사지었다. 그 소작인은 장태식이었는데, 사람이 안 바깥으로 매우 좋았다. 그 논은 2,000년대 초에 나의 부친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다 팔았다. IMF 이후에 경기가 아주 안 좋을 때라서 헐값으로 다 처분했다.현재 그 땅에는 물류단지가 들어와 있다. 논을 다 팔 때까지 이 십 몇 년 동안 김해 우리 논은 장태식 아저씨가 농사 지었다. 그 분도 부지런히 일해서 재산을 이루었다. 그 분은 나의 부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나의 부친과 형제처럼 잘 지냈다. 내가 대학생 때 나의 부친은 모은 돈으로 덕포동에 5~6개의 점포가 딸린 2층 건물을 매입했다. 수입이 매우 좋았다. 내가 군 제대 후에는 동산과 부동산 수입이 좋아서 부친은 매월 250만원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 250만원은 공무원 10명의 월급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시기 10년 전에는 은행에 맡긴 저축이 10억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10억원은 큰 돈이었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32평 짜리 아파트를 20개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나의 부친은 은행에 대출을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평생 은행 돈은 10원도 쓰지 않았다. 부동산중계업은 5~6년 한 뒤에 부동산중계업 자격증 제도가 실시되면서 그만두었다.
그 이후 부친은 벌이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나의 부친은 함안조가들과 어울리기도 하고(그 때 부친은 함안조씨 부산화수회 강서지구 지회장을 맡고 있었다), 범어사 계곡 등에서 한량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며 놀았다. 그 당시에 그 한량모임에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30만원의 입회비를 내야 했다. 나의 부친이 그 한량모임의 회장을 맡았다. 매일 춤을 추면서 술을 많이 마셔서 당뇨가 와서 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 당뇨약만 복용할 뿐 당뇨 관리는 하지 않았다. 나의 부친은 60세 이전에는 반주 한 두 잔 외에는 술을 즐겨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친이 60세 이전에는 술을 취한 것을 본 적이 없다. 60세 이후에는 술을 제법 많이 마셨다. 매일 소주 4~5병 정도 마셨다. 그러나 술에 취해 몸이 비틀거리거나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10대 때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담석증으로 많이 고생했다. 담석증 관련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마지막 수술 부위가 돌아가실 때까지 완전히 아물지를 않아서 10년 정도 많이 불편해 했다. 나는 나의 부친이 폐결핵을 앓은 뒤에 기력회복을 위해 개소주를 연이어 여러 번 해드렸다. 얼굴도 좋아지고 기력도 많이 회복되어, 바깥 줄입이 재개되었다. 그러던 중에 뇌졸증이 가볍게 발생했다. 그것도 극복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개금 백병원에 입원하여, 2개월 후에 폐혈증 등으로 사망했다. 부친은 자수성가한 분이라서 돈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살림을 알뜰히 살기 위해 부산으로 이주해온 때부터 내가 결혼한 이후까지 매일 가계부를 부친이 직접 작성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저축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먹고, 자신이 즐기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모친이 여러 해 갖고 있던 만성두통이 나의 부친이 돌아가신 뒤 깨끗이 없어졌다. 우리 형제는 자신의 돈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아도 되었던 점을 부모님께 고맙게 생각한다.
나의 부친의 칠순 때 찍은 사진(2001년). 앞에 앉은 아이가 내 부친의 외손자인 김경학, 김경윤, 조봉건이고, 서 있는 꼬마가 손녀 조현주이다. 나의 의령 고모님과 대구 고모님도 사진에 보인다.
조임제의 장녀 조덕래는 김령김씨 김정원과 결혼하여, 슬하에 김경윤(1981년생), 김경학(1983년생) 등 두 아들이 있다. 김경윤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포스코건설에 입사하여, 근무중이다. 김경윤의 부인은 신경정신과 의사이다. 김경윤 슬하에 김지한(2015년생), 김이한(2017년생) 등 두 아들이 있다. 조덕래의 차남 김경학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뒤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조임제의 장남인 조성래는 부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광산김씨 김미향(1962년생,부산대학교 생물학과 졸업)과 결혼하여, 슬하에 조현주(1987년생), 조현경(1990년생), 조현준(1993년생) 등 1남 2녀가 있다. 조성래는 대학 졸업 후 7년 간 해운대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이상적인 영어학교를 하나 만들겠다는 뜻을 갖고 사표를 내고, 부산 남산동에 어린이영어전문 데이비드어학원을 국내 최초로 설립했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어린이영어 교수법을 갖고 있던 일본의 데이비드 잉글리쉬 하우스(원장은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서 아동심리학을 전공한 영국인 David Paul 선생이다)와 기술협약을 맺고, 1993년에 어학원을 개원했다.
데이비드어학원을 개원할 때 강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중앙에 흰 써츠를 입은 사람이 데이비드 폴 선생이고, 그 옆에 명찰을 단 사람이 나 조성래 원장이다. 모두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피터, 로신 등의 영국인 강사와 조영란, 원신희, 곽영란, 염지숙 등의 선생들이다. 이 강사들을 모집하여, 대전의 원불교수련원에서 보름 간 합숙하면서 집단상담 훈련을 시킨 뒤에 또 한 달 간의 영어교수법을 연수시킨 뒤에 수업을 맡겼다. 이 학원은 30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전문적인 어린이영어 교수법을 보유한 학원이었다. 조성래 원장은 30년 동안 강사를 모집한 뒤 한 달 간 하루 8시간씩 영어교수법을 연수시킨 뒤 수업을 맡겼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돈보다는 질 높은 영어교육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성래는 30년 이상 그 학원을 운영하면서 수 백 명의 우수한 영어강사를 양성했다. 조성래는 양성한 강사들을 학교에 파견하여, 아동들을 가르침으로써 대한민국 영어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한국 최초로 사교육이 공교육에 들어가서 교육한 사례가 데이비드어학원이었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전국 초등학교에 영어가 정규교과목으로 도입되었다. 그것은 회화 위주의 영어수업이었다. 조성래는 자녀 셋을 다 대학을 졸업시킨 뒤에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여, 관정이라는 법명의 승려가 되었다. 그는 평생 갈고 닦은 불도의 실력을 발휘하여, <대승기신론 속의 사마타와 위빠사나>, <걷기명상>, <반야심경 정해>, <반야심경,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등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여, 한국불교 교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인터넷에 "관정 스님 반야심경 정해"를 검색하면 그 보도 내용들을 볼 수 있다. 조성래는 현장 법사가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원래 뜻을 절대로 알 수 없도록 문장을 왜곡해 놓았거나 빼버린 것들을 모두 찾아내어, 1,60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 했던 <반야심경>을 세계 최초로 제대로 번역하여, <반야심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를 밝혀냈다. 조성래가 <반야심경 정해>를 내놓기 전에는 세계의 모든 <반야심경> 책은 공리공론의 해설을 해놓은 것들이었다.
언론사 선정 BOOK 결산, 2022 올해의 책에 <반야심경 정해>가 선정되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어서면 서점 입구에 <반야심경 정해>와 <반야심경, 무슨 말을 하고 있나>가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챔피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조성래는 이미 대학생 때 <금강경> 번역에 대한 논문을 1985년도 전국 대학생 학술연구발표대회에 발표하여, 우수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때 7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 당시 70만원은 대기업사원의 초봉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조성래는 평생 선(禪)수행 하기를 좋아했고 20안거를 했다, 석가부처님의 선수행 방법을 연구하여, 복원하려고 애썼다. 대장경에서 석가부처님의 선수행 방법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거의 다 번역해 놓았다. 조성래는 미술품 수집과 음악감상을 좋아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서화(書畵)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40년동안 많은 미술품을 수집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구입한 작품은 추사 김정희의 영인본 글씨였다. 이것을 16만원에 구입했다. 그 당시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12만원이었다. 조선시대 및 현대 대가의 작품을 제법 많이 수집했다. 대표적인 수집품이 이우환 화가의 유화 2점과 최종태 선생의 소녀상이다. 현재 이우환 화가의 그 작품의 경매가는 한 점에 3~4억 정도 된다. 출가하면서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을 거의 다 처분하고, 현재 최종태 선생의 조소상 등 약간의 작품만 갖고 있다. 조성래는 진귀한 미술품을 감상하고, 소장하는 것을 진정으로 즐겼다.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서화를 보물로 여겼다. 오랜 수집과 공부 결과 그는 미술을 보는 눈이 밝아졌다. 미술품을 보고 즐기는 눈을 길러주기 위해 롯데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미술감상기행>이라는 과목으로 10년간 강의를 하기도 했다.
관정 스님은 통도사 금수암의 토굴에서 수행했다.
조성래의 장녀 조현주 : 초등학교 영어교사다. 조현주는 학산이씨 이승우와 결혼하여, 이하준(2015년생), 이주완(2017년생), 이예나(2019년생) 등 2남1녀의 자녀가 있다. 이승우는 고등학교 교사다.
조성래의 차녀 조현경 : 보건직 공무원이다. 조현경은 벽진(碧珍)이씨 이원호와 결혼하여, 2022년 10월에 아들 이도건(李道健)을 낳았다. 이원호는 부산대학교 생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외국 회사에 취직하여, 2022년 10월 현재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성래의 막내인 조현준은 반도체생산설비회사 중 세계 1위 기업인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에 입사하여, 미국, 프랑스 등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임제의 2녀 조덕희는 창녕조씨 조홍환과 결혼하여, 외동아들 조봉건(1982년생)이 있다. 조봉건은 세종시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 재직 중이고, 김해김씨 김보라(1986년생)와 결혼하여, 슬하에 2012년생과 2013년생인 두 명의 딸이 있다. 조봉건의 부인 김보라는 서울대학교 의대에서 의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현재 미국 워싱턴의 NIH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임제의 차남 조정래는 진양강씨 강연화(1966년생)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조현지(1992년생)와 아들 조현민(1993년생)이가 있다. 조정래는 공무원을 10년쯤 하다가 의류사업을 하는 집안 동생과 동업하기 위해 사표를 내고, 의류생산및 백화점에서의 판매사업을 2~3년간 했다. 그 이후 물류 운송업체를 약 10년간 운영했다. 검박하게 먹고 살 정도가 되어서 해인사 등의 선방에 들어가서 4년간 하루 종일 참선수행만 하고 있다. 조정래의 딸 조현지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아산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조임제의 3남 조상래는 김승희와 결혼하여, 외아들 조민광이 있다. 조상래는 경성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했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10년간 강의했다. 월간잡지 <자동차 생활>의 사진기자 및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퇴직했다. 조상래는 대학졸업 후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다.
조임제의 3녀 조선희는 김계근과 결혼하여, 김재한(1995년생), 김재민(1997년생) 등 두 아들이 있다. 조선희는 2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2022년에 손해평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조용기의 장녀 조희제(趙喜濟, 1929-2021, 93세亡)는 의령 정곡에 사는 의령남씨 남판우와 결혼하여, 슬하에 남기호(1953년생), 남기선, 남기둘(1958년생), 남기권(1960년생), 남기진, 남기웅, 남기조 등 5남 2녀가 있다. 남판우의 부친은 남상철(南相哲)이고, 그는 생육신 남효온의 후손이다.
조용기의 차녀 조정자(1938-2022, 85세亡)는 대구에 사는 김령김씨 김갑석과 결혼하여, 슬하에 1녀 김옥경(1958년생), 2녀 김혜원(순희,1962년생), 3녀 김순자(1965년생), 4녀 김순옥(1967년생), 5녀 김아영(1970년생), 6녀 김영아(1973년생), 아들 김대용(1978년생) 등 1남 6녀가 있다. 아들 김대용은 교도직 공무원이고, 2021에 결혼했다. 조용기의 차녀이고, 나의 대구고모인 조정자는 아들을 결혼시킨 다음 해에 편안하게 별세했다.
조성래의 두 고모님의 마지막 만남의 사진이다. 2020. 11. 1일에 대구 고모님(조정자)이 딸 4명과 사위 4명과 함께 의령군 정곡면 원당리에 사는 언니 조희제 집에 와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 네번째 분이 나의 의령고모님인 조희제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의령고모님의 맞며느리이고, 그 옆의 분이 대구 고모님인 조정자이다. 맨 왼쪽의 첫 번째 사람은 남기조, 그 옆 사람은 남기권, 세번째 사람은 남기호이다. 이 세 사람은 의령 고모님의 아들들이다. 이 사진을 찍은 뒤 3개월 후에 의령 고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2년 뒤 대구 고모님도 돌아가셨다. 이 사진은 정말 잘 찍었다.
1. 시조 정(鼎), 2. .... 9. 천계(天啓), 10. 열(悅), 11. 안(安), 12. 여(旅), 13. 금호(金虎), 14. 수만(壽萬), 15. 응경(應卿), 16. 성(城), 17. 민도(敏道), 18. 영기(英沂), 19. 징구(徵久), 20. 경윤(慶胤), 21. 이변(爾抃), 22. 중린(仲麟), 23. 시주(始周), 24. 지상(泜祥), 25. 사식(司植), 26. 성가(性家), 27. 대규(大奎), 28. 용태(鏞泰), 용기(鏞奇), 29. 창제(昌濟), 임제(壬濟), 30. 영래(1930년생女), 명자(1952년생女), 철래(哲來,1956년생), / 덕래(1955년생女), 성래(星來1959년생), 덕희(德喜1961), 정래(政來1963), 상래(相來1966), 선희(善喜1969) 31. 현정(1979), 현진(1982), 현실(1985) / 현주(顯珠1987), 현경(顯敬1990), 현준(顯峻1993)
* 이 글은 95% 완성된 글입니다. 시간에 쫓겨서 우선 이렇게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 카페에 올립니다. 관계자들은 이 글을 보고, 저에게 정확한 정보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성래(1959년 하림생) 올림
(조성래 폰) 010-9317-9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