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1990년, 고등학생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형성되다 : 광주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지난 토요일에 전남대에서 개최된 1991년 열사투쟁을 조명하는 자리에서 참교육운동과 고등학생운동에 대한 발표가 있었습니다. 관심있는 주제라서 자세히 들어보았습니다. 문제는 당시 1980년대 중후반의 고등학생들이 전교조 선생님들의 가르침에서 움직였는지, 고등학생 자체적으로 참교육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었는지였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일수도 있습니다. 당시 참교육을 하고자 하는 선생님들께서 수업시간에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이 향후 "전교조에 가입했느냐 안했느냐"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참교육의 실천을 이미 해오신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는 저는 초등학교6학년때 시골이었던 전남 광산군에서 도시였던 광주시로 전학(유학)을 와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시골에서 느껴보지못하는 괴리감을 많이 가졌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같은 작품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3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마치고 셋째 형님이 추천해준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를 보면서 모순, 이율배반, 도그마 등의 용어를 알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고1은 나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큰 형님이 서점을 하고 계셔서 함석헌, 장준하,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많이 보게 되었으며, 저에게는 좀 어려웠지만 칼 맑스가 쓴 사회과학책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를 통해 5.18의 진상에 대해 알게되면서 세상에 분노하고 그런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이후에는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를 통해 쿠바와 중남미 혁명을 알게 되고, 중국역사를 좋아했던 저는 중국현대사를 통해 모택동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저항하고 새로운 변혁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고등학생 1학년, 2학년인 제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그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1988년 당시에는 고등학교에도 학생자치회를 요구하고 학생회장도 선출하고 자발적으로 뭔가 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높았습니다. 당시 금호고등학교에 구내식당이 있었는데 짜장면 값을 갑자기 올려서 학생들 불만이 있었는데, 새벽에 대자보를 써서 붙여서 학교에 우리의 의지를 알렸습니다. 다행히 짜장면 값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들 스스로 싸워서 얻어낸 처음있는 값진 승리(?)였습니다. "아하, 이렇게 우리의 요구를 말하고 전달해서 관철시킬 수 있는거구나고 생각했습니다. 대자보를 붙였던 저와 친구(향후 한총련 의장이 됨)는 학생과장 선생님께 불려가 혼이 났지만, 나름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한번은 5.18 때 친구들과 검은 리본을 만들어 가슴에 차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5.18기념식을 고등학교에서 할 정도로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그런 행동을 하면 정학이나 퇴학감이었습니다. 전날 밤에 검은 리본을 준비한 친구들이 아침에 각자 반에 들어가서 5.18의미에 대해 말하고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근데 하필이면 교장 선생님이 복도를 지나가다가 교탁에서 말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였고 저는 교장실로 불려갔습니다. 순식간에 "한필이 짤렸다"고 소문이 돌았는데 저는 멀쩡히 돌아왔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느냐?5.18때 가족 중에 돌아가신 분이 있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분은 없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생각하고 했습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제 이름과 반을 적으신 쪽지를 서랍에 넣으시면서 다시 그러면 퇴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고 교장실을 나갔습니다. 친구들은 멀쩡히 돌아온 나를 보고,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날 검은 리본을 달고있던 같은 반 친구가 수업시간에 졸다가 수학 선생님께 걸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너는 리본까지 달고 있으면서 수업시간에 조냐?넌 달 자격이 없다"며 친구 빰을 때렸습니다. 그 친구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저는 당시 고전문학 선생님이셨던 강현구 선생님(2000년대 국악프로인 얼씨구학당 사회자)을 좋아했습니다. 장승, 벅수, ×바위 등 우리 문화에 대해 맛갈지게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분이 운영한 CA 고적문화답사반에 가입해서 활동도 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다산연구의 대가인 이을호 박사님이 관장으로 계신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개최한 제1회 청소년문화강좌에 참여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을 마치고 '고인돌자치회'라는 자발적인 모임을 광주상고, 광주여상, 광주농고, 금호고, 중앙여고 등 100여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문화유적답사, 야구시합 등 야유회, 강연회 등을 진행했고 "고인돌"이라는 회지도 5차례 걸쳐 제작해서 배포도 했습니다. 당시 회지는 제가 손으로 직접 써서 형님 서점에 있는 복사기를 돌려 제작했고, 우편으로 회원들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박물관에서 다산연구소 강기욱 선생님을 뵙게 되고 이후 광주소방서 옆 백제약품 4층이 저희 아지트가 되어 학습도 하고 토론도 하고 일도 벌리기도 했습니다.
1989년 2월에 휴학을 하였습니다. 더 넓고 깊게 세상을 보고싶었습니다. 대학입시 10개월 전이었지만, 저는 그 시간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눈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호기심과 혁명(?)의 꿈을 잠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휴학후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에서 주최하는 제3기 청년학교에 들어가 김낙중 선생님, 박현채 교수님, 정광훈 의장님 등을 뵙게 되었고, 망월동묘역, 동학농민운동유적지 등을 답사하고, 전교조결성후 해직교사복직을 요구하는 금호고, 중앙여고 등에서 단식, 철야 농성을 벌인 친구들 5명이 휴학을 하면서 함께 매일 어울려 다니고 대학생 형(남대협 교육부장 출신?)에게 학습도 받고 토론도 하였습니다.
1990년 친구들과 복학한 후 독서토론회 장산곶매, 사회과학서적 무상대여점 우정독서사랑방도 만들어 금호고, 중앙여중고 후배들과 어울리며 사회를 보는 비판의식도 키워나갔습니다. 저는 모두 대학입시에만 메달리는 현실과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후배들에게 주장하면서, 내가 대학시험을 보는 것은 이율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당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실천하기 위해 매월 치뤄진 시험에서 답안지 거꾸로 쓰기를 하면서 꼴찌를 하기 위해 기를 썼습니다. 하지만 꼴찌에서 두세번째는 되었지만 꼴찌를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등보다 꼴찌가 더 어렵구나"는 말을 친구들에게 한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의 기이한 행동에 담임과 후배들이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적이 좋으면 대학을 가기 위해 학력고사(입학시험)를 볼 것 같아 그 싹을 자르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습니다. 학생운동과 공부를 모두 잘 할 수 없기에 공부를 포기하려는 목적이 강했습니다. 결국 고3 전교생중 저만 학력고사를 보지않고, 대학을 가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28살에 합법적 공간에서 북한 및 통일 문제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갔지만.
1990년 봄에 광주전남지역 고등학생 연합조직을 만들어보겠다고 순천고, 순천매산고 등을 가서 학생회장도 만나고 학생회 활동을 하는 학생들과 대화도 나누고 함께 의지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광주지역고등학생협의회(광고협)하고 연계된 활동은 아니었습니다. 전남대 총학생회에서 공간지원 등 도움을 받는 광고협의 모습은 자발적인 주체로서 고운을 해보겠다는 저희와는 조금 낯설었습니다. 자유분방한 광고협의 활동인자들에게서 약간의 거리감도 있었습니다. 순천지역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생회장을 옹위(?)하는 후배들과 그 회장을 영웅(?)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대협의 의장 옹립을 보는 듯 하여 '이게 우리 고등학생의 모습인가'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광주일고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는 문구를 가슴이 새기고 있었던 저에게는 고등학생으로서 진리 추구와 민주적 사고방식의 관점에서 불편했습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고등학교 4년 동안 더 수 많은 사건과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운(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친구들은 저와 같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단순히 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고운에 참여했던 많은 친구들은 대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선배들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생운동해서 퇴학당하고 구속이 되더라도 여하튼 그 이후에 그나마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그래도 대학생 신분이었기에 최소한 사회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빨리 봐버린 고등학생은 공부를 접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자퇴하거나 퇴학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이나 분신도 했습니다. 고운 이후로 트라우마로 삭히지못한 분노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은 어려웠고 각자 도생하며 살았습니다. 대학을 들어간 친구들도 대학운동권에서 자리도 제대로 잡지못했습니다. 선배들이 말하고 학습시키는 얘기는 이미 알고있는 지식이었습니다.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진행된 '1991년 열사투쟁'에서 많이 언급된 박승희 열사도 목포 정명여고때 참교육운동과 전교조 해직교사복직투쟁에도 함께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제가 정상적으로 대학을 가고 학생운동권으로 활동했다면, 그때 살아남아 있었을까? 당시 고운출신은 대학, 노동, 농민, 문화 등 다방면으로 진출했었습니다. 저는 남민전, 통혁당 사건 등에 연루되어 쌍무기수로 복역한 임동규 선생님이 창립한 민족무예도장 경당에서 사범이 되어 민족무예를 도구로 대중과 만나면서 변혁운동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살아남은 자로서 경당사범으로서 30년 세월을 보내고, 최근 5년간 새로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가 1980년대에 가졌던 생각을 얼마나 지켜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 사고, 인식, 다짐은 지금 내 삶과 행동의 근원인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