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파일 관등놀이
사월 초파일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 날만은 모두 불교신자인 듯 초파일 명절을 즐겼다. 절을 찾아가 가족들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종이를 관등(觀橙)에 붙여 대웅전 앞에 달아매고 부처님 탄신을 축하한다. 부처님 탄신을 축하하러 절에 올라간 사람들은 절에 모셔 높은 산신당(山神堂)과 칠성당(七星堂)에도 정성껏 참배했다. 토착 신앙으로 깊이 뿌리내린 산신 신앙(山神信仰)과 칠성 신앙(七星信仰)의 축원 장소를 절간에 마련해 높은 것은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우리의 토착 신앙과 얼마나 잘 어우러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토착 신앙인 산신 신앙이나 칠성 신앙이 결국은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 축원하러 와서 산신님과 칠성님께도 축원하고, 반대로 산신님과 칠성님께 축원하러 와서 부처님께도 축원 할 수 있도록 절간에 산신당과 칠성당을 세워 둔 것이다.
도림사의 큰절은 지리산에 있는 화엄사(華儼寺)이다. 딸이 나이가 차 시집갈 때가 되면 어머니들은 나들이를 겸해 탑돌이 하러 화엄사로 갔다. 화엄사에는 다른 절보다 유달리 탑이 많았고. 스님들의 독경 소리에 맞춘 신도들의 밤샘 탑돌이가 유명했다.
형편이 어지간한 집에서는 딸을 시집 보내기 전에 꼭 한번은 탑돌이를 갔다. 그리고는 좋은 신랑 만나 아들 딸 많이 낳고 오래 살고 평안하기를 부처님께 빌었다. 시집갈 때 가지고 갈 베갯모에 수를 놓는 정성으로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태안사(泰安寺)로 올라가는 나루터 옆 덕소에서는 태안사 스님들이 방생(放生)행사를 벌이곤 했다. 할머니들은 장터에서 파는 자라를 사서 섬진강이나 보성강에 방생하기도 했는다. 이 행사에 참석하고 태안사에 올라가 초파일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보성강과 선진강이 서로 만나는, 곧 암물과 숫물이 서로 만나 하나로 흐르는 압록을 지나 덕소 나루터를 건너 태안사로 들어가는 길은 교통은 불편했지만 산천이 좋고 절이 오래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태안사는 선방(禪房)이 커서 공부하는 스님들도 많았다. 절이 크고 신도들도 많은 절이 화엄사라면, 공부하는 스님들이 많은 곳은 태안사였다. 위치상으로도 깊숙이 들어앉아 참선 공부에 어울리는 절이라서 그런지 태안사 스님들은 참선만 했지 시주 얻으러 다니지 않았다.
절에 기도하러 다니고, 또 법회에서 설법을 듣고 석가 탄신을 축하하는 초파일 행사에 참석한다 해도 사찰에서 새벽 예불 드리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절에 다녔다고 할 수 없다.
절에는 반드시 큰 북과 목어(木魚)와 운판(雲版), 인경(鱗莖)이 있다. 이것은 예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구(彿具)들이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쇠가죽으로 만든 북을 요란하게 친다. ‘땅 위에 사는 모든 네 발 동물들아, 이 미련한 짐승들아. 빨리 잠깨어 영혼을 찾으라’ 는 뜻이다. 그 다음은 나무로 만든 목어(木漁)를 북채로 득득 긁어 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는 물 속에 사는 고기를 위한 소리로 북을 칠 때와 똑같은 뜻을 지닌다. 그리고 나서 천장에 매달아 놓은 운판을 때려 창공을 나는 날짐승에게도 같은 기구(祈求)를 한다. 운판 소리는 우주 공간에서 떠도는 망령들에게 빨리 제자리로 찾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땅 속의 쇠붙이로 만든 범종(梵鍾)을 울린다. 이것은 하계(下界)를 축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식들은 부처님의 사상이 뿌리박고 있는 대목을 날마다 되새기는 법고 소리이고, 목어 소리이고, 운판 소리이고, 범종 소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곧 하늘과 땅의 뿌리가 같고, 만물은 한 몸이라는 불교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새벽 어둠이 가고 날이 밝아올 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만물에게 부르짖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식이 끝나도 나면 대응전 법당에서는 본격적인 예불이 시작된다.
어느 절에 가든지 사방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꽃 문양이다. 부처님도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석탑도 연꽃 모양으로 꾸며 놓았으며 열두 면으로 각지게 만든 관등에도 연꽃잎이 붙어 있다.
연꽃과 불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연꽃은 가장 더러운 방죽에서만 꽃이 핀다. 그래서 연꽃은 맑은 물에 꽂으면 꽃이 피지 않는다. 꽃대 밑에 담배꽁초 같은 것을 대고 꽂아야만 봉오리가 벌어지고 꽃이 핀다. 또 연잎은 물이 묻지 않아 잎 위에 빗물이 떨어져도 물방울이 되어 굴러 떨어진다. 연꽃의 이러한 생태는 부처님이 더러운 세상에 부상(浮上)해 불법을 펴는 것과 같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절에서 연꽃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려 부처님의 뜻을 표현한다면, 우리 조상들은 연꽃이 가지는 상징성을 실제 생활에서 구체화시키고 있다. 옛 선비들의 정자(亭子)는 반드시 연못가에 세워져 있었으며, 역사가 깊은 마을 옆에는 으레 연못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일터를 오가며 연못을 바라보았고, 아이들은 연밥(연꽃 씨)을 따먹고 놀았으며, 방죽물이 마르면 연 뿌리를 캐 먹기도 했다. 그러므로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뒤에야 연꽃을 심었다고는 볼 수 없다. 절에 연못이 없다는 사실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연꽃을 심었고, 연꽃이 가지는 상징성을 생활에 적용하며 살아왔다. 곧 이 세상이 더럽게 썩는 한이 있어도 연꽃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게 피어오르려는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연꽃처럼 악착간이 뿌리를 내려 집안을 번창시키고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었기에 연꽃을 심었고 사랑했다.
이렇듯 우리 선조들은 온갖 만물을 볼 때 겉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이루는 뿌리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중요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겉모양만 쳐다보고, 겉모양에 모든 가치를 두고, 겉모양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맛과 멋과 흥이 뿌리째 버림받고 말았던 것이 아닐까?
*양반탈- 양반 사회의 위엄과 탐관오리의 폭음 폭식, 농경민을 압제하는 듯한 표정에 홍안의 턱이 움직이고, 안면의 조화된 율동으로 표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