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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26구간(이화령-조령3관문)
1. 산이름 : 조령산, 신성암봉, 깃대봉
2.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3-3, 원풍리 40-1
3. 산행 코스 : 이화령←(2.7km)→조령산←(1.7km)→신선암봉←(3.2km)→깃대봉갈림길←(0.91km)→제3관문
0. 이화령-조령산(01:40)-신선암봉(03:40)-795봉(05:20)-깃대봉 삼거리(06:00)-조령3관문
(06:30)-고사리주차장(07:00)
4.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0.98km(7시간 00분)
5. 산행 인증 : 이화령, 신성암봉, 조령3관문, 인증
6. 산행안내 : 연풍숙박-택시-이화령-산행-조령3관문 도착-수안보택시-서울 도착
7. 기타 사항 : 조령산~신선암봉 구간 암릉 많음 (주의),
0.수안보-동서울 버스 : 15:40, 16:40, 17:40, 18:40, 19:40
0.조령숙박 : 고사리산장, 새재황토방민박, 버스나 택시로 수안보 숙박
이화령-조령관문 구간
연풍에서 숙박을 해서 택시 타고 이화령에 도착하였다.
너무나 익숙하여 눈을 감아도 보일 것 같은 문경새재!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길은 세 갈래의 큰 재를 넘었는데 영주에서 죽령을 넘으면 단양이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으면 황간이며, 그 사이로 문경에서 새재를 넘으면 곧 충주 땅이었다. 새재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다.
새조차 힘들게 넘나들 정도로 높고 험하다 해서 ‘새재’라고 불렸지만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새(新)로 뚫린 고개’,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間)의 고개’라는 뜻도 담겨 있다.
나는 이화령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새재3관문인 조령에서 고사리 주차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수안보에서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다. 터널이 뚫어져 차량들의 통행은 거의 없는 이화령고개의 신선한 아침이 기분 좋게 한다. 하늘재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문물의 이동로가 됐던 조령이라는 문경새재, 그리고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1926년 우마차가 아니라 현대식 자동차가 넘나들 수 있게 새로 길을 내어 변화의 기치를 올렸던 고갯마루 이화령이다.
하늘재가 현세와 내세를 가르는 샤머니즘적 고개였다면 문경새재는 문·물 교류의 길을 틔웠던 개방의 상징이었으며 이화령은 20세기 시대변화를 주도했던 혁신적 고개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이화령마저도 터널로 인해 고개마루엔 옛 추억에 젖은 사람들과 대간을 하시는 분 그리고 자전거동회원들만이 찾을 뿐이다.
빠른 것만 찾느라 옛 것을 버리게 되니 아쉬움도 남는다. 경북과 충북의 경계이기도 한 이화령고개에서 충북 괴산 쪽에서 오르는 대신에 오늘의 산행은 경북 문경 쪽에 있는 이화정에서 오르기로 한다.
이쪽으로 오르는 길이 더 편하기 때문에 시간도 단축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조령산으로 들어간다. 조령산의 숲에서는 매미들의 울음을 밀어내고 산새들의 합창으로 숲은 생기가 감돈다.
참나무의 초록이 눈이 시리도록 민감하게 나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가 하면 도토리를 줍기 위해 산을 찾은 촌로들의 막걸리의 냄새까지도 향기롭게 한다. 고도는 계속하여 높아가지만 힘이 들지 않음은 또 왜일까?
숲에서 풍겨오는 참나무 향기가 더욱 더 기분을 맑고 향기로움으로 새롭게 하고,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아침은 숲을 더욱 싱그럽게 한다. 한동안 오름을 지속하다보면 이화령에서 오르는 두 갈래의 길이 합수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세월 깊은 오랜 숲의 묵직함과 싱그럽고 맑은 기운이 가득한 대간길은 눈길 닿는 곳마다 숲은 점차 깊어져 갔고 울창해 진다. 처음 오르는 길이 아니었건만 낯선 길을 가는 듯 새로운 느낌을 받으며 조령샘에 닿았다.
조령샘을 지나면 낙엽송 숲 사이로 나있는 데크를 지나노라면 초록의 융성함으로 가슴을 더욱 시원하게 해준다.
간혹 후두둑하며 정적을 깨우며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기도 하고, 밭에 쟁기질을 한 것 같은 산돼지들의 흔적에 금방이라도 숲에서 튀어나와 나와 사귀자고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 등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신비로운 발걸음을 한 끝에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는 조령산(鳥嶺山, 1025m)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자 백두대간 조령산이라고 쓴 커다란 정상석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 건너 편으로 주흘산(主屹山, 1106m)능선으로 가는 첩첩한 산줄기가 아득하다. 북으로는 신선암봉을 비롯한 마패봉, 월악산, 문수봉, 소백산 등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나의 발걸음의 흔적이 묻어있는 속리산으로 이어진다.
산줄기와 산줄기들 사이엔 임진왜란의 슬픈 역사가와 녹아있는 새재가 깊은 골을 하고 잠들고 있다. 신립장군의 아픔을 이제는 묻어 두어야 할 것 같다.
한편 이 길은 민초들에게는 희망의 길이 아니었던가? 청운의 꿈을 품은 옛 선비들이 걷던 길인 문경새재 길에서 나의 가족들이 선현과 만나 친구가 되듯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정겨워 보인다.
정상 한 편에 나무로 만든 작은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불꽃같은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추모비였다.
충남 논산에서 1959년에 태어나 이 산에서 산에 마음을 빼앗기고 산악인이 된 후 1999년 4월 29일 엄홍길대장과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도중 7800m지점에서 실종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 벌써 18년이 지난일이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과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여성으로서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겼다. 전문 산악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것 보다 여성 산악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야 했다.
청주 서원대 산악부시절 주로 훈련한 장소이며 가장 좋아했던 이곳 조령산 정상에 후배들이 추모비를 세웠다한다.
여성의 몸으로 그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의 댓가로 이룩한 성과들을 제대로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너무 이른 나이에 타계하셨다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그녀의 불꽃같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조령산에서 고도는 급하게 하강을 한다. 안전을 위해 밧줄을 타고 마당바위갈림길까지 고도를 낮추고 있는데 문경에서 이 구간이 위험하여 데크를 설치하고 있는 중이라 아직 공사가 덜 끝난 데크로의 출입을 막고 있다.
데크 옆에 있는 예전의 등로에 설치된 밧줄을 타고 내려선다. 아마도 다음에 여길 찾게 되면 깔끔한 데크를 따라 쉽게 산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힘차게 고도를 올려 힘들게 오르는데 좁은 오르막길에 큰 개 한마리가 내려오길래 깜짝 놀라 다시 위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하니 힘들어 보여 포기했으나 친구는 기여코 바위길을 타고 올리려고 했으나 말을 안들어 포기하고 거대 암봉인 신선암봉(神仙巖峰, 937m)에 닿았다. 옅은 운무로 조망이 흐릿하지만 그렇다고 감흥까지도 줄어들지는 않는다.
신선암봉의 너른 바위에 앉으니 말 그대로 신선이 된 듯했다. 눈앞은 기암괴석과 깊은 골들 어우러져 기묘하고 장엄했으며 골마다 피어오르는 운무와 어우러져 신비하고 황홀하다.
앞으로는 928봉과 부봉능선 그리고 주흘산의 마루금이 하늘금을 긋고 깃대봉 넘어 마패봉과 월악산 영봉의 능선들이 아련하게 펼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신선들의 잔치 상에 내가 있는 것 같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간식을 하며 숨을 고른다.
눈앞에 928봉이 있는 형제들과 같은 삼봉이 줄을 서듯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한가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겠는가?
신선암봉에서 내려섰다가 꾸구리바위 갈림길에서부터 새재2관문 갈림길까지 약 1.2km의 거리는 앙칼진 바위 암릉길이 시작된다. 스틱을 접어 배낭에 넣고는 밧줄에 매달리고 바위를 부여잡으며 암벽을 내리고 오르기를 거듭했다.
거대한 암릉을 오르며 지친 몸을 쉬느라 잠시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산줄기는 산그리메를 그리고 있다.
거대한 암릉을 오르자 커다란 바위 위에 소나무들이 뿌리 내려 살아가고 있었다.
바위들은 그 단단한 가슴 열어 여린 씨앗을 받아들이고 품어 큰 나무로 키워내고 있으니 이 노송이 만든 풍경을 보고 어찌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는가?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는 곳. 멋진 풍경의 일부가 되어 대간을 하는 나에게 잠시지만 마음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몇 번의 로프를 타고 오르내린 끝에 928봉에 오른다. 928봉에서 내려서며 또다시 수많은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며 산행을 진행한다.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많으며 산객이 많다면 기다리느라 시간도 많이 들겠지만 오늘은 혼자 산행하기에 산행 속도 또한 준수하다. 새재2관문 갈림길에 도착하면서 암릉은 끝이 나고 길은 다소 온순해 진다. 과일을 먹고 쉬었다가 스틱을 펼친다.
지금까지보다 다소 편안한 산행을 이어가다 가을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해 준 구절초와 쑥부쟁이들이 부는 바람에 흔들리며 가을을 노래한다.
가을은 계절의 색에 맞추는 묘한 재주가 있는가 보다. 무덤덤한 경상도 남자에게도 가을로 가고 있는 시간들이 안타까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니 말이다. 오늘 산행에서는 ‘가마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 같다’는 부봉(釜峰)을 원없이 볼 수 있고 또한 주흘산 능선의 조망처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날씨가 조금 더 맑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812m봉 삼각점을 지나 깃대봉갈림길에 도착했다.
깃대봉을 올라 갔다가 되돌아 오는 코스라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으나 호기심에 올랐다. 대간에 벗어나 있기도 하지만 하산을 서두른다. 여기로 오른 것이 나에겐 큰 알바를 하게 되었다.
깃대봉을 확인하고 되돌아 가려고 하니 관문으로 내려가는 표지판이 있어 내려가기로 했다. 산길이 완만하고 산행하기는 좋아 중간에 볼일?을 보고 나니 친구가 안 보이길래 무조건 길을 따라 갔으나 한 참을 내려가도 친구가 없어 소리 질러 불렀더니 왼쪽에서 소리가 들리기에 그냥 내려가면 만날 거라는 짐작으로 길을 따랐다.
그러나 길은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해서 그재야 알바를 짐작하고 당황하여 어름으로 하산을 하였다.
한 참을 내려오니 과수원이 보이고 앞에 도로가 보이길래 친구와 연락하여 만나는 곳을 정했으나 과수원 길을 막아 두어 과수원을 돌아 가니 급경사 하천이 나와서 건너 보니 앞 길이 보이지 않아 작은 능선을 넘으니 큰 길이 나왔다. 길에서 과수원쪽으로 올라가니 친구도 길을 잃어 철망을 넘어 만나 서로 원망을 하며 큰 길까지 내려와서 택시를 불러 수안보로 갔다.
조령3관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내려왔던 조선의 장수 신립(申砬, 1546~1592)이 지키지 않아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지키지 않고 충주 탄금대로 물러나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으나 전멸하고 말았다. 자신이 거느린 기마병을 믿고 택한 전술이라고 하지만 상황에 맞는 전술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지형은 저습지였고 전날 비까지 내려 온통 진흙탕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보병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니 왜적의 조총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윤제학은 그의 책 '산은 사람을 기른다'에서 신립의 이해 할 수 없는 전술과 관련한 전설을 전하며 재미있는 촌평까지 달아 놓았다. 전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선조의 명을 받고 내려온 신립은 새재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꿈에 한 처녀가 나타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칠 것을 호소했다.
신립은 그 처녀의 말대로 하였다가 전멸하였다. 그 처녀는 일찍이 주흘산의 요귀로부터 신립이 구해준 처녀였는데 자신의 연정을 신립이 받아들이지 않자 원한을 품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원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윤제학은 이 전설을 소개한 후에 재미있는 촌평을 달아놓았다.
"어쩌면 처녀 귀신은 삼척동자라도 당연히 구사했어야 할 전술을 포기한 신립(지배자)에 대한 민중들의 원망과 비웃음의 상징이 아닐까. 모름지기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라면 마땅히 여럿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산은 참 별것도 다 가르쳐 준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다시피 한 전쟁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처녀 귀신 이야기를 만들어낸 민초들의 마음에서는 윤제학의 해석과는 다른 마음이 엿보인다.
아마도 원망과 비웃음 보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였던 신립의 행동을 억지로라도 이해하기 위한 슬픈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처지가 너무 슬프고 비참했을 것이니 말이다.
조령산(鳥嶺山)/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잡은 명산.
높이는 1,017m이다. 전체적으로는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 제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제3관문이 위치한 곳은 해발 642m로서 예로부터 문경새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이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 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능선 동쪽을 흐르는 조령천 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였으며, 주흘관(제1관문)·조곡관(제2관문)·윈터·교구정터 등의 사적지가 있고 완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와폭과 담이 산재하여 있다.
현재 이 일대는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안보온천, 월악산국립공원과 가깝다.
산악인 지현옥
충남 논산에서 1959년에 태어나 1993년 남자들도 선택받은 사람 외에는 오르기 힘든데 우리나라 여성 산악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1999년 4월29일 엄홍길대장과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도중 7800m지점에서 실종되었다 한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 벌써 18년이 지난일이다.. 청주 서원대 산악부시절 주로 훈련한 장소이며 가장 좋아했던 이곳 조령산 정상에 후배들이 추모비를 세웠다한다.
여성의 몸으로 그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의 댓가로 이룩한 성과들을 제대로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너무 이른 나이에 타계하셨다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그녀의 불꽃같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들꽃처럼 산들 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영원한 자연의 품으로 떠난 지현옥 선배를 기르며
조령3관문
새재 정상에 북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조(숙종 34년 : 1708)에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 홍예문과 석성 그리고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북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북 충주 땅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폐봉을 지나 북암, 동암문, 부봉, 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 조령산 공산진, 이화령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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