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대는 개화설경(開花雪景)이란 설악팔경(雪岳八景)의 하나로 신흥사지(神興寺址) 비선대조(飛仙臺條)의 한 구절을 요약해 보면 “…반석위를 흘러가는 맑은물은 아름다운 옥구슬이 굴러 가는 것 같고, 녹음방초(綠陰芳草)”는 향기를 토하고, 백화(百花)는 제각기 미모를 자랑하는가 하면 높은봉 저멀리서 짐승들 울음소리 들리고 창송위로는 백학이 춤을 춘다. 화창한 봄, 서늘한 가을 계절의 질서…이 대야 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완연하다. 이 대를 찾아 노송가지에 의관(依冠)을 걸어두고 맑은물에 발을 씻고 반석위에 누워 있으면 속세(俗世)를 벗어나 신선이 되었는듯 하고, 주위의 산봉우리들은 불경(佛境)임이 분명하다. 이런 까닭으로 옛부터 현인달사(賢人達師; 어진선비)들이 찾아와 자기 이름을 새겨 암면(岩面)을 장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설악산 정고평(停庫坪)에서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종호씨(朴鐘浩)는 에베레스트 등반경험도 있는 근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산악인으로 살아온 분인데 그의 말에 의하면 비선대 남동쪽에 있는 바위를 신선봉(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하는데 높이 약 600m되는 암산으로 한번 등반하는데 4~5시간이 소요된다 한다. 등반가들이 세계에서 13급되는 곳을 제일 어려운 곳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신선봉은 13~14급 중간되는 곳이어서 세계에서 제일 난코스로 인정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훈련한다면 세계 어느 산이라도 정복할 수 있다 했다. 발견된지 얼마되지 않지만 앞날이 매우 촉망된다는 것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 신선도 놀다 갔다는 명승지인데다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산악인들의 훈련장으로 각광(脚光)을 받게 되었는가 하면 시와 각자(刻字)등 인문(人文)ㅇ이 수(繡)를 놓았으니 자연과 안문이 조화(調和)를 이룬 곳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3.1 운동이 일어나기 3년전인 1916년 가을 유학자(儒學者) 정송리(鄭松里)가 관동팔경 경학강연(經學講演)차 왔다가 양양 유림(儒林)들과 비선대에서 시를 짓고 “설악아집”(雪岳雅集)을 출간(出刊)했는데 그 시집에 의하면,
宋 達 顯 신선이 날은지 천년이 되어 옛대는 있고 지금은 시선(詩仙)이 신선처럼 찾아왔네 계곡의 급한물 눈발같이 내려가고 숲속으로 뚫인 길 구름이 닿았네 해저문 산속에서 시귀(詩句)를 찾고 국화향기 술잔에 그윽하네 수레를 멈춘채 돌아갈 것 잊었더니 갈가마귀 울음소리 석양을 알리네 千■ ■ 春■■ ■ ■ ■ ■ 一■
송달현(宋達顯)은 여산(礪山), 송씨로 자(字)는 치존(致存) 호는 추원(秋■), 양덕(陽德; 北平)과 흡곡(■谷; ■川郡) 현감(縣監)을 역임했고 만년에 양양군 손양면 발포(襄陽郡 巽陽面 鉢浦; 지금의 도화리 바래골)에 은거, 인덕(人德)의 고매(高邁)하고 덕행(德幸)이 출중(出衆)하여 화목을 생활의 신조로 삼았고, 시와 글씨 학무에 능하였으며 특히 명문(名門) 김병기의 총애를 받았다 한다. 양양 김종극(金鐘極·88세)옹이 이 분을 본 일이 있는데 귀공자 풍모였다 한다.
남강 崔 求 宅 와선대 위에 있는 비선대를 찾아 신선의 자취따라 나그네 함께왔네 단풍에 물든산봉 불상이 선듯하고 구름과 물은 흐르고 동천은 터였네 산수는 시경(詩境)이나 가구(佳句)는 생각나지 않고 술로서 시름잊고자 술잔만 든다네 속세의 여욕을 잊을 수 없는탓인지 막대를 돌이켜 돌아갈 길 더듬네 ■ ■ 紅■ 白■ 詩■■ ■ ■ 一節■
盧 炳 翼 층(層)을 이룬 천석(泉石)들은 아직 그대로인데 신선은 간뒤 어찌 다시 오지않나 단풍찾는 손들은 나무밑에 앉아있고 동천은 숲속으로 길이 트였네 이곳 신흥사는 천년고찰인데 때마침 시객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네 신선의 자취따라 미치지 못하고 물가에 달이 지도록 시 읊다 돌아가리 層■ ■ 林■■ 洞■ 神■ ■ ■ ■
최구택( 崔求宅), 노병익(盧炳翼) 두 분은 양양 유림(儒林)에는 틀림없는데 이분들의 내력을 아는 분은 아직 찾지 못했다. 사람은 가고 시문만 남았으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이 다시한번 뇌리를 스쳐간다.
비선대에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수많은 인명(人名)들이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이 조선조 중엽초반기(中葉初半期)인 선조때부터 3.1운동후까지 약 380년간에 걸쳐 새겨진 것들이다. 본인들이 손수 새긴것이 아니고 이 일을 직업으로 하는 석공들이 명승지 부근에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들이다. 자기가 금강산에 있었다는 이야기들이다. 설악산 개척자인 최구현씨(崔九鉉)씨 말로는 자기가 금강산에 있을때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예술이라기보다 생활수단으로 관광객들의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고 한다.
만성보(萬姓譜)처럼 여러 성명들중에 金炳基 子玉均(김병기 자옥균)이라는 각자가 선명하게 눈에 뜨인다. 김옥균은 1851년 1월 13일(■■2) 충남 공주에서 김병태(金炳台)와 은진 송씨의 아들로 태어나 3살때 천안으로 이사갔고, 6살때 서울에 사는 먼 일가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10살때 강릉부사가 된 양아버지 병기를 따라 강릉으로 가게 되었다. 강릉 송담 서원(松譚書院)에서 6년동안 율곡선생의 유풍(儒風)을 열심히 배웠고 16세때 서울로 돌아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圭壽)로부터 평등(平等) 개화(開花)사상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때 동문수학한 박영교(朴泳敎; 永孝의 兄),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등과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집권(執權) 3일만에 실패하게 되어 세상사람들이 “3일천하”라고 부르게 되었다.
생부 김병태는 생포되어 천안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누이동생은 음독자살하고 부인 유씨는 7살난 어린딸을 불쌍히 여기어 죽지도 못하고 충북 옥천산골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주막(酒幕)으로 연명했고, 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해 10년이란 세월을 때로는 까닭없이 고도 오까사하라(孤島 小■原)에 유배되기도 했다. 거기다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자객(刺客)들의 표적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1894년 중국 이홍장(李鴻章)의초청으로 홍종우(洪鍾宇)가 자객인줄 모르고 같이 상해로가 미국조계(美國租界)에 있는 동화양행(東和洋行)에 투숙하고 다음날 통감(通鑑)을 읽다가 눈에 안약을 넣고 통감으로 눈을 가리려는 순간 홍이 권총으로 옥균의 뺨을 쏘았다.
벌떡 일어나자 다시 배를 쏘아 죽게하니 때는 1894년 2월 22일(양력 3월 28일)이요 옥균의 나이는 방년 44세였다.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와 양화진(楊花津; 지금 마포구 당인리 부근)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시체를 다시 목 자르는 것)되고, 사지는 찢겨 역적이란 누명을 씌워 토막난 시체를 각 고을에 한토막씩 보냈다 한다. 그래서 그의 묘소가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牙山郡 靈仁面 牙山里)야산에 유씨와 합장되어 있는가하면 일본 도꾜에서 무덤이 두곳에 있는데 하나는 아오야마묘지(靑山墓地) 다른 하나는 진죠지(眞■寺)라 한다.
사람이 한번 죽는것도 한이 된다는데 세 번이나 죽음을 당했으니 일러 무엇하리요! 옥균은 머리가 총명한데다가 해박한 지식, 넘치는 패기, 폭넓은 인격자로서 보기드문 애국자요 뛰어난 혁명가였건만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랐다. 박영효는 사기꾼이라 했고, 서재필은 둘도 없는 애국자라 했다. 옥균은 일본을 이용하려다가 도리여 이용당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고 말았으니 시운이 불길한 탓인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이라해야 옳을지 꽃다운 나이로 뜻을 펴지 못한채 역사의 뒤안길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비선대를 찾는 뜻있는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옥균이 비선대에 온 것은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재임 6년동안 있을때 그때가 아니면 1968년 2월 병기가 양양부사로 좌천되었을 때의 일로 추측되나 양양부사 당시는 옥균이 같이 왔다는 기록이 없을 뿐아니라 옥균이 22살때 문과에 장원급제 했으니 시간적으로 그럴 여유도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비선대에 있는 각자중 마지막으로 李甲成 子南■, 用■, ■■이고 그 후로는 새겨진 것이 없다 한다. 이갑성씨 하면 3.1운동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한분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맨 나중이었고 이곳 각자에서도 마지막이었으니 인연치고는 기이함을 느낀다. 비선대야말로 선경인데다가 시경(詩境)이요 수석(水石)이 모두 인문(人文)을 낳아 안팎으로 일색이다. 위치마저 누구나 갈수 있는 곳이어서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오가는 발길이 끊길 날이 없으니 어찌 신의 조화에 감탄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