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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미인도 육수 / 이승소
美人圖 六首 李承召
其三(기삼)
閑來相與鬪圍碁(한래상여루위기) 틈이 나면 서로 더불어 바둑과 싸우다가
却被春嬌下子遲(각피춘교하자지) 문득 봄의 교태로 바둑돌을 더디 놓네
手托香腮無限意(수탁향시무한의) 손으로 향기로운 뺨을 문지르니 뜻은 한이 없고
桃花枝上囀鶯兒(도화지상전앵아) 복숭아꽃 가지 위에는 꾀꼬리 새끼 지저귄다
〈감상〉
이 시는 신선들이 바둑을 두는 그림을 읊은 제화시(題畵詩)이다.
신선들은 틈이 나면 더불어 바둑을 두는데, 봄이 와서인지 바둑돌을 놓는 것이 더디다. 바둑을 두다 향기로운 뺨을 문지르니 한이 없는 뜻이요, 그 곁에 복숭아꽃 가지 위에서는 꾀꼬리 새끼가 지저귀고 있다.
이승소(李承召)는 성현(成俔)의 「제삼탄집후(題三灘集後)」에 의하면,
“공은 문치가 완전히 성대할 때에 시문 짓는 법을 배웠는데, 시문이 다 우섬(優贍)하여 같은 무리보다 매우 뛰어났다. 사가 서거정(徐居正), 괴애 김수온(金守溫), 사숙재 강희맹(姜希孟) 세 노장과 더불어 한때를 나란히 달려, 명성이 서로 상하가 되었다. 여러 장르를 모으고 큰 온전함을 이룬 것과 같음에 이르러서는 모두 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公當文治全盛之際(공당문치전성지제) 學爲詩文(학위시문) 詩文俱優贍(시문구우섬) 超出等夷(초출등이) 與四佳乖崖私淑三大老(여사가괴애사숙삼대로) 齊驅並駕於一時(제구병가어일시) 名聲相上下(명성상상하) 至如集衆流而成大全者(지여집중류이성대전자) 皆以公爲稱首(개이공위칭수)).”
라고 하여, 조선 초기 이름난 시인인 서거정·김수온·강희맹과 이승소를 나란히 두고 있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에 대해 “고운 체 속에 조금 저민 고기를 맛본다(염체중(艶體中) 초상일련(稍嘗一臠)).” 하여, 저민 고기를 조금만 씹어도 그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또한 『본집(本集)』에는,
“시와 문장을 짓는 데는 온순하고 부드러웠으며 빈틈이 없어 사람들로 하여금 전송(傳誦)하여 마지않게 하였다.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학사 예겸이 시를 보내 주기를, ‘보내 준 시의 절묘함을 생각할 때마다, 몇 번이나 시권을 열어 봐도 묵은 아직도 향기롭다’ 하였다
(爲詩文(위시문) 溫淳和潤而無瑕(온순화윤이무하) 令人傳誦不休(영인전송불휴) 嘗奉使于燕(상봉사우연) 倪學士謙贈之以詩云(예학사겸증지이시운) 每念贈行詩妙絶(매념증행시묘절) 幾回開卷墨猶香(기회개권묵유향)).”
라 하여, 문명(文名)이 중국에도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주석〉
〖圍碁(위기)〗 요(堯)임금이 만들었다는 바둑의 일종. 〖腮〗 뺨 시, 〖囀〗 지저귀다 전
각주
1 이승소(李承召, 1422, 세종 4~1484, 성종 15):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1447년(세종 2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도 합격했다. 부교리를 거쳐 145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1454년(단종 2) 장령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한 뒤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년(세조 3) 예문관응교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고, 이듬해에는 예조참의로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지어 바쳤다. 1459년 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참의·예문관제학·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으며,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를 지냈다. 이때 경연에서 사서(史書)의 간행·보급 및 교육의 강화와 불교 탄압을 주장했다. 그 뒤 우참찬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이조·형조 판서를 지내면서 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율력(律曆)·의약(醫藥)·지리(地理) 등에도 능통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조 / 이승소
早朝 李承召
東華待漏曙光回(동화대루서광회) 조정에서 조회를 기다리니 서광이 일며
萬戶千門次第開(만호천문차제개) 수많은 문이 차례로 열리네
雙鳳遙瞻扶玉輦(쌍봉요첨부옥련) 봉황이 멀리 보며 천자의 수레를 부축하고
九韶還訝下瑤臺(구소환아하요대) 구소곡 다시 맞아 요대에 내려오네
香煙殿上霏如霧(향연전상비여무) 향기로운 연기는 전각 위에 안개처럼 날리고
淸蹕雲間響轉雷(청필운간향전뢰) 맑은 벽제 소리 구름 사이에 우레처럼 울리네
聖代卽今家四海(성대즉금가사해) 성스러운 시대 당장 천하가 한집안이니
盡敎殊俗奉琛來(진교수속봉침래) 다 이국(異國)으로 하여금 보배 바치러 오게 하네
〈감상〉
이 시는 조회 때 일어나는 장면을 노래하면서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있어 이승소의 문재(文才)를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이승소는
“경연에서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을 강의하고, 이어 아뢰기를, ‘임금의 마음에 좋아하고 미워함에 치우침이 있으면 좌우 신하들로부터 모든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각자 한쪽에 치우침에 말미암아 마음을 맞추려 할 것입니다. 만약 토공(土功)을 좋아하면 토공으로 맞추려 하고, 사냥을 좋아하면 사냥으로 맞추려 하고, 불로(佛老)를 좋아하면 불노로 맞추려 할 것입니다. 임금은 더욱 여기에 마음을 두고 조심하여 조금도 호악(好惡)의 편벽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於經筵講范浚心箴(어경연강범준심잠) 仍啓曰(잉계왈) 人君心有好惡之偏(인군심유호악지편) 則自左右至百執事(칙자좌우지백집사) 各因偏處而中之(각인편처이중지) 如好土功(여호토공) 則以土功中之(칙이토공중지) 如好田獵(여호전렵) 則以田獵中之(칙이전렵중지) 如好佛老(여호불로) 則以佛老中之(칙이불로중지) 人君尤當操存此心(인군우당조존차심) 不可少有好惡之偏(불가소유호악지편)).”
라 한 『國朝寶鑑(국조보감)』의 기록대로 임금의 덕뿐만 아니라, 경계해야 할 것도 잊지 않았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의하면,
“사문 이윤인·이유인 형제가 이현을 지나다가 영천군(효녕대군(孝寧大君)의 아들)이 술에 취하여 남루한 옷을 입고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보통 사람이라 여기고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더니, 영천군이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고는 말하기를, ‘너는 왕손(王孫)을 보고도 어찌 예를 하지 않느냐? 너희들은 누구냐?’ 하니, 이유인이, ‘우리는 문사로소이다.’ 하였다. 군이 ‘누구의 방(榜)에 급제하였느냐?’ 하니, 이유인이, ‘우리의 장원(壯元)은 고태정입니다.’ 하니, 군은 침을 뱉으며, ‘강자평의 유이니 너는 속히 물러가라.’ 하고, 윤인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니, ‘문사올시다.’ 하였다. ‘너는 누구의 방에 급제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의 장원은 이승소올시다.’ 하였다. 군이, ‘너는 「백두산부(白頭山賦)」를 아느냐?’ 하니, 이윤인이 외우자, 군은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고 보냈다
(有斯文李尹仁有仁兄弟過梨峴(유사문리윤인유인형제과리현) 適君因醉微服坐路旁(적군인취민복좌로방) 二人以爲凡人(이인이위범인) 而不下馬(이불하마) 君使人招之曰(군사인초지왈) 汝見王孫(여견왕손) 何不禮焉(하불례언) 汝是何人(여시하인) 有仁曰我是文士(유인왈아시문사) 君曰(군왈) 誰人榜登第(수인방등제) 有仁曰(유인왈) 吾壯元則高台鼎(오장원칙고태정) 君唾涎曰(군타연왈) 姜子平之類(강자평지류) 汝可速退(여가속퇴) 問尹仁曰(문윤인왈) 汝是何人(여시하인) 答曰(답왈) 文士也(문사야) 曰(왈) 誰人榜登第(수인방등제) 答曰(답왈) 吾壯元李承召也(오장원이승소야) 君曰(군왈) 汝知白登山賦乎(여지백등산부호) 尹仁誦之(윤인송지) 君頓首禮拜而送之(군돈수례배이송지)).”
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승소(李承召)의 시명(詩名)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주석〉
〖東華(동화)〗 중앙관서(中央官署)나 조정(朝廷)을 뜻함. 〖待漏(대루)〗 백관이 조정에 들어가 천자의 조회를 기다림. 〖曙〗 새벽 서, 〖雙鳳(쌍봉)〗 봉황(鳳凰). 〖玉輦(옥련)〗 천자가 타는 수레.
〖九韶(구소)〗 순(舜)임금 때의 악곡(樂曲) 이름. 〖訝〗 맞다 아, 〖瑤臺(요대)〗 전설상 신선의 거처.
〖霏〗 올라가다 비, 〖蹕〗 벽제 필, 〖琛〗 보배 침
연 / 이승소
燕 李承召
畫閣深深簾額低(화각심심렴액저) 화각은 조용하고 주렴머리는 나직한데
雙飛雙語復雙棲(쌍비쌍어부쌍서) 쌍을 지어 날다 쌍을 지어 말하다 또 쌍을 지어 깃든다
綠楊門巷春風晩(녹양문항춘풍만) 문밖 거리의 푸른 버들에는 봄바람이 저물고
靑草池塘細雨迷(청초지당세우미) 못 둑의 푸른 풀에는 보슬비가 어지럽다
趁蝶有時穿竹塢(진접유시천죽오) 때로는 나비를 좇아 대숲 언덕을 뚫고
壘巢終日啄芹泥(루소종일탁근니) 집을 지으려 한종일 미나리밭 진흙을 쫀다
托身得所誰相侮(탁신득소수상모) 몸을 의탁하기에 장소를 얻었거니 누가 업신여기랴?
養子年年羽翼齊(양자년년우익제) 해마다 자식 길러 날개가 가지런하다
〈감상〉
이 시는 제비에 대해 노래한 영물시(詠物詩)이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함련(頷聯)에 대해
“세상에서 묘하다고 일컬은 곳(세소칭묘(世所稱妙))”이라고 했고, 또한 『성소부부고』에서는, “서사가가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동시대의 진산 강희맹(姜希孟)·양성 이승소(李承召)·영산 김수온(金守溫)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문형을 주관하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이양성의 제비를 읊은 시에 ······라 한 구절은 당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徐四佳久爲大提學(서사가구위대제학) 故一時如姜晉山李陽城金永山(고일시여강진산이양성김영산) 皆不得主文(개부득주문) 而先沒(이선몰) 李陽城之燕詩(이양성지연시) 有綠楊門巷東風晩(유록양문항동풍만) 靑草池塘細雨迷之句(청초지당세우미지구) 酷似唐人(혹사당인)).”
라 평하고 있다.
〈주석〉
〖畵閣(화각)〗 채색이 화려한 누각(樓閣). 〖深深(심심)〗 조용한 모양. 〖塘〗 못 당, 〖趁〗 좇다 진, 〖穿〗 뚫다 천, 〖塢〗 둑 오, 〖壘〗 쌓다 루, 〖巢〗 둥지 소, 〖啄〗 쪼다 탁, 〖芹〗 미나리 근
제화선 / 이승소
題畵蟬 李承召
香燒古篆坐蕭然(향소고전좌소연) 향을 고전 향로에 사르고 쓸쓸히 앉아
讀盡黃庭內外篇(독진황정내외편) 『황정경』의 내외 편을 모두 읽었다
一味天眞無與語(일미천진무여어) 천진의 한 맛 더불어 말할 이 없어
畫中相對飮風仙(화중상대음풍선) 그림 속에서 서로 대하니 바람을 마시는 신선일세
〈감상〉
이 시는 매미를 그린 그림에 쓴 제화시(題畵詩)로, 이승소의 탈속(脫俗)한 모습이 잘 드러난 시이다.
성현(成俔)의 「제삼탄집후(題三灘集後)」에서,
“내가 후배로서 문하에 노닐며 훌륭한 광채를 입고 남은 향기를 마신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공의 행동거지는 한아하고 자태는 옥과 눈처럼 맑아 완연히 신선 중에 사람 같았다.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고 사모하여 짧은 글이라도 얻은 자는 정밀한 금과 아름다운 옥덩이같이 하여, 읊조리며 완상하여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予以後進(여이후진) 遊于門下(유우문하) 承休光而挹餘馥者非一日(승휴광이읍여복자비일일) 公擧止閑雅(공거지한아) 風姿玉雪(풍자옥설) 宛如神仙中人(완여신선중인) 人敬慕之(인경모지) 得片言隻字者(득편언척자자) 如精金美璞(여정금미박) 吟翫而手不能釋焉(음완이수불능석언)).”
라고 언급했는데, 위의 시에서 이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주석〉
〖蟬〗 매미 선, 〖黃庭(황정)〗 도교의 경전인 『황정경(黃庭經)』을 이름.
송김선산(종직)지임 오수 / 강희맹
送金善山(宗直)之任 五首 姜希孟
其一(기일)
萱堂雲闕隔微茫(훤당운궐격미망) 훤당과 궁궐 아득히 머니
仕宦寧親兩未忘(사환녕친량미망) 벼슬살이와 모친 봉양 모두 잊지 못하네
乞郡章成誰會得(걸군장성수회득) 고향의 수령 청하여 이룬 것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事親猶短事君長(사친유단사군장) 부모 섬길 날 오히려 짧고 임금 섬길 날 긴 것을
〈감상〉
이 시는 김종직(金宗直)이 모친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갈 때 전송하면서 지어 준 것으로, 부모에 대한 효(孝)를 기리고 있다.
어머니가 거처하는 곳과 대궐 둘 사이는 아득히 멀어서, 벼슬살이를 하자니 어머니 곁을 떠나야 하고 어머니를 봉양하자니 대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고 싶으나, 공간적 여건이 너무 멀어서 그렇지 못하니, 고향의 수령을 청하여 어머니 모시는 일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어머니를 섬길 날은 길지 않고 앞으로 임금을 섬길 날은 많아서 이러한 선택을 했는데······.
『해동잡록』에 강희맹의 문학에 대한 간략한 평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경순(景醇)이요, 자호는 사숙재(私淑齋) 또는 운송거사(雲松居士)라 하고 혹은 국오(菊塢)라고도 일컫는데 강인재(姜仁齋)의 아우다. 세종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시와 문장에 깊이가 있고 자세하며, 온후하고 흥미가 진진하면서 매인 데가 없이 호탕하였다. 웅장 심오하고 우아(優雅) 건실함은 자장(子長) 사마천(司馬遷)과 같고, 넓고 크고 뛰어나기는 퇴지(退之) 한유(韓愈)와 같으며, 간결하고 예스러우면서 정밀하기는 유종원(柳宗元)과 같았고, 빼어나고 자유분방하기로는 노릉(盧陵)의 문충공(文忠公) 구양수(歐陽脩)와 같아서 당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인데 세상에 간행된 문집이 있다
(晉州人(진주인) 字景醇(자경순) 自號私淑齋(자호사숙재) 又號雲松居士(우호운송거사) 或稱菊塢(혹칭국오) 仁齋之弟(인재지제) 我英廟朝擢嵬科(아영묘조탁외과) 詩文醞藉精深(시문온자정심) 渾涵浸郁(혼함침욱) 大放以肆(대방이사) 雄深雅健似司馬子長(웅심아건사사마자장) 汗瀾卓犖似韓退之(한란탁락사한퇴지) 簡古精密似柳柳州(간고정밀사류류주) 俊邁奔放似廬陵文忠公(준매분방사려릉문충공) 爲時所推(위시소추) 官至左贊成(관지좌찬성) 謚文良(익문량) 有集行于世(유집행우세)).”
〈주석〉
〖萱堂(훤당)〗 어머니가 거처하는 방이나 어머니를 칭함. 『시경(詩經)』 「국풍(國風)」 「백혜(伯兮)」에 “언득훤초(焉得諼草) 언수지배(言樹之背)”라 했는데, 모전(毛傳)에서 “훤초령인망우(諼草令人忘憂) 배(背) 북당야(北堂也)”라 하고, 육덕명석문(陸德明釋文)에는 “훤(諼) 본우작훤(本又作萱)”이라 했다. 북당(北堂)에 훤초를 심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을 잊게 하는데, 고제(古制)에 북당(北堂)은 주부(主婦)의 거실(居室)이므로 뒤에 이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음. 〖雲闕(운궐)〗 궁궐이 높고 크기 때문에 궁궐이나 조정을 일컬음.〖微茫(미망)〗 아득함. 〖會〗 이해하다 회
각주
1 강희맹(姜希孟, 1424, 세종 6~1483, 성종 14):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무위자(無爲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1447년(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1473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이조참판·판돈녕부사·우찬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부지런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공정한 정치를 했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한편으로 아첨하며 자기 공을 자랑한다는 비방도 들었다.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민요와 설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소나무·대나무 그림과 산수화를 잘 그렸다. 금양에 있을 때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지은 농업에 관한 저서로 「금양잡록(衿陽雜錄)」이 있고, 당시 골계전(滑稽傳)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촌담해이(村談解頤)』가 있다. 그 밖에 서거정이 편찬한 유고집 『사숙재집』 17권이 있다.
차풍전역운 / 강희맹
次豊田驛韻 姜希孟
海上靈山特地開(해상령산륵지개) 바다 위의 신령한 산 특별히 솟았는데
鑾轝東幸採新詩(난여동행채신시) 임금님 동쪽으로 행차하시어 새로운 시 보시리라
定知此去醫民瘼(정지차거의민막) 정녕 이번에 가시면 백성의 병 고치시리니
倒瀉恩波便滌痍(도사은파편척이) 은혜의 물결 쏟아부어 상처를 씻어 주시리
〈감상〉
이 시는 풍전역에 있는 시를 차운한 것으로, 세조(世祖)가 관동지방으로 갔을 때 강희맹이 문안사(問安使)로 행재소(行在所)에 가던 길에 지은 것이다.
세조께서 관동 지방으로 특별히 거동하셨으니, 그 지역의 풍속을 담고 있는 새로운 시를 채집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시에는 힘들어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담겨 있으니, 임금님께서 그 고통을 알고서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다.
홍귀달(洪貴達)의 『허백정집(虛白亭集)』에,
“사숙재가 그 형 인재(仁齋)와 더불어 젊어서부터 이름이 높았다. 서거정(徐居正)이 인재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대의 자유(子由, 소식(蘇軾)의 아우 소철(蘇轍))이다.’ 하였더니, 인재가 말하기를, ‘형이 자첨(子瞻) 소식(蘇軾)이 아닌데 아우가 어찌 자유(子由)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한바탕 웃었다. 달성(達城)이 사숙재를 인재의 집에서 처음 보았는데, 이때 나이가 겨우 15살이었으나 재주가 벌써 노련하고 성숙하였다
(私淑齋與其兄仁齋(사숙재여기형인재) 自少俱有重名(자소구유중명) 徐達城謂仁齋曰(서달성위인재왈) 此君之子由(차군지자유) 仁齋曰(인재왈) 兄非子瞻(형비자첨) 弟安得爲子由(제안득위자유) 相與一笑(상여일소) 達城始見私淑齋於仁齋之第(달성시견사숙재어인재지제) 時年才十五(시년재십오) 才已老成(재이로성)).”
라고 하여, 강희맹의 뛰어난 재주에 대한 일화(逸話)가 실려 있다.
〈주석〉
〖鑾轝(난여)〗 임금의 수레. 〖幸〗 가다 행, 〖瘼〗 병들다 막, 〖倒〗 거꾸로 도, 〖滌〗 씻다 척, 〖痍〗 상처 이
명명풍우교 증평중 이수 / 강희맹
冥冥風雨交 贈平仲 二首 姜希孟
其二(기이)
冥冥風雨交(명명풍우교) 비바람 한데 섞여 어두운데
厭聞鷄亂號(염문계란호) 어지러이 닭 우는 소리 듣기 싫네
大人志功名(대인지공명) 관리들은 공명에 뜻을 두어
夙夜不憚勞(숙야불탄로) 아침부터 밤늦도록 수고를 꺼리지 않고
市人逐末利(시인축말리) 장사치들은 말리를 좇아서
百計競錐刀(백계경추도) 온갖 계교로 작은 이익 다투네
所以日復日(소이일부일) 때문에 날마다
作事繁牛毛(작사번우모) 일을 만들어 소털만큼이나 번다하네
吾今兩無謀(오금량무모) 나는 지금 두 가지 모의가 없어
萎頓安蓬蒿(위돈안봉호) 오두막살이에 정신없이 안주한다오
〈감상〉
이 시는 어둑어둑 비바람이 부는 날 평중에게 써서 준 시이다.
어둑어둑 비바람 한데 섞여 어두운데, 닭까지 어지럽게 울어 대니 그 울음소리 듣기가 싫다. 조정의 관리들은 공명(功名)에 뜻을 두어 아침부터 밤늦도록 공명을 이루기 위해 수고를 꺼리지 않고 있고, 시장의 장사치들은 장사에서 오는 작은 이익을 좇아서 온갖 계교로 서로 다투고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일을 만들어 소털만큼이나 번다해진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지금 관리로서 공명을 세우거나 장사치처럼 작은 이익에 관심이 없어 조그마한 오두막살이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살고 있다.
〈주석〉
〖冥〗 어둡다 명, 〖厭〗 싫다 염, 〖大人(대인)〗 벼슬이 높은 사람. 〖夙〗 일찍 숙, 〖憚〗 꺼리다 탄, 〖末利(말리)〗 상공업의 이익. 〖錐刀(추도)〗 작은 이익. 〖繁〗 번거롭다 번, 〖萎頓(위돈)〗 정신이 없음. 〖蓬蒿(봉호)〗 풀 더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