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분 정신희유분에서 보이는 사구게
지아설법(知我說法) 여벌유자(如筏喩者) 법상응사(法尙應捨) 하황비법( 何황非法)이라.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아서 법마저도 버려야하거늘 법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뗏목에 대한 비유는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듯하지만 간략히 덧붙여 보자면 강건너편(피안)으로 건너가기위한 방편들 수행하는 방법이나 판단하는 방법 등 불교교리에 따라 공부하는 수준을 높이기위해 사용했전 방편들을 뗏목에 비유하셔서 건느가고 난 후에는 그때까지 의지해왔던 방편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뜻이죠.
-> 법마저 버린다는 버린다는 설법은 흔히 이야기하는 방편이나 불법마저도 구속됨에 없을 정도의 해탈의 경지를 말하겠죠.
이런 이야기가 해당되는 예일 것입니다.
어느 노스님이 유명한 부잣집에 초대를 맏아 맜있고 비싼 고기를 대접을 하니까.. 그자리를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즉 고기를 먹지마라는 계(불법)를 지키신 것이죠. 그러나 어느 가난한 동네에 이르러 고기를 파는 장사꾼의 집에서 고기를 사서 고기를 공양으로 올리자, 맛있게 드시고 지극한 감사를 표시하셨다는 이야기가 바로 법을 버릴 때를 아시는 것입니다.
-> 불법에만 너무 집착하다하다보면 현실과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고를 주시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만약 이세상 모두가 스님으로 출가를 하신다면.. ^^ 세상이 그냥 종말을 고하겠죠. 그러한 세상을 부처님은 바라시질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아상이 없기 위해서는 당연히 법에 집착하는 법집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 제가 곧 미얀마로 위빠사나 수행을 떠나는 데, 우리나라에서는 법당에서 양말을 신고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 도리입니다. 그러나 그나라에서는 맨발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느나라의 불법을 따라야하며 어느 불법이 맞은 것일까요? 이같은 내용을 보면서 불법마저도 시대적인 여건이나 지역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저도 맨발로 법당에 들어가야하며 당연히 그나라 불법을 따라주는 것이 오히려 우리나라의 불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처럼 불법마저도 상황이나, 구도자들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각기 달리 쓰여 지며, 불법에 집착하게 되면 이 또한 하나에 얽매여 중도라는 불교의 사상을 범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며, 이처럼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을 버려리고 항상 바른 알아차림(mindfullness)을 유지한 채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행하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