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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여정(2) 본당 활동, 80년대로의 기억여행
- ME(Marriage Encounter)
영세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기 시작하니, 이 단체, 저 단체에서 우리 부부를 데려가려 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참여한 것이 ME 모임이었다.
내가 79년에, 남편이 1년 후인 80년에 영세를 했는데, 그 해 가을 어느 날, 누군가가 수원 ‘말씀의 집’에서 열리는 ME 주말에 우리를 보내서 영문도 모른 채 참석을 하고 왔다. 그때가 한국의 ME 운동 초창기였는데 우리 본당 교우 부부가 미군들이 영어로 하는 ME 모임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ME 모임이 시작 되었었다. 전국 대표 부부가 우리 본당 신자였고, 김득권 본당 신부님이 ME 지도 신부님이셔서 그 당시 우리 성당에서는 ME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몇 년 후 우리 부부가 본당 대표가 되었을 때는 150여 쌍의 ME 부부가 있었다. 인원이 많아 다 함께 나눔을 할 수가 없어서 여러 개의 Sharing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그 모임마다 다 참석하곤 했었다. 본당 대표는 지역구 모임에도 나가야 해서 그 일만으로도 꽤 바빴다. 1984년 5월, 103위성인 시성식 때 요한 바오로 교황님이 입장하시는 통로 양편 에 ME 부부들이 한복을 입고 도열하고 있었는데, 그 때 교황님을 가까이서 뵈올 수 있었던 것은 영광스러운 추억이 되고 있다.
- 세대주 우정의 모임
한 가지 책임을 벗으면 또 다른 책임을 맡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 본당에는 ‘세대주 우정의 모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전임 신부님이 계실 때 남성 신자들의 사사로운 친목 모임을 본당으로 끌어 드려 사도직 단체로 만들어 생긴 것으로 구역별로 모두 5개가 있었다.
ME회장을 벗자 남편 스테파노에게 신림 1동 우정의 모임인 ‘요한회’ 회장이 맡겨졌다. 임원을 미리 구성해 놓고 출석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회장을 하라고 통고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던 시절이었다. 이 모임은 월례회 때마다 성당 지하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음식 장만하는 것은 회원 부인들의 몫이었다. 월례회는 물론, 송년회, 성지 순례 등을 할 때도 여자들의 노력 봉사가 컸다.
친교 중심 단체였던 각 동의 ‘세대주 우정의 모임’은 나중에 소공동체 활성화가 중요사목 목표가 되자, 남성 구역 모임으로 바뀌면서 참석자가 대폭 줄고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 자모회
초등학교 아이들이 있었으니 주일학교 자모회는 당연히 들어야 했다. 자모회에서는 A4용지 8면의 회보를 만들어 월례회 때 나누어 주었다. 그 회보의 편집을 돕다가 나중에는 주로 내가 맡아서 했다. 전월 모임 보고와 신부님 강론 말씀, 마음의 양식이 되는 좋은 글 등을 실었고 회원들의 삶의 체험이 담긴 원고를 받아서 만들었다. 총회 때는 12개월의 회보를 묶어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들어오는 원고가 부족하여 애를 먹었는데 남은 지면을 메꾸는 일은 편집자의 몫이었다. 그 일을 한 것으로 글 쓰는 연습이 조금 되었던 것 같다.
한번은 지면이 너무 많이 남아 논현동 성당 신자인 언니에게 글 하나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언니도 나처럼 집안에만 갇혀 정신없이 살고 있던 평범한 주부였지만 글 솜씨가 좋았다. 언니는 삶의 이야기가 있는 감동적인 산문 한 편을 써서 보내주었다. 그 글이 우리 성당 교우들에게 폭발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어 자모회 월례회 때 한 번 초청되어 강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 일로 자신감을 얻은 언니는 문화센타에 등록하여 본격적으로 수필 공부를 하였다. 지금은 수필가로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작가로 활동 하고 있다.
자모회는 아이들이 커가며 탈퇴하였고 자모회지인 ‘샘물지’ 발간도 슬그머니 중단 되었다.
- 마리아회
입교 하자마자 여성 사도직 단체도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고 나갔다. 우리 본당에는 여성 단체가 연령별로 4개가 있었다. 애덕회, 마리아회, 성모회와 노인그룹인 안나회가 있었는데 그 중 나는 40 대 연령층으로 구성 된 ‘마리아회’에 들어갔다.
보통은 평 회원으로 있다 임원이 되고, 그 중에서 회장을 뽑아 맡기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나는 마리아회에 들어가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원의 경험도 전혀 없이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내가 본당 활동에 하나 둘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그 동안에도 우리 집안에서는 집안 행사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식구들도 여전히 많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많아졌다. 농춘 출신인 남편은 대소가(大小家 )중에서 제일 먼저 서울로 온 사람이라 상경하는 친척들은 우리 집에 들리 곤 했다. 적게는 하루에서 많게는 1년 이상을 묵었다가 갔다. 거기에다 시동생이 결혼하자 아이를 떼어다가 우리 집에서 길렀다. 주로 어머님이 기르셨지만 나의 협력이 필요했다.
본당신자들도 나의 이런 사정을 알았고 있었지만 그들도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일을 했던 것이고 후임자를 정해 넘겨주는 것으로 그들의 임무는 다 한 것이었다. 한 번 박수를 받고 나면 거절 할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회장 일이 내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 일을 맡기로 결정하고 온 날 나는 저녁에 한 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귀에서 터질 듯 왕왕거리는 소리가 나서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찰했는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난청이었던 것이다.
워낙에 소심한 성격이었는데다 형제 중 막내인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결혼 후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살아왔기에 남을 보조하는 일은 할 수 있어도 리더로서의 자질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일을 해 본 경험도 없었고, 회원들도 누가 누군지 잘 몰랐다.
병원에 며칠 다니니 다행히 귀는 정상으로 돌아 왔지만 공포심에 가까운 나의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처녀의 몸으로 수태고지를 받으셨던 성모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를 마음속으로 바쳤다. 이렇게 해서 담당 수녀님의 지도와 임원들의 도움으로 임기를 잘 마치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마리아회장으로 있을 때 류영도 신부님 회갑연을 차렸던 기억이 있다.
- 반장
반장을 언제부터 맡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오래 했었고, 그만 두었다가도 다시 하고 맡곤 했던 것 같다. 반장이 하는 일은 한 달에 한번 반 모임을 하고 성사표를 나눠주는 정도였다. 우리 본당에서는 소공동체 모임이 활성화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장들이 본당 행사에 동원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은 레지오와 여성 단체라는 양대 산맥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 청소도 레지오에서 돌아가면서 했다. 그러나 레지오 단원들은 반모임을 기피했다. 신부님께서 반 모임에 나가라고 아무리 강조하셔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서 반 모임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하였지만 그래도 반모임을 거르지는 않고 했다. 반장을 하면서 유익했던 것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수준 높은 구반장 교육이었다. 처음에는 명동성당에 가서 받던 교육이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지구별로 하였다.
- 각종 행사
내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전 교회적으로 굵직한 행사가 많았다.
1981년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3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유해 봉송과 본당 안치식, 1984년 103위 성인 시성식 등이 있었다.
1989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제 44차 세계 성체대회에서 반장들은 2,830명에 달하는 성체 분배 담당자들을 정해진 자리로 안내하는 역을 담당하였다. 이 때 모두 미색 한복을 입고, 푸른 줄무늬 양산을 성체 분배를 하시는 사제 머리위로 바쳐 들고, 60만 여명의 참석자 사이로 정확하게 안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때의 장면 안에는 반장으로써의 나도 있었다.
본당의 주요 일로써는 본당 성전의 증개축 사업, 바자회, 삼성산 성지 성역화 사업이 있었다.
- 부녀부장(사목회 여성 부회장)
자모회, 반장, 마리아회, ME, 요한회(세대주 우정의 모임) 등 이렇게 30대 후반에서 40대를 바쁘게 보내다가 아버님의 뇌경색 투병이 오래 지속되면서 봉사를 접었다. 이쯤해서 성당 봉사는 그만 하게 된 줄 알았었다.
94년도 5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 해 여름에 이탈리아에서 피정과 교육, 성지순례, 관광 등의 21박 22일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더니 ‘부녀부장’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본당에는 세 개의 여성 사도직 단체가 있었는데 합해서 100 여명이 되었다. 그 세 단체를 총괄하는 것이 부녀부장이 할 일이었고 사목회 여성 부회장을 겸했다. 부녀부장이 하는 일은 본당의 주방 행사 담당이었다. 그 때의 우리 본당에서는 총구역보다는 여성 사도직 단체나 레지오 단원들이 본당 행사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부녀부장’ 자리는 그야말로 나에게 안 맞는 옷이었다. 집안일도 많고 체력이 약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없는 사이에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런 결정을 내린 일로 기분이 상해 항의를 했다. 그러자 전직 부녀부장이 미안하지만 제발 맡아달라고, 이제 아버님도 돌아가셨으니 한 짐 덜지 않았느냐고, 젊고 일 잘 하는 사람을 임원으로 뽑아놨으니 잘 도와 줄 거라고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 거절 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주님,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저도 원합니다.” 하며 또 한 번의 “예!”를 드렸다.
그 당시 본당에서 치루는 혼배 성사가 토요일마다 있었다. 잔치 음식을 집에서 장만해 가지고 와서 피로연을 지하 식당에서 했다. 잔치 국수를 만드는 것은 부녀부가 해 주었다. 적게는 300명에서 많을 때는 800 명분의 국수를 말았다. 설거지도 우리 몫이었다. 그래서 회원 모두가 토요일에는 개인사를 챙길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우리 가족들도 인내에 한계가 와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본당 부녀부장 겸 사목회 부회장을 마지막으로 나의 본당 봉사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남편은 영세 하자마자, 재정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4년 동안 분과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본당 회계의 허술한 점을 바로잡고 회계방식의 기틀을 확실하게 해 놓았다. 부회장 때 성당 건물 증개측이 있었는데 건설회사에 문제가 생겨 건축업자를 내보내고 직영체제로 건설하느라 사목위원 이하 건축위원회에서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업자들을 다 밖으로 내보내고 세대주 우정의 모임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밤새 경비를 섰고 여자들은 야식을 만들어 보내주었다. 그 때 고생했던 건축위원회 회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테파노는 본당 축성식 때 교황청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님으로부터 공로패까지 받았다.
ME회장, 세대주 우정의 모임인 ‘요한회’, 사목회 재정분과위원장, 부회장을 거쳐 2001년 사목회 총회장을 끝으로 남편의 봉사는 마무리되었다. 아내와 하나가 되어 주겠다는 마음 하나로 멋도 모르고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자마자, 교리지식도 신심도 깊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현직의 업무를 처리해 가면서, 하느님의 일에 봉사해준 남편이 새삼 고맙다.
-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내가 활동 할 당시에 지속적인 성체조배회가 생겼다. 성체조배실에 성체를 현시해 놓고 24시간 돌아가면서 조배를 하는 것이었다. 조배실은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되기 때문에 뒷사람이 오지 않으면 올 때 까지 계속 해야 한다. 금요일 새벽 2시가 우리 담당 시간이었다. 대자 내외가 3시를 담당한 뒤로는 우리 시간만 하고 나올 수 있었다. 그랬는데도 무릎을 꿇고 앉아 성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잠시 후 잠에 빠져 들곤 했었다. 그 당시 나는 미사도 졸면서 드리고, 서서도 졸고, 앉아서도 졸곤 했다.
본당 봉사를 15년 이상 했음에도 레지오마리에, 성령기도회, 꾸르실료에는 몸을 담지 않았다.
신림동 성당의 레지오는 쁘레시디움도 많았고, 구성원이 안정되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입단 조건도 영세 후 몇 년 이상 되어야 했다. 연령 제한도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이었고, 여행도, 취미생활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레지오 단원들이 남의 집 방문 하는 일이 많았다. 냉담자와 환자를 찾아가고, 비신자를 교회로 나오도록 권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연륜이 있어야 했다. 레지오 단원들은 양로원, 병원 등 봉사 활동도 많이 했다. 나에게 레지오에 들어오라고 권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갈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바빠지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성령 세미나에는 세 번 정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나는 세 번 다 특별한 체험이 없었다.
하지만 성령기도회로 한 번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 살 아래의 견진 대녀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를 일찍 여의고 상처투성이로 자란 사람이었다. 현실의 삶도 너무 각박하여, 날이 서고 뒤틀린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대모인 나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곤 했는데 어느 날 찾아와 분노와 미움의 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 때 내가 무심결에 “이번 주말에 성령기도회에서 산피정을 간다는데 거기나 한 번 가보지요.” 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며칠 후 대녀가 찾아왔다. 대모님께 감사 인사드리러 왔다는 것이었다. 산 피정에 가서 한평생 못 쏟은 눈물을 다 쏟았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새 세상이 열렸다고 감격하며 말했다. 그 이후로 30년도 넘은 지금까지 대녀는 성령기도회 봉사를 하며 기쁘게 열심히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대모를 평생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고마워하고 있다. 그 일로 성령기도회에 특별한 치유의 은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기도회에 나가지 않았다. 레지오에 나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꾸르실료는 두 번 추천을 받았었다. 그러나 역시 안하겠다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무나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해서 해 주었는데 거절한다고 하였다.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고 그러느냐고도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미사참례만 잘 하는 신자로 있고 싶었다.
영세 할 당시의 열정은 사그라졌고 체력은 많이 소진되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루만이라도 나 혼자 있어 보는 것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글뒹글 하면서 지내는 것이었다. 나는 본디 게으르고,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후, 또 다른 새로운 길로의 부르심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ME 모임이나 ‘세대주 우정의 모임’ 등은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나가는 일은 어머님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어머님은 며느리인 내게 대놓고 싫은 소리나 꾸중을 하는 분은 아니셨다.
하지만 매사에 능(能)하신 분이라 우회적으로 당신 생각을 드러내셨다.
당신은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시모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 못 가셨다는 얘기며, 동네 사람 다 가는 나들이도 당신은 가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말씀을 계속 들려 주셨다.
그런 어머님을 위하여 내가 생각해낸 묘안은 나보다 앞서 부모님을 밖으로 내보내 드리는 것이었다.
성당의 남녀 노인 단체에 가입시켜 드리고, 성지순례, 동네에서 하는 노인잔치, 야유회 등을 가시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도 몇 번씩 놀러 나가셨다.
“오늘 재미있으셨어요?” 외출했다 돌아오신 어머니께 여쭈어 본 다음
“내일은 저도 나가야 하는 날이에요.” 하는 식으로 나의 행동반경을 차츰 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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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마에게 듣던 단어들이 눈에 띄어 반갑네요. 신앙여정. 인생여정.
가끔 되돌아 보면 아쉬웠던 때도 많았던것 같읍니다. 남은 여정은 아쉬움없는 삶을 살고 싶지만
지나고 나면 또 똑같겠지요.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오늘도 내일은 어제를 후회하지 않는
오늘이고자 다짐해봅니다. 연약한 몸으로 잘살아내신 이모님. 앞으로 남은 신앙여정. 인생여정도 응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