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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끼내와 감나무집 이야기
 
 
 
카페 게시글
섬섬섬 섬사람들 이야기 스크랩 진도 칠전서당(2010. 12. 14 조사)
자운영 추천 0 조회 23 18.08.24 15: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칠전 서당〉

  칠전은 본디 장흥 임씨(任氏)가 살았으나 밀양박씨 박용(朴容)의 셋째 아들 박동(棟)이 정착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이 서당의 이름은 노암재(露岩齊)로 동네 건너 산허리 칠전리 산 173번지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서당집 옆에 유후각(裕後閣)이란 비각이 있고 그 비각안에 1714년(강희 54년 숙종 49년)에 세운 「학계철비」가 있어 전라남도 기념물 202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 서당은 1680년대에 시작되었고, 1714년 그 내력을 적은 학계철비를 세우기까지 30년간 25필지 1.7결(結)의 전답을 모았으므로 10명 내외의 집안 아이들 교육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식민시절 이곳은 1922년 5월 의신 개량서당이 되고 그 이듬해 1923년 면 소재지인 의신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많은 서당학생을 이곳에 빼앗겼다. 1937년 결국 노암재서당은 폐쇄되었다.

 

  〈노암재〉

  칠전리 박씨문중은 마을내에 거주하고 있는 문중자제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1684년에 학계를 조직하여 서당인 노암재를 운영하였으며, 서당은 1933년 까지 존속되었다. 또한 동계등에서 서당을 운영하거나 양사재 등 교육활동을 부수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칠전리에서 보듯이 향촌에서 학계를 조직하여 사학 교육기관인 노암재를 세우고 제원을 각출해 학전을 만든 뒤 이를 영속하도록 철제비를 세운 일은 드문 일이다.

 

  〈유후각〉

  유후각은 학계철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각으로 마을 앞 속칭 ‘서당까끔’내에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숙종 40년(1714)에 건립한 철비가 있다. 숙종 10년(1684) 서당인 노암재를 세우고 학계를 결성했는데, 이후 운영에 관한 사항을 철비에 기록하였다. 매년 음력 3월 6일에는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위토답은 8마지기가 있는데 임사가 경작하면서 제물을 장만한다.

 

  〈칠전리 학계철비〉

  조선 숙종 40년(1714)에 건립한 철비이다. 숙종 10년(1684) 서당인 노암재를 세우고 학계를 결성했는데, 이후 운영에 관한 사항을 철비에 기록하였다. 앞면에는 학계에 참여한 사람 이름(11명)과 학문을 격려하는 글이 있고, 뒷면에는 學田을 모은 경위와 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철비의 규모는 높이 140cm, 폭 47cm, 두께 7cm이다. 일제강점기의 철물 공출 때에도 학계원들이 결사적으로 보존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매년 음력 3월 6일에는 철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 철비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및 교육사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활용방안〉

  진도 칠전 서당은 진도에서 유일하게 건물이 남아 있으면서도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한자교육과 예절교육을 한다면 진도군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좋은 사례로 남을 것이다. 방학 때 어린이 예절 교육을 위해 멀리 보낼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한다면 비용절감과 어린이들의 심리적 안정으로 더 좋은 교육효과를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칠전서당 원경

 

칠전서당(로암재)

 

칠전서당(로암재) 근경

 

칠전서당(로암재) 마루

 

아궁이

 

유후각

 

유후각 현판

 

유후각 오르는 계단

 

학계철비 안내판

 

학계철비 안내판 내용

 

진도 칠전리 학계철비

 

보호수 안내판

 

학계 문도비군

 

보호수

 

칠전서당 앞 우물

 

향토자원 조사표(B)-칠전 서당.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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