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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설교신학
김운용 교수
I. 여는 말
우리는 한 세기가 가고 또 다른 세기를 목전에 둔 정점에 서있다.
한국 교회에 있어서 지난 한 세기는 특별히 설교가 그 길을 인도하고 지탱시켜준 설교의 영광(the glory of preaching)의
시대였다. 설교를 통해 복음이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갈 길이 제시되던 시대였다. 민족의 아픔과 고난, 핍박의 시기에도 교회와 성도들을
지탱시켜 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설교자들이나 성도들은 설교를 목회 사역의 가장 중심적인 자리에 두었으며,
교회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사역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세계 어느 지역의 교회들보다도 뜨거운 말씀 선포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설교 사역들을 감당해 왔다. 실로 한국교회는 생명을 걸고서 말씀을 선포해 온 순교자의 신앙 유산 위에 말씀의 강단을 세워왔다.
그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은 지 불과 1세기를 넘기면서 세계 선교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교회 성장을 이룬 교회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한
급속한 교회 성장의 요인 가운데 설교 사역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의 영광의
시대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고, 다가오는 21세기에도 그 영광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한다면 긍정적으로 확신 있게 대답하기에는 주저되는
상황들 앞에 서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대답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인가? 21세기를 목전에 둔 오늘날 한국 사회는 거대한 문화
사회적(sociocultural) 변화들을 경험하고 있다. 실로 지난 이조 500여 년 동안 경험한 변화보다도 지난 50여 년 동안 경험한
변화가 훨씬 클 만큼 한국 사회는 문화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해 왔다.
급변하는 변화의 시대에서도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할 위탁과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how) 감당해 갈 것인가가 관건이 되고 있다. 실로 한국
교회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수많은 도전들 앞에 서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말씀 사역은 거대한 도전 앞에 서있다. 그러한 도전은 설교를 위기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데이비드 왓슨(David Watson)은 그의 책에서 [영국] 교회의 이미지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텅빈 집,
퇴락해 가는 건물, 노파들이 대부분인 청중들, 그리고 침체되고 시대에 뒤진 성직자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 복음의 강력한 설교자들과
엄청난 말씀의 영향력을 나누었던 영국 교회에 대한 묘사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단순히 영국 교회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국 교회의 상황은
다르다고 말할 수만 있는가? 급변해 가는 시대는 한국 교회의 설교 사역도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1세기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말씀 사역에 있어서는 “위기(危機)”의 시대가 되어질 것이다.
이 글은 이렇게 말씀 사역의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어질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감당 할 것인가를 관심 하는 글이다. 언제나 바른
방법은 바른 이론을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신학의 정립은 새 시대를 준비함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 글은 다가오는 21세기에 어떠한 설교신학을 가지고 설교 사역을 감당해 갈 것인가를 관심 하면서, 설교 신학적인 하나의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 아니라 제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둔다.
II. 21세기를
향한 시대 조명과 설교의 신학적 이해
현대 설교학은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들려지는 설교”가 되게 할 것이냐에 깊이 관심
해 왔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Faith comes from hearing)는 명제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설교되어지고, 들려지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칼빈의 주장은 설교에 있어서 들려짐과 그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들려지는 설교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21세기를 목전에 둔 설교자의 관심이어야 하고, 고민사항이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 교회는 전혀 새로운 상황(context)을 경험하고 있고, 다가오는 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할 상황으로서 많은 변화가 예견되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의 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늘의 상황 이해는 본문의 이해와 함께 설교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내용이며,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내용이다. 오늘의 삶의 자리와 그 정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바른 신학의 프락시스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한 설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설교사역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바른 방법론이 도출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A. 설교의 사역에서 본 21세기의 이해
새로운 한 시대는 수많은 변화가 예견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가오는 21세기는 커다란 문화-사회적 변혁의
시대가 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은 인간의 사고와 의식, 그리고 삶의 내용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설교
사역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민감하지 않고서는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말씀선포를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교회에 주어진 복음에 대한 위임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설교자들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정보화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
20세기말에 서있는 우리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도래와 함께 뉴미디어가 등장하고, 거대한 정보의 흐름(홍수) 앞에 이미
서있다.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의 형태와 내용이 과거와는 전적으로 다른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여러 학자들이
예견한대로 이제 문자적 문화에서 문자 이후(post-literary)의 문화인 전자시대(electronic age)를 살고 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는 방식에 깊이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 사역에서 이러한 변화를 깊이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오늘의 청중들에게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와 새로운 가치체계의 형성
이미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함께 수많은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전통적인 가치관의 붕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수백년 동안 한국인들의 의식과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던 유교적인 전통적 가치관은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아직 부정의
형체 가운데 형성해 가고 있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전통적인 가치관은
“권위주의의 가치 지향”이었고, 가족 혹은 혈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해온 “집단주의의 가치지향”이었다. 또한 인간이 늘 그 중심이 되어온
인간주의적인 가치지향이었다. 권위주의적 가치지향은 한국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와 사회 윤리를 규정하는 기본 원리가 되어왔고, 상하 위계적인 서열
관계에 의해서 인식되고 조직되어 왔다. 또한 개인보다는 늘 집합체에 큰 비중을 두어온 가치지향이었는데 가족주의가 그 중심을 지배해 왔으며,
개인의 사회적인 지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왔다.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지향은 자연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가치체계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공업화의 영향으로 사회기반과 문화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은 변형되고 새로운 가치지향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가치지향으로, 권위주의에서 이제는 평등주의의 가치지향으로, 인간주의적 지향은 이제는 물질주의적 지향으로 변형되고 있다.
아직도 한국인의 가치지향은 체계적인 경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본 이러한 가치지향의 변화는
21세기에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그 체계적인 틀을 갖추어 갈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사람들의 의식체계의 변화와 주요 관심사들이 달라지게
했는데, 사회 변동과 문화변동은 이러한 의식체계의 변화에 더욱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건축, 문화, 철학,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논의되고 언급되면서도 과연 우리 한국 사회가 포스트마던 시대를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17세기의 계몽주의 발달과 함께 꽃피워온 과학 혁명을 통해 그 기반을
형성해온 모더니즘은 이성을 신뢰하는 합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하여 기계론적인 물질주의와 과학주의가 절대시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20세 후반에
이르면서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과학과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가 일게 되었고, 생태계의 파괴와 함께
기계론적 물질주의에 대한 회의 등과 같은 정신적 흐름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을 등장하게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은 다원주의, 해체주의와
탈합리주의적 특성이 지배적이다. 아마도 다가오는 21세기에는 그 영향력과 형태가 보다 가시화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시대의 설교 사역은
설교 사역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절대성이나 절대 유일의 진리를 거부하며 권위 또한 거부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도전으로 와 닿고 있다.
B.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의 설교의 신학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는 동안 여러
채널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셨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뚜렷한 채널은 역시 “설교”라는 채널이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교회와
이 땅의 인간들을 위해 하늘의 뜻과 말씀을 전달하시기 위해 오늘도 여전히 사용하시고 계시는 도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시며, 또한 복음의 비밀을 증거케 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인 설교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 설교는 복음에 대한 설명인 동시에 선포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설명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도에 대한 선포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는 것이라기 보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주체는 설교자가 아닌 성삼위 하나님이시며, 마음에 깊은 상처와
절망을 가지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찾아와 하늘의 계시를 설명하시고 부활을 선포하심과 같이, 오늘도 거대한 문화 변혁의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다가오셔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 시대이래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고, 마지막 날에는 그 아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다 (히 1:1-2).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땅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세상 모든 영혼들이 너희들의 손에 달렸으니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시며 복임 사역을 전적으로 위임하셨다. 말씀을 들고 가는 제자들과는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임을 약속하셨고
(마 28:18-20), 감당할 수 없이 어려운 시대 가운데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촉구하셨다 (행1:8).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설교 사역은 오늘도 계속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계시 사건(the event of revelation by the Triune
God)이다. 그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며, 설교자들과 청중은 그 하나님의 사역 앞에 놓여 있다. 그들은 함께 말씀의 청취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떠나는 여정(the homiletical journey)을 함께 가는 동반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에
관해서(about)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먼저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한 선각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오늘도 말씀하시고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대한
증언자들이다.
III. 중단할 수 없는 설교사역: 어떻게?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많은 장벽들이 가로막혀 있을 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가 중단할
수 없는 사역임을 천명하셨다. 이것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보여준다. 오늘도 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설교를 이해할
때, 이 사역은 교회가 포기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부르심(calling)이요, 거룩한 위임이다. 그러므로 이
사역은 주님 오실 때가지 계속되어야 할 사역임을 우리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제기되는 질문은 “어떻게?”이다.
마르바 돈(Marva J. Dawn)은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를 조명하면서 “오늘의 문화가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의 예배와 설교가 그러한 문화적인 특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물결은 설교 사역을 무기력하게 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향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산업(the entertainment industry)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중들의 관심과 혼을 앗아가 버리며,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벗어나 포스트모던 가치체계로 나아가는 문화는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며, 종교 다원주의와 해체주의적인 경향을 띠면서, 말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교회의
복음적인 과제는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현대인의 정신과 지성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기 위해
계속적인 방법론의 개혁을 요구한다. 여기에서는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설교자들이 관심 해야 할 사항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설교의 방법
우리 한국 교회는 설교 사역을 감당해 오는 동안 무엇을 전할 것인가 (the
what of preaching)에는 깊이 관심 해 왔지만 어떻게 전할 것인가(the how of preaching)에서는 무관심해 왔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내용이 없는 설교는 알맹이가 빠져 버린 것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렵지만 현대 설교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학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래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은 이러한 현상을 “설교 방법론에 대한 학대”(the abuse of how)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설교 방법론의 무관심은 설교에 있어서 지루함과 설교에 대한 권태감(boredom)을 야기시키는 주원인이 되어진다. 크래독은 이러한 설교에
대한 권태감이 단순히 단조롭고 재미없는 설교자를 꼬집는 말이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악의 근원”(the
root of all evil)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지루함과 권태감은 설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면서
믿음의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항하고 거부하는 세력이 되게 한다.
설교의 내용을 알차게 준비하는 것은
설교자가 가장 깊이 관심 해야 하겠지만 잘 준비된 설교라 할지라도 적절한 형식(form)에 담아서 전달하지 않는다면 그
효과(effectiveness)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방법론에 깊이 관심 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자세로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깊은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준비하여 성령님을 의지하여야지 인간적인 방법론에 의지하는 것은 설교자의 마땅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가 굉장한 신앙의 자세 같지만 그것은 마치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아무런 그릇에 담아서 먹어도 괜찮다는 논리로 통할 수
있다.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개 밥그릇도 상관하지 않고 아무 그릇에 담아 먹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도 한가지의 틀에 모든 것을 담지 않고 다양한 문학 장르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을 관심 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이 복음은 본질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방법에 대해서 관심 하게 한다.
서구의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은 이래,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설교를 중심으로 해 왔다. 이것은 흔히 현대 설교학에서 “3 대지와 한편의 예화”로 통하는 방법에 매여왔음을
알 수 있다. 방법론 역시 강의에 적절한 “연역적 설교”(deductive preaching)의 틀을 유지해 왔으며, 논증적인 방법의 울타리
안에 안주해 왔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러한 방법론적인 틀에 묶여왔다. 토마스 롱이 지적한 대로 설교 방법론은 “설교에 있어서 가장
적게 관심을 두는 요소”이었으며, 서구 교회도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이래 거의 300여년 동안 이 설교의 틀에 안주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의 형태는 “강줄기의 흐름에 있어서 강둑만큼이나 설교의 흐름과 방향을 결정해주는 데에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에 있어 틀(shape)을
가져다주고, 또한 활력을 갖다주는 요소이다.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며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려는 설교자는 마땅히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어떻게 할 때 말씀이 들려지는가를 관심 해야 할
것이며, 인간의 의식 속에 어떻게 작용이 일어나는지를 관심 해야 할 것이다. 설교의 내용이 가장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어떻게 설교를
구성할 것인가는 지속적으로 관심 해야 할 내용이다.
특별히 현대 설교학에서는 전통적인 방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방법론에
있어서 새로운 설교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교회 강단에 유익할 몇 가지 방법론을 제시해 보면, 첫째로 귀납법적인 설교(inductive
preaching) 방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역적이며 대지를 중심으로 한 설교인 전통적인 설교방법은 각 대지 안에서의 작은 움직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이동하는 움직임(movement)이 없으며, 청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귀납적인
설교는 첫째, 둘째, 셋째 식의 대지들로 형성되는 대신에, “아하! 그렇구나”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오게 될 절정을 향하려 집약적으로 세워져
나가는 작은 단편들 혹은 움직임(movement)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역적 설교가 설교 초반에 설교의 명제나 중심사상을 제시하고서 3-4개의
대지로 나누어 그것을 설명 및 증명, 그리고 적용하는 형태를 띤다면, 귀납적인 설교는 특별한 상황(particular situation)으로부터
출발하여 말씀의 여정을 함께 밟는 움직임을 통해 말씀의 일반적인 원리(general principle)에 도달하게 되는 방법이다.
두 번째 대안적인 방법으로서는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 방법인데, 이야기와 같은 구성 혹은
줄거리(plot)를 가진 형태의 설교 형태를 취한다. 현대 설교학은 이야기의 사용에 대해서 깊이 관심 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 역시 이 방법을 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며, 또한 오래 기억하게 한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움직임을 통해
진행해 간다. 이야기에는 처음 시작이 있고, 중간 과정이 있으며, 나중의 결론을 향하여 계속해서 움직여 간다. 기, 승, 전, 결의 형태를
통해서 움직여 가는 것이 이야기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연속성”(continuity)과
“움직임”(movement)이다. 이러한 연속성과 움직임을 지배하는 것이 플랏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어떤 정지된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in-time)이다. 특별히 이야기체 설교는 모순과 갈등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것들이 훨씬 심화되고 복잡해지는 과정을 걸쳐, 기대할 수 없었던 역전이 일어나게 되고, 대단원의 종결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가진다. 본문을 통해
청중들이 느끼는 어떤 필요가 설교를 구성하는 과제로서 역할을 하게 되며, 설교는 이러한 과제를 딜레마를 형성하여 서술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청중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함(ambiguity)이 심화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모호함을 형성할 것인가 이다. 사실 청중들은 그런 모호함으로부터 시작된 설교가 나머지 부분에서 어떻게 그것이 해결되어
가는지를 간절히 보기를 원한다. 따라서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서론에서 제기된 그 모호함을 해결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가 어떻게
구성(plot)되느냐 하는 것은 성공적인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설교를 이러한 틀로 준비하기가 쉽지 않고, 또
성경의 모든 본문을 이러한 틀을 따라서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체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 방법과 비교할 때, 청중들이
기대감과 관심을 가지고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homiletical journey)을 계속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이렇듯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설교자들은 설교의 형태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우리의 실정에 맞고, 지역
교회에 맞는 설교 형태를 계속해서 개발해 나가야할 것이다.
2) 설교의 언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설교에 있어서 언어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되어지며,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무엇인가를 일어나도록 하는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말하지 못했던
삼중고를 겪고 있던 헬렌 켈러에게는 적어도 그녀가 첫 단어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W-a-t-e-r"라는 단어가
그의 손에 쓰여지고, 싸늘한 감촉을 통해서 첫 단어가 열려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고백하기를 새로운 세계가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데이비드 버트릭(David Buttrick)은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중대한 세계를 형성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의 의식 속에 구현해간다. 이와 같이 언어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설교자가 청중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맺히게 하여 말씀이 제시하는 “세계”를 창조해 가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어떤 언어가 사용되느냐하는 것은 실로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한국 교회설교에서 사용되어온 언어들은
논리적이고, 논증적이며, 명령적이고, 분석적이었다. 이러한 언어는 왼쪽뇌를 자극하여 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여지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어떤 정보에 대한 지적인 지식의 축적을 돕는 언어이며, 그들의 지성에 호소하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삶을 바꾸는 데에는 크게 역할하지 못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오른쪽뇌 접근방식은 감정에 호소하며, 보여 주고, 느끼게 하는 언어이다. 즉 귀로 듣는 말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응답하게 만들어 주는 언어이다. 그래서 동방의 격언 가운데 “진정으로 위대한 스승은 당신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당신의 귀를
눈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이, 좋은 설교자는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귀가 눈이 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청중들이 그 설교를 통해서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설교자가 가장 훌륭하다는 말이다.
21세기의 언어는 “그림 언어”가 되어질 것이다. 개념(concept)을 통해서
전하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는 언어(audiovisual language)를 통해서 말씀을 증거할 때, 가장 확실하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즉 다가오는 세대는 그림 언어 (picture language)로 말씀을 전하게 가장 확실하게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는
말이다. 언어는 보여주는(audiovisual) 매체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피레 바빈(Pierre Babin)은
“보여주는 언어 매체야말로 현대 사회의 문화에서 가장 적절한 새로운 언어”이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그림 언어는 이미지와 스토리, 메타포(은유)와
같은 가시적인 상상력이 담긴 언어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달되어진다. 현대의 청중들을 터치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던져지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언어, 논증적이고 이성적(rational)인 언어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토론장이 아니라 화랑” (not a debating hall, but a picture gallery)이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달되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월터 브르그만은 “설교자들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 신학은 명확한 논리와 명제를 통해서 메시지가 가장 잘 전달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화랑과
같음을 외면해 왔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현대 신학에서는 이야기와 같은 언어구조를 통해서 신학함에 깊이 관심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인 흐름에
깊이 관심 해 온 현대 설교학도 새로운 언어체계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깊이 관심 하면서 새로운 설교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하였고, 거기에서 분석한 내용들을 정돈 배열해서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형태의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설교는 논리적인 개요를 통해서 신학강의와 같이 그저 설명하고
적용해주는 식의 설교를 지향해 왔다. 여기에서 설교의 언어가 한가지 측면--논리적이고 분석적인--에만 관심 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이제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의 특징을 깊이 관심 하면서 새로운 설교 언어 개발에 깊이 관심 해야 할 것이다.
3) 청중에 대한 재 이해
전통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청중은 수동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passive receiver)로 이해되어져 왔다. 설교자가 준비한 말씀을 잘 전달해주면 청중들은 그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말씀이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의 최종적인 종착지이며, 그들의 역할은 단지 귀를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단순한
청취자가 아니라 청중은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을 함께 가는 동반자(partner)이다. 설교를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the event of
encounter)으로 이해해 볼 때, 그리고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보다 강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보다 깊은 헌신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청중 이해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현대
설교학의 중심 되는 관심의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한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청중들이 수동적인 수령자들로 여겨졌다면,
설교자들은 청중들보다는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말씀에 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원천(source)이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발전과 함께,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자와 청중들의 위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설교자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자리인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나아왔으며, 청중들과 같은 지체이며, 그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회중석으로부터 올라와 서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도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다. 반면 청중들은 설교자와 함께
말씀의 여정을 함께 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 여정을 함께 해 가면서 서로 돕는 존재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는 자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서로 작용하는 공동 작업(interactive preaching)이 되어 가는 것이다.
21세기에 고려되어야 할 사항의
하나로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성에 대한 재이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권위적인 설교를 지향하고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설교를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정을 함께 가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피동적인 청중으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존재로, 설교자의 권위로 말씀과 그 결론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하며 그
메시지의 결론에 함께 도달해 가는 청중의 참여가 있는 말씀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IV. 21세기를 향한 설교신학
21세기는 커다란 변화와 기독교의 말씀 전파에 커다란 도전으로 와 닿는 시대가 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그 변화의 물결에 압도되어 생존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사는 설교자는 변화에 관심하고 대처해 가는
설교자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장에서 우리는 어떠한 틀을 가지고서 변화에 관심 해 가야 할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설교자가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설교 신학적인 틀(paradigm)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무리 변화하는 시대에서 산다 할지라도 설교자가 가져할 말씀의
패러다임을 바로 가질 때, 시대를 말씀으로 조명하고 변화시키는 말씀 사역으로 감당해 갈 수 있을 것이다.
1)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 설교 사역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대답: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reaching is the Word of God)." 이러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설교는 오늘의 삶 속에 주시는 그분의 계시의 사건임을 새롭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이시라는 고백으로부터 설교 사역은 시작된다. 또한 설교자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고백할
때, 그는 온전한 설교자가 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자는 “성언 운반 일념”에 사로잡혀 있게 되며,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허하게 무릎을 꿇게 할 것인지에 깊이 관심 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 설교자들을
통해서 과거에도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하나님께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 말씀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이 말씀이 바로
들려질 수 있기 위하여 시대와 삶의 자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이다.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포함해서 청중들의 의식과 삶의 정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설교자는 말씀의 역동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청중들의 삶과의 관련성(relevance)이 없는 설교는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말씀이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그들의 삶의 연관성이 없고 의미를 주지 못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들은 청중들의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relevant),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말씀이었고(meaningful), 또한 흥미를
유발시켜주는 말씀(interesting)이었다.
설교는 사람의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준비에 결코 등한히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 말씀 연구를 등한히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준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이 놀라운 신비 앞에서 그는 성령님을 깊이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말씀 사역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주관하시며, 그 성패와 효율성(effectiveness)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마치 일상의
식사를 드시고 축사하실 때 성찬이 되게 했던 엠마오 어느 집에서의 기적을 늘 가슴속에 열망하는 존재들이다.
2) 성경이
중심이 되는 설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이요, 선포라고 이해할 때, 본문이 중심이 되고, 본문이 말씀하도록 하는
설교여야 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는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로 가득 찼고, 성경이 말하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가 말하고 성경은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proof-text)로 삼는 누를 자주 범하고는 했다. 그것은 중세교회가 범했던 오류였고, 그러한 오류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교회는 긴 말씀의 암흑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종교 개혁자들이 내 세운 기치도 “오직 성경(말씀)으로!”였으며,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는 “말씀이 말씀되게 하라”는 기치를 내세웠던 것이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간은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 외침의 중심을 이루었다. 칼빈이나 쯔윙글리,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교이기 때문이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수천년전에 쓰여진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설교의 영광을 구가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
설교자들에게 반드시 들려져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이 말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당위성을 위해서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할 것이며,
자신의 말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이며, 바른 설교 신학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주제 설교 혹은 제목 설교와 같은 설교 스타일에 익숙했던 초기 설교 전통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게 하는 설교로 구성하는데 실패해 왔으며, 이러한 강단에서의 실패는 오늘날의 설교에 역기능적인 요소들이 많이 자아내게 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서 이러한 한국 교회 강단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성경이 말씀하게 하는 설교의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바른 말씀 선포신학은 강단의 권위를 바로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며--인간 설교자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로서--권위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바른 말씀의 권위를 세워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복음 중심의 설교
기독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이며, 개인들과 사회와 나라들, 그리고 온 우주 속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실 수 있음을 선포하는 복된
소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용서의 복음, 부활의 복음, 새생명의 복음을 그 중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설교는 이러한 복음의 선포이다. 어떤 내용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언제나 설교는 이 복음과 만나야 하며, 이 복음의 소식이 그 골격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탄생되었으며, 초기의 설교자들은 예수의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그들의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리챠드 리셔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오늘의 설교자가 계속해서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기독교
설교의 원형은 케리그마였다고 말한 다드(C. H. Dodd)의 주장과 같이 현대 설교 역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생명의 소식이 그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초대교회에 “복된 소식”(good news)이었던 것처럼 설교는 복된 소식의 선포여야 하며,
절망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치유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설교에는 비복음적인 요소가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도 설교되어야 하지만 율법적이고, 강압적인 요소가 설교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청중들이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희열과 위로,
감격을 가지고 가기보다는 부담감과 반발심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문제가 많은 사역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복음적이며,
복음의 골격을 가져야 한다. 이교문화의 첨단을 걷고 있었던 로마를 변화시켰던 것은 복음이었고, 로마가 복음을 들었기에 그곳은 변화될 수 있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져야 하며, 변화하는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도 복음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지향하는 설교신학은
어떻게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설교자들이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4) “들려지는 설교”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설교신학의 관점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할
것이냐가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변화하는 시대는 진리를 보편화시키고, 해체적이며, 다양한 정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가장 관심 해야 할 것은 “어떻게 복음의 말씀을 전달할 것인가?” 즉 “어떻게 하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들려지는 설교일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와 설교의 방법론, 그리고 오늘의
청중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설교의 자리인 오늘의 상황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이것은 설교자가 계속해서 관심 해야 할
사항이다. 특별히 21세기는 거대한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시대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하는 시대가 될 것이며, 아무도 듣지 아니하려는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외로움을 설교자가 더 깊이 느껴야 할 시대가 될 것 것이다.
V. 나가는 말
21세기의 문턱에 서있는 설교자들은 급변하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두운 밤에 그발 강가에 서있었던
에스겔과 같이 이 시대를 향한 몸부림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vision)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설교의 상황은
향락주의와 물질주의, 다원주의와 해체주의, 거대한 정보의 숲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의 즐거움(entertainment)을 찾으려는 군상들의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이들 속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릴 것인가? 이것은 21세기 설교 신학의 고민이고 몸부림의 내용이다.
“전하기만 하면 저들이 변화될 수 있을 텐데, 이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기만 하면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게 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외쳐야 할 곳에는 목이 터지도록 외치게 하시고, 울어야 할 곳에서는 목놓아 통곡하게 하소서. 그러나
눈물의 강수를 이루게 하시되 눈물을 보이지 않게 하시고, 내 지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만 되어지는 역사임을 깨닫게 하셔서, 어두운
밤에도 더욱 무릎 꿇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이러한 설교자의 간절한 기대와 간구, 그리고 바른 설교자가 되어지는 일과, 들려지는 설교이기
위해 애쓰는 끊임없는 노력은 21세기도 말씀의 세기가 되게 하지 않겠는가?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면서 전후(戰後), 공허함과
허무주의가 팽배해져갈 때, 간절한 간구를 잊지 않았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의 기도문을 가슴에 새기면서 결론을 대신한다.
영광과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능을 덧입혀 주옵소서
옛날 교회들의 능력과 그
스토리들로 관을 씌우시고
나무들마다 영광스런 꽃봉오리들이 피어오르도록 하시고
이 시대를 극복해 갈 수 있도록
변화하는 이 세대를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