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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2013. 12. 15(주일낮예배) 요한계시록 7:15-17
수업시간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고 질문하였다. 그때 한 한생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또 다른 학생이 물이 남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 학생들은 이제 답이 다 나왔다는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방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 얼음이 녹으면 봄이 와요!
똑같은 사물을 보지만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 염세주의자는 얼음이 녹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을 하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남는다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서도 똑같은 반응으로 나타난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이 질문에 염세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 아무 것도 없어 하면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은 사람이 죽고 나면 무덤이 남고 또 그 사람의 유산이 남겠지 하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사람은 사람이 죽음 후에 천국이 온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목숨을 건 일본사랑 러브소나타라는 책이 있다. 하용조목사님은 30년동안 당뇨와 고혈압 그리고 7번의 간암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콩팥이 기능을 잃어버려서 일주일에 2-3번 투석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힘들어 할 때 목사님은 일본으로 요양을 떠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창 일할 나이에 간암과 신장투석 그리고 고혈압과 당뇨로 고통하는 목사님의 사역은 끝이 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하용조목사님은 달랐다. 목사님은 일본을 위해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목사님은 일본에서 요양하는 기간에 일본의 종교지도자들을 만났다. 심지어 투석을 하는 그 순간에도 일본교회 목사님들을 불러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한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여기에 요양을 위하여 왔으니 쉬어야 하다고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였지만, 목사님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간과 콩팥은 우리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기관들이 다 망가져 온 몸에 독소가 퍼져가는 고통가운데서 목사님이 정말 힘들어 하였던 것은 일본에 악한 영혼의 독소가 퍼져가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 독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쳤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서 시작된 사역이 바로 러브소나타이다. 하용조목사님은 4년동안 일본선교에 열심을 다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목사님이 죽은 후에 일본교회에서 하용조목사님에 대하여 이렇게 감사하고 있다.
일본 기독교 선교 150주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하용조목사님은 과거 일본선교 역사 속에서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선교방법을 기획하여 방황하고 피폐해 있던 일본교회에 용기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일본 전국 각지에 초교파적인 지역 교회 연대와 교회일치운동의 기운을 일깨워주기도 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주님을 믿는 일본인들은 지금 하목사님에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과 아울러 하목사님을 일본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일본기독교 선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바로 하용조목사님이었다는 것이다. 150년의 역사 속에 일본의 기독교는 1%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도 열매가 없는 나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포기하려는 그때에 하용조목사님은 일본선교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하용조목사님이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겠는가? 허무주의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나에게 라는 불평으로 목사님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졌다면 남은 인생 일본에서 편안하게 요양을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하용조목사님은 내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너머 만나야 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자신의 목숨을 불태우는 열정적인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는 내일을 바라보는 영혼이 있는가? 시편 25편은 다윗의 쓴 비탄시이다. 다윗은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는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입을 열고 있는 것이다.
(시 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주님, 하나님, 여호와이다. 주님(LORD)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통치주가 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엘로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나 야웨(여호와)는 다르다. 유다백성들은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다가 야웨를 기록할 때가 되면 그들은 야웨라가 아니라, 아도나이라고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다가 야웨라는 말을 입에 담았으면 그 순간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유다백성에게 있어서 야웨는 거룩과 경외의 이름이었다.
왜 야웨가 유다에게 거룩한 이름이 되었는가? 야웨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음으로 계시하여 준 이름이다. 출애굽기 3장은 미디안으로 도망한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장면이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고 하면서 야웨하나님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유대만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고난가운데서 제일 먼저 언약의 하나님이신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는 천하만물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다윗은 천하만물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내게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는 그 기대와 소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다윗의 이 모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옛날에 제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 중에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길을 가는데 그때 누군가가 제 뒤통수를 치면서 야 동인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범식인데 저를 잘못보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제가 고개를 돌리며 짜증어린 눈으로 그 사람을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 친구인줄 알고 실수했습니다. 하고 돌아섰다. 그래서 용서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돌아섰다가 다시 제 뒤통수를 치면서 그런데 정말 내 친구 많이 닮았네 니 동인이 아니가? 하고 또 때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니네~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또 내 뒤통수를 때려서 3번 반복되면 그냥 용서해 주겠는가? 아니면 멱살잡고 한판 싸우겠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제 성질에 멱살잡고 싸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면 제일 먼저 그 일을 바라본다. 내가 뒤통수를 맞으면 아픈 것을 생각하고, 또 나를 때린 그 사람을 보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상황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 고통의 순간에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천하만물을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시편 25편에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윗은 만물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 모든 신위에 뛰어나신 하나님, 나와 언약하시는 그 하나님을 다윗은 무의식중에서도 믿고 바라는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무슨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이란 내 마음대로 살다가 건강잃고, 돈잃고 그때서야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눈물흘리고 주 앞에 왔다가 다시 형편이 좋아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세상의 향락을 찾아나가는 그것이 아니다.
왜 이것이 믿음이 아닌가? 이 사람의 눈은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내 눈이 잃어버린 건강에 있고, 잃어버린 돈과 내 아픔에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나아와서 아무리 애절하게 눈물흘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의 삶이 아니다. 믿음의 삶은 어떤 형편에 있던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이다. 특히 요한계시록 6장-14장까지는 말세의 대환란이다. 일곱인의 심판, 일곱나팔의 심판, 일곱대접의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7장은 일곱인의 심판 사이에 삽입되어져 있는 성경이다. 요한계시록 6장에는 어린양이 인을 뗄 때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말을 탄자가 와서 이 땅의 심판하고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인을 떼실 때 대풍에 설익은 무화과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캄캄한 세상에 하늘의 별들이 다 떨어지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세상의 권세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이다. 이것이 6장의 내용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7번째 인을 떼는 내용은 8장에 기록하고 7장은 그러한 심판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장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두려워 떨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래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백성들이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지금 이 구원의 이 노래를 부르는 많은 사람들과 감히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두려워 벌벌 떠는 세상의 권세자들을 오버랩해서 한번 보기 바란다.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의 얼굴에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아오는 이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기쁨과 평화로 하나님을 노래할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계 7:16-17)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주리는 것, 목마른 것,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당한 핍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그러한 핍박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목자가 되어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풍성함이 있고,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함이 넘치는 것이다.
이것은 핍박당하는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요한계시록은 주후 95년 경에 기록이 된 성경이다. 당시 교회를 향한 로마의 핍박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 요한은 밧모섬으로 귀향을 갔고, 교회는 로마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여 배교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힘들어 하는 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계시록을 기록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핍박으로 고통하는 성도의 참된 위로와 소망은 마지막 그날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마지막 그날에만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마지막 그날을 바라보고 살지만, 위로와 소망은 오늘도 받으며 살 수 있다.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하나님 백성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선 자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이다. 또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를 놓치지 않고 살면 하나님은 그들 위에 장막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다.
아마 하나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실 분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가난하게 살고 또 핍박당하다가 죽을 때도 있는데 그때 하나님은 전혀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감옥에서 그는 외로움과 추위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죽음의 형틀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명과 쇠고랑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순간에 바울은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바울이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초대교회에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성도들은 굶주린 사자밥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렇게 순교하는 장면을 본 로마시민들은 충격에 빠져야 했다. 왜냐하면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가는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사자들을 포효에 눈물을 흘릴 때 그 아이를 꼭 안으면서 아가야 이 고통이 지나면 주님이 너를 안아주실꺼야! 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주님 오실 그날을 대망하며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비참한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지켰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빼앗기지 않는 참된 위로와 평화와 소망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초대교회 성도들의 그 얼굴이 로마를 정복하였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마지막 그날을 소망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결국 빼앗기지 않는 평화로 그들은 세상을 이겼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기록한다.
(요 1서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참된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지난 월요일에 개혁주의협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그때 열린교회 김남준목사님께서 강의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덕치중앙교회의 목사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열린교회가 임실에 있는 덕치중앙교회 12명의 청년들이 하기봉사를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하여 476가족 6개마을을 다 전도하고 그 결과를 목사님께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청년들은 전도하기 위하여 나가는 청년들에게 삽으로 흙을 뿌리고 욕설을 하는 그 어르신들에게 어깨를 주물러 드리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를 목사님께 전하여 준 것이다. 목사님이 그 책을 받고 3박 4일이면 다 도는 이 마을을 나는 6년이 되도록 다 돌지 못하였습니다고 자신의 게으름을 회개하였다. 그리고 그 책을 가지고 각 가정을 다시 돌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14명이 모이던 그 시골의 작은 교회가 1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교회에 올 수 없는 그 날에 목사님이 교회 나오기 힘든 할아버지 할머니 집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보니 눈 밭에 엎드려져 우는 할머니를 발견하였다. 할머니께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내가 늙어 예수님을 만나 교회가서 예수님을 몇 번이나 더 만나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니 고무신에 짚을 묶어서 언덕을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또 오르다고 미끄러져서 거기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 목사님은 없는 돈에 봉고차를 사서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3시에 일어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교회는 새벽기도에 4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 목회를 하던 목사님이 암에 걸려투병생활을 하다 결국 지난 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목사님은 임종을 앞두고 김남준목사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김남준 목사님 제 평생에 목사님과 열린교회를 만난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농어촌전도의 첫출발을 우리교회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때가 1997년 8월 15일이 낀 주간이었습니다. 12명의 청년 전도대원을 보내어 주셔서 교회 전도의 커다란 힘이 되어 95명 정도가 처음 교회에 나오고 그 후 1년 정도 전도를 하였는데 100명이 넘는 영혼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천사도 흠모할 그 일이 열린교회와 목사님의 기도와 협력을 통하여 저희 교회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 천국으로 먼저 갑니다. 목사님의 사역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주님이 기다리시는 저 하늘나라에서 그분을 뵙게 될 영광을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지금은 떨립니다. 목사님과 교회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은 이 편지를 읽어주면서 시골에서 작은 교회를 섬긴 이 종은 누가 작은 종이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주님 오실 그날을 바라보며 신실하게 섬긴 사람은 작은 종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고 살았고, 이제 소망하는 내 아버지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 바란다. 그래서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늘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