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소위 천재라 불리는 땅게라가 한국을 방문했었다. 워크샵과 공연을 포함한 파티를 벌였던 한국에서의 며칠간의 일정은 사랑스러운 그녀의 열정어린 에너지를 감상 할 수 있었던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춤은 근사한 장식 동작으로 가득 차며, 그 표현력과 몸의 라인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전 세계의 땅게라들은 그녀의 스타일을 훔치려고 애쓴다.
그녀를 천재라고 칭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외모나 화려한 춤 솜씨 뿐 아니라, 모든 땅게로들이 "꿈의 땅게라" 라고 부를 정도로 일체감과 충만감이 드는 팔로우(Follow)를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볍고 부드러운 아도르노¹는 모두 남자가 주는 리드(Lead) 에서 비롯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마치 땅게로의 리드를 확장시켜 주는 앰프와도 같이, 땅게로가 느끼는 춤의 느낌이나 감정을 그녀의 몸을 통해 화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자는 어떤 리드를 그녀에게 주어서 그녀로 하여금 화려한 아도르노¹를 하도록 하는 것일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천재댄서 제랄딘(Geraldine Rojas) 와 필자>
몇 년 전 처음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의일이다.
집주소만 달랑 들고 길을 찾아 나서기에 초행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너무 생소하고 낯설었다. 사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도시 구획정리는 꽤 잘 된 편이어서 나중에는 지도만 있으면 어느 주소든 쉽게 찾아갈 수 있었지만 그 당시의 필자로서는 두렵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다.
이리저리 길을 헤매다가 마침 사람들이 갓 구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가게를 발견하고 길을 물었다. 하지만 빵집 주인 아저씨가 일러주는 스페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더니 그 빵집 아저씨 급기야는 "나 이 아가씨 집 바래다 주고 올 테니 여기서들 기다리세요. (라고 말한 듯 했다)" 하고는 직접 길을 안내 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손님들을 세워놓고 가게를 비우고 길을 안내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더 기가 막혔던 건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던 모습이었다.
결국 그 아저씨는 여섯 블록쯤을 가서 다시 우회전 해 네 블록을 더 간 거리를 걸어서 바래다 주고는 손을 흔들고 30분정도 거리를 걸어서 되돌아갔다. 그저 유난히 친절한 사람을 만났구나 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한 도움에 두고두고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머물면서 느낀 점은 사람들이 각박하지 않고 무척 여유롭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마치 천국처럼 산다. 돈을 더 벌려고 기를 쓰지도 않고, 남보다 덜 가졌다고 불평하거나 시샘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가진것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오로지 즐거운 인생만을 위해 사는 가난한 그들을 보며 우리는 한심하다고 혀를 찼지만, 그들은 오히려 우리의 각박함을 측은하게 여기며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게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그들의 모습은 가난해 보이지만 넉넉하고 편안했다.
어쩌면 땅고의 리드의 개념은 이 여유로움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리드는 절대 여자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안내" 하는 느낌에 가깝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동하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여자에게 제시를 하고, 여자가 그 제안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여자가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순간 자신의 체중을 함께 움직여서 스텝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만약 여유 없이 무조건 "빨리빨리" 하고 리드했다가는 남자나 여자나 둘 다 피곤하여 지치고 말 것이다. 되도록이면 같은 비트에 같이 움직여야 춤을 추면서 일체감을 맛보며 호흡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 춤이 즐거워진다.
<마치 서로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거리의 인형>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모든 일들이 너무 서둘러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너무 바빠서 기다릴 여유가 없고, 핸드폰 문자나 인터넷 서비스 조차 바로바로 응답이 없으면 초조해지는 강박증세까지 생겨났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지만, 잠깐만 그 순간에서 벗어나 일상의 여유를 가지면 모든 사물이 다시 보이고 마음도 평안해 지며 남에게 베푸는 것도 즐거워지는 경험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동안 너무도 절실히 느꼈던 필자로서는 빨리빨리로 통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각박한 상황이 사실상 답답하기만 하다.
천재 댄서 제랄딘의 춤을 아름답게 만든 리드의 비밀은 바로 "공간의 여유" 였다. 이것은 신체적인 공간 뿐 아니라 시간적인 공간도 포함된다.
남자의 리드와 리드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여자가 그 여백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인데, 실제로 이런 공간을 많이 주면서 리드하는 땅게로와는 아도르노가 쉽게 된다.
천재 댄서 제랄딘의 경우는 그 여백을 찾아내는 능력이 여느 땅게라들에 비해 월등한데다가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그 공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춤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땅게로 역시 이 여백을 활용한다. 리드와 팔로우의 사이, 혹은 무게중심의 이동 사이에 아도르노를 넣는 것은 단지 땅게라만의 몫은 아니다.
잠시 바쁜 일상을 잊고 땅고를 추자.
파트너를 리드하고 잠깐 기다리자. 여자라면 파트너로부터 리드가 오기를 기다리자. 마치 기다리던 반가운 편지가 온 듯 매 순간이 신선하고 새로울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그 사이의 여백을 즐기자. 사실 우리는 여백의 미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즐겨 왔던 민족이 아니었던가.
이 여백은 그대로 놓아 두고 음미해도 좋을 것이고, 만약 음악이 제시하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무언가를 채워 넣는것도 완성도를 높이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여백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여유롭고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리드와 팔로우 사이에 빈 공간이 느껴질 때, 그 순간은 당신에게 주어진 무한 자유의 순간이다. 이 짧다면 짧지만 또한 길다면 충분하도록 긴 순간의 여유를 백분 활용하여 당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자.
이것이 땅고를 더욱 즐겁게 만드는 숨은 비결이다.
<2004년 대회 살롱부문에서 리드를 기다리고 있는 필자>
(주)
¹ 아도르노(Adorno) : 장식, 또는 장식하다는 뜻으로 춤을 추면서 사이사이의 여백에 채워 넣는 데코레이션 성 스텝을 말한다. 사실 이 장식동작은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이루어지게 되는데, 춤을 화려하게 만드는 동시에 즐겁게 만드는 역할도 담당한다. 영어의 Embellishment 와 같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