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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공격수’ 이기근① | |
한국프로축구연맹 | 08.05.02 |
1988년, 한국프로축구는 유난히 힘들었다. 88서울올림픽에 관심이 집중된 까닭이었다. 최순호, 이태호, 김주성 등 간판골잡이들을 프로축구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만큼 흥미도 반감됐다.
그러던 와중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경기가 있었다.
바로 7월 9일 수원에서 열린 포철과 유공의 경기. 당시 1, 2위 각축을 벌이던 상황이었고, 포철의 이기근과 유공의 신동철 간의 득점경쟁에도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선제골은 신동철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내 유공의 자책골이 터져 동점이 됐고, 다시 후반 29분 유공의 황보관이 추가골을 넣어 유공이 2:1로 앞서게 됐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추가시간만 남은 상황.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경기 내내 유공의 골문을 위협하던 이기근이 극적인 백헤딩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린 것이다. 이 골로 ‘골잡이 이기근’의 이름은 확실히 각인됐다.
어느덧 20여 년 흘러, 그는 해미중학교 축구부감독이라는 명함을 내밀고 있었다. ‘K리그의 전설’ 이기근.
그를 범계 자유공원에서 만나보았다. 이기근은 1988년 7월 당시 유공과의 경기가 “생생히 기억난다”며 웃었다.
“당시엔 뛰어난 골잡이들이 국가대표로 차출되는 바람에 프로축구의 인기가 떨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게 오히려 저에겐 기회가 됐죠. 신인 시절 6골을 넣었지만, 뛰어난 선배들의 그늘에 가렸던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은 달랐습니다.
당시 유공과의 경기에서는 아마 추가시간에 골을 성공시켰을 겁니다.
그때 저의 전담마크맨이 최윤겸 전 대전 감독이었어요. 골을 내주고 한동안 축구를 못 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하하.”
선수 시절 그는 유난히 종료 직전이나 추가시간에 득점을 많이 했다. 이런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랬었나요?”하고 반문했다.
재차 “특별한 비결이 있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정신력을 강조했다.
“사실 경기초반에 공격수가 골을 많이 넣기란 쉽지 않습니다. 프로에서는 실력 차이도 크지 않죠.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은 떨어집니다. 모두가 지치는 것이죠. 그 때부터는 정신력 싸움입니다. 한 발이라도 더 뛰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회는 오게 되어있습니다.”
이기근은 선한 눈매에 끼무잡잡한 피부였다. 인터뷰 내내 했던 “원래 성격이 강했다”는 말을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해미중학교 축구부 학생들에게 물을 챙겨주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학생들도 인터뷰 내내 연신 감독님을 쳐다보며 웃기도 했다. “학생들이 저를 안 무서워할 겁니다.” 실제로, 그와 학생들 사이에서 긴장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우신고 시절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 3/4위전 선제골, 한양대 시절 전국대회 우승 7회, 김도훈·윤상철과 함께 프로축구 득점왕 2회. 화려했다.
‘이 이상 화려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해봤다.
하지만 단 하나. 국가대표로서의 그의 이력은 눈에 띄지 않았다. 김도훈이나 윤상철은 물론 여타 득점왕에 비해 소위 ‘네임밸류’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사연이 많을 듯했다.
‘천재공격수’ 이기근. 그의 희로애락이 담긴 축구이야기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칠 것 없던 유소년시절
이기근은 스스로 “축구를 할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들을 낳는다면 무조건 축구를 시킬 것이라고 집안에 엄포를 놨다는 것. 그래서 그는 말 그대로 ‘그냥’ 축구를 했다.
어린 시절에 얽힌 일화 한 토막.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한양대운동장에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패스나 드리블 등 기본기 훈련을 착실히 받았죠.
그런 저를 한양대 축구부 형들이 신기하게 봤나 봐요. 아주 귀여워했었죠. ‘저렇게 어린 아이가 저런 훈련을 다 받고 있네’라는 식으로 말이죠.
우연인지, 한양대를 졸업했어요. 그때부터 운명이었나 봐요.”
이기근은 우신고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81년 가을. 그는 중고축구연맹전에서 중대부고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게 된다. 그는 “해트트릭을 했었다구요?”라고 외려 기자에게 질문했다.
너무 오래 세월이 지난 탓일까. 잠시 생각을 더듬던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흘렀다. 아마도 행복했던 추억이 떠올라서일 게다.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제가 프로에서는 한경기 2골을 기록한 적은 많았는데, 해트트릭을 한 적은 없었거든요.
그때 기분 좋았죠. 그 경기를 계기로 당시 박종환 감독님이 이끌던 청소년대표팀에 뽑히게 되었을 겁니다. 저로서는 너무 기뻤죠.”
자연스레 청소년대표 시절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한국축구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83년 멕시코 청소년대회 4강 신화’에는 이기근이 있었다.
그 전에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대회가 82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대회 본선 4개국 리그전이었다.
이 대회는 세계청소년대회 아시아 최종예선도 겸하던 터라 그 중요성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청소년대표팀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처음에는 후보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정말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전이 되기 위해서였죠. 정말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전으로 올라서게 되었고, 아시아청소년대회에서 매 경기 골을 기록하게 되었죠. 그 당시엔 드디어 주전이 되었다는 기쁨이 너무나 컸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막상 세계청소년대회가 되자 그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 5명 정도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영입되었고, 저는 후보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지금도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당시 정말 열심히 했는데, 어린 나이에 상실감이 꽤 컸나봅니다. 대회가 끝난 이후 한 달 동안 축구를 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폴란드와의 3/4위전에서 선취골을 넣고는 무척 기뻤지만, 나를 기용하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었죠. 더욱이 그 경기에서 역전패함으로써 4위로 밀려나게 되자, 그 상실감은 말도 못할 정도로 컸습니다.”
하지만 이기근은 실력을 인정받아 곧바로 83년 가을 국가대표 2진격인 88올림픽팀에 선발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만18세였다.
그리고 그해 9월 메르데카배 대회에서 홈팀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이기근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그는 한양대에 진학했다.
“한양대 시절은 정말 거칠 것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멤버도 아주 좋았고요. 프로팀과 친선경기를 해도 종종 이길 정도였으니 다른 대학팀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거죠.
경기장에 들어서면서 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4년 동안 국제대회를 포함해서 7번 우승했더군요.”
축구인생의 정점, 포항제철 시절
이기근은 이미 스타였다. 그를 잡기 위한 프로팀들의 노력은 가히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는 “포철의 이회택 감독님이 제가 다른 팀과 계약할까봐 제가 묵던 호텔 옆방에서 일주일간을 묵은 적도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기근이라는 선수는 프로팀감독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대어였다. 결국 그는 1순위로 포항제철에 입단하게 됐다.
“전 운동했을 때 욕심이 무척 많았습니다. 당시 프로입단을 앞두고도 마찬가지였죠.
신인 시절부터 주전으로 뛰고 싶었습니다. 당시 이회택 감독님이 저에게 주전 보장을 약속했었죠.
그리고 실제로 87년 첫해 최순호 선수를 미드필더로 내리고, 저를 스트라이커로 기용하시더라고요. 감사했죠.”
이기근은 프로 첫해 26경기에 출전해 6득점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후보로 밀려나게 됐다.
2군 경기에서 뛰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 2년차 접어들며 연봉삭감이라는 치욕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8년 그해는, 프로2년차 이기근을 위한 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시즌 초반부터 폭발적인 득점력을 과시했던 이기근은 그해 결국 12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게 된다. 특히, 골의 순도 면에서도 여타 공격수들을 압도했다.
12골 중 4번의 동점골과 3번의 결승골을 기록했던 것이다. “1988년은 저에겐 최고의 해였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죠. 팀도 우승을 기록했고요.”
당시 월간 축구는 득점왕 이기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난 해 한양대를 졸업하고 포철에 입단한 이기근은 대학시절부터 천부적인 득점감각으로 주목받았다.
170Cm, 60kg의 다부진 체격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플레이와 함께 특히 볼의 낙하지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기근은 이어 91년에 무려 16골을 기록하며 한차례 더 득점왕에 오르게 됐다. 그는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례가 없는 2회 득점왕을 차지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이에 자만하지 않고 내년 시즌에는 포철이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매우 기뻤지만 마냥 내색할 수만은 없었다. 포철이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그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채우고 싶어했다.
국가대표팀 발탁이 그것이었다.
K리그 명예기자 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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