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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예술가와 유명인사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돼
파리 여행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 잡아
죽음은 낯설고 두렵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싫은 무엇이지만, 평온함과 고요함이 깃든 일련의 무덤군(群)을 보게 된다면 글쎄... 생각이 달라지려나.
파리를 관광차 찾아가는 한국인들은 많지만 예술과 죽음이 묘한 조화를 이뤄 시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 곳을 빠뜨리는 우(愚)를 범하는 것 같다. 얼마전 'tvN'에서는 <꽃보다 할배>라는, '황혼의 배낭여행'을 컨셉으로 한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유럽 배낭여행'에서 할배들이 이곳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거라 여겨 좀 아쉽다. 그분들이야 말로 이곳을 방문, 뭔가 깊이가 다른 의미있는 감동의 멘트(?)를 날렸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에... (사실 난 뒤늦게 재밌단 소문 듣고 '대만 편'부터 봤다)
공동묘지라고 하면 밤에는 망자(亡者)들의 혼령이 돌아다며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낼 것 같지만, 파리의 그것은 차원이 다르다.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는 단순한 공동 묘지가 아닌 파리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 중 한 곳인 것. 이곳에는 쇼팽(Chopin),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로시니(Rossini), 프루스트(Proust)와 록가수 짐 모리슨(Jim Morrison)에 이르기까지...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다녀온 이들의 말에 따르면, 수백년 된 웅장한 나무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벤치와 포석이 깔린 산책로 등이 조성된 묘지에서는 고요하며, 평온한 순간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조성된 과정을 살펴보면...
루이 16세의 고해 신부였던 프랑수아 드 라쉐즈 신부(페르 라세즈)의 이름을 딴 공동묘지는 나폴레옹의 명을 받들어 1804년 5월 21일 파리 동쪽 로이 언덕에 동묘(東墓)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북쪽: 몽마르트 묘지, 남쪽: 몽파르나스 묘지와 더불어 파리의 3대 묘지).
건축가인 브로니아르가 전체 조경을 맡아 5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고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다향한 조형물을 건립해 로마 스타일의 네크로 폴리스(죽은 자의 도시)로 꾸몄다. 그리고 파리 5구, 7구, 8구의 교회 내에 있던 납골당이나 무덤의 유골들이 옮겨졌다.
도시 계획가였던 니콜라스 프로쇼는 당시만해도 도시 외관에 위치했던 묘지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1804년 파리시 당국을 설득해 극작가 몰리에르와 우화집으로 유명한 라퐁텐의 유해를 이장하면서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했다. 1806년에는 나폴레옹의 명으로 앙리 3세의 왕비였던 루이즈 드 로레인(1601년 사망)의 유해가 이장됐다. 1817년에도 '밀레니엄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유해 이장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후 지난 200년 동안 파리에서 활동하거나 생을 마감한 유명인들로서 모두 한곳에 묻혀 있다. 묘지의 모양도 살다 간 모습들의 개성을 알 수 있게 각양 각색으로 꾸며졌다.
이같은 마케팅 전략이 주효해 죽은 뒤 유명인들과 함께 묻히고 싶어하는 부자들의 무덤 구입 신청이 줄을 이었다. 이곳이 인기 매장지로 떠오르면서 이 땅의 원소유자였던 제임스 바론은 전체 땅값으로 받은 돈보다 더 비싼 값을 주고서야 무덤 한기(基)를 살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비망록을 보여주는 Le Cimetiere du Pere-Lachaise>
본명이 에디프 조반나 가시옹인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의 무덤. 가족묘인 듯하다.
프랑스의 대중적 국민가수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여성가수로 불리기도 한다.
15세 때부터 골목을 누비며 노래를 불렀고, 카바레의 가수로 생활하며 살인 사건에 말려들어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이윽고 주위의 격려를 받아 재기, 직접 작사한 〈장미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을 불러 히트시켰으며, 이브 몽탕을 비롯 많은 남성가수를 사랑하는 등 그 연애경력도 화려했으나 1952년부터 4년 동안은 가수인 자크 피르스와 결혼, 1962년에는 테오 사라포와 재혼했다.
그녀의 노래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의 반영이었고, 그녀의 특기인 심금을 울리는 발라드는 애끓는 목소리로 가창되면서 '참새(Sparrow of France)'란 애칭이 생겼다.
그녀가 남긴 주요곡으로는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 1946) "Hymne à l'amour"(사랑의 찬가 1949) "Milord" (신사 1959),"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오,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1960) 등이 있다. 그녀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가 2007년 6월에 개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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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쇼팽(Fryderyk Chopin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
비록 이곳 페르 라셰즈에 묻혀 있지만 쇼팽의 심장은 그의 유언에 따라 바르샤바 인근 교회 기둥 아래에 안치돼 있다.
쇼팽이 이곳을 싫어 한 이유는 그의 이름도 제대로 표기 못하는 파리인들의 몰상식함을 알았기 때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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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일즈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년 10월 16일~1900년 11월 30일)
아일랜드의 극작가, 시인, 단편 작가다. 대표작 : 산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동화집 <행복한 왕자>.
날카롭고 약삭빠른 재치로 유명하며, 런던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가장 성공한 극작가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알려진 유명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사람 키보다도 높은 곳까지 비석이 추모하는 여성들의 키스마크로 뒤덮여 있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여인을 이끄는 예술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 수많은 어록 중 남녀관계에 언급한 것들은 얄밉도록 사람의 심중을 까발기고 있다.
♤ 여자가 재혼할 때 그것은 첫남편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자가 재혼할 때는 첫아내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이다.
♤ 절대로 사랑이 없는 결혼보다도 더 나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랑은 있지만 한쪽 사람에게만 있는 결혼이다.
♤ 남자는 늘 여자의 첫째 애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허영심이다. 여자는 보다 더 빈틈없는 본능을 갖고 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남자의 마지막 애인이 되는 것이다.
♤ 남자란 일단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날엔 그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주지만,
단 한가지 해주지 않는 것은 언제까지든지 계속해서 사랑해 주는 일이다.
♤ 연애 감정이란 서로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 미모는 생각있는 남성이면 누구든지 빠지고 싶어하는 함정이다.
♤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에 빠졌을 때를 보면, 그들은 오직 조금만 그들의 인생을 바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그녀들의 모든 것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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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년 5월 20일 - 1850년 8월 18일)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쉰한 살이란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0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섯 편의 희곡, 수많은 콩트를 써낸 정력적인 작가이다.
소설 <고리오 할아버지> <골짜기에 핀 백합> <사촌 누이 베트> 등이 유명하다.
이십대 중반에 시도한 인쇄업의 실패로 많은 빚을 지게 된 발자크는 평생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은 ‘발자크의 집’이란 이름으로 박물관이 된, 당시 발자크가 기거했던 집 뒷문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오후 네시에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정부터 다음날 낮까지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소설을 썼던 발자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을 피해 하녀이자 정부였던 브뤼뇰 부인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포도주 박물관’으로 통하는 뒷골목으로 도망치곤 했던 것이다.
포도주 박물관의 한 켠을 이루고 있는 동굴에 등불을 든 발자크 상이 서 있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빚에 쫓기는 형편과는 별개로 스스로 ‘문학의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발자크는
글을 쓰기 위해 하루에 40잔 가까이 커피를 마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익명의 여성독자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된 한스카 부인을 향한 발자크의 한결같은 사랑은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뒤에도 8년이나 기다린 끝에 가까스로 결실을 맺는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를 넘어
발자크 문학세계의 세세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녀와 결혼한 지 불과 5개월 만인 1850년 8월 18일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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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 영화사에서 불멸의 두 사람은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여기 나란히 누워 있다.
(둘의 결혼생활은 햇수로 34년).
이브 몽탕(Yves Montand 1921년 10월 13일 ~ 1991년 11월 9일).
이탈리아 출신의 배우 겸 가수로 대부분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본명은 이보 리비(Ivo Livi)이다.
이브 몽땅이란 예명은 어린 시절 그의 모친이 계단 위에서 그를 부를 때 사용한 말로 “이브, 계단으로 올라와”란 뜻이다.
처음에는 마르세유의 항구에서 일하거나, 누이의 미용실에서 일을 했지만, 그 뒤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1944년 에디트 피아프를 만나 서로를 조언하거나 연인 사이로 발전해 간다.
1945년 영화로 데뷔하였고, 1946년 출연한《밤의 문》(Les portes de la nuit)에서 주제가〈고엽〉을 불러 인기를 얻는다.
1951년 여배우 시몬 시뇨레와 결혼한다. 이후 두 사람은 몇편의 작품에 함께 출연한다.
몽땅이 타 여배우와의 연문 스캔들이 몇번인가 있었고, 1960년 무렵 부인 시뇨레의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1985년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함께 생활했다.
그녀 사후 그녀의 보조였던 여성과 결혼해 1988년 자식을 갖는다. 1991년 11월 9일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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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그룹 도어스(The Doors)의 리드 싱어인 짐 모리슨(Jim Morrison)
그는 작곡자이자 또한 여러 시집을 썼고, 다큐멘터리나 단편 영화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 음악이 없으면 지각(perception)으로 향하는 (Doors)가 없다.
삶과 죽음에 관한 초현실주의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시적 감각의 철학이 그룹의 이름을 'THE DOORS'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 히피들의 천국이었던 미국 서부 해안의 한 시대가 만들어낸 천재 히피였던 그는 1971년 파리로 이사왔고,
넉달 후 욕조에서 숨을 거뒀다. 공식적인 원인은 심장마비였지만 헤로인 과다복용이란 것이 정설.
묘석인 흉상을 몇번이나 도난당했다는데, 열광적인 팬들의 소행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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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원래 안장돼 있던 유골은 도둑 맞고 빈 단지만이 납골당에 남아 있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훔쳐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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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묻히고 싶은 한 부부가 이름과 생일 등을 미리 묘비에 새겨 자신들이 묻힐 자리에 갖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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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를 통해 나폴레옹 3세의 사촌동생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22살에 죽음을 당한 빅토르 느와르(Victory noir 1848~1870).
저널리스트 공화주의자로 왕정에 반대했던 그는 1870년 1월 10일 두발의 총을 맞고 사망했으며,
이틀 뒤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참석해 왕정 반대시위를 벌였고, 결국 프랑스 제2제정은 무너지고 만다.
그가 총을 맞고 쓰러졌던 순간을 포착한 무덤 위의 청동상은
떨어진 모자, 망토와 자켓의 주름, 풀어젖혀진 셔쓰 사이로 박힌 총알까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성 참배객들이 몸을 문대어 반짝반짝 빛나는 빅토르 느와르의 코와 '중요 부분'.
안타깝게 요절한 걸 꼭 이런 식으로 애도해야 하는지...
누군가 한사람이 시작하면 너도 나도 따라 하는 게 여인네들의 무서운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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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포레(Felix Faure) 프랑스 대통령.
페르 라셰즈에 묻히는 프랑스 대통령은 아주 드물지만 여기 한 사람 예외가 있다.
여기에 누워 있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죽음은 대체 어떠했길래..하는 깊은 관심을 일으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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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비운의 사랑의 주인공...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사후에는 나란히 누워 있다.
아벨라르(Abelard)는 12세기 중세 프랑스 신학자이자 철학가, 카톨릭 수사였고 노틀담 성당 부속 신학교 교장, 참사회원이었다.
그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만큼이나 유명한 중세의 커플이었다.
아벨라르는 당시 나이 39세.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22세 연하 여제자 엘로이즈(Eloise)를 가정교사로서 만나며 독신이어야 하는 참사회의 규율도 버리고 1년 반 정도 숙명적인 사랑 후에 아들을 하나 낳게 되니,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의 삼촌(아벨라르와 같은 노틀담 참사회원인)에 의해 거세당하고 수도원을 떠나 칩거한다.
엘로이즈는 후에 수녀(원장)가 되지만 그들은 평생에 걸쳐 서로 사랑했다. 후에 아벨라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에로이즈는 그의 유해를 자신의 수도원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해 안치했고, 20년 후 자신도 그곳에 함께 묻혔다.
1804년 페르 라세즈 묘지가 개장되면서 이장돼 합장묘로 남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세월과 더불어 더욱 애틋하게 증폭되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남긴 편지들과, 아벨라르가 직접 쓴 자전적 문학 작품 『나의 불행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면서 읽는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 뉴욕 타임즈는 자신의 삶을 파멸시킨 열정을 선택한 뒤 주저와 후회 없이 그 길을 걸어간 엘로이즈를 12세기에 21세기의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며 '나의 밀레니엄의 전형' 4인중 한사람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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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희극작가·배우 몰리에르(Moliere 1622년 1월 15일 - 1673년 2월 17일)).
본명은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으로,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는 법률을 배워 법학사의 자격을 받았지만, 연극계에 투신한다. 그의 초기 연극 활동은 지방에서 이뤄졌다. 공연 실패에 따른 빚으로 투옥당하는 등 이 고난시대에 그는 배우 및 작가로서 비극보다는 희극에서 그 특성을 발휘했다. 1658년에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의 앞에서 <사랑에 들린 의사>를 상연함으로써 데뷔,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의 도덕이나 교육의 위선을 풍자, 성공과 동시에 교회 등 기득권층의 엄청난 반대도 불러일으켰다. 생애 마지막 순간은 비참했다.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몇 시간 뒤에는 집에서 조병성사 없이 사망했는데, 평소 자신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극화해온 몰리에르를 못마땅했던 두 명의 가톨릭 성직자는 그를 방문하는 것을 거절했고, 세번째 성직자는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또 당시의 법례로는 연극 배우를 신성한 성지에 '일반적인 의식'으로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몰리에르의 아내는 루이 14세에게 정상적인 장례식을 밤에 치를 수 있도록 간청했을 정도. 사후 120년이나 지난 1792년에서야 몰리에르의 유해는 프랑스 기념 박물관에 옮겨졌고, 1817년 페르라셰즈 묘지로 이장됐다.
몰리에르가 죽은 뒤 그 극단은 다른 극단과 합병돼 1680년 국왕의 명에 의해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가 됐는데, 오늘날 프랑스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가 '몰리에르의 집'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몰리에르는 죽은 후 프랑스 연극사상 최대의 희극작가로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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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 묘 곁에 있는 우화작가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의 묘.
프랑스의 시인이자 동화 작가이다. 1621년 - 1695년.
고대 인도 문학, 이솝, 호레이스 등에서 영감을 받아서 1668년에서 1695년까지 발표한 시문으로 된 우화집으로 유명하다.
라 퐁텐의 우화는 이솝 우화에 비해 내용 면에서 인간 세태에 대한 풍자의 강도가 세다.
루이 14세의 여섯살 난 손자에게 헌정된 최초의 우화집인 《우화 선집》(Fables Choisies)에는 124개의 우화가 실려 있는데,
동물에 비교하여 사람의 참다운 모습을 생각케 해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시골 쥐와 도시 쥐,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듣등. 한국어로는 《라 퐁텐 우화집》 또는 《라 퐁텐 그림우화》와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그의 소설로는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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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초현실주의 선구자, 기욤 아뽈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묘비가 꼭 그의 시 "넥타이"를 닮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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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모더니즘 작가로서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있다.
총 일곱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작품. 1913년부터 1927년에 걸쳐 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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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담아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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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잔느(Jeanne Herbuterne)와 함께 묻힌 모딜리아니(Modigliani)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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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 - 1903년)는 모네와 함께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초기 농원(農園)의 연작(連作)은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인상파전(印象派展)의 중심인물이 되어 그의 생애는 인상파적인 그림 제작으로 일관했다.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 따스한 감정이 충만하다.
인상파의 이론을 실천하여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음으로써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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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의 회화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
그가 편안히 기대누워 있는 밑 기단의 그림은 '메튜사의 뗏목'(루브르 박물관).
프랑스의 프리케이트함이 1816년에 이민자들을 옮기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선장의 무경험으로 난파했다.
150명의 여행객들 대부분이 사망하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뗏목에 모여 광대한 바다를 표류했다.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인간적인 비애, 격분함의 에피소드이다.
뗏목 위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떠는 군상들이 빛과 어둠의 고요한 대비로 잘 서술돼 있다.
처절한 극한의 분위기를 그려놓은 것인데, 정작 화가 자신은 그 위에서 아주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프랑스의 근대 화가 앵그르가 그린 '그랑 오달리스크(La Grande Odalisque)'는
등을 돌린 채 뇌쇄적인 자세로 뒤돌아 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오달리스크 그림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아름답다.
오달리스크 그림은 18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으로
동방 취미를 가미한 회화의 한 형태로 다루어졌으며, 근대 나체화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들라크루아, 르누아르의 오달리스와 비교 감상하는 것도 흥미롭다.
앵그르(Ingres) - 그랑드 오달리스크_1814
앵그르 - 오달리스크와 여종(Odalisque a l'esclave)
들라크루아 - 오달리스크
르누아르 - 오달리스크_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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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 ~1825)
신고전주의 대표작가로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남긴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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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폴리옹(Champollion, Jean Francois 1790~1832).
프랑스의 이집트학자로서 1822년 로제타석에 새겨져 있는 이집트 상형 문자를 처음으로 해독했다.
그래서일까,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무덤 앞에 세워 뒀다.
프랑스의 예술가, 고고학자로서 박물관 관리를 책임졌던 드농(Denon, Dominique Vivant Baron).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의 확대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드농관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1772~87년 러시아·나폴리·스위스로 가서 외교 업무를 수행하던 중,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파리로 돌아와 친구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보호를 받았다.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수행원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여하여 적군의 포화 속에서 많은 고대 유적을 스케치했다.
이 스케치들을 모아 〈이집트 남부와 북부 여행기〉(1802)를 발간했다.
1804년 나폴레옹에 의해 박물관 관장에 임명받아 1815년까지 재직했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스페인·폴란드를 원정할 때 박물관장 자격으로 따라가,
정복한 여러 나라에서 어떤 예술품을 약탈해 올 것인가를 조언했다. 이 예술품 대부분은 루브르에 소장됐다.
이런 그의 행적에서 보듯, 프랑스 군대가 구한말 우리나라 규장각을 턴 것도 문화재 약탈에 프랑스가 얼마나 혈안이었는지 가히 짐작된다.(나쁜 X들~)
고엽 (故葉)
Yves Montand_Les Feuilles Mor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