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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불교사>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11)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글 | 김형근 (본지 편집인)
스즈키 다이세츠는 미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에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는 20여년 전에 실린 정희수 박사의 글을 다시 소개한다.
소엔사쿠
노겐 센자키
미국불교사는 1840년대에 보스톤 지역과 1850년대에 서부 켈리포니아 지역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불교인들로 인해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그후의 1950년대 비트문학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불교사 전개는 일본 스님들의 활동이 대부분이다. 중국이민자들의 불교신앙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미국 불교와 관계있는 일본 스님들중 맨 앞에 나오는 사람은 소엔사쿠이다. 소엔 사쿠를 필두로 이와 관련있는 사람들이 19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까지 약 50년 동안 미국불교사에 등장한 중요 인물들이다.
코센: 소엔 사쿠의 스승이다. 그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종교 교육을 관장하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동시에 카마쿠라에 있는 엔가쿠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료마 코카이’라는 재가불자회를 조직하였다.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나중에 미국에서 소케츠에 의해 지속되었다.
소엔사쿠: 1871년 12세에 스님으로 계를 받았다. 그는 천태종, 그리고 모든 계열의 선사들의 대부인 기산과 함께 공부했다. 1884년 25세에 법통을 전수받았다. 코센의 권유로 1884년부터 1886년까지 케이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893년 일본 불교계의 대표중의 한 사람으로 임제종 대표로 시카고 종교회의에 참가하여 ‘인과법’에 대한 아주 소박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대학생 다이세츠 스즈키가 영역한 것을 미국인 베로우스 목사가 읽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폴 카루스를 만났고 그에게 그의 제자 다이세츠 스즈끼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1905년 6월 소엔사쿠 알렉산더 러셀 부부의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 방문하였다. 그는 러셀의 집에서 그의 제자인 노겐 센자키와 만났다. 그의 법문을 DZ스즈키가 통역을 했다. 그이 법문은 ‘사십이장경’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불교회관, 일본 영사관 그리고 샌크라멘토, 산호세, 오클랜드 지역에서 일본인 이민자를 위해 설법을 했다. 그리고 9월에 DZ 스즈키와 함께 로스 엔젤레스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900명의 일본인과 100명의 미국인들이 모였다.
그는 1906년 3월에 스즈키와 함께 미국의 횡단여행을 떠났다. 그는 일리노이에서 카루스를 만났고, 뉴욕을 방문하였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았다. 그는 이 여행중에 미국인을 대상으로 행한 법문을 통해 처음으로 미국 대중은 대승 불교가 지닌 종합적인 견해에 접하게 되었다. 소엔은 불교가 소극적이고 삶을 부인하는 종교라는, 널리 알려진 편견을 교정해야 했다 그는 카루스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과학적 검증에 자신있게 대응할 수 있는” 불교의 이성적이고 지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미국에서의 9개월간의 체류를 끝내고 소엔은 유럽과 인도와 스리랑카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미국사 (1918년 ~ 1945년)
각국의 무기를 제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1921년부터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결실을 맺었다. 1924년 이민법은 1880년대부터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온 남부와 동부 유럽, 특히 유대인, 이탈리아인과 슬라브를 제한할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929년의 증시 대폭락과 그 후의 세계 공황으로 인해 연방 정부는 경제의 회복과 피해자 구제에 나섰다. 그러나 회복 속도는 매우 느렸다. 대공황의 바닥은 1933년이었고, 회복은 급속도로 이루어졌지만, 1938년 불황으로 좌절되었다. 1920년대에는 자동차, 전기와 건설업계가 강력한 경제 성장을 촉진하였으나, 1930년대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큰 산업 분야는 나오지 않았다. 국내 총생산(GDP)은 1940년에야 가서야 겨우 1929년 수준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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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그는 입적을 하였다.
뇨겐 센자키: 일본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니면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 시베리아에서 태어나 .고아가 되었다. 지나가던 화엄종 일본인 스님이 얼어죽은 그의 어머니 시신 곁에서 누워있는 아기를 발견하였다. 그는 5세에 중국 고전과 불교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18세에 한문으로 된 경전들을 통독하였다. 그는 소엔사카오아 우호적인 편지 왕래를 하다가 1896년 소엔 사쿠와 엔가쿠지에서 만났다. 그는 여기에서 5년간 머물렀다. 한때는 평신도인 DT 스즈키와 같은 방을 사용했다. 그는 육아원을 설립하기 위해 엔카쿠지를 떠났다. 그는 멘토카토를 설립하고 아이들에게 종교적 교훈이나 의례 대신 자연에 대해 배우도록 했다. 소엔 사쿠는 이런 센자키를 이해하였다. 그는 멘토가튼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 그는 일본에서 불교가 조직화되어 버린 점과 1905년 러일전쟁 중에 일본을 휩쓴 군부 군국주의에 대단히 실망했다. 그는 미국에 온 후 러셀 가에서 심부름꾼 생활을 했다. 그는 접시를 닦고 빨래하고, 집안 청소를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가정부에 의해 쫏겨났다.
소엔사쿠와 마지막 이별을 하였다. 소엔사쿠는 그에게 17년 동안 불교의 ‘ㅂ’자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는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고, 오클랜드에서 일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했다.
1910년 센자키는 호텔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짐꾼으로 시작해서 서기가 되고 경영자가 되었다.
1916년 그는 동업자의 도움으로 호텔을 하나 사게되었지만 적자가 나자 호텔을 포기하고 요리사가 되었다. 그는 일본어 강습을 계속하고 일본어 신문들에 선에 대한 기고했다.
1922년 그가 미국에 온지 22년이 지나자 불교의 ‘ㅂ’자를 입 밖에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일을 해서 모은 돈 20달러로 강연장을 빌렸다. 이때부터 그는 돈이 모이기만 하면 강연장을 빌렸다. 그는 이렇게 이곳저곳에서 만나는 불교모임을 ‘떠다니는 선방( the floating zendo)'이라 불렀다.
1931년 그는 ‘떠다니는 선방’을 로스 엔젤레스로 옮겼다. 그는 불교를 가르치기 위한 준비와 공부를 하며 세상에 파묻혀 지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불교의 승려는 금욕생활을 하며 가능한 단순히 살지.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욕심내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면 감사할 뿐이야. 승려는 쓰던 옷과 신을 받아 입고 신으며, 남는 음식과 돈은 나누어줘. 그는 무소유로 걱정 없이 조용히 잠자리에 든다네.”
로스엔젤레스 선방에는 이름이 붙었다. ‘멘토가튼 명상홀(Mentogarten Meditation Hall)' 소케이안과 마찬가지로 센자키도 자기 제자들에게 가부좌 명상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명상하고 센자키의 짧은 법문을 듣고 사홍서원을 암송했다. 불상 대신에 문수보살 그림이 있었다. 그 앞에서 센자키는 하루 세 번씩 독경을 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꼭 문수보살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진정한 대승불교인은 자신의 진정한 내면의 진여 이외에는 어떤 대상도 숭배하지 않는 법이다. 경전을 암송하는 행위는 우리의 지혜와 완전한 이해의 표현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멘토가튼은 공식적인 일본 선종 계열과는 관련이 없었는데 이는 센자키가 일본 선종 계열에 크게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요즘 일본불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얀마, 중국, 스리랑카, 미국 등 어디에서든지 불교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지위가 주지이든 총무원장이든 종정이든 간에 승려의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승려로 여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안다. 진정한 불자에게 이런 직함은 단지 사업가들이 쓰는 단순한 업무상의 직위에 다름 아니다.”
1934년 그는 자기의 후원자인 타나하시 부인의 소개로 나카가와 소엔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소엔과 서신 왕래를 하기 시작했다.
소케이안 사사키
소카츠 사쿠
소카츠 사쿠: 그는 코센과 소엔 사쿠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소카츠는 10년간 엔가쿠지에서 힘든 수련을 거쳤다. 그는 출가를 하고 싶지만 절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소엔에게 말했다. 그는 미얀만와 스리랑카를 여행하고 인도로 가서 2년간 맨발의 탁발승으로 살았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오자 소엔은 그에게 도쿄로 가서 스승이 만든 재가불교모임인 ‘료모코카이’를 복원하라고 임무를 주었다. 그는 3년간 도쿄 사람들을 연구한 뒤 엔가쿠지의 도반 4 사람의 도움으로 동경 외곽에 농가를 개조한 작은 절을 세웠다. 곧 학생과 예술가와 지식인층이 주가 된 10-15명의 평신도가 그의 문하로 몰려들었다. 이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이 중에 훗날 소케이안으로 알려지는 시게츠 사사키라는 화가가 있었다.
1906년 소카츠 일행은 6명이 미국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그리고 농장을 사서 농사를 짓고 비오는 날에는 명상을 했다. 최초의 료모쿄카이의 미국지부가 생겨났고 50여명의 일본 학생들이 모였고, 몇 명의 미국인도 끼여 있었다.
2년 후 소엔 사쿠는 일본으로 소카츠를 불러 들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소카츠는 1년 반을 있다가 영원히 미국으로 떠났다.
소케이안: 소케이안은 미국에 가기 전에 소카츠의 권유로 토모코 사사키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였다. 그의 스승 소카츠와 일행이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와 부인 토모코는 남았다. 그는 중국 조각품을 수입하는 가게에서 불상을 수리하는 일을 했다. 그는 오레곤, 시애틀, 등에서 살았다. 두 명의 아이가 있는 그들은 1914년 토모코가 다시 임신을 하자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소케이안은 몇 년 후인 1916년 34살에 뉴욕시에 갔다. 그는 거기에서 예술품을 복원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또 이백의 시를 번역하여 ‘ The Little Review'라는 잡지에 실렸다. 그는 일본의 주요 신문 중 하나인 ’주오코론‘지를 위해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수필 모음집인 ’미국야화(American Night- Talks)'와 시집인 ‘쿄슈(Kyoshu)'가 일본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스승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19년 그는 일본으로 갔다. 그는 소카츠와 함께 공부하고, 토모코 및 세 자녀와 재상봉 하였다. 그는 몇 해 동안 미국을 왔다 갔다 하였다. 그는 뉴욕과 시애틀에서 예술품 복원가나 조각가로 일했다. 그러다 그는 조각 연장을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 버리고 선 수행을 완성하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소카츠와 함께 정진을 했고 48세에 선 수행을 완성하였고, 1928년 소카츠는 소케이안에게 가르칠 권한을 주었다. 소카츠는 소케이안에게 “너의 소명은 미국 땅에서 가르치는 것이니, 그곳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소케츠는 소케이안을 선승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소카츠는 평생을 코센이 시작한 평신도를 위한 선교육 기관인 료모코카이를 위해 바쳤다. 그의 후계자도 평신도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소케이안 생각은 달랐다. 그는 미국인들이 평신도를 선의 지도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므로 스님이 되어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평신도는 수련은 할 수 있지만 대를 이어 가르침을 전하는 법맥을 이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카츠는 그에게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소케이안은 할 수 없이 료센의 법맥을 잇는 스님인 아웨노 푸테츠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이로서 소카츠와는 절교되었다.
1931년 5월 소케이안은 다른 세 사람과 더불어 ‘미국 불교도협회(Buddhist Society of America)'라는 법인을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8명이 시작하였다. 1938년에는 30명이 되었다. 그는 미국의 불교 포교에 대해 “연꽃을 바위에 심어 거기에 뿌리를 내리기”를 기다리는 일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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