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중 선생님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쓴 제 글이 <당신은 가고 나는 여기>라는 33명이 함께 쓴 죽음과 애도에 관한 책에 함께 실리게 되었습니다. 윤운중 선생님을 많이 그리워하시고 보고 싶어하시는 느림보 회원분들과 부족한 글이지만 함께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예술이 삶이 된 그의 마지막
설 연휴 마지막 날, 친정에서 여유로운 아침을 맞으며 단체 대화방의 메시지를 뒤늦게 확인했다. 새벽 4시 30분경에 온 문자를 보고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윤 샘께서 조금 전 운명하셨습니다.’
그의 투병 소식을 알게 된 건 불과 한 달 전 방송을 통해서였다. KBS ‘강연 100℃’ 방송에 나온 미술 해설가 윤운중 선생의 모습은 이전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요즘 강연과 공연으로 많이 바쁘신가보다 했는데 암 투병 중임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는 나는 왠지 가슴 아팠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윤운중 선생은 48세의 젊은 나이로 그가 사랑하고, 그의 전부였던 예술의 꽃을 못다 피운 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루천남, 유럽 도슨트계의 전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콘서트마스터.’
이 모든 수식어는 바로 루브르를 천 번이나 가 본 미술 해설가 윤운중을 부르는 말이다. 그는 한국인 최초 유럽 5대 미술관 해설 경험이 있으며, 10여 년간 현장에서 미술 해설을 했다. 그가 만난 관광객만도 4만 명이 넘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국내 최초로 음악과 미술을 접목한 아르츠 콘서트를 진행하는 콘서트마스터로 활동하며 유럽 미술관 해설 경험을 담은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를 출간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고흐와 고갱이 형제인 줄 알았을 정도로 미술에 문외한이었다. 공고를 졸업하고 대기업 연구소에서 12년간 연구원으로 일했는데 외환위기 이후 운 좋게 회사에서 살아남았지만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1만 시간, 남들 하는 거 하면 전문가는 되죠. 그런데 그 전문가는 나 말고도 많잖아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등한시하고 안 하고 신경 안 쓰는 부분이 무엇일까 늘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럽의 모든 미술관을 모두 해설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자고 생각하며 유럽의 10대 미술관을 돌며 공부했어요. 제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것은 생각하면 바로 한다는 것. 실행을 한다는 겁니다.
”2014년 2월 SBS 스페셜 작심 1만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이다. 윤운중 선생이야 말로 몸소 1만 시간의 노력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블루오션을 개척해서 10년 동안 꾸준히 노력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2003년 37세에 미술관 투어 가이드를 시작해 10년 동안 현장을 뛰면서 공부하여 인정받는 미술 해설가가 되어 인간 승리의 모습을 직접 보여 주었다.
그의 인생사를 보면 나와도 닮은 점이 있는 듯하다. 올해는 내가 대기업 연구소에서 일한지 12년째이다. 하루하루가 힘든 건 아니지만 정말 이 길이 내 길인가 하는 회의감을 느끼며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만 두겠다는 생각은 수백 번도 더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과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나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용기와 결단이 부러웠고 나도 언젠가 그처럼 회사를 박차고 나와서 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나의 롤 모델인 셈이다. 그를 보며 단순하게 일이 재미없으니 그만 두겠다는 생각 대신에 나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그 일에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생각하면 바로 실행하라는 그의 말과 경험은 내 인생의 고비마다 내게 큰 자극과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윤운중 선생과 인연을 맺은 건 1년 반쯤 전 ‘느림보 학교’라는 교육 카페를 통해서였다. 그곳에서 자문위원과 운영위원으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미술은 내 삶과 동떨어진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유럽 미술관 강의를 들은 첫 날, 나의 몸과 정신은 설렘과 흥분으로 전율했다. 마치 신세계를 경험한 것과 같았다. 나의 미술에 대한 소양과 경험은 그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나는 미술이란 소위 교양 있는 사람들만 즐기고 향유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미술 해설을 들은 후에 나는 미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 그림을 보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갔다. 또한 그가 진행하는 아르츠 콘서트를 관람하며 음악과 미술이 인간에게 어떤 위로와 감동을 전해 주는지, 그 위로와 감동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느끼게 되었다. 또 예술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길 마음의 준비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윤운중 선생은 내게 미술에 눈뜨게 해 준 사람이었다.
지인들은 서둘러 조문을 갔지만 연휴 기간에 지방에 있는데다가 다음 날 밤기차를 예매해 두어 표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저 휴대전화로 장례식장의 모습과 영정 사진, 다녀간 사람들의 소식들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의 발인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납골 공원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딱 한 번 사석에서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은 강렬한 이끌림에 일요일 새벽 납골 공원으로 향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영구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지막 이별을 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숙연한 분위기 속에 오열하는 가족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죽음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안타깝지 않은 것이 없는 듯했다. 나는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곧 선생을 모신 영구차가 들어왔다. 그의 영정 사진과 납골함을 보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웃고 있는 영정 사진 뒤로 긴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매년 명절을 혼자서 쓸쓸하게 보냈다고 하는 선생의 마지막 명절만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의 죽음 이후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자꾸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납골 공원까지 가서 그를 배웅했던 것도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16년 전 윤운중 선생과 비슷한 나이였던 엄마는 그와 마찬가지로 암 선고를 받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암 선고를 받고 무표정한 얼굴로 굳게 입을 다문 채 마치 삶을 체념한 듯 보였다. 하지만 선생은 정반대였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준비한 것이다. 병원 세 곳에서 암 말기라는 똑같은 진단을 받고 선생은 그저 “네”라고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지인에게 자신의 영정 사진은 꼭 포토샵 작업을 해서 멋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투병 생활 동안 찍은 사진에서도 웃고 있는 사진이 많았다. 그는 방송에서 자신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동안 예술을 통해서 죽음에 대해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죽음을 많이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해 한 치의 두려움도 없는 그 모습 앞에 내 눈물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윤운중 선생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지난 12월 23일 생애 마지막 아르츠 콘서트를 진행하며 마지막으로 박수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좀 더 일찍 그의 소식을 알았더라면 마지막 콘서트에서 온힘을 다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을 것이다. 나에게 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해주어서, 예술이라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알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을 텐데 납골당에 모셔진 그의 주검 앞에 뒤늦게 그 말을 전했다.
‘강연 100℃’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지뢰밭이다. 하지만 인생의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삶이다. 1년 지나도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다면 중요한 응원군은 예술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지만 마음 한 곳이 허전하다. 삶의 허전함과 외로움을 해소해 주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예술이 치유해준다. 나는 오랜 시간 그런 경험을 했고, 그것이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예술을 가까이하면 여러분의 삶에 오아시스가 될 수 있다. 예술을 보는 시각이 부드러워졌으면 좋겠다.”
윤운중 선생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남다른 열정으로 예술을 자신의 삶 속에서 꽃피웠고, 예술이 어떻게 삶에 반영되는지, 예술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예술은 지루하고 난해하다는 편견을 깬 사람이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상투적인 말은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내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는 지금 없지만 수많은 강연과 공연에서 알려 준 예술이 주는 위로와 감동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삶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내게 미술적 소양과 예술을 대하는 부드러운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를 만났기 때문이고, 내 아이들에게 그런 소양과 태도가 조금이라도 전해졌다면 그 또한 그 덕분이다.
훗날 윤운중 선생의 유럽 미술관 순례기 책을 옆에 끼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박물관을 누비며 내 아이들에게 그림들을 설명해 줄 날을 상상해 본다. 엄마는 어쩜 그렇게 아는 게 많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이 모든 것이 윤운중 선생 덕분이라며 그분을 멋지게 소개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그분을 애도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첫댓글 윤운중샘은 짧지만 참 굵은 삶을 살다 가신것같아요. 이렇듯 하니님 가슴에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의 마음속에 긴 여운을 남기셨잖아요. 아마도 좋은 곳에서 못다한 열정을 꽃피우고 계시리라 믿어요. 요즈음 너무 팍팍해서인지 윤샘의 아르츠콘서트가 더욱 그립네요.
하니님, 부럽습니다. 저는 아직도 윤샘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아직도 그의 죽음을 마주하는게 두렵기만 합니다. 윤샘이 우리를 떠난 후 윤샘의 지인조차 만나기 싫은 요즈음입니다. 교수에게는 공부라는게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요.ㅠㅜ
윤샘 덕분에 지금도 미술작품 보는 즐거움이 이렇게 큰데... 너무나도 아프네요...
감사드리고 고맙습니다~^^
다시 읽어도 눈물이 나네요ㅠ
이런사람 다시 없을!
그런 귀한분을 잠시나마 알았다는것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책으로 맘을 남긴 하니님 부럽네요~^^
정말 하루하루 생각나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유럽에 다녀온 친구가 미술작품 설명 들었으면 좋겠다 해서 정말 좋은 분 있어! 멋지게 강의 소개하려 했더니... 샘의 명복을 자주 빕니다. 요즘 명리를 공부하는데 좋은 날 가신 걸로... 부디 편안하시길 항상 기도하고 기억합니다
가슴이 먹먹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분의 흔적을 찾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