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나아갈 수행의 길
불교경전에는 수많은 보살님들이 등장한다. 그중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님들을 일러 4대보살이라고 칭한다. 그에 미륵보살 대세지보살 금강장보살 대해중보살을 더하여 우리는 8대 보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경전에 따라서는 다른 보살님들을 더하기도하고 감(減)하기도해서 8대보살 혹은 10대보살이라고 칭하고 부르기도 한다. 헌데 이들 보살님들은 재가(在家)보살일까? 출가(出家)보살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재가일까? 출가일까? 경전에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 아마도 짐작하건데 재가일 가능성이 많다. 신라의 고승(高僧)원측스님은 출가의 기준을 심(心)출가와 형(形)출가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심(心)출가는 마음으로 출가한 진정한 출가를 뜻한다. 또 비록 재가에 머물고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수행을 닦는 재가 불자를 뜻한다. 형(形)출가는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집을 떠난 출가의 형식을 제대로 따르는 출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출가는 심(心)과 형(形)을 온전히 다 갖춘 구족(具足)출가를 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출가는 모두를 두루 갖춘 구족출가이다. 그럼 우리 한국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는 어떤 출가일까? 한국불교는 형식에 매달리는 형(形)출가이다. 어느 누구라도 좋다. 머리 깎고 먹물 옷만 걸치면 모두가 출가스님이다. 그기에 금상첨화(錦上添花)로 돈마저 가졌으면 큰스님이다. 마하 큰스님이다. 원래 머리는 출가하면 은사스님들이 계(戒)를 내리면서 깎아주는 것인데 요즘은 자기가 스스로 이발소에 찾아가 머리를 깎고 스님행세를 어처구니없는 출가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나 웅봉법사는 이런 사람을 일러 “이발 중(스님)”이라고 명명했다. 이래도 스님이라고 어리석은 보살님들이 줄줄 따르고 떼를 지어 줄을 선다. 왜? 왜일까? 보살님들은 스님들만 보면 존경하고 따르고 매달릴까? 왜? 보살님들은 머리 깎은 스님들만 보면 사족(四足)을 못 쓰고 방황할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스님들은 까다로운 계율(戒律)을 따르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럼 재가의 보살님들은 계율을 안 따르고 안 지켜도 될까? 아니다 계(戒)와 율(律)은 다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율법(律法)은 계와 율로 나누어진다. 계(戒)는 스스로 받고 스스로 지켜가는 것이다. 계는 자신과의 약속임으로 안 지키고 안 따라도 특별한 처벌이나 특별한 불이익이 안 따른다. 그러나 율(律)은 안 지키고 안 따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헌법(憲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을 안 지키고 안 따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과 똑 같은 이치이다. 헌데 한국불교에는 계와 율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계율이라는 용어로 혼용하고 있다. 재가 불자들이 받은 계(戒)는 계율이 아니라 계다. 나 스스로 받고 나 스스로 지키고 실천할 따름이다. 안 지키고 안 따라도 처벌이 안 따른다. 그래서 비교적 계목이 단출하다. 살생(殺生)투도(偸盜)음행(淫行)망어(妄語)음주(飮酒)의 5계에 불과하다. 그래도 범부중생들의 삶이 이들 5계를 지켜가기도 힘들고 난해(難解)하다. 솔직히 5계를 수행하기에는 일상생활 삶 자체가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옛말에 “계는 앉아서 받고 서서 범할지라도 자주 받는 것이 좋다” 했다. 계를 받는 순간만이라도 중생들의 산란(散亂)한 마음을 바로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럼 출가 불자들은 어떤 할까? 출가는 계가 아니라 계율(戒律)이다. 스스로 받고 스스로 지키고 실천해 나가지만 이를 제대로 못 지키고 제대로 실천하지 못 하면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 곧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계목도 많다. 비구스님은 250계율이고 비구니스님은 348계율을 받는다. 그리고 각 계(戒)마다 율(律)이 따른다. 못 지키고 못 따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것이다. 참고로 가장 무거운 율(律처벌)은 승적(僧籍)을 박탈하고 사찰에서 내쫓는 멸빈도첩이다. 이처럼 제대로 된 올바른 출가불자(스님)들의 삶은 외롭고 힘든 고난과 인욕(忍辱)의 삶이다.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다. 피나는 수도(修渡)의 삶이다. 그래서 출가 불자(스님)들은 재가불자들의 존경받아 마땅하다. 헌데 일부이긴 하지만 본사 주지선거에 거금(巨金)이 오고 갔다는 온갖 추문들이 난무했다. 마땅히 계율로 처벌해야 했다. 헌데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라 출간(出間)법이 미적거리다가 급기야 세속(世俗)법으로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계율(戒律)이 아닌 법률(法律)의 처벌을 받은 안타까운 사연이다. 사실주지선거는 40억 50억 억! 억! 억! 억 소리가 난지 오래이다. 소문이 없어서 그렇지 대부분 그렇고 그렇단다. 재수 없는 출가 큰 불자들만 걸려들었다. 아뿔싸! 안타깝게도 또 터져다. 이번엔 방장(方丈)선거이란다. 그것도 방장= 종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법보사찰 해인사의 방장선거란다. 성철 혜암 법전큰스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해인사의 역대 방장자리는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 0순위 자리이다. 바로해인사의 방장자리는 한국불교의 상징적 자리이다. 이른 상서로운 방장자리가 추하고 더러운 금품선거로 훼손되고 더렵혀져는 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불교 갈 때까지 다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마치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비둘기가 마음은 콩밭에가 있는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심(心)출가나 형(形)출가나 목적은 똑 같다. 육도의 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되기 위한 성불(成佛)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옛날 부모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자식들 공부에 매달려든 것은 가난을 벗어나고자하는 그 목적이 있다. 없는 집 학생들이 공부에 열심히 매달리는 것도 가난으로부터 해방되고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범부중생들의 수도수행의 목적은 다람쥐 체 받기 돌듯하며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육도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데 있다. 지은 업과(業果)에 따라 세세연연을 몸을 바꿔가며 태어나고 살아오고 살아가는 것이 중생계의 윤회이다. 이 지긋지긋한 육도윤회를 벗어나고자 출가를 하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성문(聲門)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고자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출가 제자들이다. 마음도 형식도 강조되는 심(心)출가 형(形)출가불자이다. 그리고 이들의 목적은 오직 성불에 있다. 성불을 위해서 철저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도(修道)해 가는 것이다. 이때 성문승이 지켜야 할 계율이 남자성문은 250계율이고 여자성문은 348계율을 받는다. 성문승이 이러한 계율들을 범(犯)하면 그 계율에 상응하는 처벌과 불이익을 받는 것이다. 성문 이외에도 육도의 윤회를 벗어나고자 수행하는 이들이 있다. 자연의 변화와 같은 외부와의 인연에 의하여 혼자서 깨달음을 증득한 벽지불(연각승)이다. 이들 연각(緣覺)승 중에는 부처님의 제자(아라한)도 있고 홀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증득한 독성(獨聖)불도 있다. 그러나 벽지불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는 수행자들이다. 벽지불은 나의 괴로움을 해결하고 벗어나자는 원력을 세워 깨달아 해탈한 성자라서 더 이상의 괴로움도 태어남도 없다. 윤회를 벗어난 것이다. 이들 벽지불 중에도 아라한을 증득한 부처님의 제자들은 계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과의 인연은 있어나 제자가 아닌 벽지불들은 보살5계만 지키면 될 것이다. 형식을 강조하는 형(形)출가보다도 마음을 강조하는 심(心)출가가 부각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대들은 모두가 장로불교 소승불교를 근거로 한 것이다. 대승불교에 접어들어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길이 새로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바로 보살불교이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말이다. 보살의 원력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다.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님의 대 원력이 깃들어 있다. 보살에는 깨달은 보살과 깨달을 보살로 나누어진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등등의 보살님들은 깨달은 보살님들이시다. 그리고 최근 들어 사찰에서 여자신도님들을 보살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보살이다. 부처님제자라면 모두가 다 보살님인 것이다. 출가나 재가나 불성(佛性)을 가졌다면 모두가 다 보살님이시다. 보살은 5계만 받는다. 깨달은 보살도 5계이고 깨달을 보살도 5계만 받는다. 그리고 보살은 형식을 중시하는 형(形)출가를 배제하고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심(心)출가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깨달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님.............등등은 출가불자일까? 재가불자일까? 아마도 지장보살님을 제외한 보살님들은 재가불자님일 것이다. 왜? 왜냐하면 지장보살을 제외한 다른 보살님들은 모두가 머리를 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바세계의 고해(苦海)를 벗어난 사람은 부처님과 아라한 과 벽지불의 세 부류이다. 부처님과 벽지불은 홀로 깨달은 분이시고 아라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깨달은 분이시다. 그럼 부처님과 벽지불 아라한은 무엇이 다를까? 우선 원력(願力)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되어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셨고, 벽지불은 일단 나의 괴로움을 해결하고 벗어나자는 원력을 세우셨으며, 아라한은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의지하고 해탈(解脫)하자는 원력을 세우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중생구제를 위한 회향(回向)으로 많은 가르침을 남기셨고 벽지불은 중생제도를 회향이 별로 없었다. 아라한은 부처님을 도와서 중생제도에 매진한 것으로 전해온다. 여기까지는 근본불교 소위소승불교 교리이다. 보살은 대승불교에 등장하는 수행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깨달은 연각승(緣覺僧))이다. 보살은 스스로 서원(誓願)을 세우고 스스로 따르고 실천해 나가신다. 문수보살 지혜의 대 서원을, 보현보살 행원(실천)의 대 서원을,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대 서원을, 지장보살은 서원이 크고 깊어 대원본존의 대 서원을 스스로 세우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8대보살 10대보살 아니 수많은 보살들이 스스로 원을 세우고 스스로 따르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보살님들이 스스로 세운 서원을 안 따르고 못 지켜다 하여 처벌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서원하고 스스로 지키고 따르고 실천하며 안 따르고 못 지켜도 처벌이나 불이익이 없는 지금의 재가불자와 같은 수행자인 것이다. 다만 형상으로 보건데 지장보살님의 머리를 깎은 형상은 아마도 출가불자인 것으로 봐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혜로운 불자라면 재가와 출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슬기로운 불자라면 심(心)출가와 형(形)출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제대로 된 불자라면 계(戒)와 계율(戒律)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살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것은 불교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한 불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재가의 불자들이여!
차제에 진솔한 출가의 의미를 깨우쳐가자. 그리고 기(氣)죽지 말자!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님들도 재가불자란다. 고 목이 터져라 외쳐보고 싶다.
한바가지 눈물을 삼키면서라도 인욕(忍辱)하고 싶다.
아!!!!!!!!! 진솔한 불자의 수행길이 이다지도 험난하단 말인가?
나무석아모니불! 나무석아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아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