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본문 내용을 보면 17-19절은 목회자 디모데의 공동체에 속한 당시의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권면임을 알 수 있다. 17절에서는 세 가지 명령을 말하며 이어서 18절에서는 네 가지의 추가적인 명령을 말하고 있다. 17절이 마음가짐과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18절은 주로 어떻게 행할 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19절은 이런 태도와 행동의 이유 내지는 목적을 말한다.
세 가지 마음가짐은 ‘부를 자랑하지 말라’,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그리고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다. 네 가지 행할 내용은 ‘선을 행하라’, ‘선한 사업을 많이 하라’, ‘즐겨 나누어 주라’, 그리고 ‘관대한 자가 되라’ 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한 17절 후반절의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바로 앞에서 “정함이 없는(불확실한) 재물”에는 소망을 두지 말라는 명령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누리라고 후히 주시는 모든 것에는 당연히 재물도 포함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재물은 불확실한 것이니 소망을 두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무언가 매끄럽지 못한 느낌이 든다. 소망을 두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즐기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리고 그래야만 장차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를 우리는 예수님의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마 13:4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비유에서는 자신의 재물을 다 팔아서라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사야 한다고 한다. 소유를 즐기고 누리라는 말은 없다.
또한 재물이 많은 청년 (마 19:16-22); 막 10:17-31; 눅 18:18-30)에게 하신 말씀도 연상시킨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이야기에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영생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재물을 누리고 즐길 것인지 근심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재물과 영생이 양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복음서의 내용과 함께 생각해 보면 딤전 6:17-19의 주제는 “재물을 선한 일에 사용하고 그 대가로 영생을 얻으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본문이 말하는 대로 재물을 사용하고 나면 더 이상 재물은 남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본문은 17절 서두에서 밝히듯이 “부자들에게 하는 명령, 즉 부자가 영생을 얻는 법”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시 현상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 원인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그리스어 원문을 보자.
17 Τοῖς πλουσίοις ἐν τῷ νῦν αἰῶνι παράγγελλε μὴ ὑψηλοφρονεῖν μηδὲ ἠλπικέναι ἐπὶ πλούτου ἀδηλότητι ἀλλʼ ἐπὶ θεῷ τῷ παρέχοντι ἡμῖν πάντα πλουσίως εἰς ἀπόλαυσιν
(The Lexham Greek-English Interlinear New Testament 2008. Bellingham, WA.)
17 현 시대의 부자들에게 명한다, 자랑스러워 (교만) 하지 마라, 소망을 부의 불확실함에 두지 마라, 대신 하나님에게 두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즐거움을 위해 풍족하게 주신다.
(개인역)
개역개정의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에서 “누리게 하시는” 이라는 부분이 이런 오해를 낳는다. 원문은 “즐거움을 위해” 주시는 것인데 이 부분이 “우리에게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으로 번역되어서 마치 우리가 재물을 누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같은 어감을 준다.
하지만 “즐거움을 위해 (εἰς ἀπόλαυσιν)” 라는 부분은 그 의미가 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즐거움 (ἀπόλαυσιν)의 뜻은 단순한 즐거움이기 보다는 ‘성과’ 혹은 ‘결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일로부터 얻는 ‘유익’을 말하기도 한다. 특히 그리스의 비극 작가인 유리피데스의 글에서는 이 말이 “닮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족하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을 닮는 일에 관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와 함께 구원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아낌없이 후하게 주신다는 의미이다.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우리는 애초부터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므로 이러한 은혜를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마태는 그의 본문 서두에서 (마 19:16)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ἀπόλαυσις, εως, ἡ, (ἀπολαύω) enjoyment, fruition, Thuc., Arist.
2. c. gen. advantage got from a thing, Xen.; ἀπόλαυσιν εἰκοῦς (acc. absol.) as a reward for your resemblance, Eur.
Liddell, H.G. 1996 , A Lexicon: Abridged from Liddell and Scott’s Greek-English Lexicon. Oak Harbor, 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