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까지 명당의 형태에 대해 알아봤다. 그럼 명당이라 불리는 그 터들은 과연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 또 어떻게 기막힌 발복을 후손들에게 안겨주었는지 조선에서 최고라고 알려져 온 소위 조선의 8대 명당터를 중심으로 하나씩 살펴나가 보기로 합니다.
◈ 조선의 8대 명당터 ◈
: 제목인즉 ‘조선의 8대 명당터’인데, 우리나라 워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 많으시고, 뛰어난 명당터도 많아서인지 풍수의 대가라 지칭되시는 분들마다 모두들 조금씩은 의견이 다 다르다.
김일성의 사망일을 거의 맞게 예측해 빅 스타가 되었던 육관도사님도 말년에 혜안이 점차로다 어두워졌던 것인지 말년에는 무지하게 연줄 걸린 듯 송사에 얽혔었다는데...
풍수쟁이의 혜안이 땅 속을 헤아려야지 남의 주머니 속에 있는 ‘머니’를 헤아리게 되면 명줄이 다된 것이라고 자탄하였다던데, 얼마 후 역시 남의 터 잡아주려 출장가던 중 拙하였답니다.
이제는 그나마 그러한 육관선생마저 아니계시니 추천 받은 후보지에서 여러 문중들의 효험있고 신묘한 유명 명당 발복터를 추려서 소개하는 것이 젤로 좋을 것 같아 임의로다 추렸습네다.
(01) 청풍김씨 김인백 妻 안동권씨 墓: 경기 의왕시 고천동 171, 회룡고조형 명당
(02) 안동김씨 김번(繁) 墓: 경기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산 5, 옥호저수형 명당
(03)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墓: 강원 춘천 서면 방동리 816- 1, 장군대좌형 명당
(04) 광산김씨 김극뉴 墓: 전북 순창 인계면 마흘리 547, 대마마을, 말 명당터
(05) 동래정씨 정사(賜) 墓: 경북 예천 지보면 도장리 산38, 옥녀측와형 명당
이상 여기 까지는 거의 의견이 일치되는데, 나머지 3곳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매우 많다.
남의 조상터에 감 놔라 대추 놔라 … Bic 10의 어떤 묘소라도 Vic 5에 3곳을 넣으면 그것이 바로
조선의 8대 명당터가 된다. 지금부터 조선의 명당 Bic 10을 을 간추려보면.
(1) 안동김씨 김상헌 부모 墓: 경기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산5, 옥호저수형 명당.
(2) 파평윤씨 윤관장군 墓: 경기 파주 광탄면 분수리 산4- 1,
(3) 달성서씨 서성(省) 墓: 경기 포천 설운동 산1- 14,
(4) 청주한씨 시조 한란(蘭) 墓: 충북 청원 남일면 가산리 537, 회룡고조혈 명당
(5) 진성이씨 이정(禎) 墓: 경북 안동 북후면 물한리 96- 1, 작산마을. (퇴계선생 증조부)
(6) 광주이씨 시조 이당(唐) 墓: 경북 영천 북안면 도유리 120- 2, 허화혈(虛花穴)
(7)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 墓: 경남 고령 쌍림면 산주리, 만대산 백호배주형 명당.
(8) 동래정씨 2세 정문도 墓: 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467, 화지산 야(也)자형 명당
(9)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 墓: 전남 나주 반남 흥덕리 , 벌 명당터
(10)청주한씨 한광윤 墓: 전남 영광 법성면 신장리 746, 오봉마을
: 4대승상, 7대왕비 백자천손 문무대대로 날 명당, 용사취회형(龍蛇聚會).
이상으로 VIC 5와 Bic 10을 선정해 보았는데, 안동김씨와 동래정씨는 각각에 한 곳씩 모두 선정되어 있고, 청주한씨도 Bic 10에 두 곳이나 선정되어 있다.
Bic 10의 바로 턱밑에 풍양조씨 시조 조명 묘, 덕수이씨 이식 묘, 안동권씨 권민수 묘, 밀양박씨 박침 처 밀산박씨 묘, 함양박씨 박기림 묘, 청송심씨 시조 심홍보 묘 등이 있었지만 차순위로 내림을 당했다. 토너먼트 운동경기라면 16강으로 가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에궁. 그냥 가자.
(※위에 거론 된 명당터들은 다음 EP 끝에서 다룰 ‘ 지역별 명당터(가제)’에서 분명 다룰 것이다.)
결국 문중으로 따져보면 12개 문중만이 어디 한 곳에든 선정되었는데, 전편에 조선의 명문가로 문과급제자를 200명 이상 배출하였던 가문 중에서 안동권씨, 남양홍씨(당홍), 밀양박씨, 연안이씨, 여흥민씨, 청송심씨, 진주강씨, 경주김씨 등은 어디에도 선정되지 않았고, 그 외에 버금가는 명문가라 할 수 있는 풍양조씨, 한산이씨, 경주이씨 등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 들 집안은 명당의 발복없이도 자손들이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잘도 달려오지 않았던가?
물론 명당의 발복이 출세에만 연관된 것은 아니다. 후손들의 자손번성과 생명, 재산 그리고 출세까지를 두루 바라는 것이 많다보니 비교에서도 과거시험 문과급제 등 출세만의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비교할 만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어거지로 비교해서 따져보았음에도 불구하고…
VIC 또는 Bic으로 선정된 12개 문중에서 배출된 문, 무과 급제자 및 상신, 문형의 숫자보다 선정되지 않은 11곳의 문중에서 배출된 인물의 숫자가 더 많으니 이것 또한 어찌 해석해야 할꼬나~
여하튼 그래도 나름 엄선(?)된 국가대표급 명당들이니 얼마나 멋진지 함 봐보자.
(한 번 다루었던 명당터도 처음 찾는 님들을 위해 그냥 다시 기록 및 사진을 보완해 게재합니다.)
(게재 순은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부터 … 혹시라도 한 번 그곳을 다녀가시려면 참고하시라고요,)
◈V- I). 청풍김씨 김인백의 妻 안동권씨 墓: 경기 의왕시 고천동 171, 의왕시청 좌측 기슭.
: 오봉산자락에 낙맥한 용의 혈이 집결한 곳이란다. 이곳 청풍김씨 입향조는 10세 김우증으로 중종반정의 공신이다. 이후로 13세 김인백으로 배위 안동권씨(1564~ 1632)의 명당터 발복으로 …
16세~ 19세까지 6정승에 판서와 과거 급제자가 수십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16세: 김유(대제학), 김구(우의정) 형제, 17세: 김약로(좌의정), 김상로(영의정), 김재로(영의정) 사촌,
18세: 김치인(영의정)으로 김구(숙종)-> 김재로(영조)-> 김치인(정조)의 3대 영의정을 배출한다.
19세: 김종수(좌의정, 김구 직계 증손)에 이르기까지 정승과 대제학이 쏟아져 나왔다.
청풍김씨의 대표적인 문중묘역은 인근 의왕시 왕곡동 왕림마을, 백운산기슭에 선영이 있다.
그곳에 입향조 김우증을 비롯 김인백, 김유 등이 있으며, 나머지 후손들은 각기 위치를 달리한다.
◈V-II). 안동김씨 김번(繁) 墓: 경기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산5 일원, (옥호저수형의 명당)
: 新안동김씨가 석실마을에 입향한 것은 선원과 청음선생의 조부 김생해가 부친 김번의 묘를 여기에 쓰면서 재를 지내기 위해 머므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명당은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 즉 술병에 술이 가득 담긴 형상으로 김번 묘 뒤는 술병의 주둥이같이 생겼고, 여기서 내려오는 지맥은 술병의 목처럼 가늘며, 묘터는 호리병의 아래 몸통으로 넓게 퍼져있어 태조산 천마산에서 받은 기맥이 새어나가지 않고 그대로 혈에 모이게 되는 명당터라 한다.
이 명당터에 김번을 모신 이후 12세에 손자 김극효가 동래정씨의 임당공(정유길)의 사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아들대에 이르러 김상용과 김상헌이 나란히 정승에 이른다.
이 때 장동의 청풍계(現청운동)에 세거하면서 장동파로, 장동대감으로 불리면서 안동 소산마을의 안동김씨와도 구분짓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선원 김상용이 강화남문에서 장렬히 순국하면서 가문을 빛낸 후, 동생 청음 김상헌의 자손 중에서 왕비님이 세 분, 부마가 두 명, 정승 15분, 판서 51명, 관찰사 46명, 시호를 받은 이가 49명 등 조선말 세도정치의 중심에서 서서 소위 '金貫子(금관자)가 서말' 즉 큰 벼슬을 많이 한 대단한 영광과 권세를 누린 집안이 되었다.
◈V-III).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墓: 강원 춘천 서면 방동리 816- 1
: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은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과 벌어진 팔공산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과 옷을 바꿔입어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고려 통일 후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도굴을 우려하여 나머지 봉분을 세 개로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 이 터는 도선국사가 태조 왕건의 묘터로 점지한 곳이라하나 장군의 유택으로 허락하였다.
이 명당터는 ‘비룡농주형(飛龍弄珠形)’ 즉 용이 구슬을 갖고 굴리는 형태로 청룡도 백호도 안산(案山)까지도 삼중으로 되어있고 조산(朝山), 물줄기까지 잘 갖춘 걸작이라고 일컫는다.
◈V-IV). 광산김씨 김극뉴 墓: 전북 순창 인계면 마흘리 547 대마마을 뒤, 말(馬) 명당터.
: 산소에서 보는 형태가 말머리로 보이는 천마등공형(天馬登空形) 또는 용마등공형(龍馬騰空形) 즉 ‘천마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상’으로 묘터가 콧구멍으로 혈터이고, 묘 아래쪽이 말총 즉 말꼬리가 된단다. 이곳 마을이름 마흘리(馬屹里), 대마(大馬)마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본디 이 터는 초배 함양박씨의 장인이 잡은 터였으나 아들이 없어 사위인 김극뉴의 신후지지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분묘 3기가 상하로 나란히 있는데, 제일 위는 장인부부, 다음이 초배인 함양 박씨부인 그리고 제일 하단이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내신 광산군 김국광의 아들로 사간원을 지낸 이 터의 주인공 김극뉴의 음택이다. 묘역 내에 선생의 직계 자손들이 같이 조성되어 있다.
광산김씨 가문 역시 이 터의 발복(?)인가…
고손자인 사계 김장생과 사계의 아들 김집(集)이 문묘에 부자로 배향되는 조선 유일의 영광을 누렸고, 사계선생의 증손자 숙종의 국구 김만기를 필두로 차남 이진규, 손자 김양택까지 내리 3대에 걸친 대제학 집안은 조선에서 예학에 있어서 단연 광산김씨 가문이 으뜸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면이라 하겠다. 광산김씨 집안은 조선시대에 5명의 정승과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에 왕비 한 분을 배출한 명문 반가의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인재의 산실로써 당당히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한 가문으로 칭하게 된 연유일 것이다.
※삼한갑족: 정조대왕이 칭(稱)한 명문 세 집안으로 연안이씨, 달성서씨, 광산김씨의 삼족이다.
◈V-V). 동래정씨 정사(賜) 墓: 경북 예천 지보면 도장리 산 38, 익장마을
: 앞서 ‘명당의 형태’ ⑰옥녀만개형(滿開形), 옥녀단좌형(端坐形): ‘쪼메 야하게 누운 여인의 형상’에서 살펴보았던 명당터이다. 동래정씨가문에서는 옥녀측와형국(側臥: 옆으로 누운)이라 말하는데, 한 마디로 이곳이 동래정씨 가문에 정승 한 섬을 배출시킨 명당이다.
묘역 내에 신도비와 국내 단 2개 밖에 없는 희귀한 철비가 하나 서있고, 재실과 종택은 건너편 지보면 지보리 122에 위치하고 있다.
※鐵碑: [巡相鄭公基善去思碑 戊戌十月日立(1838년)], 동래정씨(1784~ 1839), 서울産
: 부친 목사 정지용, 1812(순조12년)문과 급제, 1815년 함경도 암행어사로 폐단시정.
이후 이조참의, 부제학을 역임 경상도관찰사 시절 도내 재해 때 기민을 구제해 주었다.
이후 예조판서, 대사헌을 지냈다. 익장마을 철비는 정기선의 선정비이다.
명당의 VIC-5를 먼저 보았다. 이제는 Bic-10을 살펴봐 보자,
아마도 명당에 관련된 야그들은 ‘역사탐방’이 끝날 때까지 여기저기서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이고, 게재 순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가까운 곳부터 … 혹? 그곳을 찾게되면 참고들 하시라고요.
◆Bic-01). 新안동김씨 청음 조부 김생해墓 외: 경기 남양주 와부읍 덕소리 산5.
: 조선 8대 명당, 안동김씨 김번(璠)과 같은 지번으로 김번墓 동북방향 80m 지점 약 600평 정도의산기슭에 아들 김생해, 손자 김극효, 증손 김상헌, 고손 김광찬 및 손부(孫婦) 광주이씨, 증손부(曾孫婦) 상주이씨 등 6기의 묘가 있는데, 근래에 이르러 풍수가들의 의견이 김번(璠)의 묘는 너무 치우쳐 비혈지이고 김생해, 혹자는 청음의 묘가 주혈이며 대명당이라고 주장한다.
비혈지란 주장에는 청음선생이 생부 김극효의 4남으로 태어나 큰 아버지 김대효의 양자로 입적되었었고, 청음선생도 자식이 없어 둘째 형 김상관의 아들을 입적하여 대를 이은 것을 들고 있다.
이후 김광찬의 후손에서 정승 15명, 판서 51명, 왕비님이 3분을 위시한 고관대작과 대학자, 충신 등 금관자, 옥관자가 서 말이나 되도록 수없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터의 진혈로 부터 지기감응(地氣感應)을 받아 신안동김씨 가문이 번성을 누리기 시작했는지 청음의 증조부이신지, 조부이신지 우리도 나름대로 한 번 따져라도 봅시다.
일단, 이 석실마을의 터를 잡아준 것은 증조부 김번의 큰 아버지가 되는 조선 초 세조 때부터 연산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의 불교를 지켜왔던 학조대사가 회암사 주지스님 당시에 잡아주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설에는 포은 선생의 묘역 내 자리 잡은 저헌 이석형선생의 명당, 말 명당의 김극뉴 터와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본래 석실마을 터는 남양홍씨의 선영이어서 김번의 처 홍씨 부인이 친정 아버지 묘자리로 쓸 터가 명당임을 엿듣고는 몰래 물(?)을 부어 못쓰게 만든 후 자신의 남편을 명당터에 모셨다는 것이다.
설화란 것이 옛날에는 귀로 듣고 입으로만 전한 구전된 것이기 때문에 조상님들의 기억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거저~ 딸네미들, 친정에서 와서는 고개 한 번 둘러보고 별별 것들 다 집어갑니다.
시집간 딸네미들 조심해야 된다구요~~ 그래서인지 풍수에서는 ‘외손발복지지(外孫發福之地)’란 말이 있습니다. 용인 이석형 터, 순창의 김극뉴 터 그리고 이곳을 비롯하여 청풍김씨 김인백 처 안동권씨, 광주이씨 시조비(始祖妣) 등 많이 나타납니다. 아하~~ 그래서 ‘출가외인(出嫁外人)’이로구나.
먼저 증조부 김번(璠)의 묘를 이곳에 쓰면서 조부 김생해가 처음으로 석실마을로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이곳에서 김생해는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3남 김극효(1542~ 1618, 77세)가 김상헌, 김상용 선생의 생부가 되신다. 청음선생은 손(孫)이 없는 큰 아버지 김대효의 양자로 출계함.
김극효의 부인은 동래정씨의 유명한 임당공 좌의정 정유길의 따님인데, 정씨부인은 혼인하여 아들 5형제를 두었고, 장남이 김상용, 4남이 김상헌선생이다. 이 따님도 출산할 때면 언제나 자기 친정인 한양의 회동대감댁 산실을 이용했고, 또 친정부모 밑에서 아들들의 교육을 시키고 그곳에서 키웠다.
어찌되었든 신안동김씨는 병자호란을 전후로 해서 김상용, 김상헌 형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시기가
조부 김생해(1512~ 1558, 71세)의 묘를 석실마을에 쓴 직후에 선원 김상용(1561~ 1637, 77세)이태어났고, 이어서 청음 김상헌(1570~ 1652, 83세)선생이 태어나 가문의 영달을 일으켰다.
그런 연유로 김생해의 터에 조금 점수가 후한 것도 있단다. 그렇지만 가문이 번창했으면 된 것이지, 무엇 때문에??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아~하!! 계속해서 광영을 누릴려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두 곳이 모두 명당이므로 마치 ‘스테이크 먹으면서 안심이냐? 등심이냐?’ 따지는 것 같이 보이네욤.
◆Bic-02). 파평윤씨 윤관장군 墓: 경기 파주 광탄면 분수리 산4- 1,
: 파평은 지금의 파주이다. 파평면 늘노리 385에는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 태어났다는 전설의 ‘용연(龍淵)’이 있다. 고려개국공신으로 경주부사를 지냈고 거기에서 죽어 묻혔다.
여진토벌로 유명한 윤관장군이 4대손이다. 이 터는 주산 박달산의 기맥이 겹겹이 둘러친 좌청룡 우백호의 조밀한 형국으로 바람조차 새어나갈 곳이 없을 정도로 옹골차게 뭉쳐있고, 안산, 피구처 모두가 완벽한 명당터라 한다. 이후 파평윤씨는 15세 윤번(璠)이 세조의 국구가 되면서 가문이 불같이 번창하기에 시작하였다. 판도공파에서만 2명의 국구가 더 나왔고, 윤사분(좌의정), 윤사흔(우의정)의 형제 정승 및 윤원형(영의정) 등이 배출되면서 거의 100여년을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결국에는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집안싸움까지 하면서 권력을 탕진하다 중종 계비 문정왕후가 타계하면서 판도공파는 몰락했다.
파평윤씨의 소정공파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집안으로 숙종 때 윤지완, 윤지선 형제 정승 및 명재 윤증(숙종, 우의정), 정조 때 윤동도(우의정)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정승은 파평윤씨의 어떤 계파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파평윤씨가 정관계에서 지탄으로 주춤거릴 때, 1662년 청송심씨 심지원이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죽게되자 윤관장군의 무덤이 평장으로 되어있었던 관계로 어쨌든 옛 윤관장군의 묘터 바로 뒤에 무덤을 쓰게 되었다. (청송심씨는 1658년 사패지로 받음.)
100년이 지난 후, 파평윤씨 가문에서 조상의 묘를 찾아나섰는데, 이미 청송심씨 가문이 선영으로 이미 쓰고있었다. 청송심씨 묘역을 건드리면서 윤관의 묘를 다시 찾으려하게 되면서 그 유명한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사이의 400년 무덤송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764(영조40년), 당시 100여년이 된 심지원의 묘에 대해 본래 윤관장군의 묘를 없애고 심씨들이 쓴 묘라며 청송심씨 묘역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자 무덤송사가 일어났다.
두 가문이 모두 팽팽한지라 영조가 화해를 구하였으나 계속 쟁송이 끊이지 않았다.
(그린경제 권효숙기자. http://blog.daum.net/jeenine/127 : 상세설명 블로그.)
이후로도 내내 이어지던 송사는 2008년 윤관장군 묘역 내에 있었던 심지원을 비롯하여 심씨네 묘 19기를 파평윤씨 문중에서 제공한 바로 옆 2,500평의 토지로 이장하는데 합의하면서 역사적인 분수원산송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명당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는 있는가 보네욤. 그러니까 판도공파 몰락한 100년이 지나서 청송심씨 역시 명당을 알아보고 같은 곳, 바로 뒤에 묘를 쓴 것이 아닐까요?
오래 전, 그곳을 찾았을 때의 사진이 마침 갖고있던 자료 속에 있네욤…
나머지 묘역에 대한 소개는 다음 EP로 넘어갑니다~.
다음 EP에서는 북한 김일성주석의 조상묘를 비롯 다른 대표적인 묘역 소개가 있습니다.그 소개가 끝나고 부록으로다 서울, 경기… 그래 충청지역까지 가 봅시다.
헹여나, 혹시라도 나같이 역마살 있는 사람, 시간 많고 할 일없는 사람 함 찾아가 보시시소~~~ 了.
|
첫댓글 일 없으실 때..
따라가 명당터 구경이나 해보게 해주십사 부탁드리면 안 될까용?
명당탐구벙개...ㅎㅎ회비 내서 안성 무한정한우고기 먹으러 가요.
콜~~~~~^^
시방, 증말로 일 없슈~~ 먼저 얘기했듯이 비공개능으로 진행하면 어쩔까나.... 울 학무성님네 함저협 같은
단체의 동호인회로, 울 카페도 괜찮지만... 비공개능 개방 협조공문을 보내야만 하니까... 직인이 필요할 껄요??
서오릉에서 관리하는 곳이 많으니까 서오릉관리사무소에 협조공문 넣으면 서삼릉내 효릉, 소현세자의 소경원, 연산군 모친 윤씨의 회묘, 왕자무덤, 궁녀무덤 등 서삼릉에 비공개가 무지 많고요, 또 좀 더 가면 동이 주인공 최숙빈의 소령원, 파주에 인조 장릉... 등 엄청 많아요. 보통 때는 월담해야되요... 걸리면 혼날껄!!
무한정한우 무쟈게 땡기지만, 북쪽인지라 서오릉 앞 '주막' 털레기 수제비 아주 그냥~~이요.
@하나또하나 그래도 하실거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안 되면 ![걍](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gif)
공개된 왕릉 가요. 왕릉![벙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63.gif)
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수도 엄꼬...힝![~](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
협조공문을 뭔 이유 대면 되는디요
왕릉에서 콘서트한
@violet 비공개릉 견학이 이유지요.
공개된 능이야 입장료내면 되지만
비공개 유적지는 문화재보호를 위해 사전신고 및 협조가 필요하지요.
앗!동래정씨 명당은 부산이네요~~^
욜렛님의걘 완전 콜~~~~
하나아저씨~~~~~~^또하나언니께서 압력좀~^ㅋ
왕릉![벙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63.gif)
주전멤버로..올욜이![~](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violet 추가요 ㅎㅎ
울 아저씨 얼마나 재료 모으느냐고 눈이 아플까요.
아무튼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러게요..![굽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4/texticon_81.gif)
폰으로 보니 눈이 아플 정도로 쪼맨하고 많은 글과 자료 ...
컴 켜고 보니 더 방대하고 정리도 정말 잘 되어있고..나라에 팔아도 되겠어요.
늘 하나님의 글에 감사하고 또 감사드리는 맘입니다.
제가 돈 마이 벌어 하나님 좋아하시는 고기 한우로 많이 사드릴게용.
@violet PC 교체해서 왕짜증 없어졌시유.
울 또하나가 걍~ i5로다 체인지.
창이 5~ 6개 정도 열려있는 것은 문제가 전혀없시요.
Windows에 기름 발랐는지 거저...
휘리릭 휘리릭... 아주 거냥 죽여줌돠.
@하나또하나 고럼 또하나언냐 좋아하시는 풀떼기로 사드려야겠다.ㅎㅎ
조선의 명당 Big10, 그것도 1,2,3 번째 모두 경기도가 랭크돼 있다니 놀랍고요, 남북 분단 상황과 무관할텐데 모두 남한이라는 사실도 또한 놀랍습니다.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잘읽었습니다. ^^
한양 궁궐이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 조상묘를 둘러보려면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었겠어용.![^.^](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30.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하나오라벙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고뢔서...주로 한양 둘레 명당자리에...'
전 강남에 있는 왕릉들만 해도 한강 건너려면 큰 일이었겠다 싶어요.
맞쥬
@violet 역시 모범 수강생 다운 식견을 가지셨슴다. ㅎㅎ
@violet 왕릉은 도성에서 하룻길 즉 100리안에 두는 것이 기본 중 기본.
다니기 힘든 것 보다는 자기 명줄 안위가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먼 곳 성묘갔다가 반역이라도 일어나면 큰일이라, 곧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다가...
예외도 좀 있지만 그래도 기본100리, 하룻길.
@하나또하나 언젠가 들은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순왕이 사후에 신라의 수도 경주로 복귀하지 못하게 된 논리 중 하나로 들은 것 같아요. ㅎㅎ~
http://cafe.daum.net/4m5m/CDKB/6725
아휴 보는이도 머리아푼데 얼마나 힘드셨을지가?
덕분에 까막눈 순간이라두 쬐매 유식하다맙니다만 ㅎㅎ
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