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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그것은 누굴 위한 것인가? 개인인가 모두인가 또는 누구에게도..
안녕하세요? 오늘은 또 희곡을 들고 왔습니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후로 오랜만에 희곡을 하나 들고 온거 같은데요, 저한테 여러모로 상당히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이번에 다룰 책은 외젠 이오네스크의 <대머리 여가수>입니다! 항상 말하는 거이긴 한데, 수대연에서 토론으로 나오면 진짜진짜 정말로 모두가 할말이 많아질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봅니다. 그만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범위가 광범위하고,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많아지는, 그런 파헤치는 재미가 있던 책입니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건 평소와 같이 교보문고에서 몇시간이나 서성이며 오늘 살 책은 무엇인지 무한번 고민하던 와중 문뜩 보이는 작가의 이름이 외젠 이오네스크, 이름만으로 뭔가 평범한 소설가들 비켜! 이러면서 글을 써낼거 같은 특이한 이름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문학사를 다룬 책이라던가 아니면 문학 비평을 다룬 책들을 읽어보았을 때 가끔씩 외젠 이오네스크의 이름이 한두 번씩 들리게 되어서 대머리 여가수 말고도 다른 작품들까지 몇몇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건, 어느날 발견한 존재와 무라는 사르트르의 책을 사두고 2년동안 방치를 하다가 대머리 여가수를 읽고 존재와 무와 충분히 연결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존재와 무라는 벽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존재와 무, 아직도 여전히 읽고 있는데, 정말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제가 대머리 여가수를 처음 발견한 시점이, 아마 수대연 토론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책으로 토론했을 때였는데, 그 책이 희곡이었고, 그리고 저는 그 책을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아서 희곡은 나랑 맞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사지는 않고 그냥 있구나~ 했던 때 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와 희곡 진짜 미쳤구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여러 희곡을 읽다가 기억이 나서 그냥 한순간에 사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딱히 이 책과 관련된 중요한 경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대머리 여가수를 사고 난 바로 그날, 침대에 누워서 몇시간도 안걸려서 후루룩 다 읽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굉장히 짧은데,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여러가지를 고민하게 만든 책도 처음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느꼈던 감정이었네요.
줄거리
외젠 이오네스크의 대머리 여가수는 그의 희곡 3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 수업, 의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머리 여가수는 제목에 나타나는 어떠한 여가수, 그러니까 대머리 여가수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머리 여가수라는 단어 자체는 극 전체를 통틀어서 단 한번만 등장하며, 단순하게만 바라보자면 극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개념입니다. 대머리 여가수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물은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입니다. 극의 시작은 스미스 부인이 마치 극을 관람하는 관객에서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어디에 사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극중 고고와 디디라는 애칭으로만 등장해서 대본을 읽지 않으면 이름을 절대로 알 수 없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차이를 보이네요), 국의 간은 어땠는지, 의사에 대한 이야기, 바비 와트슨가 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가며 이야기는 정상성에서 비정상으로의 이행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마틴 부부가 와서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네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이야기 하고, 그렇게 처음 대화가 반복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수업이라는 극은, 한 소녀가 그녀를 가르칠 선생님의 집으로 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배우는 것에 매우 열정이 넘치는 것 같은 소녀는 말을 절고 띄엄띄엄 말하는 선생님과 대조되어 보입니다. 그가 낸 문제를 맞추어 나가며 수학을 배우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더하기는 가능하지만 빼기는 못하는 소녀는 이해하지 못함에 말을 서서히 더듬기 시작하고 선생은 말을 덜 더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빼기를 설명해나가는 선생님과 소녀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그들은 언어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교수의 말은 처음 보였던 더듬거리는 말은 보이지 않고, 수없이 긴 문장을 유창하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소녀는 그의 지식에 위축된 것일까 이해되지 않음에 자신의 한계를 엿본것일까, 목소리는 작아지고, 결국에는 치통을 호소합니다. 그렇게 교수의 말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보며, 극은 한 사건을 보이며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 극은 의자는, 대머리 여가수에서 포함되어 있는 극중 가장 일반 극과 거리가 멀어져 있는, 정말로 부조리라는 것에 대한 대략적인 개념을 잡을 수 있을거 같은 극이고 동시에 제가 존재와 무라는 책을 떠올리게 한 일등공신이지 않을까 하는 극입니다. 노인과 노파의 대화로 시작하는 이 극은 매일 밤 하는 이야기를 또 하며 이어집니다. 오늘밤 오기로 한 손님들을 기억한 그들은 어느 사람들을 불렀는지 이야기하며 어느새 귀부인이 온것을 알게 됩니다. 노파는 귀부인의 옷가지를 넣고 그녀를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가리키지만 귀부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묘사로서 등장하며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로도 보이지 않는 - 존재하지 않는 손님들이 무수히 많이 들어오고, 채워지지 않는 의자는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점유 됩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부조리 극
부조리 극은 일반적인 연극과는 다르게 일반적인 이치에 맞거나 상식에 부합하지도 않고 뚜렸한 목적이라던가 상황 자체에 대한 불가해가 보이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더니즘과 전통 문학과 차이를 생각하시면 될것 같은데, 이처럼 모더니즘과 부조리 극은 지향성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면서도 차이점을 보입니다. 부조리 극은 오히려 전통 극과 구분하는게 더 쉬운데, 이야기가 선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거나, 정상적이지 않은데? 하는 느낌이 들면 축하합니다. 부조리 극을 마주치셨네요. 일반 문학 같은 경우에는 모더니즘 이전에도 살짝살짝 그런 느낌이 오더라도 분류 자체는 전통문학으로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부조리 극은 문학에서와는 다르게 색채가 너무나도 다르다보니 그런 구분이 상대적으로 쉬운 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더니즘을 그래도 아직까지는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게 부조리 극은 출발 자체를 반-연극이라고 선언하면서 등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조리 극과 일반 극 사이에서의 차이를 조금 더 쉽게 알아차릴수도 있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부조리극은 극작술에서의 플롯도, 명확하게 정의된 인물도 없는 작품형식에서 시작합니다. 가령 대머리 여가수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명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정의된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우연과 창조가 주요 동인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하나의 법칙에 의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우연적으로 발생한 법칙들을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극은 문학과는 다르게 배우가 존재하고, 그 배우가 연기하는 공간으로서 무대 또한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부조리극에서 사용되는 여러 심리나 환상적인 효과들은 무대에 오름으로서 포기됩니다.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극이라는 이질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적인 규약을 수용해야만 합니다. 부조리극은, 특히 이오네스크의 극은 이야기를 '소통'이라는 무제에 집중시킴으로서, 흔히 연극 내부에서 연극을 이야기하는, 이른바 메타극을 시도합니다. 부조리 극작가들은 꿈, 무의식, 정신세계의 글쓰기를 역설적인 형식으로 숭고하게 만들고, 그들을 통해 이전 극이 지니지 못한 풍부함을 이끌어냅니다.
이러한 극 자체의 특성이나 극작가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들로 인하여 부조리극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인 등장인물, 즉 온전한 인물상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고 어딘가 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는 등장인물을 탄생시킵니다. 이들은 마치 연속성과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을 거부하는 것처럼, 부조리극에서의 인물들은 무라는 강력한 성격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등장인물은 더 이상 심리 현상을 구현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행위에서도 통일성과 연속성을 상실합니다. 마치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할머니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나에게 친숙한 존재로 여겨졌던 한 인물은 어느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내가 생각했던 연속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아가 이들은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와 소통마저도 제대로 맺지 못하는, 즉 일반인에게는 어떤 하나의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홀로 떠돌기만 하고 있는 영혼의 단편들, 혹은 부서진 페르소나로서 비춰지게 됩니다. 대머리 여가수 속에서의 스미스-마틴 부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들은 모두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부조리극에서는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모두는 가만이 있었을 뿐인데 마치 부조리 극작가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갑작스럽게 빨려들어간 것처럼, 세계는 인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오히려 세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반-연극, 또는 부조리극은 극 중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자기 자신, 자기가 자신으로 있을 예정이었고 자기었었던 자기 동일성을 잃고, 시-공간의 현실성에 탈피하며 언어가 전달능력을 상실하는 등 연극에서의 행위의 의미가 해체되어지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부조리 극은 인간 존재의 삶의 문제들이 무질서 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부조리극은 저에게는 옳은 거짓 삼단논법으로 비춰집니다. 우리는 거짓 삼단논법이 완전하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때 가끔씩은 옳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상황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수 없지만 거부하기에는 귀찮거나 또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부조리극이 아닐까 합니다.
부조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다보니 대머리 여가수에 등장하는 역자의 각주에 대해서 이야기 안할 수가 없겠습니다. 물론 제가 많은 희곡들을 읽지 않았기에 드는 생각일수도 있고, 또 그렇기에 틀릴수도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의 각주는 굉장히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일반적으로 각주라고 하는 것은 비문학에서는 저자의 설명을 보충 하기 위해서 사용되거나 또는 인용된 사람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 그리고 작성된 내용의 출처와 알아보면 좋을거 같은 논문/책 등이 기입되어 있는 경우가 다수고, 문학에서의 각주라고 한다면 잘 이해되지 않은 내용에 대한 설명이라던가, 한자어라면 그 단어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만약 작가가 어떤 부분에서 다른 문학에 대한 레퍼런스를 사용한다거나 내용에 대한 인용, 혹은 비유를 사용했다면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에서, 그리고 어떤 부분인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게 보통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각주란 전반적으로 문학이던 비문학이던 간에 상관없이 그 작품을 조금 더 풍성하게 이해하고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에서 나타나는 각주들은 뭔가 일반적인 각주와는 결이 다릅니다. 대머리 여가수에서 등장하는 각주란 대다수가 대머리 여가수의 내용적인 측면과 관계된 것이 아닌, 그것을 철저하게 연극으로, 그리고 대본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지니는 것들입니다. 실제로 각주에서는 '따라서 공연 준비 과정에서 더 적합한 대사로 옮길 수 있다면 바꾸어도 무방하다.', '원문을 그래도 번역하면 "우린 모두 감기가 들었어요."가 되지만, 이 경우 '우리'가 마틴 부부만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네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서양식 몸짓을 그대로 사용할 필요는 없으나 정확한 분석을 통하여 그 의미와 느낌을 파악한 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연구해야 한다.' 이것처럼 각주들은 배우들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들이 대본을 어느 부분에서 수정해도 되는지에 대한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점 또한 부조리한 극을 더욱더 부조리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부조리라는 것이 결국에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현실을 구겨져보이게 제공하는 것인데, 현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영역과 그 대본이 존재하는 현실을 서로 엮어서 보여준 것 마저도 부조리 중 하나에 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부조리의 수용에 대하여
부조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방인, 페스트, 시시포스 신화 등을 써낸 알베르 카뮈입니다. 동시대 철학가들이 실존주의에 물결에 휩쓸려갈때, 비록 실존주의보다 약하지만 부조리 철학이라는 것을 발전시킨 철학가입니다. 카뮈의 부조리는 우리가 그것을 끊임없이 저항해나가야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무의미로 때로는 이해불가능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허망하고 아무의미도 없지만 저항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절대적으로 옳으며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저항해나가며 그것에 굴복당하지 않고 자살하지 않아야 할까요? 시시포스는 반복되는 상황에 갇혀있음에도 불구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산을 향해서 돌을 굴려 올라갑니다.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도리어 카뮈는 말합니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기대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조리를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계에 어느순간 내던져진, 기투된 존재입니다. 넓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살아야하는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현실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수용해나가는 태도인가요?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무한히 반복되었고, 반복 되어갈 것인 우리 인생에 있어서 그와 비슷하게 저항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니체와 다르게 카뮈는 그저 살아가는 것으로,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나약하게 답을 한 반면, 니체는 초인사상을 끌어와 인간을 넘어선 인간, 하나의 초월된 존재상을 내세웁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고 이상을 바라보는 인간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는 거대한 삶의 굴레에서 그것을 긍정하고 버티는 정신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니체는 초인을 제시하였지만, 이 초인은 막스 슈티르너의 관점에서 나약한 초인입니다. 니체의 초인은 인간 사회가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긍정합니다. 초인은 철저하게 사회에 구성되어 있고 그 사회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슈티르너가 제시하는 인간상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걷어차 버리고 자기를 최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에고이스트 또는 유일자를 제시합니다. 유일자는 인간 사회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궁극적인 유일자란, 모든 개별자가 유일자로 변모하는 과정이기에 이들은 유일자를 위한 사회를 만들게 됩니다. 여러 인간상이 존재합니다. 사회에 종속될 것이냐, 사회에 속해있음에도 인간임을 넘어서기를 추구할 것이냐, 아니면 모든 것을 넘어설 것이냐... 무엇을 택해야 우리는 부조리를 긍정하고 세계를 진정으로 바라볼수 있는 것일까요? 부조리에 매몰되어 있기에 도리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카뮈의 삶이라는 것은 매우 척박합니다. 그 어떤 의미가 틈새에 끼어들 틈도 존재하지 않고 세계는 무의미의 축제 속에서 우리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며 노래의 선율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의 뫼르소는 아무 이유 없이, 또는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태양이 너무나도 뜨거웠기에 아랍인을 쏴 죽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색채가 빠져나가는 세계에서, 그 척박한 사막에 발 딛여 나아가고 인정해나가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삶의 의미가 시작되고, 우리가 살아갈 이유가 발생하는 것일 까요? 저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 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필연을 가장한 우연에서 발생해 무의미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에까지 확장되어서 세계 또한 무의미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크나큰 비약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단 그런 것이, 대다수의 의미는 인간에 관계되어 있고, 언어로서 표현하기에 인간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종이를 보고 이것은 글을 쓸 수 있는 매개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와 무관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그것을 강조해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의미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연주의적 관점을 채택한다면 인간과 무관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밝은 태양을 바라보고 그것이 쏘아내는 빛줄기를 따라서 이파리로 시선을 돌려야합니다.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푸른 이파리는 생명을 머금을 수 있을까요? 이파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양이라는 거대한 엔진이 필요로합니다. 단순 이파리를 넘어서 생명에게 있어서 태양이라는 것은, 햇빛은 거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생명이 태양에게 빚지고 있는 연속을, 우리는 인간과 무관한 의미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저에겐 이것은 인간과 무관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후에 등장하는 질문의 무한 퇴행에 빠질필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생명은 태양이 필요한가? 생명은 왜 살아가야하는가? ... 이것을 인간으로 치환한다면 일반적인 무한 퇴행의 논리입니다. 전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이는 이 논리는 그 근원에 존재하는 대상을 규명해내는 방식으로 피해갈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사물을 그저 존재한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물은 의식이 없어 인식이 불가능하기에 다른 대상과 자신을 구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의식없는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돌멩이는 돌멩이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태양은 스스로에게 나는 왜 불타며 빛을 뿜어내는가라고 질문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구조화된것이고,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의미란, 자연 스스로 내재하여 지니고 있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밝기에 아랍인을 쏜것이 아니라, 그도 나름의 이유와 의미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모두에게 비춰지는 것으로, 만인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뫼르소는 그런 공평함마저도, 자신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만인이 지니고 있는, 그리고 따르고 있는 법률과 도덕과 양심을 계속해서 비추고 그것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태양을 혐오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태양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평소에는 태양의 영향을 받지 그것을 직접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가 아랍인은 쏴죽인 것은 아랍인이 들고 있는 칼에 비친 태양의 반사, 그 반사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수직적인 폭력이 수평적인 폭력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시점을, 그는 견딜 수 없었기에, 자신 스스로는 이방인이 아님을 부정하고자 싶었던 하나의 욕구가 아랍인을 쏴죽인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의자
제가 존재와 무라는 책을 강하게 느낀 부분이 바로 대머리 여가수에 수록되어 있는 마지막 극인 의자를 읽었을 때 입니다. 의자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소재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자입니다. 극의 시작은 한 노부부를 비추며 그들의 대화로 시작되는데,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을 위해 그들은 의자를 준비합니다. 가령,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이 극에 들어온다고 생각해봅시다. 노부부는 분명히 변호사가 극안에 들어와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데 변호사가 어떤 말을 한 것처럼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한 자리를 내어줍니다. 실제로 의자에서는 이런식으로 우리가 볼 수 없고, 우리가 들을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해서 연극하고, 또 그들을 위한 의자가 주어집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 자리가 점유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의자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부조리입니다. 한번 상상해 볼까요? 노부부가 앉아있고, 그 중간에 덩그러니 한 의지가 있는 상황을. 우리에게는 그저 빈 의자일 뿐이지만 노부부에겐 한 사람이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와 인지의 불일치의 차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존재를 느낍니다. 부재를 바라봄에서 존재를 강하게 느낀다는 것, 이것은 사르트르의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저는 이를 떠올린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것은 존재의 존재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언뜻보면 우리는 존재라는 것과 무가 반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기만 해도 다르기 때문이죠. 내 눈앞에 사과가 있는 것과 내 눈앞에 사과가 없는 것 (있지 않은 것)은 다릅니다. 이런 대립되어 있는 개념들을 사르트르는 존재의 인식 방식이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로 묶어 놓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한 존재론이자 인식론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존재, 즉 모든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하나의 목적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따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가령, 내가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면 목적론적 존재론자들은 '아, 나뭇잎에는 떨어지려는 본성이 있구나!'하고 이야기 할 것이고, 굴러가는 바퀴를 보면서 그들은 '바퀴는 아무래도 굴러가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확장해서 인간마저도 목적을 지닌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란 무릇 행복해지려는 목적을 지닌다고 그는 생각해서, 상대적으로 목적을 이루기 쉬운, 그리고 더 많은 행복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인간이란 정치적인 동물이다'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목적론적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네요.
사르트르가 이런 목적론적 존재론을 비판한 지점은 그것이 다루는 존재의 범위에 있습니다. 그는 그 존재론이 일반 사물과 인간을 같은 존재로서 바라보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목적론적 존재론자들이 사물을 설계도를 그리는 방식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의자를 볼때, 의자에 대한 설계도를 그려서 생각합니다. 그 의자의 설계도를 보며 아 이것은 이렇게 기능할 것이구나 생각합니다. 이 설계도는 의자가 만약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의자가 아닌 다른 의자를 보아도 쉽게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설계도를 보면서 만약 이게 실제로 있다면 이러한 역할을 할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목적론적 존재론자들은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고 말합니다. 사르트르가 제기한 의문도 이러한 취지에서 이해해봅시다. 그는 인간도 설계도로 그릴 수 있냐고 질문합니다. 설계도적인 사고방식으로, 제가 아이를 갖게 되기 전, 저는 아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는 책을 좋아할거고, 키가 클것이고, 운동도 잘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란다면 제가 이야기한 속성을 모두 가지게 되나요?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은 부정적일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를 구분해야한다고 말하며, 이들을 즉자와 대자라고 부릅니다. 즉자란, 의식이 깃들어 있지 않은 존재, 스스로 정의내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쉽게 생각해서 돌멩이, 입고 있는 옷, 휴대전화 등이 이에 속할 것이고, 대자는 이와 반대입니다. 의식이 깃들어 있고, 스스로 정의내릴 수 없는 존재. 후자의 의미는 대자란, 의식이 깃들어 있기에, 다른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수 밖에 없고, 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즉자는 사물, 대자는 인간으로 매치시키면 좋을거 같네요.
사르트르가 바라보는 인간의 존재론이란, 인간은 본질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이 먼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미리 누군가에게 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고 성장하며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인식에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대자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인식기관을 활용해서 인식이라는 행위를 시행하게 되고, 다른 여러 사물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인식의 방법은 무화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물을 본다고 합시다. 지금 제 앞에 노트북이 놓여있는데, 저는 이 노트북을 바라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봐도 나는 노트북이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함으로서 저는 제 존재의 경계를 조금더 세밀히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제가 노트북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노트북이라는 것은 제 인식 범위 바깥에 있는 것이기에 '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 가능성은 0%라는 무로서 무너지고 맙니다. 제가 앞서 말한 무화라는 것은 가능성의 무너짐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어쨋거나, 나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본 즉자들을 무화시킵니다. 내가 바라본 모든 즉자는 내가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은 살아가면서 인식을 통해 내가 아닌 것들을 규정해나갑니다.
부정신학적인 방식을 대자는 사용합니다. 부정신학이란 신이 아닌것들을 통해서 신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로, 인간은 신이 아니야, 원숭이는 신이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신의 범위를 점점 더 좁혀나가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살아가면서 나는 A가 아니야, B가 아니야 라고 끝없이 되네이면서 나 자신의 범위를 좁혀나갑니다. 이렇게 대자는 자신을 끝없는 부정의 세계로 밀고 들어가 무를 지향하는 동시에, 그곳에서 그 무엇과도 동일하지 않는 자신의 유일한 존재를 발견합니다. 그 유일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합니다. 인간은 이로써 인식행위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나가기 떄문에 그들이 실존한 이후에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자 그리고 세계를 순환구조로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즉자로부터 대자가 탄생하며 그 대자는 인식이라는 방식으로 통하여 세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세계 내부에서 즉자는 또다시 생성됩니다. 이런 순환적 구조로 인하여 즉자의 구성 이후의 인식이 가능해지는 입니다. 물론, 대자가 행하는 인식행위의 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향된 본질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지 실질적인 본질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들, 미래에 존재할 것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단번에 인식하지 못하며,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내가 커피를 바라볼때 나는 5분전 커피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과거에는 내가 될 수 있었던 존재를 무시하고, 5분 후 커피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나중에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무시합니다. 또한 나는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는 나 자신, 커'피를 인식하는 나'를 인식할 수 없기에 인식의 한계를 체감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이, 내가 아님-무를 인식함으로서 내가 존재의 그림자를 극도로 느끼기 때문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의자를 보며 관객은 도리어 존재를 느낍니다. 부재는 ~의 없음의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재를 통하여 존재를 느끼는 것, 이런 말장난 같아 보이는 언어의 기능이 이오네스크의 언어에 대해 접근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로서 변모합니다.
첫댓글 희곡 독회 한번 열어주시죠
직접이라는 선택지는 없는건가요?
@22_2 박정균
@23_1 정기준
카뮈 사르트르 독회 한번 열어주시죠
이사람들 어디서 짜온것도 아니고 독회 얘기밖에 없네요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