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시인뉴스포엠]
■ 김윤환의 시로 듣는 인생 에세이(37)
사과를 베어 물다
박설희
사각, 밝게 웃으며 한 입 베어 문다
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잖아, 온통 헐은 대장 어디선가 피가 터져 발만 동동 구르는데 급사할 수도 있다고
과육이 으깨지는 소리가 나며 입 주위로 과즙이 번진다
응급실이든 중환자실이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상이야, 어제도 의사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어
창백한 입술이 촉촉이 젖어들며 혀와 말의 길이 부드럽다
바로 옆 침대가 비어 있어서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갔다고 그래, 집에 갔느냐고 했더니 돌아갔다고, 처음 온 곳으로 갔다고
입 안 가득 베어 문다, 대학병원에서 혈액암으로 이 년째 투병 중인 아이를 둔 엄마가 희망을 베어 물 듯 사각사각 맛나게 사과를
사과는 줄어들고 입 안의 물기는 많아지고 사과향이 점차 주변에 퍼지면서 으깨지는 사과는 말이 되고, 활기가 되고, 희망이 되어 스며들고
어제도 같은 중환자실에서 둘이나 갔지만, 그래도 우리 애는 살아 있어
멍든 것처럼 시퍼런 사과를 마지막으로 베어 물고 으적으적 씹다가 꿀꺽 삼키고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며
- 계간 《생명과문학》 2021 여름호
[감상노트] 사람의 시간은 언제나 한 입 과즙이 있는 사과같은 것일까. 으깨어지는 고통을 껴안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의 모습에서 상처 난 사과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 멈춘 그 곳. 그러나 그 시간에는 아무리 준비해도 준비되지 않는 아픈 사람이 등장한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도사리는 시간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상처 난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달콤한 이별의 시간이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인 듯 살아가지만 여행의 종점에서 보면 인간은 언제나 시간의 손님이거나 시간을 경배하는 예배자였다. 따라서 시인의 역할은 적극적 치유에 있지 않고 아픔과 절망에 멈춰 선 시간의 나그네를 시계에 그려 넣는 화백(畫伯)이 되는 것을 박설희 시 「사과를 베어 물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멈춰진 시간에서 일어나는 빅뱅, 삶과 죽음이 하나의 에너지로 폭발하는 공간의 중심에서 시인은 사람과 사람의 면회 너머, 신의 긴 침묵을 대하는 낯선 시간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으적으적 씹다가 꿀꺽 삼키는’ 순간에야 신의 시간과 마주하게 되는 익숙하지만 쉬 아물지 않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김윤환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