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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한국에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엄청난 이벤트가 개최됐습니다. 바로 88 서울올림픽 입니다. 지금 30대~40대 초반의 세대가 바로 88 서울올림픽 세대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경제 발전 속도에 비해서 국제적 위상이 부족했던 한국에게 88 서울올림픽은 이런 문제를 단번에 해소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군사정권 당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용된 측면도 있지만, 6.25 전쟁으로 인한 폐허속에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보여주는데 더 없는 광고 효과를 누린 큰 이벤트 이기도 합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서울의 한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미동초등학교 입니다. 당시 200명의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태권도 시범단은 아직도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가 나올때면 생각나는 명 장면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태권도원을 찾은 미동초등학교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현호 감독이 말하는 "미동초등학교" 태권도 시범단의 역사
현재 미동초등학교 시범단의 총 감독을 맞고 있는 이현호 감독에 따르면 미동초등학교가 이런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태권도의 대사범이자 그랜드 마스터로 인정받고 있는 이규형 사범님의 역할이 컸다고 합니다.
사실, 취재 과정에서 이현호 감독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달 받지 못했다면, 이규형 대사범과 미동초등학교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차 확인 할 길이 없었을 겁니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공개행사 태권도 시범단 (1001명)]
이현호 감독이 전해준 미동초등학교의 역사와 직접 취재를 통하 취득한 정보를 정리해 미동초등학교 시범단의 역사를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동초등학교는 1896년 5월 1일 개교 했습니다. 그리고 1973년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을 창단해 현재까지 41기 졸업생을 배출한 한국 대표 어린이 시범단으로 그동안 명성을 떨쳐왔고, 미동초등학교 태권도 시범단이 유명세를 떨치게된 것은 지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등 굵직굵직한 국제스포츠대회에서 도맡아 시범을 펼쳐던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1973년도 서울미동초등학교 태권도부]
그리고 그 중심에 대한민국 태권도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규형이란 태권도인이 존재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몰랐던 대사범 "이규형"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까지 미동초등학교 태권도 시범단이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인 "이규형" 대 사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굵직한 대회의 태권도 시범단 총감독 역할을 수행하며, 세대를 아우르는 시범단을 구성하면서 자신이 몸담으며 기본기를 갖췄던 미동초등학교 시범단을 이 자리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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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통령 영부인 개인지도 및 제 1회 세계태권도연맹 품새 대회]
이규형 대사범이 이렇게 태권도계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그가 단순하게 무예와 강함을 추구하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미동초등학교에서도 오랜기간 재직하며 시범단을 이끌었던 이유도 그가 무예인 이전에 스승, 사범으로서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을 추구하는 일종의 교육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가 이런 교육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어린시절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1948년생인 그는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작고 힘없는 아이다고 그는 각종 인터뷰를 통해 전합니다.그래서 늘 주변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수 였고 이규형 대사범이 10살이 되던 해 태권도와 인연을 맺게된 것도 이런 어린시절의 동기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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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초등학교 시범단과 함께한 태국 사관 학교 및 멕시코 순회 시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초단 심사를 앞두고 혼자서 산에 올라가 더블 백(샌드백 모양의 군대 배낭)에 모래와 톱밥을 넣고 수련을 계속하며 2번이나 낙방한 끝에 초단 승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스승과 함께 체계적으로 수련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이때 경험했다고 말이죠.
그런 경험들이 그가 초등학생을 지도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동초등학교에는 그의 교육적 가르침이 하나의 교육 이념으로 자리잡아 아이들을 올바로 성장시키는데 충실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인연과 사범의 길을 걷게된 계기
그에게 또 위기가 닥친 것은 중학교 1학년 시절 초단 승단 이후,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장수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경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는 사범이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규형 사범은 “장수군 7개면 중 6개면 사람들을 다 가르치며 1967년도에 인원만 2,000명에 육박하는 대단위 수련생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고 전합니다.
이런 경험이 사범으로서 대인원을 가르키고 성장 시키는데 초석이 됐고, 후에 88서울올림픽의 백미였던 대단위의 태권도 시범단을 기획하는 총감독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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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초등학교 졸업식 (김혜수와 기념촬영)]
미동초등학교와의 인연!!
미동초등학교 태권도 시범단과의 인연은 군에서의 인연으로 이루어 집니다. 1972년 육군종합 행정학교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군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동초등학교에서 태권도부가 만들어졌는데,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담당했던 분이 사범을 알아보던 중 군대에 공문을 보내 사범을 부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당시 군은 대민 봉사 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였기에 이규형 사범을 급파하게 됩니다.
그저 지나가는 인연처럼 짧은 군생활동안 거쳐갈 하나의 인연으로 생각하고 미동초등학생을 가르치던 이규형 대사범은 태권도 교육을 강조하며 아이들에게 태권도 뿐만이 아닌 학업과 예의범절을 강조하며 부모들로 부터 호응을 얻었고, 그런 교육 철학이 인기를 얻으며 200명이 넘는 수련생을 교육하게 됩니다.
한국 최초로 열린 88서울올림픽에서 태권도 시범단의 총지휘를 맞게된 계기는 이런 미동초등학교와의 인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그 수많은 제자들은 이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성인이되어 태권도계와 다양한 업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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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감독은 미동초등학교에서 이규형 대사범의 전재는 절대적이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범인과 달랐던 이규형 대사범이 대단한 것은 후배들에게 미동초등학교는 물론 자신이 태권도계에서 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을 내려주고 자신은 태권도 발전을 위한 개인적인 노력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현호 감독과 2명의 미동초등학교 사범은 태권도원에서 펼쳐진 태권도 경연대회에서도 이규형 대사범이 주창했던 바른 정신과 육체의 단련을 통한 건강한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현호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이규형 대사범은 단순히 한명의 무인이 아닌, 한 국민에게 바른 삶과 예의를 지켜가는 하나의 롤모델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신이 이곳 태권도원은 물론 한국의 많은 아이들에게 긍정의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이 더욱 부국강병의 길을 걷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태권도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이규형 대사범과 미동초등학교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은 뭔지 생각해보게 되며, 이번글 마무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