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 2021년 12월 5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마태복음 10:34-39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 나라에 갈 다 같은 목사와 성도들 같습니다. 알곡인지 쭉정인지, 양인지 염소인지, 곡식인지 가라지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명히 있고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될 마귀의 자식들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천국에서 안식을 누릴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부분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으로 초청을 받고 교회로 나온 사람들은 많아도 막상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 좋은 천국에 들어가는 이가 적을까요? 평생 교회에 다니며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말씀을 듣고도 삶으로 천국으로 가는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권세가 있는 자리는 소수만 차지하도록 정원이 정해져 있습니다.
의사나 검사는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해도 남들보다 못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정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좁은 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들어가기 힘들 게 좁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가는 넓은 길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셨습니까?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왜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이겠습니까?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 길을 가지 않을까요? 그 길은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다 자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자들입니다. 지독한 자아숭배자들입니다.
그 자아숭배를 부인하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그 은혜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정말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뒤치다꺼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다시 일어나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내가 주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배설하는 그 죄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타락한 바로 나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타락한 그 교만한 자아숭배를 대속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을 했다면 그 잘못을 뉘우치고 찾아가서 네 배, 다섯 배로 갚는다면 용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도둑을 맞은 사람은 더 잘 되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대속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짓는 것마다 다 죗값을 치르셨다는 겁니까? 그래서 죄를 지어도 회개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물론 주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살인, 간음, 도둑질, 시기, 질투와 같은 것을 십자가에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타락한 그 교만한 죄의 뿌리인 자아숭배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지은 수도 없는 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시기, 질투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타락한 교만한 자아숭배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 놈만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죄의 증상들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하게 내 인생에서 주인노릇하려는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주인인 자로 다시 사는 것을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육체는 죽었다가도 또 다시 살아나기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넘어지는 죄는 십자가를 의지할 때 즉시 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그 십자가의 거듭남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거듭났었지만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마음과 인생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야 되겠다 생각되면 십자가의 피를 찍어 자기 몸에 바르고 셀프로 죄 사함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을 갔느냐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나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였느냐? 그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았느냐? 그리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거듭난 자로 살았느냐는 겁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에게 십자가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십자가는 내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마음과 영으로 만나면 자신의 주인 됨과 자아숭배를 위해 내 목숨을 위해 살던 그 죄에 대하여 회개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 믿음으로 사는 자로 거듭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며 이 세상에서 육신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내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여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주시는 십자가를 만나면 예수님을 이용할 수가 없고 예수님을 위해 무익한 종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은 순교의 시대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십자가의 고난보다 세상의 화평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만났어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와 자신을,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 믿음을 세상과 불신자들에게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양보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은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자신의 이익과 자존심을 챙기는 데에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억울하면 참지를 못합니다. 손해 보는 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그 십자가가 없으면 즉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으면 예수님 때문에 일상의 삶에서 고난을 받을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칭찬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융통성 있게 믿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런 칭찬을 받을 때 하나님께는 버림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겠지만 주님께는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내려놓을 때 그가 버린 것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외면하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죄와 사망을 대속하신 주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영혼의 구원을 걷어차고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걷어차고 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떡을 버리고 똥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차라리 돈을 걷어차고 돌을 선택하는 것은 십자가를 버리고 외면하는 사람보다 지혜로울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고 버리는 사람들은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심판과 고통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미련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마음대로 편안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넓을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멸시와 외면과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되는 그 넓은 길은 영원한 고통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만은 물러서면 안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 여러분을 향해 다른 것은 다 양보를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이미 다 보셨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제가 교회에서 고난을 받을 때 성도들을 보면서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눈치를 보고 벌벌 떠는 겁니다.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 목사를 지지한다고 서명도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니까? 설령 그곳에 서명한다고 때리기라도 하겠습니까? 꼬집기라도 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두려운 게 무엇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죽은 신인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에는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십자가 없는 가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로 받는 고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자 그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믿음에 대하여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착각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기된 자들입니다.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동참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이 무한한 영광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한 후 사도들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전하였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로부터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 붙잡혀 매를 맞았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지 못하였을 때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던 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만나셨습니까? 십자가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기에 찾은 이가 적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나 구원을 받은 성도는 목숨을 버리고 그 길만을 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에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