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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사 桃李寺
경북 구미시(龜尾市)에 있는 도리사(桃李寺)는 고구려(高句麗)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新羅)에 불교를 전하러 와서 태조산(太祖山)에 세운 절이라, 신라 불교의 ' 초전법륜지 (初轉法輪地) '로 알려진 곳이다. 세상과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부처가 사슴이 뛰어 놀던 바라나시 녹야원(鹿野苑)에서 첫 설법을 한 장소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이르는 것처럼, 아도화상이 신라 땅에 절을 짓고 설법을 행한 첫 장소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막상 중생의 제도를 생각하셨지만 무명의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는 중생(衆生)들이 당신이 깨달은 심오한 진리를 알아 들을 수 있을 지에 대한 염려를 하시며 교화활동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자, 범천(梵天)이 부처님에게 진리의 법륜(法輪)을 굴려 주실 것을 청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일어나 중생제도(衆生濟度)의 길에 나섰다.
부처는 우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신과 함께 수행(修行)하였더 다섯 비구(比丘)에게 최초(最初)의 설법(說法)을 하였다. 이를 ' 초전법륜 (初轉法輪) '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죽어야 하는 것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원한있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통이다. 구(求)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이며, 번뇌(煩惱) 속에 이 몸이 존재하는 것도 고통이다. 무엇이 이 고통의 원인인가 ?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은 것, 이 세 가지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고통의 소멸(소滅)은 열반(涅槃)이며, 이는 갈애의 피안을 벗어나 영원한 기쁨에 안주하는 것이다. 어떻게 ㅎ면 그와 같은 경지를 얻을 수 있는가. 올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업(業)을 지니고, 올바른 생활수단을 갖고, 올바로 기억하고, 올바로 노력하고, 올바로 마음을 닦는 일이 바로 열반(涅槃)을 얻는 방편이다.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비구(比丘)는 이내 그 이치를 깨닫게 되어 기뻐하며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는 부처님의 최초(最初) 제자(弟子)가 되었다.
도리사 창건 연혁
도리사는 440년(신라 눌지왕 24)에 고구려의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도화상은 얼굴이 검다고 하여 묵호자(墨胡者)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며,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경주에 왕래하였다가 한겨울인데도 냉산 기슭에 북숭아(桃)꽃과 오얏(李)꽃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았다. 아도화상은 분명히 이땅이 상서로운 곳으로 생각하고, 마침내 절을 짓고 도리사(桃李寺)라고 하였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것이 514년(법흥왕 14)의 일이므로, 도리사의 창건은 이보다 70여 년이나 앞섰던 것이다. 즉 신라 불교는 국가적으로 공인(公認)되기 이전에 이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창건 사실은 워낙 오래 된 일이고, 또 공식적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창건 이후의 변천 과정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고려시대의 사정은 전혀 알 수가 없으나, 지금 극락전 앞에 있는 이른바 화엄석탑(華嚴石塔)의 조성시기가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여전히 고려시대에서도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1677년(숙종 3)에 큰 화재를 만나 대웅전과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729년에 대인(大人)스님이 인근의 금당암(金堂庵)으로 절을 옮기고, 아미타불상을 개금(改金)하였다. 아마도 1677년의 화재로 가람이 큰 피해를 입었고, 곧바로 복원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렇게 해서 도리사는 두번째로 가람을 이전하였다. 1764년(영조 40) 도리사 사적 목판을 판각하였고, 1807년에 가람의 일부를 중수(重修)하였다. 1823년에 조사전을 중건하였고, 1875년(고종 12)에 용해화상(龍海和尙)이 극락전을 중수, 단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극락전에 아미타후불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920에 아도화상의 진영(眞影)을 조성하였다.
한국 불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불교는 단순히 종교(宗敎)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통치이념(統治理念)으로 발전하여 왔다. 이러한 한국 불교의 기틀은 해동불교의 초전지, 선산의 도리사(桃李寺)에서 부터 비롯된다. 묵호자(墨胡子)로도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신라불교의 공인(법흥왕 15년, 528년)에 앞서 눌지왕(417~458년) 대에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일선군(지금의 구미 선산) 모례장자(毛禮長者)의 집에 머문 방 있다.
실로 신라불교는 이 아도화상의 전교(傳敎)로부터 지작되었다. 아도화상은 모례의 집에 머물던 중, 어느 겨울날 냉산 자락에 오색의 복사꽃과 오얏꽃이 눈 속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비로소 절을 창건하니, 이가 곧 해동 최초 가람 (海東 最初의 伽藍)인 도리사이다. 오늘날도 도리사와 이웃한 도개에는 아도화상이 포교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모례장자의 유허지(遺墟址)가 있으며, 집터에는 모례정(毛禮井)이라는 우물이 있어 당시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도리사(桃李寺) 절 입구 안내문에는 ' 한국불교는 한민족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기틀은 해동(海東) 불교의 초전지(初轉地)인 선산(善山)의 도리사(桃李寺)에서 비롯되었다. 묵호자(墨胡者)로도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신라(新羅) 불교의 공인(公認 .. 볍흥왕 15년. 528년)에 앞서 눌지왕(訥知王)에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일선군(一善郡 ... 선산의 옛 명칭) 모레(毛禮)의 집에 머문 바 있다. 그는 선산의 도개에서 오색의 복사꽃이 눈 속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절을 지었으니 이가 해동불교(海東佛敎) 최초(最初)의 가람 도리사이다 '라고 적고 있다.
가람의 배치
이곳 도리사(桃李寺)는 산(山)의 경사면에 석축(石築)을 쌓은 후 극락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태조선원, 적멸보궁 그리고 2동의 요사를 배치한 산지가람(山地伽藍)이다. 전각과 함께 석탑과 세존사리탑, 도리사사적비와 좌선대 그리고 석가여래사리탑 등의 석조유물과 유적이 가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근 태조선원 옆 언덕에 아도화상의 동상을 봉안하였고, 적멸보궁 올라가는 축대 앞에 역시 2층 건물인 설선당(說禪堂)을 지었다.
현재의 도리사는 창건 당시의 도리사터는 아니다. 본래의 도리사는 불타 없어지고, 그 속암(屬庵)이었던 금당암(金堂庵)을 중심으로 중창(重創)을 거듭한 것이 지금의 도리사이다. 도리사의 옛터는 현재 냉산 남쪽 기슭, 도리사(금당암)으로 올라오기 전, 계곡 주위에 석축지(石築址)가 위치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가 옛 도리사터라고 말하고 있다. 이 터는 대웅전, 누각 등의 건물을 조성할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지금도 절터의 흔적을 알려주는 와편(瓦片 ..기와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도화상 阿道和尙
구도자(求道者) 아도(阿道)는 중국 위(魏)나라 사람인 아굴마(我塗摩)와 고구려(高句麗) 사람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 사이에 태어나 5살에 출가(出家)를 하고, 16살에 아버지 나라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3년을 공부한 후 고구려에 돌아오지만, 당시 도교(道敎)가 성했던 고구려에 불만을 품은 어머니의 권유로 신라(新羅)에 불법을 전파하기 위하여 길을 나선다.
이때가 신라 눌지왕(訥知王) 2년, 즉 417년으로,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에 의한 법흥왕 14년(527) 불교가 공인되기 110년 전의 일이다. 서라벌에서 왕실의 관심을 받으며 불법을 전파하던 중, 씨족(氏族) 중심의 귀족(貴族)들과 토착신앙(土着信仰)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불교가 배척(排斥)의 대상이 되고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아도화상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인 추풍령 아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구미)에 몸을 숨기고 3년간 은신하였다.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정(政),교(敎)일체를 도모하려는 왕실과 기존질서를 유지하려는 토착세력의 경쟁이 낳은 결과이었다.
공주(公主)의 병을 고쳐준 대가로 서라벌에 다시 돌아와 왕이 지어준 흥륜사(興輪寺 ... 신라 최초의 절))에서 불교를 전파하던중, 미추왕(味鄒王)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도화상은 지금의 도리사 인근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으로 숨어들어 머슴살이를 하고 밤에는 불법(佛法)을 전파하려 노력하였다. 그 5년 동안 품삯 한 푼을 받지 않고, 소 천마리와 양 천마리를 길러내며, 모례장자(毛禮長者)의 큰 신망을 얻었던 아도화상은 어느 날 홀연히 그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고 나중에 아도화상을 만난 '모례'의 시주를 받아, 한 겨울에 복사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냉산 기슭에 절을 세우니 바로 그곳이 도리사(桃李寺)이다.
모례정 毛禮井
그려면 아도(阿道)는 왜 불교의 전래지로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선산, 구미)을 택하였을까 ? 일선군(一善郡)은 신라(新羅) 서북방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이었다. 신라(新羅)는 고구려가 국원성(國原城 .. 지금의 충주)을 남진(南進) 거점으로 삼아 소백준령 이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일선군(一善郡)을 중심으로 방어하였고, 신라가 소백준령 이북으로 진출할 때에도 일선군을 거점으로 삼았다. 일선군은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보은(報恩)과 청주(淸州)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신라와 고구려는 일선군(一善郡)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접촉하였고, 이 과정에서 불교(佛敎)도 민간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충주(忠州)에는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일선군(一善郡)에 도착한 아도(阿道)는 지금의 ' 도개면(道開面) '을 주목하게 된다. 현지의 구전(口傳),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 등을 종합해 보면 현재의 도개면 도개(道開) 2리가 첫 전래지역으로 모아진다. 도개리의 ' 도개 (道開) '는 불교을 열었다 혹은 불도를 개시했다 ...는 의미에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개리(道開里)가 바로 아도(阿道)가 왔던 신라시대의 도개부곡(道開部哭)인 동시에 모례장자(毛禮長子)가 살던 곳이라는 곳이다.
아도(阿道)는 모례장자(毛禮長子)의 집에 굴(窟)을 파고 살며 가축(家畜)을 치고, 밤에는 불법(佛法)의 진리를 강론하며 3년 동안 살았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가 융성했으나, 신라는 고유의 신앙과 외래 문물에 대해 배타적(排他的)이어서 불교에 대한 박해(迫害)가 심했으니, 아도(阿道)는 숨어서 포교(布敎)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도개 2리에는 아도(阿道)가 거처한 모례(毛禮)의 집으로 추정되는 ' 모례장자터 "가 있고, ' 모례장자샘 '으로 이름지어진 유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모례장자터'는 말 그대로 터만 있을 뿐 건물의 흔적은 없다. 모례장자샘은 주변에 잔디를 심고, 우물은 직사각형의 석재를 ' 정자 (井字) '모양으로 짜서 나름의 격식을 갖추어놓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三國遺事)의 ' 아도본비 (阿道本碑) '에 의하면, 아도(阿道)는 고구려인 어머니 고도령(高道寧)과 정시연중(正始年中. 240~248)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조위(曺魏) 사람 아굴마(我堀摩)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가서 아버지 아굴마를 만나보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석(講席)에서 공부한 뒤 19세에 귀국하였다.
이때 어머니가 신라로 갈 것을 권하면서, " 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佛法)을 모르고 있으나, 이후 3,000여 월이 되면 계림(鷄林)에 성왕이 나와서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7개소의 가람터가 있으니 1은,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2는 삼천기(三川崎), 3은 용궁 남족, 4는 용궁 북쪽, 5는 사천 끝, 6은 신유림(神遊林), 7은 서청전(壻請田)이니 모두 전불(前佛) 때의 가람터요, 불법이 길이 유행하던 땅이다. 네가 그 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석사(釋祀)가 동으로 향하리라 " 라고 하였다. 이에 아도(阿道)는 263년(미추왕 2)에 신라로 가서 왕성의 서리(西里)에 머물렀다. 아도가 대궐에 들어가서 불교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였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이에 일선현(一善縣 ..지금의 구미 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살았다.
그 이듬해인 264년에 성국공주(成國公州)가 병이 들어 무당과 의원이 치료를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의사를 구하였다. 아도가 대궐에 들어가 병을 치료하여 나았으므로 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물었다. 그가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며 방가(邦家)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띠로 집을 덮고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한 뒤 그곳에서 불법을 강연하였으며, 모례의 누이인 사씨(史氏)도 이때 여승이 되어 삼천기에 절을 짓고 영흥사(永興寺)라 하였다.
얼마 후 미추왕(味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다시 그를 해(害)하려 하였으므로, 아도(阿道)는 다시 모례(毛禮)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든 다음 문을 닫고 들어가 자절(自絶)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다른 기록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아도화상이 신라 소지왕 때 시자 3인을 데리고 일선군 모례의 집에 와서 있다가 몇 년 뒤 병 없이 죽었고, 그의 시자(侍者) 3인이 경률(經律)을 강독하여 가끔 믿는 이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곳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의 석상(石像 .. 위 사진)도 있었다. 1976년 도리사 경내 석탑 및 담장의 석축을 정비하다가 석상 1구(軀)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아도화상의 얼굴과 같은 조각상이라고 하여 관심을 모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리사 경내에는 아도화상이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 있다. 아도화성의 좌서내(坐禪臺)가 그러하거니와 좌선대 바로 뒤에는 아도화상 사적비가 서 있다. 높이가 3m는 됨직하다. 조선 인조(仁祖)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 전래자 아도(阿道)에 대한 숭배가 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도화상 묘지함 阿道和尙 墓地函
아도화상의 무덤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묘지함이 공개되었다. 묘지함(墓地函)은 아도화상(阿道和尙)에 대한 추모의 글을 새겨 묘에 넣은 작은 상자를 말한다. 고운 진흙으로 만든이 묘지함의 크기는 가로 20.5cm, 세로 16cm, 높이 14cm이다. 이 묘지함의 뚜껑에는 ' 이징승(阿丈僧)의 열반을 기념해 무덤을 쌓고 봉한다 ... 阿丈僧涅槃築封 ' 는 내용과 함께 제작 연도와 제작 장소가 적혀 있다. 묘지함 뚜껑에 쓰여진 글씨는 .....
진태원병자칠년 晉太元丙子七年 / 국견내성초문사 國甄內城肖門寺 / 십방금륜광선봉 十方金輪光善逢 / 선책동강궁예사 禪冊東岡宮禮司 / 아장승열반축봉 阿丈僧涅槃築封
위 글을 풀이하면, 진태원병자7년에 국견내성에 있는 초문사(肖門寺)에서 기록한다. (아도는) 시방세계에 금륜광선이 되어 선책(禪冊... 불경)을 받들었다. 둥강궁의 예사인 아장승(阿丈僧)이 열반하여 봉축하다..로 되어 있다. 이 묘지함의 기록에 따르면, 제작 연도는 晉太元丙子七年이므로, 이는 382년(고구려 소수림왕 12)에 해당한다. 제작 장소는 국내견성의 초문사(肖門寺)로 되어 있다. 아장승(阿丈僧)은 아도(阿道)로 추정되고 있으며, 국내견성(國內甄城)은 고구려 국내성(현 중국 지린성 지안)의 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초문사(肖門寺)는 이불란사(伊佛蘭寺)와 함께 375년 고구려에 최초로 세워진 2개의 사찰 중 하나이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晉)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이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이 묘지함 안에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과 아장승(阿丈僧)의 활약을 새긴 뒤, 고온(高溫)으로 구운 얇은 점토판이 6장씩 두 줄로 들어가 있다.
뚜껑과 점토판을 합쳐 모두 493字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 중에는 " 태녕삼년(太寧三年) 나라에서 佛法이 성행하고, 불도(佛道)를 숭상하여 군중이 모여들었다 "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것은 순도(順道)이며, 2년 후 아도(阿道)가 입국하였다. 만약 이 묘지함이 진품(眞品)일 경우 우선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가 소수림왕 2년(372)보다 약 50년 이상 앞섰던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또 이 묘지함 양면에 새겨진 불상(佛像)은 지금까지 발견된 국내 불상 중 가장 오래된 불상이 되는 것이다.
극락전 極樂殿
이승에서 서쪽으로 십억만 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정토가 있다고 하며, 불교에서의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묘사하고, 그 주재자인 아미타여래불(阿彌陀如來佛)을 모신 당우를 극락전이라고 한다. 또한 아미타여래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 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그 수명이 한량 없는 백 천억 겁으로도 셀 수 없다고 하여 극락적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며, 극락전에 모신 주불인 아미타여래의 이름을 따서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15평 규모의 건물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1875년(고종 12)에 용해화상이 중수하고, 이듬해 단청을 올린 도리사의 중심불전이다.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1876년(고종 13)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신중탱화와 지장보살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극락전 외부 벽화
해발 600m .. 중간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까지 걷는 길에 숨이 턱턱 막힌다. 절 입구 키 큰 은행나무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돌계단을 올라 마주친 첫 풍경은 실망스럽게도 덩치가 커다란 설선당(說禪堂 .. 위 사진)이다. 무릇 큰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닌데, 옛 것은 없다고 치더라도 규모로 압도하는 것은 절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심을 돈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세에 굴복하게 만드는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떠한 종교를 막론하고 규모가 커지는 것보다는 내실(內實)이 옹골찬 것이 옳을 것이다.
태조선원 太祖禪院
화엄석탑 華嚴石塔
도리사(桃李寺)의 극락전(極樂殿) 앞에는 ' 화엄석탑 (華嚴石塔)이라 이름 지어진 석탑(石塔) 하나가 서 있는데, 일반 석탑과 ㅡ 형태가 전혀 다르며, 우리나라 탑(塔) 중에서도 이 같은생김새의 탑으로는 유일(唯一)하다. 이 석탑은 전탑(塼塔)을 모방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축조(築造) 방식은 비슷해도 형태에 차이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같은 예(例)를 찾을 수 없는 유일한형태의 석탑이다.
보물 제470호
구조상, 옥개 낙수면부(落水面部)에 층단을 이루고 있는 점이라든지, 각 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으로 결구하여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오히려 모전석탑(模塼石塔)의 계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탑을 도리사에서는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조성연대는 남면 상하부에 모각된 양 문비형(門扉形)의 양식과 상륜부의 조각을 비롯한 각 부재의 치석(治石)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땅 위에 길게 다듬은 돌을 각 면마다 10여 개씩 세워 놓고 그 위에 기단을 만들었다. 기단은 각 면에 네모난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는데, 유일한 장식이자 특징의 하나가 남면 중앙부에 문짝(門扉 .. 위 사진)을 새겨 넣은 것이다. 탑신부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 만들었는데, 상대적으로 강하게 축약된 모습이고 상륜부도 간략화되어 있다.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탑은 마치 모전석탑(模塼石塔)과 같은 외형은 언뜻 닮아 있으나, 자세히 보면 그와도 같지 않다. 한마디로 웃기는 탑이고 이형탑(異型塔)이다.
적멸보궁 寂滅寶宮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석가모니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법당을 가리킨다. 법당 내에 부처의 불상(佛像)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고 있는 법당으로 바깥이나 뒷쪽에는 사리탑(舍利塔)을 봉안하고 있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있다. 보궁(寶宮)의 기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 (寂滅道場會)를 열었던 중인도(中印度)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된다. 궁(宮)은 전(殿)이나 각(閣)보다 우위에 있다.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봇ㄹ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이때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菩薩)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고, 부처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만들고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寂滅)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다.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의 열반(涅槃) 후 불상(佛像)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적멸(寂滅)은 불이 꺼지 듯, 탐욕과 노여움가 어리석음이 소멸된 열반(涅槃)의 상태를 말한다. 모든 번뇌를 남기멊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열반(涅槃)의 상태 그리고 모든 대립이나 차별을 떠난 상태를 말한다.
도리사 석탑에서 극락전을 사이에 둔 뒤편에 세존사리탑이 있다. 1977년 4월 이 사리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과 석가모니의 사리 1과(顆)가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은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사리(舍利)는 이곳 도리사의 제일 높은 곳에 새로 지은 적멸보궁 뒤에 사리탑을 장대하게 만들어 사리를 넣어 두었다.
적멸보궁에 올라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올라가 본다. 그 사리가 진신사리(眞身舍利)인지도 알 수 없거니와 우선 싫은 것은 고급 화강암으로 떡칠을 해 놓은 곳에 발길 돌리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사대부중이 그렇게 화려하게 해 놓은 것을 아도화상이 좋아라 할까? 얼마전 해인사 초입에 만들어 놓은 성철스님의 사리탑을 볼 때에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교회의 첨탑이 필요 이상으로 높아지는 것이나, 절집이 고급화, 대형화되는것이 믿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꼭 작은 성소(聖所)나 절집이어야 한다는 고집은 없으나, 이 나라에 필요한 절이나 교회는 인도의 캘커타 뒷골목에 있다는 성 테레사수녀가 운영하던 "사랑의 선교회"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도화상 사적비 阿道和尙 事蹟碑
석탑 옆의 쪽문 밖으로 나가면, 아도화상이 참선하였다는 대좌 형태의 널찍한 반석이 있고, 그 앞에 아도화상사적비와 도리사불량답계주질비가 나란히 서 있다. 아도화상사적비는 아도화상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로, 자연 암석 받침의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세웠다.
아도화상사적비의 남향한 비신(碑身)의 표면에는, 상부에 횡(橫)으로 아도화상사적비(阿道和尙事蹟碑)라는 전자체(篆字體)의 제목이 새겨져 있으며, 비문(碑文)은 해서체 종행(縱行)으로 첫줄에 "조선국경상도선산부냉산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朝鮮國慶尙道善山府冷山桃李寺阿道和尙事蹟碑)"라 전제하고 음각하였다. 이 비의 뒷면에는 자운비(慈雲碑)라는 명(銘)이 음각되어 있다. 이 사적비는 비에 새겨진 글로 보아 1655년(효종 6)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잇다.
세존 사리탑 世尊舍利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은 조선시대의 사리탑으로 석종형(石鐘形)의 부도이다. 도굴꾼에 의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것을 경내로 옮겨 세우면서,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 .. 국보 제208호)이 발견되었다.
높이 1.3m 남짓한 크기의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 세존(世尊) 사리탑 '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의 하층 지대석을 담 밖에 남겨둔 채, 새로 조성한 대좌(臺座) 위에 상층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뚜껑을 덮은 단지처럼 보이는 탑신(塔身)을 올렸다. 다시 그 위에 고깔모자와 흡사한 연꽃봉오리 형태의 보주(寶珠)로 장식하였다.
상층 지대석의 네 귀퉁이에는 사자(獅子)의 머리를 조각하였고, 그 중간에는 향로를 새겨 넣었다. 탑신에는 위와 아래에 띠처럼 돌아가며 연잎을 새겼는데, 그 꽃잎들이 서로 겹쳐지고 있어 특이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보주(寶珠)에도 아래에 앙련(仰蓮)을 새기고, 그 위로 다섯 개의 원(圓)을 마련하여 "世,尊,舍,利,塔"이라고 한글자씩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지고 크기도 작지만, 사자 머리 등을 새긴 솜씨가 탄탄한 사리탑이다. 1977년에는 이 탑에서 뜻밖에 8세기 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사리함과 그 안에 담긴 사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無色透明)하고, 둥근 콩알 크기의 큰 사리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가치(價値)있는 사리로 평가되고 있다.
금동 육각사리함 金銅 六角舍利函
1977년 4월 극락전 앞에 있는 세존사리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사리함(舍利函)이다. 현재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 금동육각사리함 (金銅六角舍利函) '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사리함은 높이 17cm로 기단, 탑신, 옥개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전각(殿閣)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옥개 꼭대기가 약간 파손되었을 뿐, 보존상태가 매우 좋으며, 표면에 도금(鍍金)이 잘 남아 있다. 형태는 평면 육각형으로 기단 각 면에 안상(眼像)을 투각하였다. 탑신 각 면에는 선각(線刻)으로 우주(隅柱)를 나타내었고, 2면의 탑신에는 불자(拂子 .. 원래 파리,모기 등을 쫒아낼 때 사용하는 생활용구이었지만, 불교에서는 더럽고 나쁜 것을 털어버리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는 佛具의 일종))와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천부상(天部像 ... 불법의 수호신)을 선(線)과 점(點)으로 새겨 넣었다. 천부상은 연꽃잎 위에 서서 원광(圓光)을 갖추고 있는 등 상당히 능숙한 솜씨로 조각하였다.
남은 네 면에는 사천왕상 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북방 다문천(多聞天)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상을 배치하여, 다문천이 정면이 되도록 구성하였다. 옥개(屋蓋)는 낙수면 끝이 위로 솟은 귀꽃을 표현하였고, 처마와 추녀에는 장식을 달았던 고리가 보인다. 맨 위에는 탑의 보개(寶蓋)처럼 연꽃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그 중심에 꼭지만 남아 있어 원래 꽃봉우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서는 조형물에 있어서 대체로 팔각(八角)이 유행하던 시기이었다. 석등(石燈)과 사리장치 등에서 이러한 팔각(八角)이 많이 보이는데, 이곳 도리사 사리함은 이와는 달리 육각(六角)으로 구성하였다.
이 사리함 안에서는 사리 1과(顆)가 발견되었는데,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도리사사적기"에 의하면, 17세기 전반기에 냉산의 석적사지에서 그 마을에 ' 김계장(金界丈) '이 얻은 사리 1과를 체안선사가 도리사의 석옹탑, 곧 세존사리탑에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육각사리함이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사리 역시 그 이전부터 전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 불교의 초전지(初轉地)로서 의미를 더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좌선대 坐禪臺
좌선(坐禪)은 불교에서 두 다리를 포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사려분별을 끊어 정신을 집중하여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방법을 말한다. 좌선(坐禪)은 인도(印度)의 모든 종교가 수행 방법으로 사용한 것으로, 불교에서도 이를 종교적 실천법으로 채용하였다.
세존사리탑을 지나면 절 밖으로 나가는 작은 돌문이 있고, 그 곳을 통과하여 아래로 잠시 내려서면 아도화상이 참선하였다는 좌선대(坐禪臺)가 있다. 큼직한 네 개의 자연석 기단 위에 혼자 앉아 참선을 하기에 알맞도록 사각(四角)으로 평평하게 바위를 쪼개어 만든 좌선대는 발을 딛고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발판을 다듬어 놓은 것이 이채롭다.
좌선 坐禪
불교의 좌선(坐禪)은 석가모니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좌정사(端坐靜思)하여 깨달음을 얻고, 그 직후 삼칠일 동안 삼매(三昧)에 잠겨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그 후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實遷德目)이 되어 원시불교의 3학 (三學 .. 戒, 定, 慧), 대승불교의 6바라밀(六波羅蜜 ...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의 하나로 정립되었다. 중국에서는 달마(達磨) 이후 좌선을 종지(종지)로 하는 선종(선종)이 서립되어 그 종풍을 크게 떨쳤다.
좌선(坐禪)은 송(宋)나라에 이르면, 견성(見性)을 중심으로 하는 임제선(臨濟禪)으로부터 종고(宗睾)가 공안(公案 .. 화두. 話頭)을 사용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이루는 한편, 좌선 그 자체를 대오(大悟)의 자세로 보는 조동선(曺洞禪)으로부터 정각(正覺)에 의해 묵조선(默照禪)이 생겼다. 올바른 좌선의 형식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에 올려 놓든가(결가부좌 . 結跏趺坐), 또는 단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무릎 위에 놀려놓는데(반가부좌 . 半跏趺坐), 단지 다리를 놓는 형식뿐만 아니라 손의 모양, 허리를 세우는 것, 혀의 위치, 호흡의 방법, 눈을 뜨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일정한 규범에 따라 육체(肉體)를 올바르게 보존하며, 단정히 앉는 것( 정신단좌 . 正身端坐)이 좌선의 본질이다. 따라서 좌선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비사량 .. 非思量), 육체를 올바르게 하여 ' 정신단좌 (正身端坐) '하는 순수한 행위이다.
네 개의 자연석 위에 대충 다듬은 넓은 돌 하나를 얹어 한 평 남짓한 저 자리에 앉아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어떤 것을 빌고 빌었을까? 아도화상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피신하여 찾아든 모례(毛禮)의 집에 이르러 붉은 관을 쓰고, 가사(袈裟)를 입고, 불자(拂子)를 들고 조용히 참선하자, 신령스러운 빛이 하늘을 덮었다고 한다. 불교가 국교로 인정받는 것은 언감생심이던 그 때 이곳에 절집을 지은 후, 한 겨울 눈보라에 가물가물한 등불처럼 피워내던 불교의 싹이 봄날 복숭아꽃 피듯 불력(佛力)이 만개하기를 바랬을까...아도화상이 여기서 어떠한 화두(話頭)를 잡고 수행을 하였는지 물론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서 좌선(坐禪)을 하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신비로움이 감도는 곳이다. 즉 신라불교(新羅佛敎)의 성지(聖地)인 셈이다.
불량답시주질비 佛糧沓施主秩碑
불량답시주질비(佛糧畓施主秩碑)는 이곳 도리사에 논과 밭은 시주(施主)한 사람의 이름과, 논밭의 규모를 적어놓은 비(碑)이다. 자연암석을 받침 삼아 윗면에 홈을 파서 비(碑)를 꽂아두고, 머릿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굵은 선으로 연꽃봉오리와 줄기를 조가하였고, 두 옆면에는 2중으로 된 원모양의 띠를 새겨 장식하였다. 앞뒷면에 세로로 새긴 비문(碑文)은 앞면 첫줄에 비(碑)의 이름을 적은 후, 그 아래에 논밭을 시주(施主)한 자와 그 규모를 밝혀두었다. 비문 끝에 남긴 기록을 통하여 숙종(肅宗) 38년인 1712년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도리사(桃李寺)에 시주(施主)한 사람과 논, 밭의 면적을 기록해 놓았다. 애고(哀苦)는 순간이다. 저 빛도 한 줌 어둠으로 남을 터, 탑이 먼저 어두어지는 것도 사방 만물보다 불심(佛心)이 들어서 다른 것들을 마지막까지 밝혀 놓고, 세상의 모든 것들의 슬픔과 고통을 몸으로 받아 제가 먼저 죽는 것이다. 슬픔도 고통도 아무 것도 없는 고요의 상태는 가을 저녁의 모습으로 내 문 앞에 나타난다. 눈을 감고 되뇌인다. 봄이 오면 다시 도리사 절간에는 복사꽃이 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