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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님, 불교의 부처님과 보 살님은 무엇이 다른가?
1. 들어가며
어느 철학자가 “믿음이 있으면 종교요 믿음이 없으면 철학이다.”라고 하였지만, 믿음은 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든 종교이고, 불교는 부처님과 보살님을 믿는 종교이지만 신앙대상을 대하는 자세[태도]는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님, 불교의 부처님과 보살님이 어떻게 다른지를 아는 것이 기독교와 불교를 아는 첩경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오늘 첫 번째 시간에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님, 불교의 부처님과 보살님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주제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2.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님
(1) 하나님
① 일신교(一神敎)의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신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신이 아니라 타신(他神)이 존재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유대민족)에게 내리신 십계명의 첫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당신 자신이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직접 말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구체적 의미는, 많은 신이 있는데, 딴 신들은 섬기지 말고 나만을 섬기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언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일신이라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 자신이야말로 다신론자인 것입니다.
②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 모세에게 스스로 밝힌 이름은 ‘나 여호와’와‘스스로 있는 자(Iam who Iam)'(출애굽기 3:13~14) 입니다.‘스스로 있는자[自存者]'란 자신의 존재 근원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 속성을‘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자존자라는 주장에 대해서 20세기 최고의 석학자 버트란트 럿셓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상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고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1원인에 도달한다. 이 제1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처럼 원인이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세계도 원인이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③ 창조주(創造主)로서의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첫 머리(창세기)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로 시작하여 하나님 6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한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창조설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왔다. 특히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구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의 이야기가 생명의 창조에 관한 절대적인 설명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설은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이 속속 그 베일을 벗어 감에 따라서 그 절대적인 권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④ 천지를 운행하시는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직접 천지를 운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천지를 운행하신다함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4계절이 바뀌는 것도, 비 오고 바람 부는 것도(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氣息)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 6:17/ 그 날에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당에 쏟아졌더라. 창 7:11),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동산에서 떠서 서산으로 지는 해가가 어떻게 이튿날 아침 다시 동산에 떠오르는 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그 긴팔로 서산에 진 해를 다시 끌어 올린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침마다 해를끌어 올려야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피로 하실까요?
⑤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주재(主宰)하시는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신앙활동을 금지한 것도,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끼리 총뿌리를 겨누고 있는 것도, 북에서는 김일성ㆍ김정일이 살아있는 신으로 숭앙받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문창극 후보자는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이 문제가 되어 결국 사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의 한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강연을 하며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해 “하나님이 왜 (우리나라가) 일본에 식민지로 당하게 만들었습니까?"라며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는 이조(李朝) 500년을 허송세월만 보낸 민족이다. 너희는 시련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강연에서는 "하나님이 남북분단을 만들어 주셨어. 그것도 지금 와서 보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문 후보자의 역사인식은 비단 문 후보자만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인식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일반 역사가들에 의하면 인류역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발전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36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도, 남북이 분단된 것도 거기에 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면 인간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며(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 죄를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의 책임도 당연히 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죄도 ‘신의 뜻’에 의해 지어졌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⑥ 전지전능한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그 능력이 한량없는 전지전능한(全知全能)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한 분인가?. 기독교 「창세기」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에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 이브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선악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따 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브는 사탄(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았을까 몰랐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몰랐다면 전지전능한 신이라 할 수 없고, 뻔히 알면서도 그런 시험을 했다면 이는 인간에 대한 기만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나 로봇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 먹고 안 따먹고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며, 그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과 선악과 따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만 있을 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그 근거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했기 때문에(창 1:26),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겉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면 인간도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여야 할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선악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인간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고 비로소 선악을 알게 되었다), 아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두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성경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인식됩니다. 우리가 “나는 내 삶을 결정할 수 있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오늘 이 강좌에 오게 된 것은 내 자유의지로 온 것이지, 누가 시켜서 마지못해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지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기독교 사상과 양립할 수가 없음에도, 아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두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변론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주장에 얽매인 교묘한 희론(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⑦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이것을 편재(遍在)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은 모든 변화 뒤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주는 하나의 멜로디이고, 신은 끊임없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가 시작이 있다고 하던, 없다고 하던지 신은 여전히 우주가 계속해서 움직이게 합니다.
이와 같이 신은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뒤에 신이 있으며, 아름다운 꽃 뒤에도 신이 있습니다. 우박과 천둥 뒤에 신이 있으며, 화재나 들 끊는 파리떼 뒤에도 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엽기적인 살인이나, 잔인한 행위의 배후에도 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모든 사건이나 사물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⑧ 사랑과 선(善)의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으로 선과 사랑을 들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덕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조건 주기 때문에 인간이 받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요, 환란 중에 돕는 자이다. 시편 46:1)
최근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이 뉴스를 통하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sns 상에 “하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러시아의 침공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침묵만하고 계세요?라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혹시 보신 분 있으세요?) 많은 사람들은 선인과 악인이 싸우면 하나님이 뽕하고 나타나서 악인을 징치하고 선인에게 상을 내리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를 살펴보아도, 사인 간의 다툼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약자의 편을 들어 준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강자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구약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과연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 ․ 이브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자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 버렸고(창세기 3 :22~23),,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좋아하는 여자로 아내를 삼자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해 버렸으며(창세기 6:1~3), 인간이 타락하고 교만해 졌다는 이유로 노아와 그 가족 외에는 홍수로 쓸어 버렸고,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켰으며, 바벨탑을 부수고 온 민족이 흩어져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걸핏하면 유대 민족에게 다른 민족과 싸우도록 명령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러고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⑨ 인격적(人格的)인 하나님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신념은 성서, 후기 유대교나 기독교의 기도문 신학 서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 성격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편을 드는 하나님이요(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네게 노하던 자들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하리라. 이사야 41:8~16), 신앙을 시험하는 하나님이며(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12), 질투하는 하나님이요(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에게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에까지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 출애급기 20:5~6),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심술궂은 하나님이며(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너는 쫒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신명기 13:6~9), 인간을 창조했음을 한탄하는 하나님으로(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광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따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호와의 성격도 예수 대(代)에 오자 크게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잃은 양을 찾는 신이 되고, 탕자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변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한쪽 편만을 드는 편협하고, 인간을 시험하고, 곧잘 질투하고, 잔인하리만큼 심술궂고, 자기가 한 행위를 한탄하는(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인격적 존재라는 데 대해서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2) 예수님
예수님을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라 하며, 이를 의역하여 구세주(救世主)라고 합니다. 구세주란 인류를 죄악의 굴레에서 구원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분
기독교의 『창세기』를 보면 인류의 시조인ㆍ아담 이브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낙원(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죄를 대신해 죽었다면 인간이 그 전과는 뭔가 좀 달라져야 할 텐데 인간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점점 더 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행적(行績)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의 죽음을 미화한 사실의 왜곡이요 날조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운명하였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임종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 39~50]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며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길 원하나이다.”하시고…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뜻이라…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가복음 15:34~37] 제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찾아보았지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겠다는 구절은 눈을 비비고 찾아 볼 내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복음」 에는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로마서」 에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4:25)’, 「디모데전서」 에는 ‘그가 사람을 위하여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2: 5)’등, 대속에 관한 기록이 있긴 하지만, 「신약성서」 는 저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집필했기 때문에 상이한 내용이 많이 있고, 예나 지금이나 복음서를 해석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공관복음서입니다. 그 공관복음서에 예수님의 임종 시 대속에 관한 기록이 일체 없고, 신학자들도 공관복음서에 없는 「신약성서」 는 정확성ㆍ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처형당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부여한 죄명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줄곧 자신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며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③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代贖],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6:6)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고, 개신교 내에서도 사뭇 다릅니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인간은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고, 칼뱅은 “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웠습니다. 16세기 초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벌어진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서며 종교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칼뱅이 예정설을 내세운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당에 간다면,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컨대 수능350점을 받으면 서울대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불합격시키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이 그 사람을 천당에 보내 주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칼빈은 천당에 가고 못 가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인간인가? 신인가?
예수, 그는 누군가? 인간인가? 아니면 신인가? 인간이면서 신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2,000여년을 두고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대표하여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태 6:16)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에는 예수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救世主)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예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비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2~3)
“주(예수)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 8-20)
이 말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에게 기도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하느님 안에 성부ㆍ성자ㆍ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이 있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종교회의(니케아종교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된 것으로써,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예수=하느님’이라는 등식은 여러 가지 이율배반이 따릅니다. 우선, 성서적으로 볼 때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어진 예수는 하느님과 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마태 16:19)거나, 예수가 감람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십자가 죽음을 면케 해 달라’(누가 22:42)고 애원한 구절 등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들 구절은 예수와 하나님을 엄연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3. 불교의 부처님과 보살님
(1) 부처님
부처님이란 말은 범어로는 붓다(Buddha)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이를 음역하여 불타(佛陀)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불타를 일반적으로 부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붓다를 의역하여 각자(覺者)라고도 하는데, 각자란 ‘깨달은 사람(분)’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이 부처님이기 때문에-깨달으면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에-부처님은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인류 최초로 깨달은 사람은 지금부터 2,600년 전 인도 카필라국 정반왕의 태자로 태어나신 고우타마 싯다르타(Gauta ma Sciddhartha)입니다. 석가모니(Sakyamuni)는 고우타마 싯다르타가 성불하고 난 뒤에 붙여진 존칭으로서 ‘석가족의 성자’란 뜻입니다.
‘위없는 바른 깨달음(아뇩다라 삼막 삼보리)’를 이룬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이 미묘한 물음에 석가모니 자신의 대답은 매우 확실하고 간결합니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하여, 늙고 병들고 죽지 않으면 안 될 몸이면서 늙음과 병듬과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그대들은 나를 좋은 벗으로 하여,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환난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될 몸이면서 근심과 슬픔과 고통과 환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장아함경.27-15)
석가모니 그는 사람입니다. 나와 더불어 포근한 체온을 공유하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무슨 까닭일가요? 사람만이 진실로 사람의 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뭇 왕들이 그의 발아래 예배하는 세존(世尊)으로서 홀로 높기를 원하지 않고 다정다감한 인간으로서 나와 당신의 범상(凡常)한 행렬에 동참하기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친구, 길동무인 것입니다. 그는 나와 당신과 더불어 기쁨도 함께하고 아픔도 함께하며 생(生)도 함께하며 사(死)도 함께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수고도 예정된 신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적인 가책과 연민의 아픔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유루(有漏)냐, 무루(無漏)냐? 곧 인간적인 번민이나 허물이 있느냐 없느냐가 교학상의 주요 쟁점이 되어 왔고 ‘부처님은 무루다. 절대완전하다.’라고 결론이 나 있지만, 석가모니의 완전 무루성은 바로 지극한 인간성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도 아미타부처님, 약사여래부처님, 미륵부처님 등 많은 부처님이 계시는데, 이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위 어뵤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그 지혜로서 과거ㆍ현제ㆍ미래의 3세와 한량없는 우주공간을 두루 사려 보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부처님들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은 전생에 법장비구로서 중생을 구제하려는 커다란 48서원을 세워 결국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라는 이상세계를 건설하여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며, 미륵부처님은 과거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으로부터 다음 생에 태어나 반드시 성불하여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성불시키는 용화세계를 구현하리라고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서 그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부처님입니다. 즉, 미래불인 셈입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표현하는 법신불(法身佛)이며, 약사여래 부처님은 과거에 12대원(十二大願)을 발하여 결국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구해주시는 부처님입니다.
(2) 보살
보살은 보리살타(Bodhisattva)의 줄임말로 께달은 존재(사람)이란 뜻으로, 각유정(覺有情) 또는 대사(大士), 고사(高士), 개사(開士)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보살은 보리살타(Bod -hisattva)의 줄임말로 께달은 존재(사람)이란 뜻으로, 각유정(覺有情) 또는 대사(大士), 고사(高士), 개사(開士)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이루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성불은 뒤로 미루고, 부처님을 보필하면서 일체의 중생을 먼저 깨달음의 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이며, 시방세계에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괸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중생제도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의 성품인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열심히 수행정진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정한 보살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불(成佛)하겠다는 서원을 일으켜서 보살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오늘날에 와서는 불교수행을 하는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여자 신도님을 보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승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입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서원이며, 자기가 쌓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이 회향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사찰 전각 안에는 대부분 주불(主佛)의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 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를 삼존불(三尊佛)이라고 합니다. 삼존불의 형태는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부처를 모시는 하나의 형태로 정착하였습니다.
① 석가모니불: 문수보살ㆍ보현보살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입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맡고 있으며,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중생제도를 돕고 있으며, 코끼리를 탄 모양이나 연화대 위에 올라선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형태로 협시보살을 모신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불국사의 대웅전에는 과거불인 제화갈라(提和碣羅, 定光如來)보살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특이하게는 가섭과 아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모신 곳, 약사여래와 미륵보살을 모신 곳도 있습니다.
② 아미타불: 관세음보살ㆍ대세지보살(또는 지장보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건설하신 아미타부처님의 좌우협시 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인데, 특히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이 따로 신앙이 될 정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앞에는 대자대비(大慈大悲)․천수천안(千手千眼) 등의 수식어가 붙는데, 이 보살은 대자대비를 근본서원으로 하여 그 명호를 부르거나 위기에 처한 중생에게 구원을 주시며 중생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합니다.
수많은 중생의 부름에 응하시므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있다고 하며 중생 앞에 나타날 때, 그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합니다. 이 때문에 관음보살님은 항상 자비로운 모습뿐만 아니라 악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아주 무서운 얼굴이나 대노상(大怒相)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예, 석굴암 11면 관음). 관음보살님은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으며, 연꽃이나 감로수병, 때로는 무기까지 들고 있습니다.
대세지보살은 지혜문(智慧門)을 표현하며, 형상은 머리에 쓴 보관의 정수리에 보병(寶甁)을 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대세지보살 대신에 지장보살을 모시는데, 지장보살님은 지옥에 있는 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 직접 지옥에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고 계시는 보살님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스스로 보관을 벗어 던졌기 때문에 까까머리를 한 형태이며, 육환장[지팡이]을 들고 있는데 지팡이의 정수리 부분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습니다.
③ 약사여래불: 일광보살ㆍ월광보살
동방 정유리 세계의 교주이신 약사여래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입니다. 일광보살은 화관의 일륜(日輪)을 이고 있거나 손에 지니며, 월광보살은 월륜(月輪)을 보관에 이거나 가슴에 지니며, 봉우리진 연꽃을 손에 지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1992.8.12 경주지역불교중고등학생연합회 수련대회/ 감산수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