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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 文】高麗奉善大夫軍器寺少尹洛隱公墓碣銘
公諱軒姓李永川人也永之李系出高麗平章事諱文漢世襲簪冕有諱大榮神虎衛大將軍封永陽君是爲公五代祖高祖諱得芬典工判書曾祖諱文卿保勝護軍祖諱松侶吏部侍郞考諱日忠主簿公之生卒年紀盖以世代悠遠累經兵燹文獻無徵祗以譜牃所載考之則公當麗末官奉善大夫軍器寺
소윤공 이헌의 묘소 少尹壽八十四墓禮安沙川越麓也字局辛坐之原嗚乎公生丁革命之辰潛光隱德不樂仕進爲遯跡自靖之計遍訪佳山水自永稅駕于禮安之沙川逮至曾玄赫世榮耀內外雲仍名賢相繼公之實跡泯沒雖若可恨天之所以報施於公者自有不掩而不朽者焉又何必深慨乎哉配淑人宣城李氏有諱元白之孫合之女先公沒始卜葬于沙川東麓亥坐之原有三男一女男宗實坡縣監贈參議塢直提學女吳元夏宗實二男可種可植俱无后參議有二男一女男孝孫奉禮贈參判誠孫女金有庸直提學有一男一女男凞良司正女權葺參奉參判有二男三女男欽縣監贈參贊鈞直長女朴有阜郡守南瑞雲縣監安從仁縣監誠孫一男仁堅進士司正有二男玉仝參奉銀仝展力副尉贈左承旨參贊有四男一女男賢輔知中樞號聾巖諡孝節立祠汾江賢佑習讀贈參判賢佐部將賢俊察訪女權謨直長有三男四女男賢弼忠順校尉賢祖賢哲司直女權甫均金長孫朴彦樑李友參進士進士有一男一女男賢東女金潤石玉仝三男琱參奉瑜參奉瑞左承旨三男二女男仁輔參奉仁弼參奉贈參判仁碩判官女金彦倫鄭公翰孝節公有八男一女男碩樑文樑察訪號碧梧希樑縣監號虎巖仲樑監司號賀淵季樑縣監號串巖閏樑判事號杏巖叔樑師傅號梅巖追享硏經衍樑司僕寺正女金富仁兵使號山南立祠洛川習讀有一男二女忠樑敎授贈參判女南崧文科監察琴應石主簿部將有三男一女男元樑亨樑貞樑女朱世增察訪有七男二女男宗樑進士國樑進士號暘谷堂遂樑汝樑生員世樑慶樑應樑女琴克仁梁允成校尉有一男二女男雄進士女郭崇武李士悌賢祖女安寬司直一男英出賢東一男芝府使琱有一男三女男希亨主簿女朴承枰閔僖安
瑜有三男一女男希常參奉希倫參奉號智仁堂希種參奉女朴承軾瑞有一男一女男杜壇女金彦璞進士仁輔一男之英參奉仁弼有三男四女男之華同樞之芳之蕃女權景純安國梁南胤叔金彦璣進士號惟一齋立祠龍溪判官有二男慶男禦侮將軍應男同樞宣武功臣文樑男元承進士福承全承僉樞女黃俊良牧使號錦溪立祠郁陽琴應侁金箕報縣監號蒼筠希樑男善承忠順克承生員仲樑男令承秉節校尉號東巖季樑男光承判決事號犁巖顥承僉樞號景巖明承號近巖閏樑男誠承奉事叔樑男敬承參奉號遯窩揚承世承企承忠樑男命弘贈參議號坤曰壽弘福弘贈參議號蘆雲德弘縣監號艮齋以扈從功臣贈吏參立祠
溪女琴應夏申汝瓘貞樑男逸民參奉國樑男永承奉事遂樑男德承主簿應樑男安承參奉雄男淑熙號錦溪命熙參奉芝男靑春察訪希亨男繼僉樞希常男得忠參奉希倫男聖鯉號樂窩希種男夢南主簿杜壇男唐賢僉樞號江左之英男夢鯉景鯉號種德女安潤屋正郞琴悌筍參奉朴毅長府尹贈判書諡武毅立祠九峯之華男佺引儀侃敎授號阿休之芳男偉奉事之蕃男儼都事號仙巖慶南男起憲僉樞汝憲號耘叟良憲應南男英震以下子姓亦多文行科宦之可傳而不能盡錄焉就其外裔而攷之則有若晦退兩先正彰明較著去公之世未遠趙月川朴嘯皐權晦谷諸賢永有聞焉于公有光斯益驗矣公之碑碣未知刱建於何代而去丁酉冬重磨改刻以表塋域迄于今五十餘年則石面苔荒字畫剝落且陰記簡忽難詳玆用合謀諸族兩位碣石一時改竪畧叙公世系及子孫錄如右系之以銘銘曰 裕其澤厚其仁理昭昭族振振始娥銘垂千億如可考視斯石 後孫 祥奎 謹識 ■ 고려봉선대부 군기시소윤 낙은공 묘갈명
공의 휘는 헌이고 성은 이씨이고, 영천인이다. 영천이씨의 계보는 고려 평장사인 휘 문한에서 나와서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다. 휘 대영은 신호위대 장군을 지내고 영양군으로 봉군되었는데 이 분이 공의 5대조부이다. 고조부의 휘는 득분인데 전공판서를 지냈고, 증조부의 휘는 문경인데 보승호군을 지냈고 조부의 휘는 송려인데 이부시랑을 지냈고 부친의 휘는 일충인데 주부를 지냈다. 공의 생졸 연기는 세대가 아득히 멀고 여러 번의 병란을 겪었기에 찾을 문헌이 없어서 다만 족보에 기재된 바를 살피니 공은 고려 말엽 당시에 봉선대부 군기시 소윤을 지내셨고 84세를 향수하셨고 묘소는 예안현 사천촌 건너편 기슭의 야(也)자 형국의 신좌 언덕이다.
아! 공은 혁명이 싹틀 때를 만나 만나서 재주를 숨기고 은근히 덕을 쌓으셨으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안정하실 계획으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두루 다니시다가 영천으로부터 예안현의 사천촌에 머무시게 되었다. 증손 현손까지 미쳐서는 세상에 명예를 빛낸 내외손 중에 명현이 계속하여 나타났으나 공의 실지 자취가 없어져서 비록 한스러우나 하늘이 공에게 베푸는 바를 스스로 숨기지 않고 있으니 영원히 전할 것인데 또 무슨 필요가 있어서 한탄만 할 것인가.
배위 숙인 선성이씨는 휘 원백의 손녀이고 합의 따님인데 공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처음 잡아두었던 사천촌 동쪽기슭의 해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3남 1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종실이고, 파는 현감을 지내고 참의에 증직되었고 오는 직제학을 지냈고 사위는 오원하이다.
종실의 아들은 가종과 가식인데 모두 무후이다. 참의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 효손은 봉례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되었고 성손이고 사위는 김유용이다. 직제학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량은 사정을 지냈고 사위 권즙은 참봉을 지냈다.
참판(효손)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흠은 현감을 지내고 참찬에 증직되었고 균은 직장을 지냈고 사위 박유부는 군수를 지냈고 남서운과 안종인은 모두 현감을 지냈다. 성손의 아들 인견은 진사였다. 사정(희량)은 2남을 두었는데 옥동은 참봉이고 은동은 전력부위를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참찬(흠)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현보는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는 농암이고 시호는 효절이고 분강서원에 봉향되었고, 현우는 습독을 지내고 참판에 증직되었고, 현좌는 부장을 지냈고, 현준은 찰방을 지냈고 사위는 권모이다. 직장(鈞)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현필은 충순위 교위를 지냈고, 현조이고, 현철은 사직을 지냈고 사위는 권보균과 김장손과 박언량이고 이우삼은 진사이다. 진사(인견)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동이고 사위는 김윤석이다. 옥동은 3남을 두었는데 조와 유는 모두 참봉이고 서이다. 좌승지(은동)는 3남 2여를 두었는데 인보는 참봉이고 인필은 참봉을 지내고 참판에 증직됐고 인석은 판관을 지냈고 사위는 김언륜과 정공한이다.
효절공(현보)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석량이고, 문량은 찰방을 지냈고 호는 벽오이고, 희량은 현감을 지냈고 호는 호암이고, 중량은 감사를 지냈고 호는 하연이고, 계량은 현감을 지냈고 호는 환암이고, 윤량은 판사를 지냈고 호는 행암이고, 숙량은 사부를 지냈고 호는 매암이고 연경 서원에 추향되었고, 연량은 시복시 정을 지냈고 사위인 김부인은 병사를 지냈고 호는 산남이고 낙천에 봉향되었다. 습독(현우)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충량은 교수를 지내고 참판에 증직되었고, 사위 남숭은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을 지냈고 금응석은 주부였다. 부장(현우)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원량과 형량과 정량이고, 사위는 주세증이다. 찰방(현준)은 7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종량은 진사이고 국량은 진사이고 호는 양곡당이고 수량이고 여량은 생원이고 세량과 경량과 응량이고 사위는 금극인과 양윤성이다. 교위(현우)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웅은 진사이고 사위는 곽숭무와 이사제이다. 현조의 사위는 안관이다. 사직(현철)의 아들 영은 출후하였다. 현동의 아들 지는 진사이다. 조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형은 주부이고 사위는 박승평과 민희와 안업이다. 유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상은 참봉이고 희륜도 참봉이고 호는 지인당이고 희종도 참봉이고 사위는 박승식이다. 서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두단이고 사위 김언박은 진사이다. 인보의 아들 지영은 참봉이다. 인필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지화는 동추이고 지방과 지번이고 사위는 권경순과 안국량과 남윤숙이고 김언기는 진사이고 호는 유일재이고 용계에 봉향되었다. 판관(인석)은 2남을 두었는데 경남은 어모장군이고 응남은 동추를 지냈고 선무원종공신이다.
문량의 아들 원승은 진사이고 복승이고 전승은 첨추이고 사위 황준량은 목사를 지냈고 호는 금계이고 욱양에 봉향되었고 금응신이고 김기보는 현감을 지냈고 호는 창균이다. 희량의 아들 선승은 충순이고 극승은 생원이다. 중량의 아들 영승은 병절교위이고 호는 동암이다. 계량의 아들 광승은 판결사를 지냈고 호는 여암이고 호승은 첨추이고 호는 경암이고 명승은 호가 근암이다. 윤량의 아들 성승은 봉사이다. 숙량의 아들 경승은 참봉이고 호는 돈와이고 양승이고 세승이고 기승이다.
충량의 아들 명홍은 증직이 참의이고 호는 곤재이고 수홍이고 복홍은 증직이 참의이고 호는 노운이고 덕홍은 현감을 지냈고 호는 간재이고 호종공신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오계에 봉향되었고 사위는 금응하와 신여관이다. 정량의 아들 일민은 참봉이고 국량의 아들 영승은 봉사이고 수량의 아들 덕승은 주부이고 응량의 아들 안승은 참봉이다. 웅의 아들 숙희는 호가 금계이고 명희는 참봉이다. 지의 아들 청춘은 찰방이다.
희형의 아들 계는 첨추이고 희상의 아들 득충은 참봉이고 희륜의 아들 성리는 호가 요와이고 희종의 아들 몽남은 주부이고 두단의 아들 당헌은 첨추이고 호는 강좌이고 지영의 아들은 몽리이고 경리의 호는 종덕이고 사위 안윤옥은 정랑이고 금제순은 참봉이고 박의장은 부윤을 지내고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무의이고 구봉서원에 봉향되었고 지화의 아들 전은 인의이고 간은 교수이고 호는 아휴이고 지방의 아들 위는 봉사이고 지번의 아들 엄은 도사이고 호는 선암이고 경남의 아들 기헌은 첨추이고 여헌은 호가 운수이고 양헌이고 응남의 아들은 영진이다. 이하 자손 또한 많고 문행과 과환이 전하고 있으나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어서 외손을 살펴보면 회재(이언적)와 퇴계(이황)같은 두 분 선정은 뚜렷하게 드러났고 공이 돌아가시고 멀지 않은 세대에 조 월천(조목), 박 소고(박승임), 권 회곡(권춘란) 같은 여러 어진 분은 소문이 길게 났으니 공의 후광이 있다는 것이 이처럼 더욱 징험되었다.
공의 비석을 어느 대에 처음 세웠는지는 알지 못하나 지난 정유년(1777) 겨울에 새로 다듬고 새겨서 묘소에 세웠는데 50여년이 지났으므로 돌에 이끼가 끼고 거칠어 졌으며 글자의 획이 떨어졌고 또 비문이 간단하고 소홀해서 상고하여 활용하기 어렵기에 여러 종친들이 합의하여 두 분의 비석을 일시에 다시 세우고 간략한 서문과 공의 세계 및 자손을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한다. 명에 이르나니, 은택이 넉넉하고 인자함이 두터우며 도리는 소명하고 자손은 드날리도다. 이 명을 시작으로 영원히 드리워지리니 옳게 상고하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후손 상규4)는 삼가 기록한다. 李祥奎(1774~1844):永川人. 字는 而晦, 號는 芝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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