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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은혜로 성전은 세워집니다. / 2016년 12월 11일 주일 예배
본문 / 시편 30:1-12
사랑에 눈이 먼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공부까지 잘하니 무슨 짓을 해도 밉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아들의 책가방을 정리하다 처음 보는 석판을 발견했습니다. 그 석판에는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의 손에 들려진 석판을 본 아들은 얼굴을 숙이며 잔뜩 겁을 먹었습니다. 아들에게 다가간 엄마는 친구의 이름을 지우고는 아들의 이름을 써서 선물을 주는 것처럼 건네주었습니다.
이 후에 아들은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훔쳐왔지만 어머니는 모르는 척 했습니다. 선생님이 찾아와 상담하면 오히려 화를 내며 아들 편을 들었습니다. 시간에 흘러 아들은 큰 죄를 짓고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흘리며 지켜봅니다. 판사는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아들은 머리를 떨구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판사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엄마가 흐느끼며 아들에게 다가가자 아들은 어머니 귀에다 무슨 말을 할듯하더니 엄마의 귀를 입으로 물어뜯었습니다. 그 아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석판을 훔쳐 왔을 때 왜 나를 혼내지 않았어요. 왜, 아들이 도둑으로 살다 죽어가는 데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다’ 말합니다. 성도들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어도 공의에 눈은 시퍼렇게 뜨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불의에 눈이 멀 수 없습니다. 오히려 눈이 먼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불의를 징계하시는 그 채찍으로 완성되어 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랑 받지 못할 자를 사랑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더럽고 추악한 죄인을 씻어 주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시는 그 사랑은 눈이 먼 사랑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져 구원이라는 열매로 결실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문 시편 30편은 하나님은 결코 어리석은 인생들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그 죄까지 묵인하는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죄로부터 성도들 떼어 놓아 온전한 의를 이루는 완전한 사랑을 성취해 가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시편 30편은 다윗의 시이며 성전 낙성가라 밝히고 있습니다. 건축물을 준공하고 감사하는 의식에서 부르는 노래가 낙성가입니다. 이스라엘이 건축물을 완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일은 성전 낙성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전 건축을 완성하고 감사하는 찬양으로 부른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시온에 성막을 설치했을 뿐입니다. 그는 성전 건축의 소망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셨습니다. 다윗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성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 직접적인 내용이 성전 건축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지도 않았고 본문에는 성전 건축에 대한 내용이나 그것을 노래하는 의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데 왜 본문은 성전 낙성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일까요?
학자들은 시편 30편이 성전 낙성가로 불린 이유에 대하여 추측하기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 귀환한 후에 느부갓네살이 파괴한 성전을 b.c 516년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 봉헌식이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무너진 성전을 b.c 164년 마카비가 중수하여 다시 봉헌한 수전절에 본시가 감사 찬양시로 선택되어 낭송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본문의 저자인 다윗은 성전 건축과 봉헌과는 무관하게 본시를 저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전혀 표면적으로 성전 낙성식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여 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 성도들이 파괴되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할 때 성전 낙성가로 본시를 특별히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본문에서 무엇을 보았길 레 성전 봉헌을 생각했을까요? 일반인들이 결혼식 축가로 많이 부르는 노래는 주로 사랑을 고백하거나 다짐하고 결혼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제목을 보면 ‘고백’ ‘영원히 둘이서’ ‘사랑합니다’ ‘감사’ 이런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결혼식 축가로 이런 노래를 부르면 어떨까요?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이 노래는 제 아내 오빠의 결혼식에 축가로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저런 노래를 축가로 부르나하고 깜짝 놀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사노라면’ 이라는 축가가 더 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노래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사랑을 노래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제 당신들은 전쟁보다 더 치열한 전선으로 나갑니다. 그러니 단단히 각오를 하십시오. 십자가의 죽음과 자아 파쇄의 길로 들어가서 믿음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라 노래한다면 결혼식에 너무 겁을 주는 것일까요?
제가 만약 여러분의 결혼식에 ‘서쪽하늘 붉을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 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를 축가로 불러도 이상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성전 봉헌을 단순히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리는 건축물과 그 과정을 마치고 기념하는 것으로만 보면 시편 30편은 결혼식장에서 생일축가를 부르는 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헌해야 될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의 피로 산 성도의 몸과 영혼임을 깨닫는다면 본문이 왜 성전 낙성가로 불려 졌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저자인 다윗의 믿음의 고백과 그 삶을 통하여 성도의 몸 된 성전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세워져 봉헌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본문은 다윗의 노년에 지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사다란 했던 자신의 인생의 말미에서 일생동안 함께하신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다윗은 본문을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인생은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말씀하심으로 성도는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터 위에 믿음의 집을 세워나가는 건축자임을 알리셨습니다.
타락하여 죄인 된 인생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길은 어떤 과정일까요? 다윗은 본문 5절에서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봉헌되어가는 성도의 믿음의 집을 건축하는 연장은 하나님의 노염과 은총입니다. 건축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노염과 은총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성도를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으로 만들어가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노염이라는 연장을 사용하시면 성도는 고난과 고통의 어두운 밤을 눈물로 지세야 합니다. 교회를 리모델링할 때의 일입니다. 건축자는 가장 먼저 굴삭기로 외벽을 따라 기초를 파고 철근 작업을 한 후 콘크리트를 부어 기초를 단단히 다졌습니다. 그리고는 낡은 창틀을 뜯어내고 삐뚤어진 외벽을 컷팅기로 잘라내었습니다. 저는 여기 저기 외벽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 이러다 교회 다 부수는 거 아냐. 커팅기가 요란한 괴음을 내며 벽을 자를 때면 제 마음이 아픈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불안한 맘을 알았는지 건축자는 목사님, 다 부수는 것 같죠? 나중에 일이 마무리되면 멋있을 겁니다. 하는 말에 불안한 마음은 좀 가셨지만 그래도 일이 잘 되가는 것일까 하는 걱정은 가라 않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이 오기 전에 이른 아침부터 마치 폭격을 맡아 폐허가 된 것처럼 처참하게 남아 있는 성전 안을 돌아다니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성전이 깔끔하고 예쁘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잘 못된 부분과 낡은 부분을 과감하게 부수하고 잘라내는 과정인지라 오히려 건물은 더 어망인 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건물의 설계도를 갖고 일을 하는 건축자는 다릅니다. 그는 정확하게 측량해서 잘라내야 할 부분은 과감하게 털어냅니다. 그는 건물에 대한 완성된 미래를 향해 나가는 데 거침이 없습니다. 이거 저거 털어내 지시하면 인부들은 사정없이 부수고 그걸 지켜보는 저는 마음을 졸이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껏 우리 인생의 건축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마치는 그 날까지 우리의 인생의 믿음의 집을 뜯어 고치는 그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노염이라는 커팅기가 성도의 인생 속에 들어와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잘라내기 위해 작업할 때 성도는 심한 고통과 고난을 받게 됩니다. 인생이 무너지고 파괴되어 더 이상 소생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이 찾아옵니다.
한 번은 인부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간 후 작업 현장을 둘러 보다 일을 마무리 하지 않고 간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건 끝내놓고 갔어야지 하고 푸념하며 그 일을 제가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가보니 인부들끼리 야, 누가 이거 이렇게 했냐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저는 뭔가 잘 못된 상황임을 재빠르게 눈치 채고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지으려는 집은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입니다. 세상이라는 기초를 깊게 파고 그 위에 건강을 다지고 돈과 명예를 높게 쌓아 올려 감히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집을 지으려 합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세상의 힘과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연장을 획득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도의 건축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인본주의 위에 지은 성도의 그 인생의 건축물에 노여움을 일으키십니다. 내 감정과 생각과 뜻을 의지하여 내 힘과 정성으로 이룩한 업적에 대하여 인생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어떤 목사님의 프로필을 보니 과거에 자신이 목회한 교회에서 땅을 몇 평 구입한 일까지 적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장실이나 보일러실을 건축한 업적은 없나 하고 본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100억 짜리 교회 건축이나 1년에 천명 등록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파이가 커지면 인정하려고 합니다. 타락한 인생들이 이렇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그저 외모만 본다고 책망한 것처럼 타락한 인생들은 밖으로 드러난 세상의 가치를 쫒아 가며 육신을 위한 인본주의 집을 건설하고자 하는 부실 시공업자들인 것입니다.
인부들이 제 한 일에 대하여 노여움을 일으키고 그것을 사정없이 부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성전을 아름답게 꾸밀 비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인생에 분노를 쏟아 징계를 내리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태초에 하나님의 자녀로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 부름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셔야 될 거룩한 나라며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만왕의 왕이 거할 거룩한 궁전으로 세워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룩한 당신이 거할 처소에 성도가 그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탐심에 종노릇 하는 그 인본주의의 불량한 날림 무자격 건축자가 시공하는 역사에 노여워하지 않겠습니까?
네 몸은 내가 거할 나의 거룩한 성전인데 내 집에 감히 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본문 6절에서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다윗이 과거에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세상의 풍요와 번영을 마치 자신의 힘과 지혜로 성취한 것 인양 착각하고 교만에 빠졌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을 모셔야 할 성전에 자신이 떡하니 앉아 교만이라는 자기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노여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성도에 대한 직접적인 노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죄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분노하면 그것은 징계가 아니라 심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집을 다 허물어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받아들여 죄의 집이 된 그 집에 노여움을 쏟아 그 집에서 그 죄를 떨구어 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노여움과 징계에 성도는 아파 고통스러워합니다. 두려워 떨며 낙심과 절망과 고난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 고난의 시간을 통해 성도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우리의 인생이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까? 불의한 자들이 형통하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는 되는 게 없을까 불평하지 않았습니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왜 나는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이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내가 잘 되는 꼴을 못 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잘 되는 꼴을 그냥 보고 계시면 안 됩니다. 성도의 인생은 내 안에서 하나님이 잘 돼야 비로소 잘 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이란 자신의 왕 됨과 주인 됨으로 세상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려는 육신에 속한 옛 성전이 하나님의 노여움과 징계로 낱낱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거룩한 믿음의 성전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자 다윗의 인생은 근심과 고통과 슬픔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7절로부터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호소합니다. 9절에서는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자신의 처지와 그 고통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로 비유하며 ‘진토’가 되었다 말합니다. 즉 생명을 소실한 육체가 되었다고 탄식하며 주께 부르짖고 간구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에 성도는 거의 죽은 자처럼 됩니다.
그런데 성전 리모델링을 하던 건축자들이 부수고 잘라내고 털어낼 것을 모두 다 마친 다음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작업을 시작하자 제 마음에도 평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하나 만들어지는 일들을 지켜보자 기쁨과 기대로 흥분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을 졸였는데 말입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기대는 조금 전에 건축자들이 나를 근심케 했던 그 일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노여움과 징계는 성도의 사랑에 눈이 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잠언 3장에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면 자식은 그 징계를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서 나온 징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때로는 사랑이 아닌 분노만을 쏟아 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언제나 사랑과 긍휼과 인자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는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징계로 인하여 성도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은 이번에는 은총이라는 연장을 들고 성도의 집을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나가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는 길은 하나님이 성도의 인생에 개입하여 일하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인생 안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진토가 되어가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은혜를 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너져 내린 인생을 다시 온전하게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돕지 않으신다면 인생들은 반드시 심판을 견딜 수 없는 집을 짓게 됩니다. 그 집이 겉으로는 크고 화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한다 해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는 것은 결국 타락한 자신의 자아일 뿐입니다. 이 시대는 그런 사람을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추켜세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집을 이 세상에 건설해 보길 얼마나 원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할 수 있는 집말입니다. 저도 그런 집을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가 지은 집을 무너뜨렸을 때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세상이 부러워하는 집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무 잘 부셔 놓으셔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억울하게 교회에서 밀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보란 듯이 교회 바로 앞에 개척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어라 전도해서 교회를 키웠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억울하게 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힘으로 복수하기 위한 일념입니다. 어느 날 그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들아, 영적인 목회를 하고 영적인 목회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육신의 속한 옛 성전을 허심은 하나님을 모신 새 성전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생들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집을 지어 보란 듯이 성공해 보겠다고 이를 악무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인생 안에 개입하여 일하기 원하시는 건축자이신 하나님을 환영하며 겸손하게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그것을 은혜로 성취하기 원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만이 성도의 인생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일을 이루기 위해 그 은혜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두 번 지으면 빨리 죽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관을 건축한 업자는 저에는 건축이 끝나면 대개 집주인과 원수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말을 합니다. 집주인과 건축자와의 갈등은 빈번한 문제가 됩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 내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들의 피로 성도의 몸을 사시고 그 몸을 하나님의 소유로 등기하시고 그 몸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 집을 얼마나 사랑하시겠으며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성도들에게 너의 몸은 너희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집주인도 건축자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집주인이고 하나님이 건축자이면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공사는 빈번히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선하신 목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그 자녀의 집을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를 파괴하려는 것은 악한 마귀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노여움에 근심하고 놀라기도 하지만 그 징계는 잠깐일 뿐입니다. 징계는 길고 은혜는 짧다면 어떻게 그 노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지날 때에는 은혜는 잠깐일 뿐이고 징계는 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육신의 삶은 영원한 성도의 인생에서 순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젊었을 때 여러분의 인생은 더디기만 했지만 이제 여러분의 인생은 날아가는 화살 같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인내해야 할 노여움은 잠깐입니다. 그 노여움을 참아낸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원함을 생각하면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먼 것입니다.
다윗은 11절에서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노래하며 하나님이 은혜와 그 선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기쁨은 역시 자신의 인생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그 안에 좌정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노래할 때입니다.
다윗은 4절에서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찬양은 새 노래로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세워진 그 영광스런 나라와 성전을 볼 때 그 은혜에 대한 노래는 날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고 영원한 감사와 찬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배당 봉헌식에 가면 여러 가지 감사패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건축하고 봉헌하며 왜 사람이 영광을 받아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과거에 그 감사패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안 받겠다고 사정을 해도 주는 사람은 기어이 주려고 합니다. 결국 그것을 미리 낚아채어 숨겨 논 다음에야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성의도 무시하는 교만하고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비난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만찬가지입니다. 내가 받아야할 영광은 없습니다. 날을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쏟으신 그 주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데 제가 어떻게 그 분의 은혜를 찬송하지는 못할망정 그 영광을 가로챈다 말입니까?
다윗이 1절과 2절의 고백하는 것처럼 나를 끌어 내사 원수와 모든 대적들로부터 구원하시고 그 죄에서 나를 고쳐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평생 즉 영원히 잊을 수 없어 그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3절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노래합니다.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은혜만을 노래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 받아야 할 옛 성전을 십자가의 보혈로 허신 것도 주님이시고 그 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 성전을 세우시는 것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그 갚을 수 없는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져 가는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십사 장로들은 머리에 쓴 금관을 벗어 하나님 앞에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이 그들에 허락한 것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차마 영광을 조금도 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성전 된 성도의 믿음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어떻게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도는 12절에서 선언하는 다윗처럼 하나님, 영원히 죽어도 부족할 이 죄인을 그 은혜로 용서해 주시고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성전 삼아 영화롭게 하시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영원히 감사하며 나의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나이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날마다 육의 속한 옛 집은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만을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봉헌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