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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Neckless of Time-
12.탐사와 진실...
숲...숲은 대지의 모든 축복을 안은 것처럼 사시사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봄이 되면 가녀린 가지에 푸른 빛깔의 신발이 신겨지고, 여름이 되면 한없이 발을 늘려 가다가 가을이 되면 파란 꿈을 접고 새로운 하늘을 준비하고...겨울이 되면 가녀린 가지는 발이 시려 이리저리 흔들린다. 숲은 그렇게 회생하고 번창하고 저물어 가고 잠을 잔다.
그러던 숲 가운데, 갑자기 하얀색 마법진이 바닥에 생겨났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강렬해지고...그러던 것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파핫
“...후아.”
“다 무사히 왔나요?”
“아, 네. 일단 모두 문제는 없는 것 같네요.”
마법진의 하얀색 빛이 사라지면서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다. 데르나와 해왕, 그리고 장로...그러나 그들말고도 엔센스터로 활동하는 5명의 사람들이 같이 동행했다. 쌍둥이 형제지만 사고방식은 전혀 다른 두 남자는 각각 펠레어 라그니트, 할레어 라그니트, 전사로 활동할 엔센스터였고, 그 옆에 길게 기른 금발을 중간에 질끈 묶고 무표정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여자는 궁사로 레이아 엘라스트, 그리고 옆에서 약간 호들갑스럽게 일행을 살펴보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애는 성직자 네라 클라이어. 그리고 그 뒤에서 거대한 M249머신건을 들고 있는 남자는 디폴트 라네스타라고, 총 쏴 본 적은 거의 전무하다 싶은 해왕에게 데저트 이글을 건네준 아저씨(?)였다. 모두 장로가 만약을 대비해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귀찮은 게 굴러들어왔으니...
“언니, 언니는 괜찮아요? 고대유적을 쓰느라 조금 위험했을 텐데...”
...데르나를 언니라 부르기 시작한, 어제 일행을 안내해 준, 금발 긴머리를 찰랑이는...일행과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애...일행 중에서 마법을 가장 잘 한단다.
“나야 괜찮아. 근데 장로님, 어디로 가면 돼죠?”
데르나는 대충 그렇게 대답해 주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장로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장로가 나직이 대답했다.
“...모른다네.”
“...네?”
“텔레포트 플레이스의 종점은 매번 다르게 바뀌거든. 그래도 아틀란티스 근처지만...”
“맞아요. 언제는 바다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소금물만 잔뜩 먹었다니깐.”
장로와 소녀의 말에 데르나는 왠지 허탈하단 표정이었다. 하긴 텔레포트 플레이스의 특성처럼, 끝에 또 다른 플레이스가 있다면 그 곳으로 나오겠지만 지금처럼 문이 없는 경우 그 주변 어느 곳에 떨어질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 곳이 용암이든 바다든 절벽이든. 이렇게 안전하게 도착한 게 더 이상해 보일 정도로.
“...그래도 도착점 텔레포트 플레이스가 없는 게 다행이예요. 오히려 있었다면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겠지만 적으로부터 역으로 이용당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엔 데르나도 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지금 당장 걱정되는 건 이제 어떻게 아틀란티스에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소녀가 나서더니 가만히 중얼거렸다.
“하나님, 저희가 가야 할 길을 밝혀 주세요.”
...주문이라기보단 마치 어린아이의 천진한 기도 같았다. 모습도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감는 게 오히려 세상에 때묻지 않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주변에 희안한 일이 일어났으니...
번쩍
순간 대지에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빛줄기는 몇 라쳬 뱀처럼 몸을 틀더니 일정한 방향을 가리켰고, 엔센스터들은 주저없이 그녀를 선두로 그 불빛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일행도 어리벙벙한 얼굴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때 데르나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정식 이름은 너무 길구요, 세라프라고 불러주세요.”
발랄하게 대답한 그녀를 보며 데르나는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누구에게 들었더라.....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일행은 어느덧 숲을 벗어나 드넓은 바다에 도착했다. 날씨는 화창. 물놀이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
“이야아~!”
“바다다!!”
제일 먼저 좋아하고 달려나간 건 해왕과 데르나였다. 데르나야 맨날 숲 속에 살다가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반가웠지만 일년에 한 번 갈까말까한 바다를 이런 곳에서 보는 해왕이 더욱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그러나 둘 다 바다의 쌀쌀한 파도 대신 앞에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에서 잠시 멈칫거려야 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풍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뒤에서 푹신한 백사장을 밟고 오던 장로와 엔센스터들은 그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한국인들은 바다에 다가갈 시간조차 없다더니 저 모습이 영국사람들에겐 딱 그 꼴이었던 것이다. 뭐 그것이 고성장을 이룬 한국의 저력이겠지만, 원래 적당적당 해서 놀고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영국으로썬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장로는 애써 그들의 새끼 참새같은 시선-무엇을 갈구하는 눈빛...-을 외면한 채 빛무리의 끝 백사장에 다가가 손을 휘저었다. 엔센스터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서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해왕과 데르나는 그녀가 뭐하는 건지 몰라 물끄러미 장로를 바라보았다.
백사장에선 곧 아까 탔던 분수 속 텔레포트 플레이스를 구동시킨 버튼과 비슷한 석상의, 손바닥만하게 동그란 판을 발견할 수 있었따. 그러나 장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손을 흔들었고, 결국 그 손바닥만한 판은 거의 공책 하나의 크기 정도로 넓혀졌다. 장로는 그 단추에 지그시 손을 대고서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야페그(언:Un) 넨크리(락:Lock)”
저것도 텔레포트 플레이스에서 외웠던 주문,...그렇게 생각하던 해왕은 곧 단추 위에 은은한 마나가 덧씌워지더니 아예 단추에 내제되어 있던 마나가 사라져 버린 것을 느꼈고, 곧 장로는 그 단추를 가만히 손으로 눌렀다. 그러자...
..............쿠구구구
“...?!”
바다가 잔뜩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울림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마치 모세의 기적을 현실로 보듯 파도가 심하게 출렁거리더니 바닷길이 좌우로 갈라지는...게 아니라 바다 밑에서 길다란 빛의 무리가 모여들었고, 그 빛의 무리는 이윽고...
“...와아.”
거대한 바다 위 다리를 형성했다.
10여 분을 걸었다. 그러나 아직도 빛의 길은 끝이 나지 않았다. 좌우를 보니 바다도 꽤 깊어진 것 같은데... 문제는 해왕이고 데르나고 그다지 수영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왕은 잠수조차 하지 못하는 맥주병이었으며, 그나마 호숫가에서 약간의 유년 시절을 보낸 데르나는 잠수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그녀 역시 발 끝에 땅이 없으면 허우적대는 소주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다리가 넓어서 왠만하면 빠지지 않을 거라는 것 뿐.
“어이, 바다가 꽤 깊지?”
그때 약간 겁먹은 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뒤를 돌아보았고, 그, 그...누구더라??
“아, 예. 생각보다 꽤 깊네요. 근데...죄송하지만 누구시...더라?”
“이런, 이런...벌써 까먹은 거야? 나는 할레어 라그니트. 그냥 할레어라 불러.”
남자의 말에, 아니 할레어의 말에 그제야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할레어도 자신을 알아 주었다는 것에 미소를 그리며 데르나를 살짝 바라보았다.
“아참, 이 바다의 전설을 알아?”
“예? 전설이요?”
“응. 옛날에 이곳에 인어가 살고 있었대.”
인어는 듣기만 했지 본 적이 없던 데르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할레어의 말에 집중했다. 인어 못 본 것은 해왕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인어가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아, 이런 인어는 있을라나? 몸이 물고기고 다리가 인간다리인 인어....크크큭
“...왜 웃어?”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손사례를 치는 해왕을 추궁하는 할레어를 보며 데르나는 빨리 이야기해 달라고 했고, 할레어는 조용히 대화를 시작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인어는 엄청 예쁘다더라. 세라프처럼 찰랑이는 금발에 네라처럼 귀엽고도 레이아처럼 성숙한 미모, 그리고 늘씬함 몸에다....”
퍽
“아악! 우씨, 왜 때려, 레이아!”
“...거기서 왜 내가 나오는 건데?”
꽤 지성있게 생겨선 지금까지 과묵하게 한 마디도 없던 레이아였다. 할레어는 난데없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하여간 그렇게 아름다운 인어가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면?”
‘캑...인어공주...’
해왕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데르나가 동화를 읽었을 리는 없고...
“정말요?”
...그럼 그렇지. 데르나의 호응에 힘을 얻은 할레어는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그렇다니까.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떤 한 남자를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결국 자기 목소리를 팔고 다리를 얻었어. 하지만 뭐 하겠니. 목소리도 없고 언어도 모르는데. 그래도 편지나 쓸 요량으로 언어를 배웠는데 하필 그 언어로 남자가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은 거야. 인어는 남자도 죽고 자기도 죽으려 하지만 그의 행복을 빌며 바닷속으로 떨어져 물거품이 되었지. 그래서 가끔 밤에 이곳을 오면 지금은 사라진 그 인어가 노래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단다.”
“어머나...너무 불쌍하다”
“그렇지, 그렇지. 근데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에? 그게 누군데요?”
“그 남자는 바로 우리 라그니크 가문의 중조할아버지야.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어땠냐면...”
퍽
“크악! 쓰읍! 형은 또 왜 때려!”
“이 자식이 대드네? 아직 어린 애들한테 무슨 거짓말을 해 대는 거냐!”
“...그럼 다 거짓말이었어요?”
“응?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해하는 그와, 그를 노려보는 그의 형과 데르나...결국 할레어는 묵사발이 된 채 다리를 질질 끌며 일행의 뒤를 따라와야 했다.
이윽고 그들은 빛의 길 끝에 다다갔다. 그러나 빛의 다리 끝에넌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망망대해만 있을 뿐.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가? 이제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게 데르나가 의도한 뜻이었지만, 그냥 듣기엔 마치 은밀한(?) 곳에서 이상한(?)짓을 하는 아이들을 부르는 경찰과 같은 말투였다.
“여기서 기다리게나. 곧 놀라운 걸 보게 될 테니까.”
장로는 그렇게 말하고 곧 다리의 맨 끝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고, 이어지는 조용한 목소리 하나.
“녹스 쉘 옐름 주 샌스트 그라브 랄 일, 안흐(디) 스데(스) 로리넨(펠).”
그러자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바다에 물감이 뿌려지듯 서서히 초록빛 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섬....보통 섬들과 같은, 울창한 나무들과 수풀로 이루어진 원형 섬이었다. 그러나 보통 섬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사람이 없다는 것과 그리스 유적처럼 아름다운 모양이 새겨진 보도블럭이 쫘악 깔려있다는 것과, 옛날에는 화려함을 자랑했을 왕궁과 건물, 사원들이 와르르 무너져 있다는 것 뿐? 유럽과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이 섞인 것 같은 섬...이제는 굴러 다니는 인공 돌들과 암울한 벽돌만이 아로새겨진 섬...
“...아틀란티스에 온 걸 환영하네.”
터벅 터벅
“으음...이건...양각 문자인가? 데르나, 읽을 수 있어?”
“도 룬어네..죄다 룬어로 기록되어 있어. 으음...”
데르나와 해왕은 엔센스터들의 지킴 하에 과거엔 중요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곳-신전이라든가 왕궁이라든가-을 전전하며 링 오브 스페이스에 대한 설명이 담긴 돌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자신의 목걸이와 아틀란티스 사이에 연관된 일을 더 자세히 알아 보려 했는데, 물론 간단히는 찾을 수 없을 테고...아무래도 엔센스터가 가지고 온 텐트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을 듯 했다.
“...단순한 시야. 사랑을 찬양하는 시....하아....”
...또 시군. 하여간 지금까지 발견한 글자들 중에서 공문서는 찾아보지도 못했다. 이 곳은 아닌 것 같고...결국 일행은 또 그 건물을 나오고 말았다. 그나마 제일 성한 건물이었는데, 하긴 방금 일행이 나온 건물은 신전인 데다가 놀라울 정도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일행이 찾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였다.
“여기요! 여기 석판이 포개져 있는데...”
옆에서 돕는다고 나섰덴 세라프가 또 다시 신전 안에서 책같이 포개어져 있는 돌덩어리들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해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을 받아 들고 데르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쿵
“.............”
“.............”
“...이걸 읽어보라고?”
“응.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데르나는 탐탁치 않은 얼굴이었다. 저 신전에서 나왔다면 기껏해야 찬송가나 축시 몇 장이 전부일 텐데...그래도 읽으라니깐. 데르나는 좋게좋게 생각하며 판에 다가가 살짝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잔잔하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은 곧 커다란 희열로 바뀌었다.
“...이것은...?!”
“무슨 내용인데?”
“왕궁에 대한 안내 책자야.”
“뭐?”
안내책자? 그렇다면 왕궁에 대한? 근데 안내책자면 좀 가볍게 만들 것이지...
“이렇게 무거운 게 어떻게 안내책자가 되는 거야?”
“아무래도 한 곳에 비치해 놓고 볼 수 있도록 만든 모양이야. 으음...디폴트 아저씨, 이것 좀 들어 주시면 안될까요?”
“응? 아, 그러지.”
데르나가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디폴트에게 부탁하자, 마침 심심했던 그는 선뜻 승낙하며 해왕과 세라프에게서 그 커다란 돌들을 안아들었다.
“읏차! 생각보다 무겁네?”
“그걸 들고 있었던 저희는 어떻겠어요.”
해왕과 세라프는 살았다는 듯 손을 탁탁 털며 서로를 바라보곤 미소를 교환했다. 그리고 어느새 옆에서 다가온 세라프와 함께 그 돌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으음...이건 서재 같은 곳인가 본데? 여기 자료가 있을지도...”
“글세? 아직도 문헌이 남아 있을라나?”
“저기요, 저기요. 여기 뭐 비밀보관소 같은 게 있는 모양인데요?”
“....뭐?”
세라프의 지적에 데르나는 그 곳을 바라보았다. 위치는 왕궁 앞 커다란 광장 가운데.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맣게 써 있는 글씨는..
“...문을, 여는 데는, 세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
...세라프가 그만 해석을 해 버렸군. 데르나는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라프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길게 기른 금발, 아니 엄밀히 말해서 끝이 꼬불꼬불한 웨이브 머리에 얼굴은 예쁘다 못한 여리고 귀여운 티가 있었지만, 어찌 보면 무척 다 자라 버린 어른 같았고, 또 거부할 수 없는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불분명하고...해왕은 그녀가 누구일까 밝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였다.
“..여기가 우리가 있는 데고, 저쯤 해서 석상이 있었을 테니까 왕궁은 저쯤 될 거야. 왕궁 한 가운데 지하석실.”
“아아, 그래? 위치를 알았으니까 다행이긴 한데...그 곳에 없다면?”
“...백문이 불여일견.”
그렇게 디폴트의 목소리를 간단한 고사성어 하나로 일축해 버린 해왕. 그러나 그의 눈은 석판이 아닌 데르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뭔가가 느껴진다는 것은....뭘까?...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
지이익 터엉
슈아악 팍
갑자기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자 레이아는 활을 당겼고, 할레어는 등에서 드로잉 액스를 들어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적중하는 순간 한 남자가 뒤로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악!”
콰당탕
“...!”
“뭐야?”
“장로님, 어느새 녀석들이 이 안으로 몰려온 모양입니다!”
다급한 펠레어의 목소리에 일행은 모두 각자의 무기를 꺼내며 전투 준비를 했다. 펠레어는 긴 대검을, 할레어는 조그만 손도끼 하나와 짧은 검을 들었고, 레이아는 궁 대신 석궁을 들었으며, 네라는 신성력을 끌어들였고, 디폴트는 M249 대신 Ak계열의 라이플을 가방에서 꺼내었다. 해왕도 디폴트가 준 데저트 이글을 들고 쓰러진 기둥에 엎드려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미 들켰다! 순순히 이리 오는 게 좋을걸?”
디폴트가 AK를 이리저리 돌려 가면서 외쳤으나 근처 숲이나 무너진 기둥이 움찔 하는 느낌만 들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자 디폴트는 사방으로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다다다다
피피핑 퍽 팡
유적에 난데없는 총성이 퍼지고, 이번엔 아까보다 더 주변이 흔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던 수풀에서 곧 검은색 옷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일어나 일행을 조준했고, 일행은 본능적으로 근처의 유적에 몸을 숨겼으나 다음에 이어져야 할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 자식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낭패라는 듯한 할레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그 쪽에서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표 한 사람만 나와라! 협상을 하자!”
“...장로님, 녀석들이 협상하자는데요.”
디폴트가 가만히 옆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장로를 향해 물었고,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펠레어를 보며 말했다.
“으음... 펠레어, 저랑 같이 가시죠.”
장로가 멀리 있는 펠레어에게 제안하자, 펠레어는 장로를 도와 가운데로 나섰다.
“...대표 한 사람만 나오라고 했을 텐데?”
“..노인이니 그냥 봐 주시지?”
“...알겠소이다.”
그렇게 말하던 상대 남자는, 복면으로 가려 잘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고, 백인인 듯 했으나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요구 조건은?”
“링 오브 스페이스와 네클리스 오브 타임을 얻는 것. 그쪽은?”
“...우리는 그것을 지키는 게 목적이라네.”
장로가 가만히 상대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상대는 슬쩍 코웃음을 치는 듯 했고, 곧이어 말을 이었다.
“...그럼 아예 협상 자체가 되지 않겠군.”
“그렇구만. 후훗.”
철컥
“쉴드!!”
타앙 파아앙
급시 휠드를 전개한 장로에게 한 가닥 총알이 날아왔고, 총알은 쉴드에 맞아 철과 철이 부딪치는 듯한 맑은 소리를 내며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장로는 서둘러 엄폐물로 들어갔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두두두둑
타타타타
타앙 타앙 피피핑 퍼억 팍
“젠장...열라 많네.”
어느새 M249를 내갈기는 디폴트. 그리고 그 옆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권총을 쏘아 대던 해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 번 총을 사용해서 적을 쓰러뜨린 적이 있는 해왕은 그다지 총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조준이 흐트러지는 건 왜일까?
“지금 한 20명 되나요?”
“아니! 30명도 넘는 것 같아! 40명? 45명?”
급한 디폴트의 목소리 사이로 탄창을 갈아끼운 해왕은 알겠다는 듯 비장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별반 긴장되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자기만 싸우는 게 아니라 6,7,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같이 싸워 주고 있으니까. 뒤에서 활을 쏘고 마법을 쓰고 기습전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어쩌면 학교 때처럼 성진 혼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터엉
파악 콰당탕
레이아는 활을 죄는 동안 엄폐물에 숨었다가 쏠 때는 몸을 일으켜 바로 활을 나렬■고, 어느새 그냥 궁으로 바꿔 버린 화살은 날아가는 족족 적의 몸에 박혀 버렸다. 게다가 네라는 가끔 부상을 당한 아군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네라가 치료를 하는 동안 그 시간을 번 것은 세라프의 희안한 마법들이었다.
“하나님, 저희를 공격하는 적을 붉은 구체로 벌해 주시길...”
파앙 쿠아아아....콰콰쾅
“크아악!”
“제길, 마법사단은?!”
그렇게 녀석들이 앞에서 불구덩이와 화살, 그리고 총에 맞아 쓰러지는 동안 숲 속에선 조용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고...
슈악
서걱...털썩
“큭! 이쪽에서...!”
그러나 마악 도끼와 검을 든 사내들을 발견한 녀석은 방아쇠도 당겨보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할레어와 펠레어가 달려나갔다.
가끔 숲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성과, 적에게 날아가는 마법과 화살, 총알, 그리고 그 뒤를 받쳐주는 네라의 신성력을 보며 해왕은 엔센스터들이 훌륭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으윽...지금 몇 명이 당했지?!”
“교신이 끊겨진 인원만 23명입니다!”
“제기랄!”
저쪽에서 욕지거리가 확 튀어나오자 해왕은 살짝 미소를 그렸고, 은연중 쉴드를 형성해 녀석들의 총을 막아 나가던 데르나도 똑같이 앙큼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갑자기 이들이 미소를 지워 버리는 한 마디 말이 들렸으니...
“대장님! 지원군이 곧 도착한답니다!”
“그래? 잘 됐군. 우리는 그 동안 저 녀석들의 발을 묶어 놓는다!”
다 들리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드는 적장을 통해서 응원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 일행.
“젠장, 장로님! 계속 버티고 있을까요?”
디폴트가 삐쭉 고개를 내민 한 녀석을 쓰러뜨린 뒤 장로를 향해 조용히 물었으나 정작 본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녀석들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무렵, 그제야 장로는 일행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물론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잘 듣게나. 응원군이 오기 전에 먼저 왕궁의 지하석실로 들어가야 할 듯 하네. 펠레어와 할레어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저와 데르나, 해왕 네라, 세라프 순으로 가도록 하자고. 레이아와 디폴트는 뒤의 적을 막아 가며 천천히 따라오게나. 할 수 있겠지?”
“네. 알겠습니다.”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어느새 일행에 합류한 펠레어와 할레어가 쾌할하게 대답하자 일행은 준비를 서둘렀다. 장로의 말대로 펠레어, 할레어 형제가 각각 자신의 무기를 들고 앞장서 가기 시작했고, 데르나와 해왕은 장로를 부축하며 그 뒤를 따랐으며, 나머지 일행이 움직이는 동안 레이아와 디폴트는 전에 없이 마구잡이식 공격으로 장로가 얼른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물러났다 싶자 레이아가 먼저 물러섰고, 디폴트는 유적과 기둥 사이를 오가며 계속해서 M249머신건을 난사했다.
두두두두
피핑 팡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습니다!”
“좋아, 조금 다 속도를 내게! 데르나, 어디로 가야 한다고?”
“이대로 쭈욱 가면 되요! 아, 저기 있습니다!”
하면서 데르나는 장로의 물음에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 곳은 섬의 꼭대기이자 중앙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일행은 죄다 그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단은 본래 뛰어가다 보면 힘이 드는 법. 게다가 계단도 길이가 엄청나게 길었다. 결국 일행은 하나 둘 지쳐가고...
턱
“꺅!”
쿠당
“으윽, 네라씨, 빨리 일어나요!”
올라가는 계단길에 툭 미끄러져 버린 네라를 일으켜 주던 해왕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아가 이번엔 연사속도가 좀 빠른 석궁으로 활을 쏘고 있었고, 디폴트는 군데군데 총알이 스쳐간 상처를 입으면서도 계속 뒤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어느덧 그가 들고 있던 총은 M249머신건에서 Ak47로, 그리고 듀얼 베레타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총알이 떨어진 것 같은데...
왕궁으로 가는 길은 더없이 험난했다. 앞길은 수천 개의 계단, 뒤에는 마치 양을 노리는 늑대들처럼 일행을 쫓아오는 적들...응원군은 금새 달라붙었는지 적어도 100명 이상은 되어 보였다. 새까맣게 밀려오는, 검은 옷에 복면까지 쓰고 M16라이플을 난사하는 녀석들...
타타타
피피핑 퍼억
“크악!”
그때였다. 갑자기 디폴트가 쓰러진 것은...?!
“아앗! 디폴트!”
디폴트가 총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급소는 피한 것 같지만 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나왔고, 그 피는 조금씩 대지를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해왕은 그것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디폴트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했고, 반나간 혼을 일깨워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그의 몸을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으니...
타앙 타앙
퍼퍽 팍
“아악!”
콰당탕
손목에 전해져 오는 통증도 뒤로 한 채 방아쇠만 당기는 해왕의 손길이었다. 해왕의 손으로는 데저트 이글을 두 손으로 잡아도 반동을 버티기 어려운데 그걸 한 손으로 잡았으니 그의 손목 가득 통증이 밀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총알은 능숙하게 가장 가까이 있는 한 명의 적을 쓰러뜨려 버렸다.
디폴트를 도와주는 건 해왕뿐만이 아니었다. 데르나는 공격마법을 시전하려 했고, 세라프도옆에서 같이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는 동안 네라도 달려나와 신성력을 발하기 시작했으며, 레이아도 석궁에 화살을 두 개씩 걸어가며 활을 쏘았다.
“...미티어 스트라이크!”
“하나님, 성처입은 동료가 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세요!”
터텅 투앙 콰과광
하늘에서부터 불덩어리가 떨어졌고, 그것은 대지에 작렬하며 그 주변으로 거대한 원형의 불바다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쉴드가 전개되어 반격하려 하는 적의 공격을 막아 내었고, 네라의 신성력이 디폴트의 상처를 치료하 나가는 동안 해왕도 방아쇠를 당기며 디폴트를 계단 위로 올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할 듯 했따.
“크윽...괜히 나 때문에...”
“무슨 소리예요! 빨리 가자구요!”
한편으론 천만에요, 라는 뜻을 반영하면서도 한편으론 서둘러 움직이자고 재촉하는 해왕...디폴트는 어느 저도 치유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치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야.”
“으윽, 뭘 하는데 그런 감탄사를...”
그새 먼저 올라간 할레어가 감탄사를 연발했을 즈음, 그 소리에 펠레어가 뒤통수를 때리려다 말고 똑같이 앞을 바라보며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장로도 금방 같은 얼굴이 되었고, 일행도 그렇게 정신없는 사이에도 앞을 보며 멍...하게 표정을 바꿨다.
거대한 왕궁이었다. 다 무너지고 1,2층만 남은 것까진 좋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이 왕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듯 했다. 가로 길이만 운동장 두세 개를 붙여 놓은 수준이었고, 세로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 다급한 상황에서도 감탄하는 이유가 이미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데르나는 문득 광장 가운데,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한손엔 검을 들고 한 손엔 방패를 든 석상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데르나가 소리쳤다,
“저기예요! 저게 그 지하 석실이예요!”
“좋아. 펠레어와 할레어, 그리고...데르나, 미안하지만 저것 좀 밀어 주겠니?”
“그러죠.”
“그래. 해왕과 레이어, 세라프가 뒤에 오는 적들을 밀어내게나.”
차근차근한 장로의 목소리에 세 명은 그 곳에 달라붙었고, 처음에는 꿈쩍 않던 석상도 약간 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뒤로 스르르 미끄러져 버렸다. 일행은 죄다 그 쪽으로 들어갔고, 장로도 그 곳에 들어갔으며, 세라프와 레이아도, 그리고 해왕도 이윽고 자신들의 공격을 접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안 쉘, 넨크리(락).”
스르르륵
이번엔 5명이 함께 석상을 앞으로 움직이게 했고, 그 위에 데르나가 ‘락’마법을 걸어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오도록 했다. 물론 억지로 하면 열리겠지만 당장에 몰려오는 정도는 지연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일행은 무엇에 쫓기듯 석실로 들어섰다.
타타탁 탁 탁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잠깐만. 라이트.”
파앗
해왕의 말에 데르나가 마법을 시전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불빛은 주변으로 화려하게 뻗어 나갔다.
넓은 홀....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지는 않은 듯 석주와 종류석, 석순이 군데군데 자리잡고 있었고, 가운데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사람의 머리 높이로 횃불이 올려졌을 거라 짐작되는 썩은 나무걸이만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예요?”
세라프의 목소리가 석실 가득 울려퍼졌고, 그것은 각 벽에 반사되어 거대한 메아리를 남겼다. 그러자 반대쪽에서 데르나가 그 물음에 화답했다.
“링이 있을 만한 곳은 여기 뿐이야. 내 생각이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근거리 단체 텔레포트를 해야지 뭐. 상관없어.”
해왕의 말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받아친 데르나는 조금씩 광구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고, 그녀는 곧 세 개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벽돌로 만들어진 인공 통로, 또 하나는 자연 그대로의 통로, .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물길이군. 지하수길...”
“그렇네요. 데르나 언니, 어디로 가야 되요?”
데르나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세 개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려도 링이 있는 곳은....아니다, 링이 어디 있는지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지.
“...여기부터는 저도 몰라요.”
“알아서 찾아가라는 건가?”
그러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물론 전부 끝이 한 군데로 모여져 있다면, 그리고 함정이 하나도 없다면 무척이나 좋겠지만 공교롭게도 여기는 지하석실. 무척 비밀스러우면서도 위험한 데는 제 1순위로 꼽는 장소였다.
파앗
그때였다.
“....?!”
“...네클리스..가?”
데르나가 차고 다니던 네클리스 오브 타임이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했다. 목걸이는 주변으로 파아란 빛을 뿜어 내다가, 중력을 무시하는 듯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것은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중앙에 자리잡은 자연 동굴을 향해서.
“..여기로 가라는 건가?”
할레어가 안심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또 다시...그때였다.
쿠쿵 쿵
“뚫렸다!”
“들어가자! 전진!”
멀리서 녀석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그것을 들은 일행은 멈출 시간이 없다는 듯 주저없이 가운데 동굴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라이트를 소환한 데르나를 선두로 일행은 주변에서 빛을 내는 석순과 종류석을 보며 뛰다 걷고 걷다가 뛰고를 반복했으며, 일행은 그렇게 한참을 도망갔다.
이윽고 일행은 뒤에서 들려오는 군인들 목소리를 들으며 아까 만났던 넓은 홀보단 조금 작은 홀을 만났다. 그러나 그 곳은 전에 그 곳보다 훨씬 밝아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고, 데르나는 슬며시 라이트 마법을 해제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일행은 이유모를 신비함을 느꼈다. 엔센스터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데르나와 해왕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가운데 단상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홀과 일행을 감싸고 주변을 밝혔는데, 좌우엔 각각 정면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온갖 사람들을 그린 벽화가 자리잡고 있었고, 중앙에는 화려한 의상으로, 황금의자에 앉은 한 사람이 한 손에는 육각형, 아니 정육면체의 상자. 그리고 한 손으로는 조그만 금색 반지를 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오래되고 군데군데 퇴색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마치 이집트 그림과 중국 그림얼 섞어 버린 듯한 그 장면에서 일행은 장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단상 위에 있는 것은....?
“...링 오브......스페이스(Ring of Space: 공간의 반지)”
“맞다! 링 오브 스페이스가 맞아!”
세라프와 레이아의 목소리에 데르나는 천천히 링에 다가가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동그란 태에 룬어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조그만 초록색 보석이 콕 박혀 있는 반지...그런데 그때였다.
파아앙
“꺄악!”
콰당탕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데르나 앞으로 거센 마나벽이 밀려왔고, 데르나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그것을 맞고 뒤로 넘어졌다. 일행이 서둘러 데르나를 일으켜 세웠고, 데르나는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윽고 뭔가를 생각해 낸 듯 주문을 외웠다.
“야페그 넨크리!”
...이번엔 장로 대신 데르나가 외쳤다. 같은 흑마법사인 자신이 외쳐도 시전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물론 자신이 한다고 꼭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작동은 되는 모양인지 데르나의 몸에서 약간의 마나가 빠져 나가면서 단상을 가로막던 방어막의 느낌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빛이, 화려한 빛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파핫
단상에서 비추어지던 그 빛들은 하나 둘 가운데로 모이더니 이윽고 하나의 여인을 만들어 내었다. 백색 옷을 가지런히 차려입고, 머리에는 보석들을 얹은 여인. 상체는 본래의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나 아래로 갈수록 흐릿해지는 형상이었고, 얼굴은 보석 같은 걸 머리에 얹었으면서도 오히려 수수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것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어머니?”
“...리프?”
세라프와 데르나가 동시에 내뱉은 목소리였고, 그 소리에 일행은 그 둘을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얼굴이었는데, 사실 그들보다 더 서로에 대해 궁금한 건 데르나와 세라프였다. 데르나는 데르나대로 세라프가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고, 세라프는 세라프대로 어떻게 데르나가 자신의 친구라 할 수 있는 그 여인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의 의문을 해명해 보기도 전에 여인이 방긋 웃으며 낭랑한, 그러면서도 홀을 가득 울리는 목소리로 일행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군요. 그럼 구태여 제 설명을 할 필요가 없겠죠?”
부드러우면서도 기개가 있는, 동굴 안을 가득 메아리치는 목소리.. 데르나와 세라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일행들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들은 알 리가 없으니까. 그러자 카피 이미지 마법으로 그려진 드산 그 여인은 알았다는 듯 계속 미소를 지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리프 일란시스. 일란시스 가의 네클리스 계승자 중 제일 하대이면서 아틀란티스의 멸망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제사장이죠.”
그제야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데르나와 세라프의 궁금증은 더해 가기만 했다. 왜 리프가 거기에 있는지, 어째서 그녀는 자신들을 못 알아 보는지. 뭐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 ■벗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는지 데르나가 물었다.
“어머...아니, 리프 님. 제가 누군지 못 알아 보시겠어요?”
“저는 이 링을 지키기 위해, 또 적당한 계승자가 이 링을 가져갈 수 있도록 자격을 심사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정작 저를 만드신 본인은 어떻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 분을 대신해 이곳을 지키는 일종의 환영이면서 방어장치일 뿐이지 본체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그런 질문들에 답을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왠지 컴퓨터 합성음을 듣는 듯한 그목소리에 세라프와 데르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일행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데르나는 약간 미안해지기도 했다. 여인이 한 말은 이미 자기도 알고 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아시겠나요? 그렇다면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여인은 거기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사실 본론이라고 해 봐야 별 것 아니지만...저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링을 계승할 자격이 있는지, 아, 자격 시험은 이미 통과하신 모양이군요. 방어막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네클리스 오브 타임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격시험이요?”
여인의 말에 데르나가 묻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자격 시험은 네클리스를 가진 채로 이 방어막을 흑마법으로 깨뜨리는 건데, 벌써 통과하셨으니 이제 계승식만 거행하면 됩니다.”
“저기, 저기...계승식은 짧게 하면 안될까요? 네클리스를 노리는 자가 저희를 쫓고 있는데...”
살짝 대화 중에 끼어드는 해왕의 말에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처음 절차는 생략하고 계승식을 시작하죠. 네클리스를 지닌 자여.”
“.........네.”
“당신은 이 고대의 유물을 지키고, 선한 곳에 쓸 것이며, 최후의 형상인 유나이트 오브 디맨션(Unite of Dimension)을 완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유나이트 오브 디맨션? 데르나는 홀린 듯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의 두 가지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유나이트?
"...후우. 좋습니다. 이제 저, 리프 일란시스는 다음 후계자로 데르나 헬 일란시스를 지명하고, 네클리스와 링, 유나이트의 정통 계승자임을 승인합니다. 그럼.“
사아아아
“아앗, 어머니!”
데르나의 절규. 그러나 데르나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 한 여인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고, 곧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적의 함성을 들으며 링을 손에 끼고 최초의 명령을 내렸다. 명령어는 이미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텔레포트 투 메모리즈.”
...기억된 장소로의 이동.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최초로 알려준 시동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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