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사회시민회의(공동대표: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4월 6일(목) 오후 7시, 서울특별시립 서울청소년수련관(을지로 3가 소재)에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펴냄)」의 공동 저자인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를 초청해 춘계 공개특강을 개최했다.
이 날 특강에는 대학생과 일반 시민 120여명이 참석해 강연을 경청했다. 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국 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ndependent.co.kr%2Fdata%2Fnews%2F200604%2F06_12712_1.jpg) |
-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1979년에 첫 권이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1970년대 말-80년대라는 어려운 시기에 민중과 민족을 주축으로 한 역사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인식》이 ‘시대적 요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 책이 드러낸 명백한 문제점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출간으로 극복될 수밖에 없다.
《인식》은 사료와 자료를 근거로 한 학문적 성과라기보다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선언문이었다. 그 책은 소위 민족적 모순의 극복, 곧 민족통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소명이며, 그것은 민중의 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와 더불어 친일파에 대한 추상같은 단죄와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난 국가 성립 과정을 극도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특징이 있다. 이러한 주장들의 문제점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학문적 연구에 의해 수정되어왔다. 문제는 학계의 최신 논의를 알 리 없는 정치인들이 예전 시각을 그대로 가진 채 과거사청산을 둘러싼 현재의 정책결정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목표가 사실의 추구가 아니라 현실적ㆍ정치적 이념에의 봉사라는 잘못된 생각이 현재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친일과 반일
현재 우리 사회를 분열로 치닫게 하는 중요한 이슈 가운데 친일파 청산이 있다. 그러나 친일과 반일은 이분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근 40년에 걸친 식민지 경험을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 가해와 피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족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친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책의 한 필자는 친일파의 대표격인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로 규정하며, 나 역시 2000년에 출간한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에서 그를 ‘주저하는 협력자’로 정의하였다. 민족의 갱생을 위해 일본의 힘을 이용하려 한 이율배반적 상황에 처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이 같은 복합적인 내면은 사람마다 정도의 차는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산 대부분의 지식인에게 나타난다. 그들은 제국을 적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모범으로 삼는 자기분열적 모순을 드러낸다.
조선어학회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길항관계에 대한 최근 이론에 의하면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진영에는 몇 개의 집단이 있는데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견제한다. 그 가운데 한 집단이 제국의 파트너가 되지만 제국에 대해 너무 강하게 주장을 펼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제국이 파트너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운동은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를 보여준다. 식민지기 민족저항운동의 최고봉이라 평가받아온 조선어학회(1921년 창설)의 한글운동을 분석해보면, 조선어학회는 식민지기 내내 총독부 권력과 대립한 적이 없었다. 자신들과 대립하는 다른 민간단체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총독부 권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는 총독부의 협조를 얻어 소위 ‘정음파’의 반대를 극복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였고(1933), 조선총독부는 이를 보통학교-중등학교 교재에 사용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전면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학교나 신문 같은 기구를 장악해야 했고 현실의 정치권력과 등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편 총독부는 효율적 통치를 위해 각종 미디어를 통한 문자의 유통을 장려하고, 그 일환으로 한글운동을 지원하였다. 한글운동에 관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제껏 무시되고 간과되어왔다.
위안부문제
역사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위안부다. 위안부문제는 분명 반인륜적 범죄행위였으며, 위안부는 전쟁의 피해자면서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온 제3의 요인으로 가부장적 봉건질서가 있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군과 그의 대리인들이 순결한 조선 처녀들을 위안소로 납치, 연행한 줄로만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공식적, 대중적 담론만으로는 위안소로 끌려간 여인들의 생애 전체가 복원되지 않는다. 생존 위안부들의 증언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많은 경우 원초적 요인은 가정 내에서 여자아이에 대한 가부장 권력의 무자비한 구타와 학대였다. 그들은 가부장적 학대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아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고 한 용감한 여성들이었다. 그들이 위안부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몰리게 된 데에는 많은 공범관계가 작용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민족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방 후 나라 만들기
해방 후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편협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태도이다. 유럽의 역사는 전제왕정으로부터 시민사회의 발달과 민주주의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수세기에 걸쳐 진행시킨 데 반해, 우리는 그런 ‘나라 만들기’ 과정을 단 수 십년 만에 치러야 했고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를 현재의 잣대를 들이대고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전 처음 접한 민주주의는 집권층에게도, 대중에게도, 지식인들에게도, 시행착오를 거쳐 조금씩 습득될 수밖에 없는 외래의 것이었다.
요즘 학계는 1950년대를 어둡고 우울한 절망의 시대로 묘사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데 대체로 공감한다. 1960년대 이후에 본격화한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역동성은 그때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시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제도의 도입, 국민교육의 확대, 농지개혁으로 인한 평등화의 실현 등,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나 첫 삽으로 뜨기에는 충분한 역사적 진보가 이 시기에 발견된다. 요즘 특히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비록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오명을 역사에 남겼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대항하면서 혹은 미국을 협박하면서 한미상호방어조약을 이끌어내고 수입대체공업화의 기반을 닦은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민족운동과 친일행위는 다같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이었으며 상호 모순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최근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이 주장하듯, 식민지배자를 압도적 존재로 부각하는 것은 우리를 대단히 피동적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즉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모든 일을 일제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한국인들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작되고 통제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도 행위자로서, 주체로서 존재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을 그 후의 우리 역사는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모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는 공과(功過)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비판해서는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도덕군자라면 모를까 역사가는 냉철한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또 무엇인지 모른 채 총체적 경험부족 상태에서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를 따뜻하게 이해해야 한다. 《재인식》은 해방 후 한국 사회가 어느 쪽으로 갈지 모르는 혼동에서 시작하여 암중모색 속에 여기까지 온 과정을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으로 보여주려 하며, 그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과정은 아니었다는 점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
independent@independent.co.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