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의 삶과 문학
정석준(동리목월문학관 상주작가)
김동리는 본명이 시종(始鍾)이고 필명이 동리이다. 1913년 경상북도 경주군 성건동(현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에서 부 김임수(金壬守), 모 허임순(許任順) 사이에,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나이가 마흔 두 살로 노산(老産)이었으므로, 젖이 모자라고 밭일이 바쁜 어머니 대신에 아이는 형수가 맡아 암죽으로 키워진다. 암죽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고 크던 그는 두 살 때부터 아버지가 남긴 술찌끼를 빨아먹는 버릇을 들인다. 이 버릇은 점점 심해져 세 살 무렵에는 취한 나머지 비틀거리며 뒤뜰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주정뱅이였으며, 김동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김동리는 경주 제일교회의 부설학교인 계남학교에 들어가는데, 공부보다는 방과 뒤 경주 인근 야산이나 들판으로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이런 자연과의 교감 체험은 김동리 문학의 바탕에 자연 친화적 정서를 기르는 계기가 된다. 6학년 때 교지에 내놓은 「돛대 없이 배탄 백의인」이라는 글 때문에 일경에게 불려가는 곤욕을 치르지만,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난다. 그는 대구 계성중학교을 거쳐 서울 경신고교로 진학하나,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면서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둔다. 경신학교 4학년 중퇴가 김동리의 공식 최종학력이다. 정규교육 과정의 궤도를 벗어난 김동리는 철학, 세계문학, 동양고전을 탐독하는 것으로 작가 수업을 대신한다.
김동리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독서량을 소화해 낸 것은 한학자이자 철학자인 큰 형 김범부의 영향이 크다. 부산에 살던 큰 형의 방에는 철학 서적이 천장에 닿도록 쌓여 있었는데, 그는 한동안 그 집에 머물며 종일토록 책에 파묻히곤 한다. 이때 길러진 집중적 독서습관은 경주 집에 돌아와서도 지속하여 철도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운다.
1934년 김동리는 신문의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각 신문사의 상금을 몽땅 타볼 작정으로 한 달 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을 써서 응모하는 열정을 보였지만 시 「백로」만 <조선일보>에 가작으로 뽑히는 데 그쳤다. 고향으로 돌아가 소설 쓰기에 전념해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다.
동리는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다솔사와 해인사 등에서 은거한다. 그가 다솔사나 해인사를 거처로 잡은 것은 이미 큰형 범부가 다솔사에서 스님들에게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 또한 선문(禪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6개월 동안 해인사에 머물며 숯굴을 소재로 한 「산화」를 써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또 당선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1940년까지는 그는 「황토기」, 「잉여설」, 「찔레꽃」 등을 발표한다. 이즈음 다솔사에서 함께 있던 큰형 범부가 일경에 연행되었다. 당대의 지식인인 김범부는 툭하면 가택수색이며 예비검속을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그도 일제가 강요한 ‘문인보국회’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며 그가 몸담고 있던 광명학원은 폐쇄 당한다. 일제의 강제로 <문장> 등의 문예지가 폐간되고는 사실상 작품 활동을 접어버렸다 절망한 나머지 그는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며 술과 노름, 유행가, 화투, 장기와 같은 잡기에 휩쓸린 채 반년을 보낸다.
해방 후 동리는 사천에서 서울로 상경한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좌익매체인 문학가동맹에 가입되 있었다. 동리는 문학을 구호화 하는 것을 막고,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946년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조연현, 황순원, 최인욱, 박두진, 박목월, 김달진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된다.
이 무렵 쓰여진 「혈거부족」, 「황토기」, 「지연기」 등의 작품들은 정치색이 짙은 문학풍토에 저항하는 작가정신의 소산이었다. 그는 혼자서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좌익 논객 글의 정(釘)을 신랄하고도 날카로운 필봉으로 막아냈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경향신문>의 문화부장과 <민국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언론계에 몸을 담은 채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데, 해방 직후의 귀환과 더불어 집 없는 사람의 애환을 다루는 등 현실 문제를 들추는 변모를 보였다. 하지만 「역마」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사주(四柱), 무속(巫俗), 불교, 기독교 등과 관련해 인간의 근원적 삶을 탐구하는 본디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1949년 김동리는 두 번째 창작집 「황토기」를 펴내고, 창간된 <문예>의 주간을 맡는다. 이 무렵의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다방 ‘모나리자’에서 그는 ‘모나리자’의 주인이자 신인 작가인 손소희와 처음 만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그는 손소희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겨주면서 두 사람 사이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1ㆍ4후퇴 때는 부산에 가서 지내며 문인들의 집결지 구실을 하던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에서 많은 일화를 만드는데, 나중에 「밀다원시대」에 생생하게 재현된다.
1953년 서울로 돌아온 김동리는 서라벌예대에 출강하는 한편, 손소희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불륜’이라는 비난이 높았다 1954년에는 예술원 창립회원이 되고 한국유네스코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한다. 1955년 그는 한국전쟁 체험과 연관된 현실적 색채가 깃들인 「흥남 철수」를 발표한 데 이어 창작집 「실존무」를 펴냈다.
동리가 ‘작가생활 35년 만에 작품다운작품을 썼다’고 한 「사반의 십자가」는 1955년 현대문학에 연제된 후 195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사반의 십자가」는 현실적이며 지상적인 가치와 초월적이며 천상적인 가치의 대결을 주축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무녀도」에서도 서구 기독교와 한국의 토착 샤마니즘의 대결을 통해 세계관적, 문화적 이념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작가 자신은 비평이나 실제의 행동에서 인간주의와 동양주의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소설에서는 어느 한편의 손쉬운 선택을 거부하고 그 두기지의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적 관점을 객관화하고 있다. 이 같은 작가적 진지성이 김동이 소설의 탁월함을 입증해 주는 예이다.
1957년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를 발간해 이듬해 예술원상을 받고,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의 부이사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창작집 『등신불』을 펴낸다. 1968년에 그는 <워란문학>을 창간하고 1970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한다. 일흔다섯 나이에도 장편소설 「자유의 역사」와 수필집 「사랑의 심은 곳마다 솟고」를 펴내는 등, 그는 평생에 걸쳐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쏟아낸다.
후학을 가르치는 명장으로서 김동리의 면모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가 가르친 6회 서라벌 예술대 졸업생 전원이 문단에 나왔다. 동리는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해 보고, 그 사실을 예언했다.
서울대 국문과, 고려대 국문과 강사를 거쳐 중앙대 예술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강단에서 가르친 세월은 30년이었고, 김태준, 김민숙, 김원일, 김정례, 김주영, 김지연, 김형영, 노순자, 박상룡, 백시종, 송기원, 송상욱,,양문길, 오정희, 유현종 이경자, 이근배, 이동하, 이문구, 이채영, 천승세, 한분순, 황추앙 등 빼어난 문학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일백 여명에 이른다. 또한 그가 창간한 잡지만도 4종에 이르러 수많은 작품의 산실이 되고 있다.
동리가 ‘나는 단체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꾸 나에게 단체를 맡긴다’고 했듯이, 단체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고, 늘 선봉에서 사나운 바람을 맞게 했다. 그는 역할을 피하지 않았을 뿐, 한 번도 즐겨서 한 일은 없었다. 시대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책무는 그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겼으나, 그 상처는 그가 비겁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33세 때 사천청년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청년문학가 협의회장, 한국문총 사무국장,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시 예술위원, 중앙대 예술대 학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한국문입협회 이사장, 한일문화교류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동리는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구 계성중학 2학년 때 백형이 안진경법첩을 주고 운필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 뒤 다솔사에서 묵고 있을 때, 서예가 하동주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동리의 서예 삼매는 58세 이후, 쭉 이어져 틈이 나는 대로 붓을 잡았다. 집안에는 항시 묵향이 감돌았다. ‘문장을 쓸 때에는 고통스러운데 글씨를 쓰는 것은 즐겁다’ 73년 회갑기념서예전 때, 오체를 두루 쓴 55점을 선보여 서예계의 주목을 받았고 검여(劍如), 동정(東庭) 일중(一中) 등과 친교를 맺는 한편, 한중일 서예문화교류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류전을 주재해 왔다.
창작욕을 과시했던 김동리는 1990년 7월 30일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오랜 투병 끝에 1995년(향년 82세) 숨을 거둔다.
김동리는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신비감과 허무감이 내재된 인생의 근원적 본질 추구 등을 통한 '인간성'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소설가이다. 그를 빼고는 현대한국문학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한국문단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