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갑작스런 금교령
한국 초대 교회가 처음으로 당한 수난은 1888년 4월에 발표된 전도 금지령이었다. 1884년 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한 이래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복음 전파는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1887년 한 해 동안 소래교회, 새문안교회, 정동교회를 창립하고, 첫 순회 전도를 실시하고 세례식도 거행하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1888년 4월 28일에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한 것이다. 이에 알렌이 입국한 이후부터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한국 정부를 자극할까 봐 매우 우려를 해오던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는 이 내용을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선교가 순조롭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 갑자기 금교령이 내려진 것이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1887년 11월 27일 정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피어선에게 편지를 보내 "정부가 기독교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며 한국 선교의 장래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정부가 바뀌거나 아니면 더 안정될 때까지 선교사역의 진행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현재와 같이 생명과 재산의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은 무모한 짓"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를 겨냥해 내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개신교만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개신교가 천주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천주교보다 개신교를 선호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개신교에 대해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금교령이 내려진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1887년에 천주교회에서 서울 시내의 고 지대(지금의 명동)에 대지를 비밀리에 큼직하게 매입해서 왕궁을 내려다볼 정도로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하는 데서 발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홍렬 교수는 그의 책‘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조선 정부의 말썽’과 건축 과정에서의‘조선 정부의 강렬한 반대와 물자의 결핍’정도로 일언하고 있으나, 사실은 고종이 그 성당 위치가 궁전보다 높기 때문에 왕실 존엄이 깎인다 해서 그 건축
의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불응한 천주교회의 불손이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왕실을 가장 불쾌하게 만든 것은 이 과정에서 보여 준 불란서 신부들의 오만한 태도였다. 왕실에서는 조약에 있어서도 서울이 개항지가 아니기 때문에 성당 건축을 무조건 반대할 수도 있었지만 시내 다른 터를 골라도 된다는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고종이 불란서 공사관을 통하여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란서 신부들은 불란서 정부를 등에 업고 동시에‘동맹국 러시아의 훈수’를 받아 성당 건축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천주교는 그 자리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물색하여 온 성당 자리인 데다, 개신교가 선교열을 가속화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 선교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성전 건축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실의 요구를 천주교가 거절하자 사태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성당 건축 중단을 요구한 고종의 요구에 불응한 천주교의 불손이 급기야는 금교령으로 이어진 것이다. 금교령은 외국 공관뿐 아니라 국내 선교사들에게 적지않은 혼란을 초래했다. 고종의 금교령이 발표되자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는 정도 여행 중에 있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두 선교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대군주 전하의 명령이라 하여 조선 외무부로부터 공한을 받았는데, 그 내용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미국인 중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 정부에서 알고 있다는 것과, 이 사실을 정부 당국에서는 부당하게 여긴다는 것, 조약상 인정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중지를 요구한 것 등이 있다. 이러한 행동의 금지에 협조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므로 나는 주한 미국 공사로서 두 분은 조선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전파 및 종교 의식과 규례의 집행을 중지하도록 청하는 직무를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 전교 금지 칙령은‘어떤 장소에서 여하한 종류의 종교 교육이든 금’하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조건에 관계없이’‘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금지한 것’이었다.
1888년 봄, 아펜젤러와 함께 순회 전도여행을 하던 언더우드는 평양에 도착하여 금교령 소식을 듣게 되었고, 지방 전도 여행을 중단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의 상황을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본래 이 칙령이 로마 가톨릭 교도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의 주의 사업에까지 지장이 있게 되었다고 이 소환 명령에 몹시 불쾌해 하였다. 한편으로 뭔가 이상한 낌새만 보이면 늘상 그러하듯이, 외국인 사회에서는 위기적인 긴장감이 팽배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가 그들의 무모한 지방 여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의료 사업이나 교육 사업에만 몰두해야지, 공연히 전도 사업에 끼어들어 관리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중요한 위치를 위험스럽게 만든다든가, 그들을 곤경에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적인 원인은 금지된 자리에 성당을 세운 로마 가톨릭교인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학교 아침예배, 주일예배를 비롯한 일체의 한인들의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다. 시골에서는 정도가 더 심해 기독교 문헌들을 모두 불태우고 종교의식을 전폐시켜 과연 그곳에 이전에 선교 사업이 있었는가 의심할 정도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과연 한국에서의 선교 사업이 계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종교 활동 재기 문제를 놓고 장감 선교회 안에는 미묘한 의견 대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알렌과 헤론을 비롯한 한쪽에서는 조정을 자극하지 않고 최소한의 명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 활동을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설사 생명 그 자체에 위험이 온다 해도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최우선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미국 공사는 금지령이‘학교나 가정에서 예배를 행하는 것, 또는 본토민과 함께 기도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교사들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배재학당과 고아학교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실제로 종교 활동을 재개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제외한 다른 선교사들은 그 칙령 공포에 따라 모든 종교 사업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유사점이 많은 이 두 선교사는 그들의 두 소년 학교와 가정에서 종교 활동을 개시하여 원기 왕성하게 찬송가를 불렀는데, 한국인들과 함께 부르는 이 찬송가 소리는 거의 1.6km 근방까지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저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지방 여행에서 돌아온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언더우드는 정부의 지도적 각료 몇 사람의 공식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언더우드에게 그들이 세운 육영공원
(government school)을 영구히 맡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원래 이 학교를 맡았던 미국인 교사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퇴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젊은 선교사가 얼마의 보수를 요구하든 가장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로 가득 찬 그 학교를 그의 완전한 통제와 책임 하에 맡기려고 한 것이다. 외국인들의 입장, 혹은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곧 이 학교를 담당하는 데 있어 기독교를 가르칠 수 없다면, 자기는 학교를 맡지 못하겠다고 그들에게 통보했다. 규칙상으로 교과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조차 언급될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언더우드의 제안은 두말 없이 승낙되었으며 빠른 답을 기다린다는 소식이 왔다.’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할 경우 선교 일보다 학교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을 염려한 언더우드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선교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금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것도 순회 전도여행에서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처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큰 소리로 이끄는 회중들은 계속해서‘예수의 피밖에 없네’등의 찬송가를 하늘에 울리도록 소리쳐 불렀는데도 가장 비천한 조선인 신자를 비롯해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일꾼들은 다시 나가 복음을 가르치고 선교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다.”
2) 영아 소동
1888년 5월부터 9월까지 선교 금지령이 진행되는 동안 소위 ‘영아 소동’(the Baby Riots)이 발생했다. 이는 1870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유형의 것이었다.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자 서양인들에 대한 폭동으로 이어져 서양인 학살사건으로 발전했던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이 소동이 최절정에 달한 것은 6월 10일부터 25일 사이였다. 이것은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과 오해가 증폭되면서 터진 것이다. 외국인들이 조선인 악질분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아이들을 꾀어다가 잡아먹고, 눈알을 빼 약용이나 사진 현상 재료로 사용한다는 음흉한 소문이 항간에 나돌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와 상종하던 관원까지 9명이나 처형을 당했다.
릴리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영아 소동의 동기는 민비의 파멸을 획책하던 정적들이 고의로 일으킨 사건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 당시 궁궐 사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민비의 파멸을 획책하는 왕비의 적들이 모든 문제를 고의로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민비는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외국인들을 좋아했는데, 폭도들은 외국인을 대적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왕이 어렸을 때 나
라를 통치하던 섭정이었는데, 아들에게 통치권을 넘겨 주어야 할 때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권력을 쥐고 정사를 맡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왕은 온화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쉽사리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지 못했다. 동양 종교(유교)의 규율과 관례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행동
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왕과는 전혀 다른 인물로서 영특하고 강력하며 두려움을 몰랐다. 때문에 본래의 왕이 이렇게 하찮은 존재로 밀려나 있는 것을 참지 못하여, 급작스럽게 쿠데타를 일으켜 놀라고 격노한 늙은 섭정자를 밀어내고 고종을 왕좌에 앉혔다. 그날부터 대원
군은 복수할 기회만 노리며, 민비와 그 가족을 파멸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 중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 1884년의 폭동이었으며, 이 때문에 왕비는 농가 여인의 복장을 하고 서울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또 하나의 음모, 마지막 음모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 1895년 궁궐에서의 민비시해 사건이었다.
아마 대원군은 민비의 행동을 배은망덕하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를 왕비로 택한 것이 바로 대원군 자신이었으며, 그때는 민비가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은 대비가 양자로 택했었기 때문에, 대원군이 왕좌에 대해 요구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6월의 폭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공격을 당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왕이 아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가마에서 끌어내려져 그 자신의 종자와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 당시 왕과 왕비가 아끼는 기관이었던 병원은 특히 음험한 범죄의 소굴로 지목되었다. 거기서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내어, 외국 관리와 선교사들의 요리상에 진미로 바쳐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병원 부근에는 커다란 소요가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던 한 사람은 아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받아 아무런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폭도들이 우리 공사관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던 어느 날 밤, 서울 근교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 그리고 북소리와 함께 사람의 혼을 빼는 듯한 외침 소리가 계속되고, 집들이 무너지고, 군중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우리 모두는 이제 우리의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
은 꺼지고 우리는 아무 해도 입지 않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셨고, 우리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영아 소동이 일종의 폭동의 성격으로 발전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아 소동으로 가장 위기를 만난 것은 역시 선교사들이었다. 군중들이 이성을 잃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후에 발생한 중일전쟁이나 러일전쟁보다도 더 두려웠다고 말했다. 흥분한 군중들이 공관 건물들을 방화하고, 몇 명의 일본인이 살해되어 거리에 방치된것을 목격하고는 외국 공관 대표들은 즉시 조선 정부에 자기 나라 국민의 보호를 요청하였고, 제물포의 전함에 주둔해 있던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해군들이 급히 서울로 출동했다. 선교사들은 언제든지 공사관으로 달려갈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고, 심지어 상당수의 외국인들은 값진 물건을 챙겨 여차하면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훗날 언더우드가 회고한것처럼 선교사들은 ‘화산(火山) 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들 정도로 너무도 불안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선교사들의 안전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정부에서도 영아 소동이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근거 없는 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진화에 나섰다.
‘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누구든 아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곧 잡혀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사실 두 사람 이상이 공공연히 길거리에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태는 곧 진정되어 갔다.’
3) 금교령과 영아 소동의 결과
금교령과 영아 소동은 한국 선교에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과 폭동이 있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본국 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심각하게 재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신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여론은 물론이고, 이런 위협이 존재하는 조선에 선
교를 계속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언더우드가 지적한 것처럼 감리교 선교부는 조선에 선교사업이 중지된것으로 알고 선교비를 삭감했고, 장로교 선교부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될 때까지 선교사를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내의 선교 금지령은 선교부로 하여금 선교 중지를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내의 선교사들은 금교령과 영아 소동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의 선교사역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본국 교회와 교단에 한국 선교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정부를 자극시키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했다. 오히려 금교령과 이어 발생한 영아 소동은 본래 그것을 발표하거나 그 사건의 발단의 원인과는 달리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국내 선교사들이 왕실과 민중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는 상당히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첫째, 정부가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어 두 사건은 오히려 조정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더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로 인해 발생한 금교령이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즉시 순응함으로써 정부 관리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천주교의 명동성당 건축 강행으로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이미지는 더 악화된 반면 개신교에 대한 정부의 호의는 계속되었다. 왕실이 선교사들에게 호의적
인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1884년 알렌이 입국함으로써 시작된 조선의 개신교가 천주교와는 달리 고종의 윤허를 받고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심 없는 국내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갑신정변 때 알렌이 보여 준 민영익에 대한 헌신적인 치료, 그의 후임 헤론의 희생적인 봉사로 개
신교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호의적이었다. 이처럼 천주교와는 달리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보여 준 사랑과 상호 존경의 건전한 가정생활, 1886년 콜레라 만연 때의 헌신적인 봉사정신, 그리고 계층을 가리지 않은 진료활동 등은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다. 명성황후는 연봉 1,800달러를 지급하며 미국인 여의사를 자신의 시의(侍醫)로 고용했고, 고종은 알렌을 미국 주재 조선 공사로 파송할 정도로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 금교령과 영아 소동 이후 왕실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개신교 선교사들을 궁궐이나 외부에서
열리는 연회나 식사에 초대했다는 사실, 모든 면에서 선교회를 극진히 대우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칙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교사들이 ‘칙령을 무시한 것이 아무런 반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모두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실제로 1889년에 들어서면서 금교령은 사문화될
만큼 개신교 선교가 자유스러워졌다.
둘째, 자연히 이 일을 계기로 선교회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중과도 더욱 밀접해졌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무지와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지고 보던 선교사들과 선교 사업이 결코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민중의 치료에 앞장섰던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이 두 사건을 경험하고 지적한 것처럼 선교사들은 비로소 ‘민중접촉자격험’을 통과한 셈이다. 처음
선교 사업에 냉소적이던 조선인들은 이제 전적으로 선교사들을 믿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노동을 천시하여 학식 있는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설교하고, 가르치고, 타자기를 사용하고, 책과 설교문을 쓰고, 지방을 걸어 다니고, 좋은 길을 만들고, 담과 집을 세우고, 채소와 과수를 심고 가꾸며 돌보고, 또한 가축과 생선밖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는 백정 일도 할 줄 아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선교사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92년 길모어 선교사가 ‘조선에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안전한 일은 아니다. 위험은 존재한다.’고 고백한 것과 같이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백홍준은 복음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정부에 의한 박해가 종식된 후에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것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동네 사람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