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유 애 선
태풍이 지나자 가을이 더 깊어졌다. 쪽빛하늘 아래 펼쳐졌던 황금 들판도 서서히 마른 바닥을 내 보이기 시작이다. 오늘도 ‘부우웅 부우웅’ 탈곡기 소리가 동네 논 가운데에서 들려온다. 이제 벼 바심도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이러다가 얼마가 지나면 풍성했던 들녘은 황량하게 변하여 갈 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눈길 닿는 곳마다 가을꽃 천지이다. 철따라 그 철에 맞는 꽃들이 피고지면서 들과 산을 장식하여 우리들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데 눈부신 계절은 자꾸만 자꾸만 흘러간다.
예전 어른들의 말씀에 가을이 되면 마당은 예뻐지고 머슴은 미워진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마당에서 온갖 곡식들을 바심하였으니 그때마다 머슴은 대빗자루를 가지고 여러 번 쓸고 또 쓸고 하여 어찌 마당이 빛이 나지 않았으랴. 그러다가 가을 일이 끝나면 머슴은 새경을 받고 나갈 때가 오는데 주인은 꽤나 욕심꾸러기였나 보다. 당연히 주어야 할 품삯 때문에 죄 없는 머슴을 미워하니 말이다.
요즘은 바깥마당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또 시골동네를 샅샅이 둘러본들 어느 누구네 집에도 아니 농사치가 많을지라도 머슴이 없다. 여름 내내 자란 밭곡식을 타작하려면 일거리가 많아 마당이 필요해도 밭에다가 널따란 포장을 펴고는 탈곡기로 순식간에 바심하니 마당까지 갈 일이 없다. 그저 알곡을 들에서 직접 광으로 들여보내면 된다. 머슴도 없고 일감도 없는 마당, 우리들의 유년 때는 벼 바심은 물론이고 밭곡식들 전부가 마당을 거쳐야 했다. 그뿐인가, 우리들의 사방치기며 남자애들의 제기차기, 자치기 등 얼마나 다양한 놀이를 마당에서 하였었는가. 지금은 시골동네에 아이들조차 많지 않으니 마당은 심심하게 가을을 보낸다.
한가한 마당에 가을빛 가득하다. 오전 햇살 퍼지면서 밭에 나가 일하다가 햇빛이 정수리에 닿을 쯤 해서야 허리를 펴면서 집에 들어왔다. 아침밥을 먹고는 이슬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고구마 밭으로 갔다. 가을날일지라도 한낮에 일하는 동안 등에 땀이 꽤 흐르는데 싫지만은 않았다. 요즘 가을은 여름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점심 먹은 후 잠시 쉬었다가 밭에 나가 잠깐 일한 것 같은데 벌써 햇볕이 식어졌다. 아마 네 다섯 시가 넘은듯하다. 여름에는 오후 여덟 시가 되어도 얼마든지 일하는데 시월로 들어선 가을해는 그렇지가 않다.
주섬주섬하던 일을 마무리 하고는 집으로 향하는데 마침 하루 일과를 마친 해님이 서산을 아슴아슴 넘어가면서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다. 온종일 일하고 무엇이 부끄럽기라도 한가, 서산을 꼴딱 넘어서면서 서쪽 하늘과 동네는 주홍빛으로 물들었는데, 깊어가는 가을하늘 빛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
온몸에 짙은 저녁노을을 받으며 밭둑을 걷다가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이게 웬 일인가. 황혼 빛에 물든 우리 집은 마치 그림에서 본 유명한 산 중턱에 자리 한 멋진 별장과 흡사하다.
동네 가운데에 논과 밭, 잡풀들로 둘러싸인 시골집이 무슨 별장까지 들먹이는 게 해당키나 할까마는 착각은 자유라 했다. 부푼 가슴을 누르면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놓아 집에 들어선다. 아늑한 기온이 이내 가슴으로 달려든다. 들떴던 마음을 풀면서 천천히 저녁 만찬을 준비한다.
이렇게 가을속의 하루가 저물 즈음이면, 음력은 으레 구월 중심에 이른다. 한낮에는 따갑지만 저녁엔 찬 공기가 가을의 깊이를 말해준다. 하루 일과가 바쁘게 끝났다. 나의 쉼터로 잠시 가야 할 시간, 저녁 설거지를 마치면 커피 생각이 떠오른다. 옷장에서 갈색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두르고 목 쟁반에 커피 한 잔 바쳐 들고는 밖으로 나간다. 문 밖 오른쪽으로 몇 발자국을 놓으면 따사로운 가을햇빛이 온종일 머물다 간 자리에, 하얀 달빛이 말없이 가득 내려앉은 곳, 내방 창문 앞의 뜰, 이곳이 저녁이면 나를 초대한다. 낙원이 따로 있는가. 내 마음을 고요 속으로 안내하는 곳이니 더 바랄게 무엇이랴. 나무 의자에 몸을 맡기고 오늘 같은 날은 만월인지라 더욱 밝은 빛이다.
서늘한 밤바람이 인다. 반백인 내 머리칼이 날린다. 산과 들은 단풍이 마악 들기 시작인데 마당가에 서 있는 감나무는 서둘러 밤에도 잎 지는 소리가 들린다. 계절이 가는 소리이다. 옆에 큰 덩치를 하고 있는 은행나무, 은행을 바닥에 잔뜩 쏟아 부은 채 잎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이쯤 되면 좀 급해지겠지.
부엉이의 울음은 잦아지고 풀섶과 땅속에서 은은히 들리던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그윽하다. 커피 잔이 다 비워진다. 깊어가는 가을 밤, 달빛에 한동안 취해 있노라면 만월은 조금씩 조금씩 서쪽으로 옮겨가고 나는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현관을 들어서기 전에 몸을 돌려 동네를 둘러본다. 열닷새 달빛은 마을과 들판과 산야에 풍요롭고 휘황하게 넘친다. (2013.10,19)
첫댓글 늦가을에 경치를 그대로 담으셨네요~~
순수하고 예쁜맘 그대로 보입니다.
자연에 아름다움을 항상 수필에서 표현을 하시네요
늦가을 정취에 빠지게 하네요
노랗고 빨깧게 잘 물든 단풍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넉넉하고 편안해지는 느낌입니다. 지은이가 잘 물든 단풍이네요.
글이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좋은 표현
차원 높은 단어들
훌륭한 수필가로서 한 발자국씩 나가시네요
읽기 편하고, 한번 더 읽고 갑니다.
제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와 고마움을 드립니다.
힘 입어 더 노력하겠습니다.
자연의 풍경을 어쩌면 그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요. 항상 부럽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 께요.
아~~
여기에
가을을 가득히 담으셨네요.
제 가슴에도
가을이 가득히 담겨집니다.
“갈색 스카프 목에 두르고
달빛아래서 커피 한 잔”...... 멋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