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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생에 대한 자료
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생은 선산출신(선산김씨)으로 고려조의 충신입니다.
농암 선생을 모신 월암서원(月巖書院)은 1630년(인조 8) 선산 유림에서 당시 선산부사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의 후원으로 월암사(月巖祠)를 창건하고 묘우는 저의 선조 여헌(旅軒) 선생께서 내격묘(來格廟)로 명명하여 농암 선생을 향사하였습니다. 1636년(인조 14)에 사육신 중의 한분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과 생육신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선생을 추배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내격묘(來格廟)에 상의사(尙義祠)로 사액을 내리고 월암서원(月巖書院)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때 내격묘호(來格廟號)는 재궁촌 농암선생 묘 아래의 별묘(別廟)의 묘호로 사용하게 되었고, 1798년(정조 22) 내격묘(來格廟)에서 충정공(忠貞公)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정조대왕이 직접지은 제문으로 치제하고 부조지전(불천위)이 내려졌습니다. 이로 인하여 월암서원(月巖書院)은 세분을 모시는 서원이 되고 내격묘(來格廟)는 농암(籠巖) 선생을 독향하는 묘우(廟宇)가 되었습니다. 농암 선생의 후손으로는 좌의정을 지낸 김응기(金應箕)공이 있으며 후손들은 농암 선생의 유명에 따라 묘비를 거의 세우지 않아 묘비에 대한 자료가 타문에 비에 적은 편입니다.
근래에 후손들에 의해 선생의 유문과 관련자료를 모아 농암선생문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아래에 선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 몇 편을 부기하였습니다.
2014년 6월 인동 장달수 근지
월암서원(月巖書院)에 항상 쓰는 고유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도는 경도와 권도의 차이가 없으니 / 道無經權
권도가 있어 경도를 온전히 하옵니다 / 權以全經
변에 처하여 직책을 다하오니 / 處變盡職
어찌 때로 제향 올림을 폐하겠습니까 / 曷愆時馨
월암서원(月巖書院)에 농암(籠巖) 김 선생(金先生)을 향사하는 축문 정경세
복명하려 해도 할 곳 없었거니와 / 復命無所
두 임금을 섬기는 건 수치였다네 / 事二則羞
몸은 비록 중국 땅서 죽었다지만 / 身淪中土
혼은 응당 이곳 고향 돌아왔으리 / 魂返故丘
고려 충신 황명(皇明) 예부 상서 김주(金澍)에게 시호를 내리는 날에 치제한 글 정조대왕
교산의 남쪽 / 嶠山之南
낙동강의 동쪽에 / 洛水之東
산에는 반달이 있고 / 山有半月
물에는 긴 무지개가 있네 / 水有長虹
높디높은 바위가 있으니 / 有石巖巖
누구를 형상하는 것인가 / 侯誰象之
넓고 밝은 집이 있으니 / 有屋噲噲
누구를 제향하는 곳인가 / 侯誰饗之
바로 상서 김주가 / 曰金尙書
실로 이 땅에서 제사를 누리네 / 實食玆土
나의 주 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자 하였으니 / 莫余周粟
너의 은 나라 의관을 고수하지 않을 것인가 / 奈爾殷冔
폐백을 받들고 사신으로 간 곳이 / 玉帛于將
저 명 나라의 남경이었는데 / 于彼南京
돌아와 압록강에 이르니 / 曁乎鴨江
조선 건국의 아침이 청명하였네 / 會朝淸明
단을 쌓고 휘장을 치고 절을 하는데 / 維壇有帷
남들은 강을 건너도 자신은 건너지 않았으니 / 人涉卬不
어찌 올 수 있었겠는가 / 曷云能來
나라의 정사가 어지러워 갈 곳이 없었네 / 蒙戎其裘
한번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고 / 一去不復
초목이 우거진 백월에 머물렀으니 / 百越蓁蓁
명 나라 황제가 탄식하며 / 皇帝曰咨
그대는 충신이라고 칭찬하였네 / 女維忠臣
삼례를 맡아보게 하였으나 / 典我三禮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네 / 不改其舊
흰 칼날을 밟을 수 있자 / 白刃可蹈
크게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네 / 拜而稽首
고기와 곡식이 / 庖人廩人
공의 집 문에 계속 이르렀으니 / 繼之在門
동국에 전해지는 말이 / 海左相傳
대개 이와 같았었네 / 蓋如此云
백씨는 걸출하여 / 伯兮傑然
또한 섬으로 들어갔으니 / 亦浮于海
인자의 풍성(風聲)을 구하는지라 / 求仁者風
이로써 후회함이 없었네 / 是以靡悔
일찍이 내가 광세의 감회가 있어 / 夙予曠感
이 태상에 명하면서 / 命玆太常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드리게 하니 / 宣以侑之
무양이 아득히 혼을 부르네 / 招招巫陽
[주1]삼례(三禮) :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 말로, 천신(天神), 인귀(人鬼), 지기(地祇)에 제사를 드리는 예이다. 여기에서는 명 나라 황제가 김주(金澍)를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임명한 사실을 말한다.
[주2]무양(巫陽) : 전설 속의 여무(女巫)로, 상제의 명을 받고 혼백을 주관하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이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집(文集)에,
“주(澍)는 선산인(善山人)이며 호는 농암(籠巖)이다. 공양조(恭讓朝)에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하절사(賀節使)가 되어 황조(皇朝 명(明) 나라를 가리킨다)에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아조(我朝 조선(朝鮮)을 가리킨다)가 개국(開國)하였다는 말을 듣고 부인에게 편지를 부쳐 이르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니 내가 압록강을 건너가도 몸을 용납할 곳이 없소. 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국으로 향한 그 날로 나의 기일(忌日)을 삼을 것이며, 장례한 뒤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라.’ 하므로, 자손들은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았으니, 이날은 곧 압록강에서 편지를 발송한 날이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정유년(선조 30 1597) 가을에 일본(日本)을 책봉하는 행차 중 막관(幕官)에 허유성(許惟誠)이란 자가 있어 자칭 선생의 후예라 하면서 선생의 집이 형초(荊楚)인데 딸 셋을 낳았다고 말하니, 허(許)는 곧 그의 사위 중 한 사람이다. 이제 선생의 7대손 유엽(有曄)의 말을 채택하여 유사(遺事)를 찬한다.”
하였고, 또 죽계(竹溪)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그를 위해 전(傳)을 썼으니, 대략 윤설(尹說)과 같다.
【안】 명(明) 태조(太祖)의 성절(聖節)이 9월 18일이기 때문에 본국에서 하절사(賀節使)를 보내는 것은 언제나 6월이었다.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해 보아도 다 그러하다. 공양왕(恭讓王) 4년 임신(1392) 6월에 평리(評理) 경의(慶義)과 개성윤(開城尹) 조인경(趙仁瓊) 등을 하절사로 보냈는데, 예의판서 김주의 사실이 없고 또 예의판서는 공양왕 때의 관명(官名)이 아니니 더욱 의심이 간다. 또 김주의 명예와 지위가 이미 나타났고 큰 절의가 이와 같은데, 우리 나라 사람이 하나도 아는 이가 없고 심지어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책에도 하나같이 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선조의 사실에 있어 지나치게 과장하여 그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있으니, 사가(史家)가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본가 자손들의 사언(私言)만 믿고 기록해서는 안 된다.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의 일기(日記)에 변설한 것이 옳기 때문에 지금은 취하지 않고 싶으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전설이 이미 오랬고 《동사찬요》ㆍ《여사제강》ㆍ《동사회강》 등의 책에 다 기록되었기로 할 수 없이 옛것에 의해 쓴다.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김주는, 자는 택부(澤夫)이며, 호는 농암(籠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에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망한 것을 듣고 본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고려말에 하절사(賀節使)로 명 나라에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태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듣고 종에게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다만 이것을 가지고 표적을 삼아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고, 또 내가 도로 명 나라에 들어가는 날을 기일로 삼아라.” 하였다. 드디어 돌아서서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기를 청하니, 명 태조가 말하기를, “제왕이 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이 있으니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어 묻기를, “너는 본국에서 무슨 벼슬에 있었느냐.” 하였는데, 공이 대답하기를 “예의 판서(禮儀判書)로 있었습니다.” 하니, 드디어 종신토록 상서(尙書)의 녹을 주었다. 공은 형초(荊楚 지금의 호남(湖南)ㆍ호북성(湖北省) 일대) 지방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았다. 임진에 명 나라 군사가 왔을 때에 유격장군(游擊將軍) 허씨(許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칭 공의 외손이라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해동악부(海東樂附)》
○ 공이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부인에게 글을 주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면 가서 몸을 둘 곳이 없다.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 나라에 돌아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고, 장사 지낸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 하였다. 그 자손은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으니, 이 날은 바로 압록강에서 글을 보낸 날이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 가을, 명 나라에서 일본에 간 책봉사(冊封使)의 일행 중에 막하관(幕下官) 허유성(許惟誠)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유성(惟誠)은 복건인(福建人)이다.” 하였다.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동래(東萊)에 들려 사람들에게 자칭 공의 후예라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은 형초지방에서 장가들어 세 딸을 낳았는데 허씨는 그 사위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신곡(新谷)의 김씨(金氏)들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김씨의 본관이 선산(善山)이라는 것만 알고 신곡이 공이 살던 동리임을 알지 못하여 답을 못해 주었다. 그래서 후손은 끝내 유성과 서로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농암전(籠岩傳)》에 말하기를 “정승(政丞) 김응기(金應箕)는 이름난 사람이나 조선(祖先)을 밝게 드러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공의 7대손 유엽(有曄)의 말을 채택하여 유사(遺事)를 찬술했다.” 하였다. ○ 부윤(府尹)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대략 이와 같다.
우리 태조가 임신년(1392) 7월 16일에 개국하고 한상질(韓尙質)을 사신으로 명 나라에 보냈는데 그 주문(奏文)에 말하기를, “우리 신하 조림(趙琳)이 예부의 자문을 받아 왔는데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바꾸었느냐. 빨리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그러면 상질이 명 나라 서울에 가기 전에 이미 조선의 개국을 알았고, 상질이 돌아온 것도 바로 이해이다. 공이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돌아왔다면 어찌 연말에 압록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태조의 개국을 들었을 리가 있겠는가.
이것은 온 우주에 뻗치는 큰 충절인데 어찌 수백 년간 묻혀서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으며, 문대공(文戴公) 김응기의 시호 등 여러 자손이 비록 유명(遺命)을 따라 지문과 묘갈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을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엽(有曄)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까. 일본에 책봉사(冊封使)가 간 것이 을미년(1595) 겨울이었는데 유엽은 정유년(1597) 가을이라 하니, 십여 년 전의 일도 혼란하여 이같이 사실과 다른데 어찌 수백 년 전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선산삼인록(善山三仁錄)》 서 우암 송시열
선산(善山)은 예로부터 현사(賢士)와 문인(聞人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많았다. 남산사(南山祠)에서 향사(享祀)하는 네 선생[四先生]1)은 본디 익히 알려진 바이거니와, 그 외 또 일은 서로 같지 않으나 인(仁)을 똑같이 이룬 사람 셋이 있으니, 농암 선생(籠巖先生) 김주(金澍), 단계 선생(丹溪先生) 하위지(河緯地), 경은 선생(耕隱先生) 이맹전(李孟專)이 바로 그분들이다.
기(記)에 이르기를 ‘인(仁)을 이루지 못한 지 오래이다.’ 하였다. 대체로 은(殷) 나라 같은 거대한 천하(天下)로서도 오직 세 사람[三人 은 나라의 세 어진 이, 즉 기자(箕子)ㆍ미자(微子)ㆍ비간(比干)]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선산(善山)은 우리 동방(東邦)의 한 고을로서, 그 존상(尊尙)하고 칭도(稱道)하면서 인(仁)으로 일컫게 된 사람이 그 은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으니, 아, 이 얼마나 훌륭한가.
어떤 이가 힐난하면서 ‘인도(仁道)는 지극히 크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일찍이 함부로 남에게 허여하지 않았는데, 이제 특이한 일절(一節)만 가지고서 그런 명예를 얻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론 전체(全體)를 들어 말한다면 진실로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오직 그 존심(存心)과 처사(處事)가 공적인 천리(天理)에 합하고 사적인 인욕(人欲)이 없다면 이 또한 인(仁)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문(聖門 공자의 문하)으로 말하자면, 여러 제자들 가운데는 일월(日月)에 한 번 이른 것2)에 대해서도 오히려 인(仁)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더구나 고국(故國)과 처자(妻子)를 마치 헌신짝처럼 버리고 형초(荊楚)에서 생을 마치면서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던 농암(籠巖)3)이야말로 어찌 제(齊) 나라를 떠난 지 오래지 않아서 다시 돌아온 진 문자(陳文子)4) 같은 사람에 비할 바이겠는가. 그리고 이른바,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여 인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대로 실천한 사람은 단계(丹溪)를 꼽을 수 있겠으며, 경은(耕隱)의 경우는 마치 장님이나 귀머거리처럼 살면서 그 뜻을 이루었으니, 이는 또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면서 수난을 겪은 명이(明夷)의 뜻5)이 아니겠는가.
이 세 사람은 비록 전체를 가지고 논할 수는 없지만, 그 변사(變事)를 당하여 바름[正]을 잃지 않고 각기 본심(本心)의 편안함을 얻은 것으로 말하면 그 이른바, 천리에 합하고 인욕이 없는 것은 거의 달성한 것이요, 또한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전(傳)함을 같이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고 보면 선산(善山)의 선비들이 하나같이 이분들을 존모(尊慕)하여 삼인(三仁)이라고 칭하고 그분들의 사적을 뽑아 한 책(冊)으로 편집하여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경은(耕隱)의 5대손(五代孫)인 성산(星山) 이상일 여휴(李尙逸汝休)가 이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이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그런데 이 책을 얻어서 읽어 보고서도, 감명을 받아서 뜻이 벌떡 일어나고 숙연히 공경심을 가지며, 완악(頑惡)한 마음이 청렴해지고 나약한 마음이 굳세지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인심(人心)이 없는 자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아무리 백이(伯夷)ㆍ숙제(叔齊)와 함께 있은들 또한 어찌하겠는가.
숭정 무신년(1668, 현종9) 맹하일(孟夏日)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주1]네 선생 : 길재(吉再)ㆍ김종직(金宗直)ㆍ정붕(鄭鵬)ㆍ박영(朴英)을 합해서 일컫는 말이다.
[주2]일월(日月)에 …… 이른 것 :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안회(顔回)는 3개월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고, 그 나머지는 일월에 한 번 이른 정도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일월에 한 번 이른다는 것은 바로 혹은 하루에 한 번 인을 성취하기도 하고 혹은 한 달에 한 번 인을 성취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주3]고국(故國)과 …… 농암(籠巖)이야말로 : 농암 김주(金澍)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려 말엽에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명(明) 나라에 하절사(賀節使)로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태조(李太祖)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인에게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이것을 신표로 삼아 내 아내가 돌아가거든 합장하고, 또 내가 명(明) 나라로 들어가는 날을 제삿날로 삼으라.” 하였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명 나라로 들어가 명 태조에게, 군사를 일으켜 조선 이 태조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명 태조는 그에게 상서(尙書)의 녹(祿)을 종신토록 주었는데, 그는 형초(荊楚) 지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주4]제(齊) 나라를 …… 진 문자(陳文子) : 춘추(春秋) 시대 제 나라 대부(大夫) 최자(崔子)가 임금을 시해하자, 역시 같은 대부인 진 문자(진수무(陳須無)를 가리킴. 문자는 그의 시호)가 제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왔었다. 《論語 公冶長》
[주5]머리를 …… 명이(明夷)의 뜻 : 이는 은(殷) 나라 말엽의 기자(箕子)에게 비유한 말이다. 은 나라 말왕(末王)인 주(紂)가 워낙 포학하고 무도하므로, 그의 숙부(叔父)인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였다. 명이(明夷)의 뜻이란 바로 《주역(周易)》 명이괘의 상을 가리킨 것으로, 이 괘상은 현인(賢人)이 암군(暗君)을 만나 화(禍)를 당하는 상인데 기자가 곧 그 상에 해당했던 것이다.
농암(籠巖) 김 선생(金先生) 주(澍) 의 신도비명 병서(幷序) 수암 권상하 찬
고려(高麗)가 나라를 향유한 지 5백 년 동안에 교목세가(喬木世家)의 신하가 백 명, 천 명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할 때에는 의리를 지켜 스스로 깨끗이 처신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으니, 이렇듯 인(仁)이란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농암 김 선생이 성취한 의리가 가장 명백하고 깨끗했으므로, 후세에 고인을 논평하는 이들이 농암을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과 백중지세로 논하곤 한다.
선생의 휘는 주(澍)인데, 공양왕(恭讓王)을 섬기어 벼슬이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 임신년(1392, 태조1), 하절사(賀節使)로 명(明) 나라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鴨綠江) 나루터에 임하여 아조(我朝)가 혁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쪽으로 향하여 통곡을 하고,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부쳐 그 가인(家人)과 결별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니, 내가 압록강을 건너가면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부인이 임신한 것을 내가 아는데, 만일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양수(楊燧)라 하고 딸을 낳거든 이름을 명덕(命德)이라 하시오.” 하고, 인하여 조의(朝衣)와 조화(朝靴)를 신표로 삼아 보내면서 또 하인에게 경계하기를 “후일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 이것으로 합장을 하고, 지문(誌文)이나 묘갈(墓碣)은 쓰지 말아서 후인들에게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할 것이며, 지금 이 편지 발송한 날짜를 내가 죽은 날로 삼아라.” 하였으니, 이때가 곧 섣달 22일이었다. 선생은 이 편지를 다 써서 전하고는 마침내 혼자 몸만 빠져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혹자는 말하기를 “선생은 이때에 다시 중조(中朝)로 들어갔는데, 태조황제(太祖皇帝)가 선생에게 본국에서 무슨 벼슬을 하였느냐고 묻고 당장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제수하였으나, 선생이 사양하고 받지 않자, 태조황제는 상서의 봉록을 종신토록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형초(荊楚) 지방에 살면서 딸 셋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이 사적(仕籍)에 많이 올랐다. 만력(萬曆) 연간에 황조(皇朝)에서 사신을 보내 일본(日本)을 책봉(冊封)할 적에 그 책봉사의 막하관(幕下官)으로 허유성(許惟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사신 일행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러 자칭 선생의 외손자라고 했다.”고 한다.
선생은 선산인(善山人)이다. 상조(上祖)는 고려 초기 시중(侍中)을 지낸 선궁(宣弓)이고, 그후 득충(得忠)이란 사람은 지위가 숭질(崇秩)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이 낭장(郞將) 양인(良印)인데, 이가 바로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소윤(少尹) 신함(愼緘)이고, 조는 민부 의랑(民部議郞) 우의(友誼)이며, 고(考)는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으로 판서에 증직된 원로(元老)이고, 비(妣)는 수주 김씨(水州金氏)이다. 부인(夫人)은 개성윤(開城尹) 유사우(柳思雨)의 딸이다. 아들 하나는 곧 양수(楊燧)인데, 뒤에 수(燧) 자를 보(普) 자로 바꾸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선위사(宣慰使)를 지냈다. 선위사의 두 아들은 이(履)ㆍ지(地)인데, 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현감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선경(善慶)은 찬성에 증직되었고, 지경(之慶)은 대사헌을 지냈고, 유경(惟慶)은 현감을 지냈고, 삼경(三慶)은 생원이고, 성경(成慶)은 헌납을 지냈다. 그후에 또 좌의정 응기(應箕)란 사람이 있으니 그는 대사헌의 아들이고, 응교 진종(振宗)이란 사람은 헌납의 손자이다. 외손들도 벼슬아치가 많은데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고려의 운수가 다한 때는 곧 성인(聖人)이 일어나서 만물이 보고 따르는 때이니, 선생이 일단 압록강을 건너기만 했다면 그 부귀영화가 반드시 처음부터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서 자취를 끊고 멀리 떠나, 고향과 처자를 마치 헌신짝처럼 버리고 끝내 이역(異域)에서 죽으면서도 원망과 뉘우침이 없었으니, 진실로 의리(義利)에 본디 밝아 심덕(心德)의 온전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옛날 부자(夫子)께서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논하기를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선생 같은 분이 여기에 가깝다고 하겠다. 대체로 그 수립(樹立)한 것이 크기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겨룬다 하더라도 될 것이다. 그런데 압록강 가에 이르러 경계의 말을 전해서, 곧장 성명(姓名)과 함께 자취를 없애어 천하 후세로 하여금 자신을 어떻게 일컬을 수 없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망한 것을 지성으로 슬프게 여긴 데서 나온 것으로, 털끝만큼도 무엇을 계교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음이 더욱 분명하다.
그러나 향인(鄕人)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향사한 것이 오래되어도 쇠퇴하지 않고, 제현(諸賢)들이 선생의 숨은 덕을 찬양한 것이 간책(簡冊)에 빛나는데, 그중에도 우리 우암 선생의 경우는 또 선생을 극도로 높이고 칭도하여 삼인(三仁)에 비유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선생께서 스스로 자신의 자취를 감추려고 한 본의에는 걸맞지 않으나, 백세의 충신ㆍ열사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한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어찌 이른바 “은미한 것이 드러나는 것이니, 성(誠)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옷과 신을 묻은 곳이 선산부(善山府) 동쪽 제궁촌(諸宮村)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는데,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향사(鄕祠)를 짓기 시작하던 날에는 기다란 무지개가 그 위에서 일어나 초석(礎石) 세워 놓은 곳까지 뻗치었고, 들보를 얹을 때에도 그러했다 하니, 이상한 일이다.
선생의 선대는 본디 주아리(走兒里)에서 살았었는데, 선생에 이르러 신곡(新谷)의 농암(籠巖) 아래로 옮겨 살았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농암 선생이라 칭하였다. 지금의 부사(府使) 김후 만증(金侯萬增)이 그 유허(遺墟)에 갈(碣)을 세우고 비각(碑閣)을 지어 덮었다. 그런데 선생의 후손인 지평(持平) 덕기(德基)가 언사(言事)로 죄를 입고 외직으로 나와 그 방군(傍郡)을 다스리면서 여러 종인(宗人)들을 불러모아 놓고 꾀하기를 “우리 할아버지 같은 선덕(善德)과 사행(事行)을 가지고도 아직까지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지지 않은 것은 바로 자손들의 수치이다.” 하고는, 급히 종인(宗人) 태벽(泰璧)을 시켜 나에게 명(銘)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나는 글을 못하니, 어떻게 그 큰 공렬을 찬양하여 영원한 후세에 전해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어릴 때부터 선생을 대단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지금 이 일에 대해서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이상과 같이 그 사실을 차례대로 기록하고 명(銘)으로써 이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군신 간의 큰 윤기는 / 君臣大倫
만고불변의 법칙이라 / 天經地義
마치 하수와 태산이 / 有如河嶽
영원히 유치함과 같으니 / 萬古流峙
사람치고 이것이 없으면 / 人而無此
곧 금수와 같은 것이라 / 乃禽乃獸
성인이 이것을 근심하여 / 唯聖有憂
오륜 만들어 후세에 고했으나 / 立典垂後
사람이 이욕의 꼬임을 받아 / 然爲利誘
직분을 다하는 자 적었는데 / 盡分者少
세상이 한 번 내려오매 / 世一以降
누가 온전히 잘할 수 있겠는가 / 疇克全好
훌륭하신 농암 선생은 / 於赫籠巖
고려 말기에 태어나서 / 挺生麗季
조정에서 강직함 떨치고 / 揚廷侃侃
나아가 나라의 예 맡았네 / 晉掌邦禮
이어 명 나라에 사신 갔다가 / 觀風帝京
일 마치고 돌아오는데 / 四牡來復
얼마 안 되는 그동안에 / 日月幾何
고려 망하고 조선 건국되었네 / 天地變易
모두가 새 임금 섬겼으나 / 衆逐風雲
나만은 화서를 슬퍼하노니 / 我悲禾黍
아 어디로 돌아갈꼬 / 嗚呼曷歸
복명할 곳이 없어졌네 / 致命無所
그리하여 넘실대는 압록강을 / 鴨水洋洋
맹세코 다시 건너지 않고 / 矢不復渡
차라리 상국으로 되돌아가 / 寧返上國
우리 임금 가까이 있으리라 하고서 / 以邇父母
정처 없이 멀리 떠나 / 飄然遐擧
영원토록 자취를 끊음으로써 / 終古絶迹
나의 천상을 온전히 하고 / 全我天常
영원히 인륜의 법칙 붙들었네 / 永扶人極
우뚝한 그 절의가 / 有卓其節
사람들의 입에 새겨 있어 / 銘在人口
맑은 향기로 맺혀져서 / 結爲淸芬
우주 안에 두루 전파되었네 / 播於宇宙
봉곳한 언덕의 빈 무덤이 / 睾如虛封
저 낙동강 가에 있는데 / 唯洛之涘
공이 영령 왕래하는 것은 / 公靈往來
물이 땅에 있듯 어디도 가리라 / 如水在地
성대한 공의 후손들이 / 翼翼來雲
큰 비석 세우므로 / 載樹穹石
내 그 비면에 이렇게 써서 / 我書其面
무궁한 후세에 고하노라 / 以告千億
[주1]성인(聖人)이 …… 따르는 : 성인도 똑같은 인류(人類)이기 때문에 성인이 나면 모든 사람이 다 우러러보고 따른다는 뜻으로, 즉 현인(賢人)이 성왕(聖王)을 만나 벼슬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周易 乾卦 文言》
[주2]삼인(三仁) : 은(殷) 나라 말년의 세 충신인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을 가리킨다. 이 세 사람에 대한 자세한 것은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나타나 있다.
[주3]은미한 …… 없다 : 천지의 실리(實理)는 은미하면서도 잘 드러나서 숨길 수 없다는 뜻으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6장에 있는 말이다.
[주4]유치(流峙) : 물은 영원토록 흐르고 산은 영원토록 우뚝 서 있음을 뜻한다.
[주5]화서(禾黍)를 슬퍼하노니 : 나라 잃은 슬픔을 비유한 것이다. 주(周) 나라가 동쪽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뒤, 주 나라 대부(大夫)가 행역(行役)차 가는 길에 주 나라의 옛 도읍지를 들러 보니, 궁실(宮室) 터가 모두 벼와 기장 밭으로 변했더라는 데서 온 말이다. 《詩經 王風 黍離序》
〈농암선생전〉 뒤에 쓰다〔書籠巖先生傳後〕 대산 이상정
〈농암선생전(籠巖先生傳)〉은 월정(月汀) 윤공(尹公)이 지은 것이다. 선생이 나라를 떠나 멀리 은둔하여 그 이름과 자취를 없애고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는데, 윤공이 그를 위하여 전을 지어서 칭찬해 드높이니, 혹 선생의 본의와 어그러지는 면은 없는가? 옛날 태백(泰伯)이 친족을 떠나 신체를 훼손하고 스스로 오랑캐 속에 숨어서 백성들이 뭐라고 칭송할 만한 흔적이 없게 하였는데, 공자께서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성인의 이 한마디 때문에 태백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으나, 이 어찌 태백의 뜻을 손상한 것이겠는가. 윤공의 뜻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아아, 형만(荊蠻) 지역은 멀리 중국의 남쪽 끝에 있는데 태백이 전대에 그곳에 거처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었고, 선생은 또 후대에 그곳에 우거하여 그 절개를 이루었으니, 앞뒤로 수천 년 동안 천지의 동량(棟梁)을 부지하여 덕분에 인륜 기강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그런즉 비록 행적과 일은 다르지만 그 지킨 바의 고절(苦節)과 확립한 대의(大義)는 같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에 성인이 나오신다면 지극한 덕이라 병칭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런데 하담(荷潭) 김 상서 시양(金尙書時讓)은 선생의 일에 의심을 품고 자못 이 전을 믿지 않았다. 아아, 선생이 이미 그 자취를 없애 버렸고 자손들도 당시 상황에 핍박받아 또한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여 칭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래된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박용암(朴龍巖 박운(朴雲)),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顯光)), 최인재(崔訒齋 최현(崔晛)), 이창석(李蒼石 이준(李埈)) 등 제현은 그 지방에서 태어났고 시기가 멀지 않은 분들인데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며 사당을 세워 제향을 드렸으니, 하담의 한마디가 또 어찌 선생을 흠집 낼 수 있겠는가.
선생의 먼 후손인 김복형(金復亨)이, 윤공의 수필(手筆)이 오래되면 좀먹고 손상될까 걱정하여 배접해서 첩을 하나 만들어 길이 가전(家傳)할 보물로 삼았는데, 근간에 나에게 보여 주기에 받들어 완상해 보고는 삼가 뒤에 한마디 적어 돌려주는 바이다.
[주1]농암선생전(籠巖先生傳) : 농암은 김주(金澍)이다. 고려 말에 중국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선이 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입국하지 않고, 집안에는 자신을 죽은 것으로 치라는 유언을 남기고 중국의 오초(吳楚) 지방으로 떠났는데, 후에 김주의 사위라는 사람이 집안사람을 찾아 이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다. 한국문집총간 47집에 수록된 윤근수(尹根壽)의 《월정집(月汀集)》 권4에 김주의 절의를 높이 평가한 〈농암선생전〉이 실려 있다. 이 사건의 진위 여부에 대한 김시양(金時讓)의 논란이 있었는데, 성해응(成海應)은 한국문집총간 275집에 수록된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58 〈고실고이(故實考異)〉에서 윤근수가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에 대해 전(傳)을 써서 후인들을 오도했다고 비판하며 김시양의 판단이 옳다는 점을 낱낱이 사실을 인용하여 논증하였다.
[주1]월정(月汀) 윤공(尹公) :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으로 《월정집》이 전한다.
[주2]태백(泰伯)이 …… 하였는데 : 주나라 태왕(太王)이 막내아들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전해 주고 싶어 하자, 태왕의 장자인 태백이 동생 중옹(仲雍)과 함께 남쪽 형만(荊蠻) 땅으로 도망쳐서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쳐 스스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게끔 만들어서 왕위를 사양하니, 계력이 왕위를 이었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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