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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5일 주일 설교
제목: 창조 프로젝트
https://www.youtube.com/watch?v=im5MEDVQEbE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사야 65: 17~18, 25)
설교 목적
구원을 어떤 이야기로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다르게 이해할 것이다. 구원을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자로서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우리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날 것이다.
나는 이 설교에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창조 프로젝트라고 제시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이 큰 프로젝트 안에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운영하신다. 그 운영의 최종 목적은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이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은 공허와 혼돈에서 질서와 충만의 세상을 이끌어 내셨다. 그리고 주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실 때마다 세상은 다시 질서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서 대리인이자 관리자로서 소임을 다시 감당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받은 소임이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이 세상 전체를 위한 계획이며 그 계획에 인간이 동참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사명이다.
이런 설교 목적을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것이다:
1. 문제 제기: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2. 하늘과 땅의 창조
3. 창조 프로젝트와 구원
4.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삶
5. 기독교인이여, 배타성을 극복하라
1. 문제 제기: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질병을 고쳐달라는 기도, 우리의 가족을 돌봐 달라는 기도, 그리고 우리의 앞 길을 인도해 달라는 기도 등. 우리의 기도는 거의 언제나 우리의 필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거의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득 신앙인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정성을 바치며 그분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처음에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파악합니다. 예를 들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권면을 기억하며(에베소서 5:17)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로마서 12:2).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온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지상명령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마태복음 28:18~20).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쉽게 우리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일을 그르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에 ‘사우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현대차는 작년에 55만대의 현대자동차를 사우디에 제공했으며 수소경제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산유국이지만 앞으로는 석유중심의 경제에서 벗어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은 47년 전인 1976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산업항구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완성한 고 정주영 회장의 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어떤 일을 목표로 세우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동원하는 모든 계획이나 활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며 행동을 합니다. 그것을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하나님의 프로젝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것은 이런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프로젝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성경이야기를 종합하면서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살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성경 이야기에서 어떤 일을 하셨고 장차 어떤 일을 완성하려고 하실까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프로젝트에 걸맞은 생활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야기에서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구원이라고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글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디모데전서 2:4)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이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를 이 세상으로부터 건짐을 받아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생각은 테러리스트들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하면 그들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테러를 저지르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중세시대 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구원의 이야기로 이해하고 그 구원을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윤리나 도의를 저버리는 일을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이사야 65:17~18상
저는 오늘 성경이야기를 종합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창조라는 말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엇이며 그 창조가 완성되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왜 우리의 소망인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2. 하늘과 땅의 창조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옛 하늘과 옛 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전 하늘과 이전 땅이며 이전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전 세상이 망가졌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제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창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처음 세상과 처음 땅을 창조하셨을 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궁창과 땅과 바다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들로 채우셨고 땅에는 초목과 짐승들로 채우셨으며,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와 하늘에는 새들로 채우셨습니다. 이제 세상은 보기에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세상입니다. 그런 곳은 보기에 좋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예레미야 4:22~26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고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을 때 세상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바꾸어 질서와 생명과 밝음으로 채우는 활동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심판과 저주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인간을 이 낡은 세상에서 건져내어 저 높은 곳에 있는 빛나는 세상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낡은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3. 창조 프로젝트와 구원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것은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임무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 세상에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은 하나님의 진짜 모습인 정의와 자비와 경건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처소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때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통해 세상에 비추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으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점점 완성되어 세상은 생명으로 충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아담을 부르셨듯이, 그 후에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을 주셨고 마침내 그들은 그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처소를 지으시고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온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은 열방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는 자기 백성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않았으며 세상은 다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신약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신약성경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칭하셨습니다. 그 열두 사람은 장차 세워질 교회의 기초가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열두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질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충실하게 따르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며 진정한 의미의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셨다면, 예수님은 자기 형상을 담은 교회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이 임하기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목적을 이해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새 아담이라는 말이며, 새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사입니다(고후 5:20).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본래적인 소임에 동참하기 시작할 때 세상은 혼돈과 공허가 물러가고 질서와 생명이 자리잡으며, 흑암이 물러가고 밝아질 것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살기 시작할 때 그는 사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을 완성하시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온 세상과 함께 우리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8
4.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삶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적부터 사람들은 귀한 일과 천한 일을 구분했습니다. 생각없이 짐승처럼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을 천하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귀한 사람들은 선비들처럼 경전을 연구하고 시를 짓거나 나라를 통치하는 일에 참여하고, 몸을 움직여 힘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를 담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성직과 세속직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위세가 컸던 시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성직자들이라면 그런 부르심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은 세속직업에 종사한다는 말입니다. 흔히 세상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기독교인들 중에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직업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에 vocation이 생겼습니다.
어떤 일에 종사한다는 말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자리를 잡고 그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담은 영어 단어는 occupation입니다. 이것도 직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 job이라는 말은 본래 덩어리(lump)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직업(job)은 사람이 어떤 짐을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업은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 신성한 일이므로 그 일은 본래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며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을 부를 때는 voc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구원으로만 이해하면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목회활동을 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부르고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창조 프로젝트로 이해하면, 이 세상을 보존하고 돌보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물론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겠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영리(營利)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더럽히는 사람이며 결국 공동체를 망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임무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는 어떤 일입니까? 그것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는 곳을 질서와 생명과 빛으로 채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약한 것을 돌보아서 강하고 굳세게 자라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가르쳐서 자신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 그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누군가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유지되고 더 번성하는데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직업은 거룩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며 서로에게 감사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공감과 상호연대는 우리의 공동체를 유지하게 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5. 기독교인이여, 배타성을 극복하라
오늘 저는 신앙생활의 시작이 개인의 필요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신앙은 개인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결핍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후에 신앙인은 성경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성경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생각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가 됩니다.
예언자 요나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나라 앗수르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살고 있는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요나 4:11). 지금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전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은 모두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확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 두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합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사로 임무를 수행할 때 가장 먼저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 목상을 찍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사사기 6:25~27). 기드온은 자기 집에서 일하는 종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일을 실행합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종교의 신상을 찍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핵심 프로젝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행동을 분별없이 따라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오해한 이야기를 토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면 결국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프로젝트와 반대가 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성경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원을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저 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나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생명이 잘 자라도록 돌보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는 종교나 인종이나 국적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널리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좋아하도록 배우고 깨닫고 돌이키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돌이켜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큰 뜻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라고 부릅니다. 그 일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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