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찾을 때 한번쯤은 가보는 곳이 포석정(鮑石亭)일 것이다. 이곳에 갔을 때 통일신라 말기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친 비극적인 장소에 왔다는 착잡한 감회도 있지만 포석정은 우선 그 형태부터 독특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복모양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포석정은 곡수유상(曲水流觴)이라 불린다.
곡수유상은 구불구불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는 것, 또는 그 유적을 뜻한다. 이 곡수유상은 원래 중국의 진 시대에 왕희지가 중국 최초로 난정(蘭亭)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음력 3월 3일 상사(上巳)일에 계욕의례를 하면서 시를 짓는 풍류를 덧붙여 곡수유상연이 시작되었다. 진 시대 이후 곡수유상연은 음력 3월 3일 정자 속에 만들어진 풍(風)자 국(國)자 모양의 인공수로에서 행해졌다. 즉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술잔이 누군가의 면전에 맴돌거나 멈추면 그 사람은 즉흥적으로 시 한 수를 지어야만 했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을 석잔 마셔야 했다.
그러나 명 이후 계욕의례와 함께 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곡수유상연은 계욕이라는 제사의 의미가 퇴색되고 봄놀이 행사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궁궐 정원에서 8세기에 성행한 곡수유상연은 11세기까지 연중 단 한번 음력 3월 3일에 개최되는 세시풍속으로 행해지다가 단절됐다. 이후 16세기에 들어 곡수유상연은 음력 3월 3일 계욕의례와 관계없이 봄날의 풍류놀이로 부활됐다.
포석정에 대해서 현재까지 나타난 첫 기록은 9세기이며 이곳에서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고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곡수유상연을 했다 한다. 우리의 기록에는 없으나 중국에서 기원한 곡수유상과 비교할 때 이곳은 음력 3월 3일에 제사의 의미인 계욕의례와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연중 단 한번 여는 세시풍속이 있었던 장소일 것이다. 그리고 왕이 신하와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은 제사를 지내는 계욕의례 이후의 오늘날 표현으로 뒤풀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포석정에 현재 남아 있는 인공수로인 석구(石溝)는 곡수유상의 유적이다. 포석정이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정(亭)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을 것이고 중국과 비교해 볼 때 포석정 속에 인공 수로가 있거나 인공 수로 밖으로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포석정 유적은 인공 수로 석구만이 동그마니 홀로 남아 있고 석구의 입구에 고목 한 그루가 있을 뿐 황량하기 그지없는 상태이다. 이 포석정 환경을 곡수유상연을 했던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세계가 각국의 문화유산을 자국의 긍지로 삼고 있는 이때에 인공 석구뿐인 포석정은 우리의 곡수유상의 유적으로는 극히 빈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1시간 거리의 사오싱(紹興)을 답사했을 때 난정의 곡수유상 유적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곳은 원래의 위치에서 평지로 내려와 청(淸)대에 복원된 유적이지만 난정의 건물및 왕희지의 글씨들과 함께 진시대의 곡수유상연을 했던 곡수유상의 계류와 주변 환경을 그대로 잘 회복하여 보전하고 있었다. 곡수유상을 했던 계류와 그 물줄기가 시작되는 못과 흐름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고 주변의 정각(亭閣)들도 난정과 함께 정비되어 곡수유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경주 포석정 주변의 발굴조사가 몇년 전에 일부 시행됐다고 들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개울 너머 민가들을 포함한 포석정 전 영역의 발굴조사가 아닐까. 앞으로 기존의 발굴조사에 덧붙여서 포석정 전 영역을 밝힐 수 있는 점차적인 발굴조사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발굴조사가 선행된 후 곡수유상연을 할 수 있었던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재앙이나 악귀를 쫓아내고 깨끗하고 맑게 하는 계욕의례와 곡수유상연을 했던 우리의 아름답고 풍류가 있는 풍속이 부활됐으면 한다. 그리되면 서로가 서로를 질시하는 거칠고 메마른 오늘날의 세태에 한 가닥 숨통을 터줄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나만의 포석정에 대한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