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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종교>: 서양의 종교
유대교[Judaism]
[개요]
하느님의 임재를 인간행위와 역사에서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이다.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이사악·야곱 등 족장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세기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 년 동안 믿어온 신앙체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협의의 유대교 통사만을 다룬다.
[유대교 재건 시대(BC 538~333)]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패망하는 과정에서 엘리트 유대인들은 3차례에 걸쳐(BC 597, 587, 582) 신바빌로니아로 끌려가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칙령을 내려, 신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성전재건을 명했다(에즈 1:2~4, 6:3~5). 세스바쌀과 그의 조카 스룹바벨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족들을 데리고 귀향해서 성전재건에 진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귀향하지 않고 눌러 살던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귀향자들은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스룹바벨은 다리우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BC 515년 3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레위인·평신도 가릴 것 없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앙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이스라엘의 역사 A History of Israel〉). 페르시아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4~424 재위)의 술 시중을 들던 유대인 느헤미야가 BC 444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BC 437년 12월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쳤다(요세푸스의 〈유대교사〉). BC 433년 느헤미야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궁정으로 돌아갔다가 1~2년 후 다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혼종혼(混宗婚)을 금했다(느헤 13).
BC 428년을 전후하여(〈이스라엘의 역사〉) 느헤미야에 이어 제사장이며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느헤 8).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종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에즈 9:2, 10:2~43). 유대인들은 에즈라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로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 가운데서 사위를 맞이하거나 며느리를 보지 않을 것,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이 안식일에 곡식이나 그 무엇을 팔러 오더라도 사지 않을 것,……7년마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 남에게 빚준 것이 있으면 없애버릴 것, 우리 하느님의 성전행사를 위하여 해마다 1/3세겔씩 바칠 것,……우리 밭에서 나는 햇곡식과 처음 딴 과일은 해마다 야훼의 성전에 바칠 것, 법에 있는 대로 맏아들과 처음 난 가축, 곧 갓난 송아지나 새끼양을 우리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에게 바칠 것"(느헤 10:31~37) 등이며 또한 십일조를 바치기로 다짐했다(느헤 10:38~39).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나 모세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AD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림으로써 성전제사가 아주 사라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재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2의 모세로 일컫기도 한다. 유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 신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하느님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 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어로 번역한 타르굼에 따르면 에덴 동산을 거니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고 그분의 말씀(멤라)이었다고 한다(창세 3:8). '하느님은 삼키는 불'이라는 표현을 '말씀은 삼키는 불'이라고 고쳤다(신명 4:24). 초월적인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명(神名) '야훼'를 입에 담지 못하고 '야훼'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읽었다. 그밖에도 하느님 야훼를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들이 발달했는데 '이름'(마태 6:9), '하늘'(마태 5:34), '전능'(마태 26:64), '셰키나'(現存) 같은 것들이다.
나. 선민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마태 5:46~47, 6:7, 18:17, 사도 2:23).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다.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제도·성전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5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수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빌론 유수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해석했다(느헤 9). 이렇게 해서 미드라시 문헌(성서 주석)이 생겨났다. 율법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BC 332~63)]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대제사장 야손(BC 175~172 재임)과 메넬라우스(BC 162 죽음)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I마카 4:36~40).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몬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C 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디즘)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 못지않게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2번째로 쿰란 종파가 있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하바꾹 주석 8:8~13).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 때(BC 103~76)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을 했다. 3번째 종파는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이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정권과 결탁했다(→ 헬레니즘 종교).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사도 23:6~8) 영혼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정결법·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만~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2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세기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세기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세기에 씌어진 〈아리스테아 서한 Letter of Aristeas〉에 따르면 역자 72명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세기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BC 20경~AD 50)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씌어진 작품으로는 우선 쿰란 문헌을 꼽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작품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성서 전설 또는 성서 주석류로 〈욥 유언집〉·〈이사야 순교기〉·〈아담과 하와의 생애〉, 쿰란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토비트〉·〈수산나〉·〈벨과 뱀〉 등이 있고, 묵시문학으로는 〈다니엘〉·〈에녹〉·〈모세 승천기〉·〈시리아어 바룩〉·〈에스드라 4서〉·〈아브라함 묵시록〉 등이 있으며, 역사서로는 요세푸스(AD 38경~100 이후)가 쓴 〈유대 전쟁 Bellum Judaicum〉·〈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가 있다. 그밖에 요세푸스는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Josephus〉·〈아피온 논박 Contra Apionem〉을 썼다. 지혜문학류로는 시라크의 아들 예수가 BC 180년경에 쓴 〈집회서〉·〈12족장의 유언〉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 시대(BC 63~AD 135)]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를 로마 시대로 본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가.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또는 14)~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마르 12:13~17).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나. 제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km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이스라엘의 성지〉).
다.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제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라. 제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마. 예수와 그리스도교
에즈라 이후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27년경 예수가 출현하여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고 그에 대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게 능사가 아니고, 하느님과 이웃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돌아섬'을 강조했다. 이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식민정권의 미움을 사서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루살렘 북부 성곽 바깥 골고다에서 약 33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에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를 처치했지만 하느님은 그를 정당화하여 그를 부활시켰다. 제자들은 수시로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고, 마침내 30년 오순절 예루살렘에 순례온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창교했다. 예수는 이단자가 아니라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 동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극히 적은 반면, 그리스도교 창교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몰렸다. 기성종교인 유대교와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 간의 결별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유대 독립전쟁(66~70) 때 유대계 그리스도교도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요르단 강 건너,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28km 떨어진 펠라로 피신했다. 85년경 유대인들은 야브네에서 18조 기도문 중 제12조 기도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을 단죄하는 구절을 덧붙였다. 115~117년 키레네 출신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와 제2차 유대 독립전쟁(132~135) 때, 바르 코크바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랍비 시대(1~18세기)]
가.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나.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다. 게오님 시대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라.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디즘)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시)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너무도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솀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 탈무드[Talmud]: 히브리어로 '연구', '배움'이라는 뜻. 유대교에서 〈토세프타〉를 포함한 구전 율법 모음과 〈미슈나〉에 대한 학문적 해설과 주석.
〈미슈나〉는 유대 구전 율법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법전으로서, 3세기초 유다 하 나시가 완성했다. 유대교 학자들(아모라임)의 두 학파인 팔레스타인 학파와 바빌로니아 학파는 각각 독자적인 〈탈무드〉를 만들어냈다. 두 학파가 동일한 〈미슈나〉를 사용했고 서로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나, 결국 율법·전승·주석으로 이루어진 별개의 모음집을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모라임은 약 2세기 동안 작업하여 400년경(바빌로니아 아모라임보다 약 1세기가량 앞섬) 완성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탈무드 바블리〉라고도 함)는 늦게 완성된 만큼 〈팔레스타인 탈무드〉(〈탈무드 예루샬미〉라고도 함)보다 방대하며, 그런 이유로 더 높이 평가받는다. 두 〈탈무드〉 모두 〈미슈나〉의 모든 부분을 다룬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들은 아예 주석되지 않았고 어떤 부분들은 그 주석들이 상실된 것 같다. 초기 사본들과 인쇄본들에서는 〈미슈나〉에 대한 주석을 〈탈무드〉라고 했으나, 1578~81년에 나온 바젤판의 경우에는 교회 검열국이 〈탈무드〉라는 이름을 〈게마라〉(아람어로 '완성'이라는 뜻)로 바꾸었다. 이렇게 바뀐 이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탈무드〉라는 이름은 〈미슈나〉와 〈게마라〉를 합친 전체를 가리키는 데만 쓰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탈무드〉 학자들이 다시 옛날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탈무드〉는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법전이다. 〈탈무드〉의 자료는 독특한 논법으로 구성되었고, 본문도 이러한 논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노력들이 기록되어 있다. 랍비들의 종교적 신념은 〈탈무드〉의 판결·사상·태도에 잘 나타나 있는데, 〈탈무드〉는 의식법 및 사회법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탈무드〉가 완성된 뒤 그 내용을 법전으로 만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알려진 최초의 시도는 8세기에 예후다이 가온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결정된 율법 Halakhot pesuqot〉과 9세기에 시메온 키야라가 지은 〈위대한 율법 Halakhot gedolot〉이다. 이 두 책은 〈탈무드〉의 논법을 없앴지만, 그 순서와 용어는 그대로 보존했다. 이후에 법전편찬은 1가지 주제나 분야에 집중하여 연구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12세기에 마이모니데스가 쓴 〈재검토된 토라 Mishne Torah〉와 14세기에 야코프 벤 아셰르가 쓴 〈줄들 또는 부분들의 책 Sefer haurim〉, 16세기 요제프 카로가 쓴 〈준비된 식탁 Shulan arukh〉이 있다. 세파르디 전승을 중심으로 씌어진 〈준비된 식탁〉에 16세기 아슈케나지 소속의 법전 편찬자 모세스 이세를레스가 주석을 붙였는데, 그 형식은 모든 유대 법전의 표준이 되었다. 그밖에도 〈탈무드〉에 대한 해석 문헌이 아주 많다. 11세기에 유럽에서는 라시(랍비 슐로모 이츠하키)가 지은 중요한 주석서가 나왔다. 그의 손자들인 이사크, 사무엘, 야코프와 같은 랍비들은 〈미슈나〉를 해석했듯이 〈탈무드〉도 해석했으며, 그로써 '토사포트'라는 해석 방법을 만들었다. 이것이 유럽 전역에서 받아들여졌으며, 람반(모세스 벤 나흐만)과 란(니심 벤 레우벤 게론디)과 같은 세파르디 소속의 저자들이 쓴 주석에 영향을 주었다.
〈탈무드〉 문헌의 또다른 형식은 7세기에 학자들이 법률과 종교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레스폰사)을 쓰는 방식으로 생겨났다. 레스폰사 문학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왔으며, 중세기의 주요저자들로는 마이모니데스·람반·란 등을 들 수 있다. 고대 학교들은 구전으로 학문을 전수했기 때문에 〈탈무드〉가 언제 처음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팔레스타인 탈무드〉는 1523~24년 베네치아에서 처음 인쇄되었으며,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1482년경 스페인에서 인쇄되었다. 1886년에 빌뉴스에서 처음 인쇄된 표준 번역본은 각 페이지마다 〈미슈나〉와 그에 관련된 〈탈무드〉, 주석, 관주를 실었다. 〈탈무드〉는 세계 전역에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중요한 경전이 되어왔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 보수파 유대인들은 점점 더 〈탈무드〉 연구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반면 개혁파 유대인들은 〈탈무드〉식 논법과 '레스폰사' 해석 형식을 받아들였다. 현대 〈탈무드〉 연구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 결과 멘델스존(1729~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디즘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디즘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디즘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1860~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J.G. 몬티피오리(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교[Christianity]
[개요]: 그리스도교도들의 수는 17억에 달하며,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 개신교 등 3개의 주요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 3집단들 이외에도 동방 그리스도교에는 몇 개의 독립교회들이 있고, 세계 전역에는 수많은 종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와 종파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을 표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가. 초기 교회와 후기 유대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안의 한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이방세력의 영향과 통치 아래 있었고, 그들의 정치나 문화적 업적보다는 종교에서 공동체의 구심점을 찾던 때였다. 아모스(BC 8세기 활동)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는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이상을 함축하고 있던 유일신 개념과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했다는 개념 사이의 긴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의 시기(헬레니즘 시대:BC 3세기~AD 3세기)에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왕국들과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것이 유대교로 하여금 보편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방 통치자들, 특히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BC 168∼165 사이 그리스 문화와 종교 혼합주의를 팔레스타인에 강요하고자 하였고, 이는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는 주로 다음 2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나자렛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이고, 둘째는 만인을 위한 모세법의 영구적 타당성이다.
히브리 성서(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를 구약성서로 받아들였음)는 역사를 섭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로 보았으며, 이 드라마는 종국적으로 계약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모든 절망의 원천들, 즉 이방세력의 지배 혹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하느님의 통치는 BC 10세기에 이스라엘 왕으로 활동하였던 다윗 계열의 기름부음 받은 왕, 즉 메시아에 의해 수립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에 이를 것인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사두가이파는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바리사이파는 5경 이외의 성서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 천사의 존재에 대한 교리 등 그 당시 유대교에 수용된 교리들을 포용하였다. 이 교리들은 역사의 종말이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하느님의 극적이고 대격변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적인 대망(待望)에서 비롯되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유대 의회)은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열심당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는 공격적인 혁명가들이었다. 그 이외의 집단들은 헤로데의 속국을 지지하는 헤로데 당과 정통 유대교로부터 탈피하여 수도원에 버금가는 공동체를 이룩한 에세네파였다. 아마도 사해 두루마리를 보존한 사람들도 에세네파 사람들인 듯하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이 집단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정경(正經)으로 인정받는 복음서들(교회가 진정성을 인정하여 채택한 복음서들)에서 예수가 비판한 주요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에서 사두가이파나 열심당이 지속될 가능성은 적었다. 묵시문학적인 꿈을 실현화하고자 한 열심당은 66~70년과 132~135년 2차례에 걸쳐 로마인들에 맞서 주요반란을 일으켰으나 유대의 파멸로 끝났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은 바리사이파와 그리스도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리사이파는 모세법을 세밀한 부분까지 지키는 데 관심을 쏟았고, 그리스도교는 성서 신앙을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종교로 전파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미시나(구전율법)와 탈무드(구전율법에 대한 주석과 보완)에 보존된 바리사이주의는 규범적인 유대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방인(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혁명적인 열심당과 조심스럽게 관계를 끊음으로써 유대교의 특수성과 배타성을 희생시키는 대신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소수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유대인들로부터 공개적인 지지를 얻는 데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보다 신학자들에게 더 큰 수수께끼이다.
나.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신약의 자료들
나자렛 예수를 아는 데 필요한 주요자료들은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들이다. 처음의 세 복음서들, 곧 〈마태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는 문학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때문에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불린다.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는 〈마르코의 복음서〉를 활용한 듯하다. 그 형식과 내용에서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의 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보다 더 풍부한 신학적 해석을 담고 있으며, 세밀하게 살펴보면 훌륭한 역사적 정보들을 보존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두드러지게 불확실한 점은 연대이다. 마태오는 예수가 BC 5년 하반기 혹은 BC 4년 상반기에 있던 헤로데 대왕의 사망보다 최소한 2년 앞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을 로마의 인구조사가 있던 무렵으로 본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인구조사는 AD 6~7년에 실시되었고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한 봉기를 유발시켰다고 한다. 루가의 인구조사 부분은 맞지만 총독의 이름은 잘못된 것 같다. 예수가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때는 29~30년경인 듯하지만,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은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 사막의 금욕주의자로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내다보면서 회개와 세례를 설교하였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그가 출범시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라고 인정하였다. 예수는 그의 고향 갈릴리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를 생동적인 비유로 하였으며, 기적적인 치유도 베풀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공생애 마지막에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보다 더 잦았고 그의 공생애 기간이 1년 이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기록이 옳을 가능성이 많다(루가 13:7도 이 사실을 암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음). 율법준수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바리사이파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민중이 그를 보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통치 당국의 공포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월절(BC 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에 예수가 개선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최후의 위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고 심문을 받았다. 심문은 처음에는 산헤드린에서, 그 다음에는 필라테 앞에서 진행되었다. 필라테는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였다. 필라테에게 제출된 고소의 내용은 반란교사죄였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이를 날조된 죄명으로 본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만에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신앙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어떤 본문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본문에서는 이미 와 있는 것으로 말하기도 했다. 예수의 언행은 하느님의 최후 승리로 끝나게 될 하느님 나라 과정의 시작이라고 믿어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였으나 정작 그가 이 호칭을 자신에게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예언자와 랍비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스스로 사용한 수수께끼 같은 칭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 칭호를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받을 고난을 언급하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장차 맡을 재판관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사용하였다. 이 칭호는 〈다니엘〉(7:13)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환상에서 동물의 형상들과 대비되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자'는 외세에 의해 정복을 당했으나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그 권리를 되찾게 될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그후 복음서 전승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월적인 심판자라는 주제인 것 같다.
예수의 가르침은 암시적으로 혁명을 거부하면서도 기존질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폭력은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인 기적이 암시하듯이 예수의 활동이 열심당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지 간에, 복음서들은 자기 역할에 대한 예수의 이해와 열심당 혁명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어두운 평가는 이처럼 혁명적 이상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회개의 복음은 각 개인과 사회가 깊이 더럽혀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악령의 세력 아래서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은 사랑과 긴급한 선교를 필요로 한다. 제자라면 심지어 원수까지 전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재산과 세속적인 복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에게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창녀들, 동족의 미움을 받는 가혹한 세리들 등)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남을 헐뜯는 태도는 좋은 덕목이 아니었다. 국가는 어떤 점에서는 소원한 실체로 간주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과 시민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마 황제의 권리들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요구를 이행하는 일과 양립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복음은 유대교 안에서 저항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는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인 사울(사도 바울로:이 이름은 나중에 쓰여졌음)에 의해 이방인들의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울은 원시 교회를 박해한 열렬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소아시아의 타르소(다소)에서 태어난 사울은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예루살렘에 와서 루가가 "헬라주의자들"이라고 한 그리스도교 집단을 괴롭혔다. 이 집단의 지도자는 스데파노(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였는데 그는 예수가 타락한 예루살렘 예배를 정화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개혁자라고 생각했다. 바울로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배타적이고 특수한 유대교 의전들에 얽매일 필요없이 복음을 비(非)유대인의 세계로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바울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견해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통해 개종자들을 얻었으며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바울로는 교회가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확신하면서 온 인류를 향해 보편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이 곧 랍비적 보수주의에 대한 철저한 결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깨달았다.
몇 편의 무게있는 서신들이 보존됨으로써 바울로는 사도 시대(AD 1세기)에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남긴 유일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나이가 많고 헬레니즘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마찬가지로 그는 〈구약성서〉를 우의적(상징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예수가 안식일을 자유로운 관점에서 해석했듯이 그도 문자에 대한 영(靈)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최고의 구원행위인 동시에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바울로의 사상에서 구원은 양심에 호소하는 도덕주의에 의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이 교리에서 바울로의 선구를 이룬 사람은 필로이다. 바울로는 이 교리에, 복음은 모세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자신의 논지를 연결시켰다. 이 논지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단의 지도 아래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불러일으켰다. 62년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권위있게 대표했다. 야고보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서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반율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들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베드로는 둘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12 사도들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어렴풋이밖에 알 수 없으나, 초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바울로와 같은 시기(64)에 네로의 박해를 받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바울로의 신학에서 예수의 인간적 업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임무에 복종하고 충성을 다한 예수의 태도는 예수의 자기희생에 도덕적이고 구속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강조점이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이 복음서는 에페소스에서 씌어졌는데 교회와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 정통 그리스도교와 소아시아의 영지주의 분파들 사이의 논쟁 등 당시 그 지역에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요한의 독특한 개성은 역사적 사건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재적인 구원 경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그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역사를 신앙에 이르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역사는 한 특수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들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범주이기 때문에, 요한은 이전에 존재했던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육화(肉化)되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 사상은 예수의 우주적인 의미가 헬레니즘 세계에 더 잘 인식되도록 도왔다. 고대 세계에서 신의 현존은 신의 영감이나 육화로 이해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이 신의 영감을 선택하였다면, 〈요한의 복음서〉는 육화를 선택한 셈이다. 이 2가지 유형의 그리스도론 사이의 긴장은 4세기 후반기에 안티오크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에서 최초로 첨예화되었다.
다. 초기 교회의 가르침과 조직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우상숭배와 이교적 성애주의(性愛主義)와 구별되는 거룩함에 관한 강한 의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다신교와 그것에 부수되는 관용이 고대 사회에 널리 스며 있었지만, 그 당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엄격성은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상업활동과 직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세례를 받을 때, 어떤 그리스도교인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다신교·미신·부정직 혹은 악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경우 그 직업을 버려야 했다. 군복무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은 군인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을 경우 군대를 꼭 떠나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인이 정식으로 군인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저했다. 또한 엄격한 그리스도교인들은 가르치는 직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사는 이교적 관념들과 외설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문학작품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연극과 춤도 달갑지 않은 직업이었고 마술은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윤리는 사회로부터 다소 초연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때로 경제적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고대 사회의 구조는 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었다. 노예나 자유인이 된 사람도 자신의 생계와 앞날이 후견인에게 달려 있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막대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권력은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달라졌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교는 1차적으로 여성과 어린이들, 특히 상류계층 여성과 어린이들을 통해 사회 속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장이 그리스도교인인 경우에는 그에 속한 사람들도 가장의 뒤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는 밀접한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 3세기의 한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신자들끼리 돈을 거래하기도 하고 서로 멀리 떨어진 집단들은 상업활동과 상호부조를 통해 서로 도왔다.
바울로의 서신에는 매주 첫날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일요일이 "주의 날"로 언급된다. 매주 일요일에 갖는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금까지 토요일에 갖던 유대인 회당모임을 대신하게 되었다. 할례 의식은 사라졌고, 입교는 세례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일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물의 세례는 교육(교리문답)과 금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악을 버릴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신앙을 공표하면서 몸을 물에 잠깐 담근다. 그 다음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을 이룸을 상징하는 기름부음과 안수(견신례)로 세례의식은 전부 끝난다. 세례를 받은 사람만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한 말을 회상하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성찬 때는 봉헌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임재할 것을 기원하고 거룩하게 구별된 빵과 포도주를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성찬의식에 관한 기록은 유스티누스(150경)의 저작들과 특히 로마의 히폴리투스(220경)의 〈사도전승 Apostolic Tradition〉에 나온다.
세례를 받은 후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교회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나 파문을 당한 사람도 시편 낭송, 성서 낭독, 설교로 이루어지는 예배의 첫 부분에는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몬타누스파와 로마 가톨릭 분파였던 노바티아누스파는 교회의 사면권을 부정하였으나 그 엄격성보다는 분파성이 더 심해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조차도 노바티아누스파를 비판할 때 그들의 엄격성보다 분파성을 겨냥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공적인 고해(告解)가 등장하였다. 고해는 금욕적 고행을 전제조건으로 일생에 단 한 번 허용되었다. 고해자들은 안수를 받음으로써 교인들과의 친교를 회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해자들은 덜 힘들고 덜 공적인 고행을 요구받았다.
제1세대 그리스도교에서 교회의 권위는 예수의 친족들이나 예수로부터 사도와 선교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도들의 권위있는 목소리가 호소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도들이 모두 죽자 권위의 소재와 관련해 첨예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주 오랜 3~4세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주로 교직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권위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사도회의는 보통 장로들(presbyteroi:그리스어로 사제들)이나 감독들(episkopoi:주교들)이 참석자(diakonoi:집사들)의 보조를 받아 운영되었다. 성직자는 설교, 세례와 성찬,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나누어주는 책임이 있었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로 구성된 단체(총회)의 수장이나 원로가 자연히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다른 교회들과 서신을 교환하였고, 이 교회들이 새 수장을 임직할 때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대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톨릭적 성격(보편성과 통일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성직수여식에 참여하곤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주로 도시에서 발전했다. 시골의 농부들은 옛 방식에 집착하였으며,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대부분이 선호하던 이교(異敎)를 믿었다. AD 400년경 토지소유자들 가운데 개종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교회를 세우고 사제에게는 '성직록'(聖職祿)을 주었다. 이 경우 사제들 가운데는 권력자의 노예도 있었다. 아프리카 동부와 북부에서는 보통 고을마다 주교가 있었으나, 서부지역에는 주교들이 적어서 보다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4세기 이래 이 지역들은 세속적인 용어로 주교관구라고 지칭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서방의 관습을 동방의 관습에 맞추어 주교의 수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압력이 강해지자 서방의 주교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그 이유는 이 조치로 인해 주교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3세기말에 관구 수도의 주교는 점차 그의 동료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갖게 되었고, 대도시의 주교(4세기 이래 수도대주교라고 지칭됨. 대주교라고 지칭되는 경우도 많았음)는 동료 주교들의 주교 서품자(敍品者)였다. 3세기의 로마 주교, 알렉산드리아 주교, 콘스탄티노플(AD 320 창건) 주교의 권위는 자신의 관구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은 이 3개의 대주교 관구를 5개의 대주교 관구로 늘렸다. 파파(papa:아버지)라는 칭호는 처음 600년 동안에는 신자들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교를 부르는 애칭이었으나 6세기 이래 로마의 주교들에게 특별히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로마 주교들에게만 사용되었다. 애초부터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를 지도해야 한다는 특별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다. AD 165년경 로마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게 바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베드로를 위한 기념물은 바티칸 언덕의 공동묘지에 세워졌고 바울로의 기념물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목에 세워졌다. 이 건립사업은 로마 교회가 사도전승의 수호자라는 의식을 반영해준다. 이러한 의식은 AD 190년경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춘분 후 첫 만월이 지난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지 않고 예로부터의 관습에 따라 유대교 유월절에 부활절을 지킨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사건에서 또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256년 로마의 스테파누스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위임했다는 성서 구절(마태 16, 18~19)을 근거로 권위를 주장한 최초의 교황이다.
[그리스도교 성서의 형성]
그리스도교인들은 처음에는 아무 논란 없이 히브리 성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역사순례의 무대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도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가 타당한 것이라면, 〈구약성서〉의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최종적인 말씀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 성서는 '옛 계약'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어떤 책들을 성서에 포함시켜야 하는가를 놓고 주저하였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70인역 성서)에는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 등과 같이 히브리 정경에 채택되지 않았던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70인역 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오리게네스와 특히 라틴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제롬:4~5세기 활동)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책들에 근거하여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영어판 성서들이 히브리 정경에는 채택되지 않았으나 70인역에 채택된 구약의 일부분을 외경이라는 이름(이 명칭은 사람들을 오도하기 쉬움)으로 별도로 인쇄하는 경우는 이러한 고대 교회의 망설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고 논쟁이 많았다. 1세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때 문서전승보다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구전전승을 더 많이 활용하였으나, 이 이야기들이 권위를 갖기 위해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르코가 처음으로 이 이야기들을 서로 연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짜보려고 생각했다. 복음서들이 널리 돌려가며 읽혀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구전전승은 여전히 통용되었고 오히려 선호되었다. 그래도 공들여 복사한 문서들은 전승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 장치가 되어주었다. 공관복음서들은 AD 150년경 로마의 변증가였던 순교자 유스티누스에 의해 일찍이 종합복음서(또는 복음서들을 종합한 것)라는 형태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시리아 교회의 타티아노스는 여기에 〈요한의 복음서〉를 추가하여(4복음서에 따른) 디아테사론(Diatessaron)을 만들었다. 이 네 복음서의 종합판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타티아누스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250년 동안 낱권의 복음서들을 실제로 전혀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도서신들, 특히 바울로의 서신들은 공관복음서 다음의 권위를 누렸다. 바울로의 서신들 가운데 주요부분은 AD 90년 이전에 서간집의 형태로 회람되었다.
[초기의 이단운동]
영지주의는 150년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점차 그 정도가 약화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악과 하느님 사이에는 전면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구원이란 무능하고도 악한 세력들에서 파생된 피조세계의 혼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 소외된 수인(囚人)들처럼 살아가는 이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원의 방법은 선택받은 사람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영혼이 지복(至福)의 본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로막는 적대적인 세력들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터득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하느님이 역사에 나타났다는 개념을 파괴하였다. 영지주의의 염세주의와 이원론(물질은 악한 것, 정신은 선한 것으로 생각)은 도덕적인 일관성없이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 경향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반이성적(反理性的)인 종교사상으로서 완전히 초월적인 계시만을 주장하여 창조된 세계 안에 자연적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게 하였으며, 개인의 책임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정통파 신학자들과 3세기의 이교(異敎)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영지주의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짓되고 위험한 미신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였다.
정통신앙은 사도들에게 근거를 둔 교회들이 확인해준 전승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단자들은 이 주장에 맞서 열광적인 예언에 호소함으로써 훨씬 더 위험한 대응을 하였다. AD 172년경 몬타누스와 2명의 여성 예언자들이 프리기아에서 일어난 준오순절(準五旬節)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세계종말의 임박성을 거듭 주장하였고, 몬타누스는 성부의 시대(구약시대), 성자의 시대(신약시대), 예언자 몬타누스가 예고하는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가르쳤다. 몬타누스주의로 개종한 중요한 인물은 카르타고의 라틴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이다. 〈신약성서〉를 보완해야 한다는 몬타누스파의 주장은 전교회적으로 거부되었다.
[신학논쟁]
251년 로마의 노바티아누스 분파는 사변적 신학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교회의 교인 자격과 성례전의 유효성에 관한 법적 문제에 집중했다. 이 문제들은 로마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그 핵심은 도나투스가 표방한 사상들에 관한 카르타고 논쟁이었다(313). 도나투스파는 성례전의 유효성이 목회자의 자격에 달려 있다고 말했으나, 로마 그리스도교인들과 로마와 유대관계에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성례전의 유효성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설령 효력은 없을지라도 분파주의자가 집전한 세례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포의 주교(396~430)이며 위대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나 마침내 합리적인 논거를 포기하고 마지못해 제한된 강제력 사용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교회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은 훨씬 더 착잡한 문제였다. 그것은 신앙이 하느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의 수사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파기하고 인간의 능력을 부정했다고 항변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는 모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적절치 못한 비인격적인 사유범주들을 적용했다. 교회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극단적인 주장들 가운데 일부(특히 예정론과 원죄의 유전론)도 흔쾌히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부에서는 4세기 내내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250경~336)가 내세운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 고난을 당하고 죽은 그리스도가 모든 고통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창조의 제1원인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정죄하고 하느님의 아들은 그 본질에서 성부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 공식주장은 로고스가 독립된 인격적 실체라는 교리를 거부하고 성부 하느님만이 완전한 신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던 단일신론에 반대할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가 아리우스 사상을 동방에서 완전히 근절시킨 뒤 비로소 해소되었다.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은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360~380 활동)의 교리와 모프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350경~428)의 교리 사이에 벌어진 각축에서 비롯되었다. 이 교리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를 각각 대표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루스가 이끈 에페소스 공의회(431)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안티오크 학파의 극단적인 그리스도론을 정죄하였다. 그 이유는 이 그리스도론이 인간 예수를 신의 말씀과 별도로 존재하는 독립된 인격이라고 주장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잉태한 자')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키릴루스는 "성육신(成肉身)된 말씀의 단일 본성"을 공식주장했다(→ 단성론자). 교황 레오 1세(440~461 재위)는 이 단성론(單性論)을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두 본성(hypostasis)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칼케돈 공의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단성론자들을 소외시켰다.
그후 250년 동안 비잔틴의 황제들과 대주교들은 단성론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크나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속해서 이루어진 3번의 화해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① 제노 황제 시대(482)의 통일공식주장(Henotikon)은 칼케돈 공의회에 대한 단성론자들의 비판이 정당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교회를 공격하였다. ②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키릴루스의 신학과 단성론을 비판하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 테오도렛, 이바스의 글이 실린 '세 장들'(Three Chapters)을 정죄함으로써 칼케돈 규정을 억지로 옹호하였다. 시리아 교회의 단성론자 야콥 바라데우스는 이에 대항하여 경쟁적인 단성론자들의 주교회의를 창설하고 항구적인 분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③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시대에 칼케돈파는 단성론자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는 2가지 본성과 단일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單意論)으로 재결합을 시도하였다(→ 단의론자). 그러나 이 회합은 단성론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과도 화해를 이루지 못했으며 칼케돈파 자체의 분열만 일으켰을 뿐이다. 칼케돈의 '양성론'은 지금까지도 줄곧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틱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의 안티오크 대주교 관구(시리아 야코부스파)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교회와 제국의 동맹]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312) 동서 로마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가 되었고(324), 니케아 공의회의 실제 주관자였으며(325),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창건하고(330), 337년에 사망하였다. 4세기에 그는 특히 종교부문의 위대한 혁명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로마가 되리라 생각하며 콘스탄티노플을 그리스도교 도시로 창건한 것은 장래의 정치구조와 교회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은둔상태로부터 세상으로 끌어내어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그리스도교가 이교사회를 자기 수중으로 끌어들이도록 도왔다. 교회와 황제의 동맹은 2가지 측면에서 저항을 불러일으켜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서는 수사들의 사막은둔으로 표출되었고, 이교도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짧은 통치기간(361~363)을 제외하면 수동적인 저항을 했을 뿐이다. 4세기에 고조되었던 이교에 대한 무언의 압력은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재위)의 칙령들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한 시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만들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많은 이교 사원들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재위) 시대까지는 이교도들이 대체로 정부로부터 별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다.
교회와 국가의 결속은 주교들에게 수여된 작위와 훈장을 통해 표현되었다. 주교들은 또한 황제의 사절 임무를 맡기 시작하였다. 40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궁정에서 모든 문관들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74~397 재임)의 기록에서는 '로마'와 '그리스도교'라는 낱말이 거의 동의어로 쓰여졌다. 아리우스 논쟁(아리우스의 사상에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아리우스 사상을 지지하자 교회와 국가의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압력을 가하여 황제를 교회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교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파 황제들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와 국가가 사실상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등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회는 아주 천천히 제국의 국경선 너머로 선교사업을 펼쳐나갔다. 고트족의 울필라스는 고트족을 아리우스 사상으로 개종시켰고(340경~350), 성서를 번역하였다. 그는 〈구약성서〉의 호전적인 구절들을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삭제하였다. 고트족은 그들이 믿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반달족 같은 게르만 부족들에게 전했다(최초로 그리스도교도가 된 부족은 프랑크족이다. 프랑크족은 506년경에, 그 뒤를 이어 비시고트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5세기에 서방지역은 야만적인 고트족·반달족·훈족의 침략을 받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으나, 이로 인해 교회나 국가에 별다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서방에서는 교황의 지위가 국가권력의 쇠퇴로 인해 높아졌다.
726년 이후로 비잔티움은 성상파괴논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 논쟁은 성상들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뜻에 교회가 예속되는 것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였다. 성상들에 대한 제국의 공격은 서방교회에서 신랄하게 비판되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성상파괴론자들이 제7차 니케아 공의회(787)에서 정죄당하자, 교황 아드리아누스 1세(772~795 재위)의 마지못한 동의를 받아내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교회회의(794)에 모인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왕의 주교들은 이 결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동방교회에서 성상파괴론이 득세하자(815~843) 서방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마침내 서방교회는 제7차 공의회의 결정사항들을 받아들였다. 서방교회는 성상들을 동방교회와 다르게 평가하였다. 서방교회에서는 거룩한 그림들이 동방교회에서처럼 성례전적 구원의 실제적인 매체가 아니라 헌신의 보조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황제들과 교황들 사이의 적대관계는 8세기의 교황들로 하여금 보호자를 찾도록 만들었다. 카를 마르텔(719~741 재위)과 프랑크 왕국의 번영은 바로 이러한 보호자를 제공해주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서방교회의 이해관계를 지켜주었고,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은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이 샤를마뉴를 제1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거행해줌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다. 신성로마 제국은 1806년까지 지속되었다. 샤를마뉴는 서방 교회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동서 교회의 분열]
성상파괴논쟁은 종식(843) 되었지만, 파벌을 유산으로 남겼다. 847~877년까지 자신의 직위를 빼앗기기도 하고 되찾기도 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활동했던 이그나티우스는 858년 당국에 의해 추방당했고 포티우스가 그를 대신하였다. 평신도 학자로 제국 법원의 수장이던 포티우스는 대주교로 선출되어 6일 동안 대주교 자리에 있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지지자들이 교황 니콜라우스 1세(858~867 재위)를 설득하여 포티우스를 인정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는 불가르족에 대한 비잔틴 교회의 선교에 대해 격노하였다(→ 볼가리). 왜냐하면 그는 불가르족이 자신의 선교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가 불가르족에 서신을 보내 그리스 의식들에 공격을 가하라고 명하자, 포티우스는 서방교회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Filioque)고 말함으로써 신조를 이단적으로 변조하였다고 고소하였다.
포티우스로 인한 분열의 주요내용은 로마가 교황 니콜라우스와 아드리아누스의 주장대로 모든 교회들에 대한 전제군주적인 관할권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포티우스와 그리스인들의 생각대로 로마가 5개의 준독립적(準獨立的)인 대주교 관구들의 맏형에 불과하므로 교회법에 의거하여 다른 관구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였다.
포티우스 시대에 나타난 상호불신은 교황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들에게 라틴식 관습을 강요하였던 11세기 중반에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1054년 7월 16일 이탈리아에서 온 한 교황사절은 냉대를 받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는 로마 교황의 파문장을 올려놓았다. 또 성령에 대한 그리스식 교리를 정죄하였고, 그리스 사제들의 결혼을 매도하였으며, 성찬을 위해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는 그리스 방식을 비난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이 불화는 양편이 얼마간 격분하여 행동한 데서 비롯된 작은 폭풍으로 취급되었으나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이 점점 더 소원해지자 사람들은 1054년의 사건이 동서의 최후 분열을 일으킨 계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965년 12월 7일 교황 파울루스 6세와 에큐메니컬 대주교 아데나고라스 1세는 마침내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중세와 종교개혁]
동방교회와의 갈등은 중세기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특색있게 발전하게 한 원인이기도 하고, 그러한 특색있는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는 안으로부터 교회와 교황권을 개혁하였다. 그는 교황직이 부패와 외부의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교황직의 교회법적·도덕적 권위를 확립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재임기간(1198~1214) 동안 교황의 보편성 주장은 교회생활의 모든 수준들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두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다른 세속 통치자들로부터 교황권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교회가 봉건주의에 편입되고 세속군주들이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이 주제가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가 시작된 이후 수세기 동안 중세 그리스도교의 산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중세사상,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과 철학이다. 이 신학과 철학의 탁월한 대표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였다. 스콜라주의 신학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 전통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고대의 고전적 업적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동방과 서방의 초기 교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적 사유방식의 영향 아래서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 신학들을 스콜라주의에 의거하여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교리내용을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가정들로부터 분리해내야 했다.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재발견을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이슬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먼저 알려졌으며, 결국 비잔티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본 문헌들을 번역하고 연구함으로써 재발견되었다. 스콜라주의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자연정신'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와 결합시켜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서구문화사 모두의 지표가 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중세사회와 문화의 그리스도교화를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고, 중세사회와 문화에 그리스도교가 야합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다.
스콜라주의와 중세교회 자체에 대한 후기의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고취시켰다. 프로테스탄트는 서구 가톨릭주의의 교회법적·신학적·성례전적 발전에 대하여 철저히 논박했다는 점에서, 중세 후기에 나타난 다양한 저항운동들과 구별된다. 처음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교리와 생활을 안으로부터 개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이와 같은 개혁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비타협성과 개신교 운동들의 배타성 때문이기도 했고, 정치적·문화적 상황 때문이기도 했고, 이 모든 요인들이 합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중세신학과 경건성, 교회조직에 대한 저항의 정도에 따라 몇몇 파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운동 및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 전통을 다룰 때 전반적으로 극히 보수적이었다. 장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은 덜 보수적이었다. 재세례파와 종교개혁 좌파의 다른 집단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가장 적었다. 이들은 서로 큰 차이점들이 있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개혁운동들은 교회나 교회전통과 구별되는 성서를 종교의 권위로서 강조한다는 점, 죄사함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점,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전제조건으로 업적을 전혀 도외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한다는 점,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과 예배에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 공통의 특징이다.
종교개혁은 콘스탄티누스 이래 번영을 누렸던 기성 그리스도교 내부의 운동으로 출발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1,000년 이상 발전해온 그리스도교 문화의 해체를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완료되었을 때 교회와 문화는 철저하게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변형은 부분적으로 종교개혁의 결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원인이기도 했다. 지리상의 대발견, 자본주의 경제의 태동, 과학시대의 동틈, 르네상스의 문화 등 이 모든 요인들과 그밖의 다른 요인들이 '중세적 종합'을 붕괴시키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 요인들 가운데 종교개혁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확실하게 가장 의미있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종교개혁의 사실상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분열과 서구의 세속화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못지않게 로마 가톨릭주의도 이 결과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자신의 역사적 형태를 맞추려고 노력하며 근대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다. 4세기 이래 서방에서 발전해온 기성 그리스도교가 종교개혁 이후 모든 곳에서 일시에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근대 그리스도교]
역설적이게도 낡은 의미의 '기성 그리스도교'의 종언은 교회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광범위한 팽창을 낳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그리스도교화와 아시아·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의 복음화는 '에큐메니컬'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용어에 처음으로 지리적 실체를 부여했다. 그러나 지리적 범위와 교인수의 증가가 반드시 교회의 영향력 강화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전기간에 걸쳐 교회는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는 여러 전선들에서 후퇴했고,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은 특권과 권위를 상실했다.
근대 서구 역사가 형성되던 시기, 대략 16세기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문화적·정치적 팽창운동들에 가담했다. 신세계의 탐험가들을 바로 뒤따른 사람들은 선교사들이었다. 탐험가가 동시에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당시 정치·문학·과학 부문에서 탁월한 인물들이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특히 17~18세기의 많은 지식인들을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했지만,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전통적인 형식과 결별했어도 예수라는 인물이나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보통 신실성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적 편협성의 위험을 보여주는 예로 종교개혁의 신학적 갈등과 그 갈등에 따른 정치적 갈등을 말하면서, 점차적으로 국교폐지, 관용, 종교의 자유를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 도입했다. 이 운동을 통해 그들은 교리의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개개인의 그리스도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 집단들과 연합하게 되었다.
17~18세기의 교회에서 나타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모습은 그당시의 정신을 반영하거나 저항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로마 가톨릭교 안의 개혁 움직임 일부를 흡수했지만, 교회의 신학과 도덕은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을 통해 크게 수정되었다. 교황은 국가 단위의 가톨릭 교회를 건립하려는 여러 국가들의 시도를 분쇄하는 한편 종교개혁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고 그때 저지른 실수들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반대로 개신교는 로마로부터 분립했다고 해서 개신교가 비난해 마지않았던 로마 가톨릭교의 많은 경향들로부터 반드시 면역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7세기에 루터교와 개혁교회에서 발전된 정통주의 교의학은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스콜라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많은 특징들을 보여준다. 선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정통주의를 부분적으로 보완하고자 한 경건주의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신앙과 그 목적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설교했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설교가 타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경건주의가 강조한 주관성은 뜻밖에도 그 적들의 수중에서 놀아났다. 경건주의적 주관성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흔들어놓도록 도왔던 것이다.
계몽주의 정신과 손잡고 진행된 18~20세기의 혁명들은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밑바닥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촉진시켰다. 과거에 유럽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의 로마 가톨릭교는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들에 의해 구체제의 일부로 규정되었고, 구체제와 더불어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과학의 발견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 발견들은 이제까지 소중하게 여겨져왔고, 조직화된 그리스도교의 여러 지도자들이 열렬하게 지지하는 창조교리에 관한 옛 개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근대 학문의 비판적 방법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자주 공격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문서들, 곧 성서와 교부 문서들, 종교개혁자들의 저작들이 활발히 편찬되도록 했다. 또 교회의 역사에 대해 전례없는 관심을 갖게 했다. 19세기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세기로 일컬어져왔다. 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그리스도교를 공격한 덕분에 교회 안에서 새로운 신앙의 변증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변증가들은 근대의 새로운 철학 및 과학과 연결시켜 신앙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의 대의에 대한 또다른 도전들이 공산주의, 새롭게 부흥하는 세계종교들,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들은 재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교회 내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와 영국성공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마침내 동방정교회의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 이래로 로마 가톨릭의 주목을 받고 공감을 얻게 되었다.
이슬람교[Islam]
[개요]
유일신론을 강조했고 고유의 엄격한 종교의례를 발전시켰다. 이 종교 안에서 여러 종파와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지역마다 문화적·종교적으로 큰 편차를 보이지만 모든 신도들은 공통된 신앙으로 묶여 있고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코란〉]
이슬람의 기본 가르침은 〈코란〉에 있다. 이슬람교도(Muslim)들은 〈코란〉이 태초의 신의 말씀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알라의 명을 받아 문맹(文盲)인 예언자 마호메트라는 복사기를 통해 한 자, 한 획도 빠짐없이 그대로 인류에게 전달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신성한 절대신의 말씀을 운율에 맞추어 낭송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나 중들이 불경을 읽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이슬람 성전 건물 안 벽에 우상이나 다른 그림을 새기는 것이 금기사항이었으므로 그곳에 〈코란〉 구절을 새겨넣는 것을 크게 선호하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이 읽고 있는 〈코란〉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사망(632)한 지 20년이 지난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Uthmn:644~656 재위) 때에 완성된 것이다. 이때 양피지, 가죽, 야자나무 껍질, 나무 조각 및 낙타의 몸 등 여러 군데 흩어져 씌어 있는 〈코란〉 구절을 모아 비단과 파피루스에 다시 수록하여 기본경전으로 만든 것이다.
〈코란〉은 114장 6,200여 절로 나누어져 있고 가장 긴 장(章)은 오늘날의 인쇄체로도 30여 쪽이 되지만 짧은 것은 불과 3, 4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랍어로 장은 수라(Sura), 절(節)은 아야(Aya)라고 부른다. 각 장의 배열은 마호메트가 20여 년 동안 받은 계시 순이 아니며 제1장을 제외하고 대체로 가장 긴 장에서 짧은 장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그 짜임새가 낯선 〈코란〉은 각 장마다 독특한 이름이 있는데, 그 내용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제2장은 암소의 장(surat al-baqr)이라고 부르는데, 암소에 관한 것은 총 286절 가운데 몇 절에 불과하다. 그 이름도 예언자 모세가 절대신의 명을 받아 살인자를 찾기 위해 암소 1마리를 죽인 데서 나왔다고 한다(2:73). 메카 초기의 계시는 주로 인간의 내면적인 것, 즉 절대신과의 관계와 임박한 최후의 심판 등을 다룬 내용이며 그 문체는 시의 운율로 되어 있지만 산문체이다. 반면 메디나에서 받은 계시는 주로 인간의 외면적인 것이어서 그 내용은 움마의 행정과 그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 많으며 서술적인 문체이다. 또 메디나 계시는 〈구약성서〉 또는 〈신약성서〉에서 유래한 이야기나 일화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알맹이는 변형된 것이 많다.
〈코란〉은 아랍어 기록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랍 문학에 미친 영향 또한 지대하여 그에 버금 가는 아랍 문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고대 아랍 문학의 특징인 심취적 요소를 수준 높게 다듬어놓은 모형이어서 오늘날까지 아랍어가 분열되지 않게 막아준 파수꾼 역할을 했다. '코란'이란 말은 아랍어 동사 '읽다'(qa raaa)에서 나온 파생어로 '읽는 것', 즉 '독경'(讀經)을 뜻한다. 예언자가 받은 첫번째 계시 96장 제1절도 '읽어라'로 시작된다. 〈코란〉의 어휘 하나하나는 이슬람교도에게 모두 신성한 것이고 절대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서 법률을 도출(導出)해야 올바른 이슬람 성법(聖法 Shari'a)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생존시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통치수단으로 성법이 전제되어야 했다. 성법의 필요성은 〈코란〉의 해석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해석학(tafsir)이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타프시르). 그래서 특정한 구절의 해설을 확정시켜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여건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해설이 권위를 가지게 된 예도 허다하다. 유명한 해설서로는 타바리(839~923), 자마흐샤리(1075~1145), 파흐룻 딘 알라지(1210 죽음)의 것이 있으며, 최근 것으로는 마호메트 아브두(1848~1905)와 그의 제자 리시드 리다(1935 죽음)의 해설서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수니파의 것이다. 시아파의 해설에는 투시(11세기)의 것이 명성이 높으며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이븐 알 아라비(1240 죽음)의 것이 주목을 끌고 있다.
[하디스:예언자의 전승]
하디스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말씀과 관행을 기록한 것으로 〈코란〉에 버금가는 권위로 간주되며 이슬람 역사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그 연구는 이슬람의 양상(樣相)과 기풍을 이해하는 지침이 된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회상은 즉시 체계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디스의 본격적인 발전은 느리고 고르지 못했으며 체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사후 1세기까지의 전승은 이슬람 공동체의 형성과 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공동체 결속의 틀이 되었다. 사후 2세기에 들어서면서 하디스의 체계화는 더 촉진되고 그것이 공동체와 맺는 결속은 더욱 견고해졌다. 즉 하디스의 형식은 마호메트 개인에 관한 것으로, 그의 교우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문장으로 다듬어 간추린 것이다. 하디스의 자료들이 방대해지고 날조되기까지 하자 이를 분류·편집할 필요가 있게 되었고 마호메트 사후 3세기에 수니 이슬람교도들은 6가지의 권위있는 하디스를 편찬했다.
하디스는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연결고리, 즉 이스나드(isnad)와 그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마튼(matn:진수)으로 나누어진다. 즉 하디스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나는 A로부터 들었는데, A는 B로부터, B는 C로부터, C는 D로부터, D는 예언자의 말씀을 E(그는 예언자의 교우였음)로부터 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결고리를 이스나드라고 한다. 이 연결고리가 하디스의 출처를 밝혀준다. 하디스는 이스나드와 마튼을 기준으로 신빙도가 높은지 또는 미흡한지에 따라 건전(sahih)·좋음(hasan)·약함(daif)의 3가지로 구분된다.
하디스 편찬자 가운데 가장 저명한 알 부하리(810~870)는 16년간의 노고 끝에 완벽한 이스나드를 갖춘 7,397개의 하디스를 모았다. 그중에서 이스나드가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순수한 것은 총 2,762개가 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60만 개 이상의 돌아다니는 하디스를, 알 부하리가 3,450가지의 이야기를 모아 97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에 버금 갈 정도로 유명한 하디스 편찬자로는 무슬림 이븐 알 하자지(817~875)이 있다. 이밖에도 이슬람력 3세기에 많은 하디스 전집이 편찬되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하디스는 이슬람 초기부터 서로 달랐다. 시아파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완전무결성을 수니파와 마찬가지로 믿었지만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와 그의 자손 가운데서 선정되는 이맘들의 특별한 역할과 기능 또한 믿었다. 시아파의 하디스는 쿨라이니(939 죽음)의 것이 유명하다.
[이슬람 신자가 준수해야 할 관행]
가. 5가지 기둥
예언자의 사후 수십 년 동안에 이슬람 공동체에는 신자가 지켜야 할 준수사항이 확정되었다. 이것을 '이슬람의 기둥'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앙의 증언, 예배, 종교적 헌납, 단식 및 순례이다. 하와리즈파는 이 5가지에 성전(聖戰)을 추가해 6가지를 기둥으로 간주한다. 신앙의 고백은 '신의 유일성과 마호메트는 신이 보낸 이'임을 증언한 것이다(→ 샤하다). 예배는 하루 5번 행하는데 해뜰 무렵, 정오, 오후 4시경, 해질 무렵, 잠자기 전에 올린다(→ 살라트). 예배는 혼자서 할 수 있으나 이슬람 성전에서 하는 것을 장려한다. 금요일 정오에는 집단예배를 각 지역 중앙 이슬람 성전에서 본다. 예배 전에 손·발·얼굴을 씻으며 메카를 향한다. 종교적 헌납은 자카트라고 하는데, 〈코란〉에 그 헌납규정이 명시되어 있다. 천수답의 경우에는 10%,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5%, 현금과 귀금속을 1년간 보관하는 경우 2.5%를 징수한다. 이슬람교도들의 정치적·종교적 힘이 약화된 이후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의 이 종교적 헌납은 강제성을 띠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 따라 바치게 되어 있다.
단식은 이슬람력 9번째 달인 라마단 한 달 동안, 매일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먹는 것, 마시는 것, 피우는 것 및 성적 욕구를 자제한다(→ 사움). 그러나 해가 진 후 다시 정상생활로 돌아온다. 병자·임신부·여행자는 그 기간만큼 다른 날에 단식을 행한다. 미성년자는 단식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신체 건강한 이슬람교도들은 가능한 한 일생에 1번 이상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하즈). 순례는 이슬람력으로 12월 7일부터 10일 사이의 기간에 행하며 많이 할수록 더 좋다. 순례자는 우선 신성한 직6면체의 바윗돌인 카바를 7번 돌고 난 후 그 옆의 조그마한 검은 돌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쓰다듬는다. 그 다음 메카에서 미나를 거쳐 아라파트 평원으로 가며, 끝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즈다리파에서 밤을 보내면서 소·염소 등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순례는 끝난다.
나. 성지와 종교 축제일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곳은 메카의 카바이다. 아브라함이 만든 이곳을 천국의 기쁨과 힘이 닫는 곳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다음은 메디나의 예언자 성전이다. 3번째로 성스러운 곳은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한 예루살렘이다. 시아파에는 이밖에도 다른 순례지가 있는데, 즉 이라크의 카르발라와 이란의 메셰드이다. 일반적으로 보통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 성인들을 따르고 있는데, 그들이 죽으면 그 무덤도 성지가 된다. 그 좋은 예가 바그다드의 알 카디르 알 질라니의 무덤인데 해마다 전세계의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이 곳을 방문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 성전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한다. 예언자의 시대나 초기 칼리프 시대의 이슬람 성전은 공동체의 중심이었으며 그 관리는 국가의 책임이었다. 이슬람력은 예언자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622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는 태음력이다. 축제일에는 라마단 달의 종말을 축하하는 단식 종료제(Id al-Fitr)와 순례의 종결을 기념하는 순례제(Id al-Adha)가 있다(→ 이드 알 피트르, 이드 알 아드하). 또 예언자가 하늘로 승천한 날과 최후의 심판일을 축일로 한다. 시아파는 예언자의 외손자인 후세인의 순교일인 무하람(첫째 달)의 10일을 제삿날로 삼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성인의 죽음을 기리는 날이 많은데, 이는 성인이 죽음과 더불어 정신생활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슬람 신학]
7세기 후반 이슬람 전통신학과 다른 학문, 즉 아랍 어학, 〈코란〉 해설, 하디스 편찬, 법학 및 연대기의 발달과정을 서로 분리해서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슬람 신학은 계시의 사실성과 그 배경을 확인하고 이슬람교도들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또 이슬람 공동체의 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8세기 전반기에 신학은 신의 유일성, 정의 및 다른 속성을 비롯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내세에 관련된 의문이 제기되어 전문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했다. 그래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므로 신학의 명칭도 칼람(대학)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슬람 신학이 그 모양을 처음 나타냈을 때에는 그리스도교·유대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힌두교·불교 등에 관한 신학과 철학서의 번역을 통해 또는 여러 종교의 많은 신학자들간의 논쟁을 통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를 비롯한 이란과 인도의 종교사상도 간접적이지만 격을 가리지 않고 소개되었다. 9세기 전반부에 신학자들이 방대한 번역작업을 착수했기 때문에 많은 사상적 전문용어가 아랍어에 유입됨에 따라 철학과 종교 및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
신비주의는 이슬람교도들이 신과의 체험을 통해 신의 사랑을 직접 찾으려는 믿음과 관행의 한 측면이다. 수피라는 용어는 아랍어로 양털이라는 뜻의 'suf'에서 유래된 말로 초기 이슬람 수도자들이 양털로 된 옷을 입고 다닌 데서 나왔다. 이 수도자들은 아랍어로 파키르(faqir), 페르시아어로 데르비시(dervish)로 알려졌는데 그 뜻은 가난한 사람이다. 이슬람 신비주의는 발전과정에 따라 몇 가지 단계로 나뉘는데 첫째, 초기 금욕주의 단계, 둘째, 신과의 사랑을 찬미하는 고전적 단계, 셋째, 수피들의 형제적 우호관계를 다짐하는 종단의 단계로 나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과 관계없이 이슬람 신비주의의 역사는 신비주의자 개인의 신비적 체험에 크게 의존한다.
이슬람 문학에 끼친 수피 사상의 가장 큰 공헌은 아랍어·페르시아어·터키어로 지어진 매력적인 서정시이다. 수피 사상은 시에 관심을 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녀 사랑에 관련된 시는 대부분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간과 아름다운 젊음을 노래한 것이다. 인도 이슬람교도들의 신비주의적 노래 가사에는 "영혼은 사랑을 주고 싶은 아내이며 신은 사랑의 대상인 남편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 사나이·아타르·루미의 페르시아어 작품은 수세기 동안 시인들에게 신비적 생각과 표현을 제공한 원천이 되었다. 또 신에 대한 찬미는 수피 시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역의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 신비로움을 전달해야 했으므로 각 지역의 민족, 지역 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신비주의자는 신의 지혜가 담긴 〈코란〉에서 주로 그들의 전문 용어를 인용하여 사용하며 심오한 해석을 덧붙임으로써 최후 심판 날의 무서움을 읊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신을 사랑한다는 구절도 찾아내어 신비주의적 사랑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들은 또한 종교법을 엄격히 준수할 목적으로 예언자의 생활태도와 행동양식을 모방하는 데서 행동의 근간을 찾았다. 수피는 신에게 한 치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려고, 아무리 작은 이기심일지라도 버리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하여 자신의 의도와 행동에서 절대적 순수성(ikhlas)을 찾는다. 또 절대신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하며 심지어 내일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경으로 생각한다. 즉 신에게 접근하여 궁극적으로 합일하는 길은 금욕생활, 즉 자기 정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수도의 길은 개인의 참회에서 시작된다. 절대 유일신에게 접근하려고 작정한 초심자는 도사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즉 도사가 수도원에서 초심자에게 엄격한 금욕적 관행을 훈련시키면 초심자는 철저히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인내와 감사는 수도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참회보다 더 높은 단계이다. 즉 빛과 밝음을 찾아가는 수도의 길은 영지(靈知 gnosis), 즉 신과 인간의 사랑 단계에서 절정에 이른다. 정통 수니파는 이 점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의 절대신에 대한 사랑은 순종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의 길의 최종 목적지는 절대신에게 들어가 자기 소멸(fana)하며 완전히 합일(合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신비주의자는 합일에서 수도의 길이 끝나지 않고 절대신 속에서 다시 여행하여 남는다(baga)고 보았다. 최초의 수도원은 페르시아인 헤이르(1049 죽음)가 만들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종단은 12세기 아브드 알 카디르 알 질라니(1166 죽음)가 세웠으며 거의 전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었고 바그다드에 있는 그의 무덤은 지금도 순례객들의 성지이다.
13세기에 이르러 전 이슬람 세계에 매우 큰 종단들이 설립되었다. 이 종단들은 선교활동에 이바지했으며, 또 종종 정치적 영향력도 발휘했다. 예를 들면 1781년에 북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티자니야 종단은 그들의 영향력을 세네갈과 나이지리아까지 확대시켰고, 19세기초에 시작된 사누시야 종단은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리비아 왕국을 건설했다. 자아 실현의 방법을 매개로 수피 사상은 신플라톤 철학, 헬레니즘, 영지주의(Gnosticism)와 결합하여 신지주의의 체계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신지주의는 1191년 시리아에서 처형당한 페르시아인 앗 수라와르디에 의해 조명(照明 ishraq) 철학으로 발전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스페인 태생의 이븐 알 아라비가 존재의 단일성을 내세워 이성보다 신비적 직관을 우위에 두었다.
[이슬람 철학]
이슬람에서 철학의 기원과 착상은 신학과 차이가 있다. 철학은 비종교적 학문 이론과 더불어 발전하는 데 비해 이슬람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신학과 별개의 것이나 철학에서 이러한 부분은 있을 수 없다. 이슬람교도들의 철학적 관심은 9세기경 신학의 생성 단계에서 나타났다. 즉 그 기원은 그리스어·파흘리비어·산스크리트로 된 철학과 학술 서적이 9세기 중엽까지는 아랍어로 대량 번역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학문 분야는 자연과학·수학·형이상학·윤리학·정치학 등 광범위했다. 최초의 이슬람교도 철학자 알 킨디는 무타질라(mutazila)의 융성기인 9세기 전반에 바그다드에서 살았다. 그의 저서는 그가 인도의 수학과 그리스의 철학에 식견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서와는 친숙하지 못한 것 같고, 또 접근방법도 미숙한 것처럼 보였다. 알 라지는 9~10세기에 무타질라의 원자론을 받아들여 창조된 세계에 만연되어 있는 불완전성과 악의 책임을 절대신에게 돌리지 않고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창조론의 발전에 전념했다. 결국 알 킨디와 알 라지는 철학과 이슬람을 갈라놓고 있는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이 간격을 메우는 데 공헌한 이가 알 파라비(9~10세기)이다. 그는 철학을 이슬람의 틀에 맞게 다시 짜서 이 철학적 틀에 따라 논리학·물리학·수학·형이상학 및 정치학을 체계화시켰다. 특히 정치학의 연구 대상은 행복의 탐구와 공동체에서 행복의 실현에 두었다.
11세기초에 크게 활약한 철학자 이븐 시나는 알 파라비의 저서에서 몇 가지 영감을 받았다. 즉 창조·형태·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가르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설보다 계시 종교의 교의에 더 가깝고, 또 플라티누스를 비롯한 신플라톤 학파의 교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견해와 계시 종교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 철학은 창조나 내세의 보답과 응징의 문제에는 종교의 가르침에 반드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세는 인간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문제에 파고들어 본질과 실존을 구분했다. 즉 실존한다는 사실은 실존물의 본질에서 추론 또는 설명될 수 없으며, 형식과 질료는 그 자체가 우주의 움직임이나 실존물의 점진적 실현에 상호작용·반작용하지 못하며 그 기원일 수 없다고 논했다. 따라서 실존은 동인(動因 agent-cause)의 덕을 입어 본질에 추가 또는 부가되는 것이다. 즉 원인이 곧 실존 개물이며 또 그 결과와 병존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와 북서 아프리카에서는 12세기 전까지 이슬람 신학과 철학, 물리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일반적 관심은 소홀한 반면 의학·약물학·수학·천문학·논리학 등에 대한 관심은 컸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와서 파라비, 이븐 시나, 가잘리의 저작이 알려지면서 철학도 발달했다. 서부 이슬람 철학은 이븐 밧자, 이븐 투파일을 거쳐 이븐 루슈드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븐 투파일보다 젊은 이븐 루슈드는 철학과 이슬람 공동체의 관계 정립에 뛰어났다. 그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추구가 이슬람 율법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슬람 신조를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혜의 으뜸인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한 결혼을 신학자들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법 해석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 그는 논했다. 즉 신법 자체가 철학자에게 직접 그 해석을 최선의 방법으로 추구하도록 그 권위를 위임했기 때문에 신학자는 이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철학과 부조리〉는 가잘리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새 지혜:철학과 신비주의의 결합]
서부 이슬람 철학 문헌은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유럽 중세철학의 발전과 현대철학의 출현에 공헌했다. 동부와 서부 이슬람 철학은 이슬람 전통주의의 부활과 새 지혜의 출현에 의해 압도되어 고립되었다. 전통주의의 대표격인 이븐 타이미야(1328 죽음)는 사소한 변혁에도 반대하여 철학적·신학적·법학적 논의를 전개하여 독실한 선조들의 믿음과 관행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선조들은 곧 예언자 마호메트와 그 교우들을 의미하고 그때는 철학이 없었으므로 철학도 변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미 이성 철학은 알 가잘리의 〈철학의 부조리〉라는 저서로 큰 타격을 입어오던 차였다. 즉 이슬람 이성철학은 지하로 들어가서 한동안 지내다 새 옷을 갈아 입고 새 지혜란 이름으로 나타난 것이다. 새 지혜는 곧 이슬람 신학, 그리스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 학파, 중근동의 신비주의 및 고대 이란의 빛 개념 등이 결합된 것이다. 새 지혜의 첫 주창자는 앗 수라와르디(1191 죽음)이다. 그는 새 지혜를 조명철학이라 불렀다.
최초의 새 지혜학자 앗 수라와르디는 이븐 시나가 본질과 실존을 구분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과 우연, 가능성과 현실성 및 질료와 형상 등을 구분한 것을 단지 이성에 의한 구분이라고 혹평했다. 그대신 그는 빛과 어둠으로 불리는 실존과 그것의 부정에 대한 관념에 관심을 두었다.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비당파적 태도는 다른 무슬림 철학자나 신비주의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혜의 특징이 되었다. 앗 수라와르디보다 새 지혜의 발전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이가 이븐 알 아라비(1204 죽음)이다. 그의 교설은 존재의 단일성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으며, 진리인 절대 유일자와 그의 현현(顯現)인 창조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븐 알 알라비 이후 새 지혜는 동부 이슬람 철학자들에 의해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븐 시나와 앗 수라와르디, 이븐 알 아라비의 저서에 대한 주석이 널리 행해졌으며, 또 뛰어난 시들을 보급하여 문학교육이 이루어졌다. 12명의 이맘파를 국교로 삼은 이란은 17세기에 문학과 과학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미르 다마드(1631 죽음)와 그의 제자 물라 사드라(1640 죽음)는 이스파한 학파를 대표했으며, 역사와 철학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으로 폭넓은 저작 활동을 했다. 이들의 저서에는 철학, 신학 및 신비주의가 갈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슬람 법률:샤리아]
절대 유일신 알라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이슬람의 교리이다. 따라서 이슬람 법은 이슬람 공동체에 내린 알라의 계명을 표현한 것이고, 이슬람 신앙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에게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체계인 것이다. 이를 샤리아라 하는데 본래의 뜻은 '물 마시는 곳으로 이끄는 길'이다. 샤리아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보면 9세기말에 다수의 이슬람 법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샤리아와 서구법 사이에는 2가지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우선 샤리아의 범위가 더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샤리아는 한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절대신과 인간 양심과의 관계도 포괄하고 있다. 2번째 샤리아는 서구법과는 달리 절대신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마호메트 사후의 사회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샤리아는 변형되지 않는 것이다. 이슬람 법학에서는 법을 형성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를 조정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지도 아래 이슬람의 기본적 행동양식을 토대로 622년 메디나에서 창립되었다. 그러나 〈코란〉은 총 114장 가운데 단지 80여 장만이 아랍인의 관습과 규율을 명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포괄적인 법률체계가 아니다. 마호메트 생존시 법률 문제는 〈코란〉의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 해결했으며 사후에는 칼리프가 이를 승계했다. 661년 우마이야 왕조 수립과 함께 수도가 다마스쿠스로 옮겨간 후 법의 차원이 보다 넓어져 카디라는 재판관 제도가 활용되고, 또 로마-비잔틴 법과 페르시아-사산 왕조 법의 요소와 기능이 점령지에서 이슬람 법체계로 흡수되었다(→ 사법부).
8세기 중엽에 아바스 왕조(750~1258)의 등장과 함께 샤리아의 적절한 시행 여부가 논의되자 법학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나타난 법학파가 생기게 되었다. 수니파는 4개의 법학파로 갈라졌다. 즉 아부 하니파(767 죽음)의 하나피야, 말리크 이븐 아나스(759 죽음)의 말리키야, 샤피이(820 죽음)의 샤피이파, 아흐마드 이븐 한발(885 죽음)의 하나빌라이다. 이들 네 법학파의 신학체계는 예언자와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순나(관행)였으므로 그 추종자를 수니라고 불렀다. 단지 각 파는 자기 파의 법률 해석이 최선이지만 타파의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특히 샤피이는 〈코란〉에 언급되지 않은 분야에서는 개인 의견을 선호하는 법학자와 예언자의 선례를 존중해야 한다는 법학자 사이의 논쟁을 포용했다. 즉 〈코란〉과 예언자의 관행인 순나를 법원으로 삼고 법학자의 개인 의견인 라이(ray)도 그 적용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후 〈코란〉과 순나의 구절에서 유추한 키야스(quyas)와 법학자들의 합의점인 이즈마(ijma)가 법원으로 추가되었다. 이밖에도 시아파·이바디파는 수니파의 법체계와 비슷하나 각각 독자적 법체계를 마련했다. 각 법학파의 추종자 분포상황을 보면 하나피야는 중동과 인도 대륙, 말리키야는 북·서·중앙 아프리카, 샤피이파는 동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하나빌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시아파는 이란을 비롯해 인도와 동아프리카의 시아 공동체, 이바디파는 잔지바르, 우만, 알제리의 일부에 분포되어 있다.
전통적 이슬람법은 형법·상거래법·가족법·상속법 등으로 나누어진다. 살인·폭력 등의 범법자를 피해자가 받은 만큼 똑같이 보복함으로써 벌하지만 피해자의 가족이 보복 대신에 보상금을 지불하는 해결방식에 동의할 경우 그렇게도 허용된다(→ 범죄).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면 배교 행위와 노상 강도는 사형하고, 절도는 손을 절단하며, 혼외 정사의 당사자가 기혼일 경우 돌로 쳐 죽이나 미혼자일 경우에는 100대의 곤장질을 한다. 가족관계는 가부장제로 아버지는 딸의 결혼시 계약의 권리를 가진다. 부부관계에서 남편은 한번에 최대한 4명의 부인과 결혼할 수 있으나 부양할 책임이 있다(→ 복혼제). 부인은 가정문제나 사회문제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또 남편이 이혼을 원할 경우 비교적 용이하나 아내가 원할 경우는 그 반대이다. 유언에 의한 상속은 부동산의 1/3로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2/3는 법에 규정된 상속자에게 주어진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상속상의 차이점은 수니파는 부계 친척을 중심으로 하나 시아파는 부계와 모계 친척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19세기 이슬람 사회는 서구의 영향으로 민법·상법·형법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샤리아의 형법과 민법이 대부분 이슬람 국가에서 폐지되고 변화에 맞게 유럽형 세속법으로 개정했다. 또한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국가에서 샤리아법의 적용에 법정의 기소와 증거를 규정해 놓도록 법제화했다.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샤리아는 상황변화, 특히 도시의 급속한 인구증가와 여성해방운동으로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결과 1926년 터키에서는 샤리아 법을 전면 폐지하고 그대신 스위스식 가족법을 채택했다. 이집트의 가족법은 1920년과 1931년에 개정되었고, 시리아와 튀니지에서도 일부다처제와 이혼에 관련된 법이 각각 1953, 1957년에 개정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코란〉과 순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어 1961년 이슬람 가족법령이 공포되었다.
[이슬람의 사회·윤리]
이슬람에서는 결혼을 정상으로 보고 경제적 궁핍에 의한 독신을 예외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 가족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코란〉은 수도원의 독신생활을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여자를 악으로 간주하고 보통 독신생활을 하고 있다. 부부관계는 의복과 같이 몸에 맞아 상호 사랑과 자비로 이루어지는 것을 권장한다. 부모에 대한 효행,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효를 강조했다.
이슬람은 종교생활과 일상 세속생활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는 종교국가로 정의된다. 수니파·하와리즈파·시아파 사이에는 통치자 개념에 각기 상이한 점이 있다. 수니 할리파는 예언자의 후계자로서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로마 교황의 직능과는 달라서 교리의 정의와 입법권도 그에게는 없다. 그는 단지 이슬람 법의 집행과 이슬람 공동체의 일반적 이익에 봉사할 따름이다. 이론상으로는 그 자신도 이슬람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어서 필요할 경우에는 폐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니 정치이론은 사회여건의 산물이다. 즉 역사 발전에 따른 사실을 합리화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수니파는 통치권을 예언자의 사위 알리의 후손에게만 속해야 한다는 시아파의 정통성 주장과 통치권은 심지어 에티오피아 노예에게도 줄 수 있다는 하와리즈파의 민주적 주장 사이에서 중간적 입장을 취한다. 즉 칼리프는 쿠라이시족(예언자의 부족) 출신자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우마이야 왕조(661~750)와 아바스 왕조(750~1258)의 할리파 가문이 쿠라이시 부족 출신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아가서 부당한 통치자에 대한 반란권을 주장하는 시아파의 극단론적 견해와는 달리 수니파 통치자는 일정한 자격을 구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사소한 과오로 통치자의 지위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차츰 수니 정치론은 경직화 또는 정형화되어갔다. 단 하루의 혼란은 30년간의 독재보다 더 나쁘다는 정치적 주장을 나오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는 절대적 전제 군주가 될 수 없었다. 즉 그는 이슬람 성법인 샤리아 아래 있어야만 했다. 이슬람 율법학자들도 줄곧 정치적 귄위 위에 샤리아의 주권을 받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팽창 기타]
법과 교리의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는 문화적으로 보면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성은 이슬람의 팽창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또 이슬람 영역의 확대는 대체로 두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첫번째는 7, 8세기에 아랍인의 정복, 즉 무력에 의한 것인데 그 예가 이란이다. 2번째는 12, 13세기의 이슬람 신비주의자, 즉 수피들의 선교활동에 의한 것이며, 그 예가 인도네시아이다. 이란은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정복된 지 300년 후에 비록 그 문화와 언어는 회복했지만 이슬람의 영향이 너무 심대하여 이슬람 이전과 이후의 이란은 동질적 요소와 이질적 요소가 반반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란은 17세기에 이르러 절대 다수가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개종하여 종교적으로는 독자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은 수피들에 의해 평화적으로 개종되었다. 따라서 그 개종은 진척도도 매우 느렸으며 또 17, 18세기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그 전통적 관행이 상당히 남게 되었다. 특히 선교 일선에 나선 수피들은 현지인과 접촉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관행과도 적당히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현상은 이슬람의 변두리지역인 인도, 파키스탄, 중앙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중부지역에도 대체로 같다. 이슬람 상인들 역시 이슬람 세계의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19, 20세기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정책으로 인해 이슬람의 정치적인 힘이 상실되었지만, 이슬람 공동체라는 의식은 점점 더 강해져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이슬람인들이 그들의 정치적인 독립과 주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데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