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방00(여, 53세, 토박이)
- 살아있는 동안 매순간 모든 열정을 불태워 살자 -
<사북에서의 삶이야기>
방00 씨는 53세이다. 사북 토박이로서 학교는 사북중학교를 다니다가 강릉여중으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강릉으로 가게 된 동기는 어머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 향학열도 대단했죠.”
그런 인연으로 오빠와 언니 모두 강릉으로 외학을 가서 학교를 마쳤다. 대학은 서울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서 공부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는 일은 초등학생들의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거나 중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문해학교 교사자격증도 있어서 지역 어르신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5년 정도 되었다.
그녀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좌우명을 물으니 “매사에 남김없이 살자!”라고 했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매 순간까지 모든 열정을 쏟아 사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을 와서 올해 나이가 95세인데 평생 하숙을 치고 살았다.
“어머니는 음식솜씨가 남달랐어요. 그래서 하숙생이 많았죠.”
하숙생들은 주로 교사, 경찰, 영림서 직원 등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정선 동면인데 별다른 직업 없이 지냈다. 어머니를 도와주는 일을 주로 했다. 얼마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머니와 사북 관련 이야기를 글로 써서 중앙부처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그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방00 마을이야기<사람, 장소, 물건>
『마을이야기』라는 주제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우리 집,우리엄마』이다. 마을이야기에 무슨 가당찮은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70리 마을의 중심에 더 나아가서는 사북의 중심에는 “우리 집, 우리엄마”가 있다고 생각한다. 70리 스토리텔링의 중심소재로서 “우리 집”이나“우리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금부터 풀어놓고자 한다.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우리 집,우리엄마』가 왜 70리 중심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하는가? 우리엄마는 1926년7월7일(음력)생이다. 고향은 강릉이고 이 먼 곳으로 16세에 우여곡절로 시집을 왔다. 그 당시는 알다시피 일제 강점기 때였고, 결혼 하지 않은 젊은 처자는 모두 일본으로 팔려간다는 소문에 외할머니가 급히 서둘러 결혼을 시켜 보낸 곳이 첩첩산중산골 이곳 이었다. 그러니 엄마는 16세~현재까지 사북에서 살아왔다. 시집 왔을 그 당시 집이 서너 채가 있었다고 한다. 서너 채도 뚝뚝 떨어져 있어서 이웃과의 교류도 힘들었다고 한다. 7남매를 낳아 길렀다. 먹고 살 길이 없었던 그 당시 우리엄마는 어떻게 생계유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웠을까?? 처음에는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해주기도 했고 머슴살이도 했다. 그러다가 사북에 관공서가 들어오고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생기면서 우연찮게 공무원들과 선생님들 하숙을 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조금씩 형편이 나아져서 밥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거의 50년을 하숙을 치셨으니 사북이 조금이나마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사북에 들어온 공무원들은 거의 엄마 밥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부터 공무원들이 들어왔고 언제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생겼고 학생 수가 어느 정도였고 언제부터 광산이 문을 열었고 등등.. 심지어는 예전에 어떤 사람들이 왔다갔고, 어떤 이웃이 있었고 마을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확실히 알고 계시니 이것만 봐도 우리엄마가 사북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북의 산 증인이고 70리의 터줏대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7남매 막내로 태어나 아주 예전의 일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래도 짐작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엄마가 가끔 옛날이 그리워 옛날이야기를 할 때 귓등이지만 재밌게 들어서이다. 엄마가 많은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귀 담아 들어둘걸 하는 후회감이 든다. 사실 지금은 이미 이야기를 기억하고 풀어내기 힘드신 연세라서 앞으로는 무엇을 더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다. 사북의 도서관이 사라지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어떤 이야기라도 놓치지 말고 기록해 놔야겠다. 더는 그 시절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지기 전에.. 나의 유년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사실<마을이야기>에 장황하게 쓸 수 없어서 거의 대부분을 생략하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로 밖에는 전달을 못하지만 나중 기회가 되면 엄마의 역사를, 엄마의 생(生)이 되어버린 사북의 역사를 기록해보고 싶다. 이건 엄마의 이야기 뿐 만이 아니라 사북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70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감히 단언해본다. 우리가 몰랐던 사북마을의 재밌고 어느 누구도 아~할 수 있는 이야기가 탄생 되지 않을까??
지금 엄마와 나는 우리엄마가 거의 50년을 하숙을 쳤던 집에 기거하고 있다. 그 동안 많은 이웃들이 있었을 것이다. 꿋꿋하게 한 자리에서 50년은 사실 쉽지 않다.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났고, 우리 아버지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우리 집안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새 건물이 주변에 생기고 없어지고 했지만 여러 상황 상 그대로 외관상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엄마가 평생을 일궈놓은 집이기고 하지만 사북의 역사가 있고 엄마가 있는 이곳을 나도 떠나고 싶지 않다. 이 집(건물)이 있어야 사북의 스토리가 70리의 스토리가 만들어 진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건물이 많이 노후 되어 걱정이다. 옛 것을 살리면서 예쁘게 새롭게 단장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이웃 분들이 방문하여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 될 것 같다. 사북을 방문하는 많은 외지인이나 방문객들에게도 사북의 역사를 알릴 수 있고 이 지역을 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않을까? 이 집이 예쁘게 리모델링되어 활용된다면 70리에서 “우리엄마와 우리 집”은 스토리텔링의 빼놓을 없는 소재가 될 것이다.
<<마을이야기>>에서 우리 집과 우리엄마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사북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북역사와 면백(免白)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집은 “우리 집”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 “70리의 집”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집은 내게 큰 숙제(?)다. 주변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이 집이 70리 에서 잘 활용될 수 있다면 더불어 나너우리모두의 가치와 위상을 높일 수 있고 모두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보물창고 같은 역할을 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우리 엄마)
경로대학 가시는 날 채비를 하셨습니다. 사진을 안 찍으신다고 손사래를 치시다가 막상 찍는다고 하니 모자도 쓰고 예쁘게 찍어달라고 하시네요. 우리엄마 아직 예쁘죠??
사북도서관역할을 오래오래 하시기를 기도해봅니다.
내내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지금 거주 하고 있는 우리 집(사북5길 19-14)입니다. 건물이 많이 노후 되어 볼품없지만 그래도 제겐 어느 곳보다 소중하고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집이 서너 채 밖에 없던 시절부터 인구 5만이 살고 있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있어 준 집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집”은 그냥 “집” 이 아닙니다. “우리 집”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도 힘들 것 같습니다. 언어로 표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것(사연, 추억, 역사.. 등)을 함축하고 있는 곳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곳이 예쁘게 단장이 되어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좋은 공간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시재생이야기>
그녀는 도시재생센터에서 일하는 직원은 아니지만 도시재생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도시재생센터에서 하는 모든 교육에 참여해 수료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보다 발전하는데 관심이 많았고 “내 역할이 뭔가 있을 것 같았어요.”라고 대답했다.
도시재생센터에서 짓고 있는 건물이 완성되면 그녀가 카페를 운영할 것 같다. 주민협의체가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데 거기서 거론되었다.
그녀는 걱정이라고 했다. 초중등학교 학생지도와 문해학교 일이 주중 계속이어지고 있어 손을 낼 수가 없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이지만 직업이 있어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다가 하나 둘 이탈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젊은 층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활성화될 수가 있으나 이런 사람들을 찾는 것도 난제다.
도시재생센터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수시로 바뀐다. 사업이 변경되거나 새로운 사업이 추진되다보니 일하는 사람도 바뀌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책의 일관성도 결여되는 것 같고 구성원간 응집력도 떨어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