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任道 1585 1664 咸安 德勇, 致遠 澗松
간송집 제5권 / 행장(行狀) / 무민당 행장〔无悶堂行狀〕
朴絪 1583 1640 高靈 伯和 无悶堂, 臨軒
공의 성은 박씨(朴氏), 휘는 인(絪), 자는 백화(伯和)이다. 선대의 가계는 고령(高靈)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 12월 초6일 합천군 야로현(冶爐縣) 우거촌(愚居村)에서 공을 낳았다.
*우거촌(愚居村) : 현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우거 마을이다.
처음 용강(龍岡)에 살면서 서실을 “용강잠실(龍岡潛室)”이라 이름하였는데, 새벽에는 어버이를 뵙고 저녁에는 주무신다는 말을 들은 후에 물러 나와 서실에 거처하며 무릎을 모으고 똑바로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조동정사에 와서는 아침마다 반드시 뜰과 마루를 깨끗이 쓸었고, 서책과 책상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으며, 좌우의 벽 위에는 경의(敬義)ㆍ삼성(三省)ㆍ사물(四勿)ㆍ사무사(思無邪)ㆍ신기독(愼其獨)ㆍ용잠봉상(龍潛鳳翔)ㆍ천균기력(千鈞氣力)ㆍ만장광염(萬丈光焰) 등의 글자를 써서 걸어두었다.
*용강(龍岡) : 현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이다.
六年癸酉 先生五十一歲 春龍淵齋成。是春創立書齋於龍岡之上孤査舊址。名曰龍淵。與門徒月朔講學。嚴立規目。勸課不倦。
갑자년(1624, 인조2) 조동정사(釣洞精舍)를 지어 그 집에 ‘영모재(永慕齋)’라고 편액을 걸고, 장서감(藏書龕)을 ‘존경감(尊經龕)’이라 이름하고, 대청을 ‘양정당(養正堂)’이라고 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7) 조동정사의 북쪽에 서재를 지어 ‘벽연재(壁淵齋)’라고 이름하고서 고을 사람들 중에 배우기 원하는 자를 모아 그들에게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일찍이 남명(南冥) 선생의 “티끌이 만약 오장에 생긴다면,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塵土倘能生五內 直今刳腹付歸流〕”라는 시구를 읽고서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부친에게 글을 올려 과거 공부를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이로 인해 자호를 ‘임헌(臨軒)’이라고 하였는데, 《주역》에 “군자가 보고서 가르치려는 생각이 끝이 없으며, 백성을 용납하여 보존함이 끝이 없다.”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上書家庭。請捨擧子業。因自號曰臨軒。蓋取易敎思無窮。容保民無疆之義云。
周易正義(2) 周易兼義 上經 隨傳 卷第三 19. 臨䷒ 兌下坤上
象曰 澤上有地 臨이니 君子以敎思无窮하며 容保民이 无疆하니라
계유년(1633, 인조11) 고사정(孤査亭) 뒤에 서당을 세워 그 집을 ‘용연재(龍淵齋)’라고 이름하고, 세 마을의 연소자들을 선발하여 재주에 따라 학업을 권하고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홉 가지 규목(規目)이 있다.
六年癸酉 先生五十一歲 春龍淵齋成。是春創立書齋於龍岡之上孤査舊址。名曰龍淵。與門徒月朔講學。嚴立規目。勸課不倦。
현종 3 1662 임인 康熙 1 - 사림이 龍淵書院을 건립하여 위판을 봉안하다.
顯宗大王三年壬寅○士林創龍淵書院。先生易簀後十九年戊戌。洪箕範沈日三宋必遠等。創建于孤査。粤壬寅奉安位板。後士林移建于釣洞精舍之傍。
정축년(1637, 인조17) 당호를 ‘무민당(无悶堂)’으로, 문을 ‘절호문(節戶門)’으로 고쳐 편액하였는데, ‘문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라고 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기묘년(1639, 인조17) 조동정사의 옆에 띳집을 세우고 ‘벽한정(碧寒亭)’이라고 이름하였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58 11월 10일, 고산정사에서 졸하다. ○ 12월, 伊泗里 求理洞 선영에 장사 지내다.
경진년(1640, 인조18) 봄 진주의 고산정사(孤山精舍)에 우거하였다. 겨울에 병이 더욱 심해져서 11월 10일 정해일 고산에서 세상을 떠나 조동(釣洞)으로 반친(返櫬)하였으니 향년 58세였다. 12월 20일 구리곡(求理谷)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이 있는 곳이다.
*고산정사(孤山精舍) : 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에 있다. 정몽주의 후손인 정훤(鄭暄, 1588~1647)이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구경아 정현섭 (공역) | 2015
三年 仁祖大王元年 癸亥 先生四十一歲○是歲春。國家改紀。鄭被極禍。先生自是絶口不言鄭是非曰。吾豈以前日立異而追咎旣往乎。國法已正。從以疾之。非君子接物之道也。 ○冬往孤山精舍。河謙齋弘度來訪。孤山卽鄭學圃暄之精舍也。謙齋飽聞先生名。故來訪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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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1권 / 시(詩) / 벽한정에서 공경히 박무민당의 현판시에 차운하다〔碧寒亭 敬次朴无悶堂板上韻〕
선생은 천하의 선비이지만 / 先生天下士
갈대꽃이 핀 달밤 가을 강에 배를 띄웠네 / 蘆月秋江船
부모 봉양함을 삼공과도 바꿀 뜻이 없었으니 / 不換三公意
벽한정이 있은 지가 몇 백 년이던고 / 遺亭幾百年
[주-D001] 벽한정(碧寒亭) : 경남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에 소재하는 정자로,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이 학문을 닦기 위해 1639년(인조17)에 건립하였다.[주-D002] 박무민당(朴无悶堂) : 박인(朴絪, 1583~1640)을 말한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백화(伯和), 호는 무민당(无悶堂)이다. 그는 산림처사로 학식과 덕이 높고 애국심도 깊어, 1637년(인조15) 삼전도의 국치(國恥) 이후 호를 임헌(任軒)에서 무민당으로 고쳤다.[주-D003] 삼공(三公) : 주대(周代)의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이며, 조선조에서는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다.[주-D004] 부모 …… 없었으니 : 왕안석(王安石)의 시에 “고인이 하루 동안이라도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삼공(三公)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았네〔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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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任軒)에서->臨軒
간송집 제5권 / 행장(行狀) / 무민당 행장〔无悶堂行狀〕
일찍이 남명(南冥) 선생의 “티끌이 만약 오장에 생긴다면,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塵土倘能生五內 直今刳腹付歸流〕”라는 시구를 읽고서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부친에게 글을 올려 과거 공부를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이로 인해 자호를 ‘임헌(臨軒)’이라고 하였는데, 《주역》에 “군자가 보고서 가르치려는 생각이 끝이 없으며, 백성을 용납하여 보존함이 끝이 없다.”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上書家庭。請捨擧子業。因自號曰臨軒。蓋取易敎思無窮。容保民無疆之義云。
周易正義(2) 周易兼義 上經 隨傳 卷第三 19. 臨䷒ 兌下坤上
象曰 澤上有地 臨이니 君子以敎思无窮하며 容保民이 无疆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