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삽화에 꽂혀서 집어든 이인성의<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는 나를 몇 주 동안이나 낑낑대게 만들었다. 누보로망에서 무의식은 지배적인 원리로 승격되어 비의지적인 무시간성 속에서 구조화된다. 이인성이 불문학을 전공해서 인지 그는 그러한 화법과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그와는 또 다른 형태의 언어 구조를 형상화하고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펼치는<미쳐버리고...>는 미쳐있는 듯 하지만 언어의 향연이 아닐까.
<미쳐버리고...>의 언어 구조는 무의식을 따라 그려진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 자아의 분열을 통해 무의식층위의 담론으로 얽혀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고 기대하는 이성적 층위를 '욕망'하는 독자는 짜증이 치밀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의 '실존'을 완결되고 완벽한 구조로 모른 척 속아주는 독자들은 의미론적으로는 '결핍'의 상황을 지나 박제된 존재나 다름없을 것이다.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잡기 위해 과거의 시간을 박제시킨 복고풍 이미지의 상품에 매혹되는 것처럼 죽은 시간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완결된 문장으로 쓰여질 수 없고, 일관적인 구조의 플롯으로 짜여질 수 없다. 확고하다고 믿었던 모든 대립적·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이 사실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양가성 혹은 무차별적인 양가성 안에 있다. 그렇게 세상은 끊임없이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빌딩 두개가 폭발됐다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한 나라를 몰살시키고,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여자가 한밤중에 남편을 찾아오고......
미친 듯이 돌고 도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의 세계에서 이인성의 파산적 언어는 필연적 '선택'이지 않았을까. 의미론적 무차별성이 지배하는 언어적 상황에서 의미론적으로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의식-무의식의 해방을 제지하는 지배적인 서사구조의 글쓰기에 대해 <미쳐버리고...>는 해체를 시도한 것이다. 전통적인 형식의 붕괴는 세계의 점증적인 복잡성에 대한 반응 형식을 통해 세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없는, 미칠 수도 미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인성의 노력은 외롭고 힘겨운 생존 방법이기에 미쳐있지만 우리의 향연일 수 있을 것이다.
2. 새로운 주체-내부의 타자 찾기
이인성의 화자는 대답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문제는 실존의 위기감으로 인한 존재의 욕망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 땅은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가치들이 무차별하게 뒤섞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어느 정도는 정형화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다원성의 문화를 획득함에 있어 용이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다원성의 시대 안에서 작가 이인성은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절대성에서 벗어나 개인의 주체성을 처음으로 인식함으로써 기존의 체계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세계관을 등장 시켰듯이 이인성의 <미쳐버리고...>는 새로운 주체 인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드러나 있는 실체만을 인식하는 평면적인 주체가 아니다. <미쳐버리고...>는 무차별한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온전할 수 없는 주체의 숨겨져 있지만 늘 도사리고 있을 주체의 내부를 파헤친다. 주체 내부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분리하고 의미화한다. 그러므로 인해 주체는 복합적이고 다성적인 그들의 세계를 풍성하게 한다.
이인성은 주체 내부에 짓눌러 있는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들쑤신다. 그래서 무한히 무차별하고 양가적인 세상에 휘둘린다 해도 그의 주체는 살아남을 틈을 찾는다. 억압된 무의식을 감각의 층위에 기대어서 맘껏 의식화하고 있는 주체의 해방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화자의 미래의 시간으로 볼 수 있는 '그'는 무의식적 행로를 따라 어둠의 숲으로 찾아감으로써 욕망-살의 질투에 대한 해방이 실현된다. '죽은 자에게는 입구이나 산 자에게는 다름 아닌 맨 처음의 출구일 뿐이라고.' 하는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깨달음으로써 황홀해진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여러 시간들이 뒤얽힌 채 동일한 자아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세 명의 상이한 인물은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의 주체가 된다. 그런데 세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적 분류의 체계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뒤섞여 있다.
세계는 무차별적으로 비이성적으로 철저하게 해체되어야 한다. <미쳐버리고...>는 이성적 이성을 거부한다. 문명의 발달을 실현한 이성은 그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 도구적이다. 기존에는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출했다면 <미쳐버리고...>에서는 내부의 주체에 의해 외부의 주체는 호출되고 행동하고 해체되기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인해 근대성에 의해 구축된 허상의 주체가 아닌 새로운 주체 형성이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주체 내부에서 억압되고 소외당하고 있는 타자-주체 내부의 타자를 무의식의 층위에서 실현시킨 <미쳐버리고...>는 새로운 주체 인식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속의 너와 미래일 그와 현재의 나는 서로 분명 다르지만 '미래를 그에게 맡겼으니 죽을 수도 없는 너'는 분명 함께 공존한다. 이는 의미론적으로 양가적이면서 더 나아가 카오스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실존의 주체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나, 너, 그 사이의 관계가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의 무관심성-무차별적 구조를 이행한다. 이러한 무관심성이 「모라비아」에서 처럼 이데올로기 순응주의자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체와 주체 내부들에서의 치열한 의문과 문제제시의 분투는 충분히 이데올로기 비판적이다.
세계는 이데올로기와 양가성과 무차별성이 공존한다. 의미론적 적실성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양가적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고, 무차별적인 양가성이 떠돌고, 이데올로기의 무차별성이 가능한 세계라고 하면 억지일까. <미쳐버리고...>는 억지였으면 좋을 그 세계의 이율배반에 스스로 주체를 노출시킴으로써 그 모든 세계를 관통하는 주체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다양성과 모호성을 지닌 언어를 끌어올려 주체 내부의 타자성을 파헤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주체의 내부를 세 가지의 의식-무의식으로의 말하는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방법론은 그래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렇듯 <미쳐버리고...>는 그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타자성을 드러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들을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비껴가기를 반복하고, 외부적 질서에 의해 제한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충실한 주체를 통해 주체-내부의 타자는 열린 구조를 가진다. 총체적-단일적 주체는 복잡하고 파편화된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무의식의 구조에서 기인한 무차별적인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부서지고 소멸하는 주체가 현대의 적실성을 생성할 수 있지 않을까. 무차별적이고 양가적인 세계에서 주체 상실은 직선적으로 발생될 수 있다. <미쳐버리고...>는 그 속에서 새로운 주체-내부의 타자 가능성을 찾았다는데 의의를 가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