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에 소재하고 있는 보림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동부도 오름길엔 치자꽃이 한창...]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과 천왕문·영각(影閣)·요사채 등이 있다. 사천왕문 안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된 국내 목각상의 대표적인 것으로 최근 중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장 속의 비장품은 도굴꾼들에 의하여 망가진 상태로 방치되었다. 현재 사천왕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 백과사전에서 알려준다.
[보림사 경내 안내도...]
[보림사 동부도밑 첫 번째 부도..]
[보림사 동부도 우측 첫 번째 부도...]
[보림사 동부도 밑쪽...]
[보림사 동부도밑 좌축 둥근부도...]
[보림사 동부도밑 우측 둥근부도...]
[보림사 동부도(寶林寺 東浮屠)(보물 제155호)...]
보림사 동부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6m이다. 부도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이다.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505.8m)에 있는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에 딸린 절이다. 860년 무렵 신라의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0)의 권유로 승려 체징(804∼880)이 창건하였으며 선종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이다. 팔각원당형을 따랐으며, 승려의 사리를 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 기단을 두고 위에는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깎여져 있다.
지대석은 8각으로 매우 넓으며, 그 위의 하대석은 반구형이다. 3단으로 된 기단의 맨아랫단과 맨윗단에는 8잎의 연꽃잎을 둘러 새기고 각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얹었으며, 가운데는 8각의 기둥을 낮게 두었다. 탑신 또한 8각 석주형이며, 우주의 표시는 없고 한 면에만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본떠서 그대로 새기고, 지붕돌은 다른 부분에 비해 좁고 낮은 편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중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위아래를 나누어 장식하였다. 탑신의 윗부분이 전체적으로 보아 높게 이루어졌으며 기단의 가운데 받침돌이 작고 낮아 안정감이 떨어진다.
잘 정돈된 구조가 돋보이며 머리장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의 조형수법은 세련되었으나 입체감이 부족하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나 고려 전기의 특징을 나타낸 묘탑으로, 부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라고 백과사전에서 알려준다.
[아름다운 치자꽃...]
[보림사 동부도군은 보림사 주차장 우측 언덕에 자리하고...]
[가지산 보림사(迦智山 寶林寺)) 일주문...]
보림사 일주문은 참 독특하게 생겼다. 정밀 일주라는 뜻에 맞게 기둥이 하나인 것 사실이지만 포작이 여러겹으로 된 구조로 아치형 덧문을 만들어 놓아 받히는 힘도 얻겠지만 아름다운 멋도 살려놓은 것 같다. 일주문 안쪽에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구석에는 옹정(雍正)4년 그러니까영조 2년(1726년)이라는 연대가 적혀있어 역사적으로 멋진 자료가 될 것 같다. 그밑에는 외호문(外護門)이라 쓴 작은 현판도 있다.
[일주문 안에서 내다본 천왕문과 경내...]
[보림사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앞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천왕문에 걸린 목판과 『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의하여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고 이후 2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상징물을 들고 있으며 발 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을 갖는다. 또한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따라서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좌측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우측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
동방 지국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고. 비파를 들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들고 있다.
[좌측엔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우측엔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과 우측엔...]
서방 광목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용과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북방 다문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는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보림사 금강역사...]
[보림사 금강역사...]
[보림사 당간지주...]
[보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재 보림사는 중심 불전으로 대적광전과 대웅보전 두 곳을 두었다. 두 불전 직교축으로 자리 잡았는데 일주문축에 맞춰 남북축에 사천왕문, 대적광전이 있고 대적광전과 직교한 동서축에 대웅보전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은 원래 조선 초기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84년에 제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근래에 조성한 삼세불좌상과 4대 협시보살 입상을 모셨으며, 후벽에는 3폭으로 구성된 영산회상탱을 봉안하였다. 불상은 화려하게 조각한 불단 위에 모셨고 머리 위에는 아자형 닫집을 걸었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층 불전이다. 장대석 기다 위에 널찍한 자연석 초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한 뒤 다포계 공포를 짜 올렸다. 포는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출목수는 같다. 주간포는 상하 모두 1구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상하가 트인 통층인데 천장은 상층부에 우물반자를 가설한 우물천장으로 장엄하였다. 처마는 상하 모두 겹처마로 구성하고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용마루 와적층 아랫단은 미출(眉出)로 장식하였으며 마루 끝은 망와를 세웠다.
기와골 끝은 상하층을 달리하여 상층은 막새를 끼웠지만 하층은 와구토로 마감하였다. 전면은 띠살로 짠 모두 4분합문을 달았으며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상층은 채광용 고창을 달았다. 주련은 하층 전면 기둥에만 걸었다. 외부 벽면에는 심우도(尋牛圖)를 그려 넣었다.
[보림사 대웅보전과 앞에 쾌불석주들...]
[보림사 대웅보전과 쌍삼층석탑 그리고 석등...]
사찰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다.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
[쌍삼층석탑중 북탑(국보 제44호)...]
[쌍삼층석탑중 남탑(국보 제44호)...]
[보림사 석등(국보 제44호)...]
보림사 대적광전 앞 두기의 삼층석탑 사이에 있는 이 석등은 지대석을 제외한 기단, 화사석, 옥개석이 모두 8각으로 이루어진 형태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등을 대표한다. 크기는 총 높이 3.05m, 화사석 높이 0.48m로 좌우에 위치한 석탑과 함께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아래에서부터 2단의 사각판석형태의 지대석 위에 각 면에 안상이 새겨진 8각기단을 올렸다. 하대석은 복련으로 연잎 중앙에는 당초문형의 화려한 귀꽃을 새겼다. 중대석은 8각의 긴 기둥형태로 상·하에 2단의 갑석을 넣었다. 상대석은 복판의 앙련형으로 각 연판에는 화문을 모각하였다. 화사석 역시 8각으로 앞·뒤면에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두었으며,
화사가 놓이는 곳에는 화사를 놓기 쉽도록 낮게 홈을 팠다. 옥개석에는 기왓골이 없는 형태로 처마 끝에 한 단의 턱을 두어 절수(切水)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처마의 곡선은 완만한데, 전각(轉角)에는 귀꽃장식을 더하였다. 옥개석 상단에는 단판 연화문을 장식하고, 그 위로 원형의 원통형 기둥에 앙련과 복련의 팔엽단판을 조각하고 보개를 올렸다. 보개는 옥개보다 작은 형태로 그 위로는 원형의 보주형 연봉오리를 안치하였다. 이 석등은 좌우에 있는 석탑의 탑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석탑과 같은 기간 즉 함통(咸通) 9년(868)에서 함통 11년(870)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대웅보전을 향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일반적으로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의 협시를 시작으로 시왕상을 배치하는데 비하여, 보림사 명부전에는 중앙 불단에 지장보살좌상 만을 모시고 후불탱으로 지장보살탱을 모셨다. 전각 바깥의 양 측벽과 뒷벽에는 지옥도를 그려 장식했다. 현 명부전은 1972년 지은 대적광전을 모태로 한 건물이다. 최근 새로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1998년 현 자리로 옮겨 명부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차례로 결구한 뒤 포를 짜 올렸다. 포는 주간포를 두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다포와 짜임이 다르다. 어칸 좌우 기둥머리에는 용두를 새긴 안초공까지 끼워 장식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층단을 두었다. 천장 중앙부는 종보 높이에 맞췄고, 외곽은 대들보 높이에 맞춰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를 얹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용마루는 기와를 쌓아 만들지 않고 용 형상의 자기로 쌓았으며 용마루 좌우에 용두를 두고 한가운데는 장식물을 설치하였다. 내림마루 끝에도 장식기와를 끼웠으며 암· 수키와도 유약을 바른 기와를 사용하였다. 기와골 끝은 막새를 사용하여 마감하였다.
[보림사 명부전내 지장보살좌상...]
명부전 안에는 중앙 불단에 지장보살좌상 만을 모시고 후불탱화로 지장보살탱을 모셨다. 전각 바깥의 양 측벽과 뒷벽에는 지옥도를 그려 장식했다. 중앙 불단의 지장보살상은 승문형 머리에 불투명한 두건을 썼는데, 얼굴은 살이 오른 원만한 상으로 작은 이목구비를 갖추었다. 두 눈썹사이에는 백호가,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묘사되었고, 긴 귀는 어깨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으로 착용하고, 목에는 영락장식을 하였다. 왼손에는 보주를 받쳐 들고 오른손은 석장을 잡고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광배 대신 지장보살탱을 봉안하였으며, 대좌는 연화대좌로 본존과 같이 개금되었다. 지장보살탱은 흑지바탕에 금선묘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을 배치하고, 얼굴과 신체 등에는 드문드문 채색하였다.
[명부전 용마루 선이 너무 아름답고 두 마리 용과 가운데 장식이 돋보여...]
[보림사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대적광전과 동국선원 사이에 자리 잡은 건물이다. 내부에는 중앙 불단에 칠성탱을 봉안하고, 좌우 측벽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을 모셨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치목한 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워 익공을 짰는데 초익공이다. 주간에는 장혀 하부에 소로를 받쳤다. 천장은 구조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다. 구조는 간단한 3량가로 짰는데 앞뒤 기둥 위로 대들보를 걸고 한 가운데에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얹은 겹처마이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고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였으며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정면 3칸은 모두 2분합문을 달았다.
[보림사 범종각...]
사천왕문 오른편에 있는 누각으로 옆에 수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하층은 모를 접은 사각형 장초석을 놓고 기 위에 짧은 누하주를 세웠다. 누상주는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으로 기둥머리는 창방을 끼운 뒤 익공을 짰다. 익공은 이익공이며 주간에는 화반을 각각 1구씩 받쳤다. 천장은 구조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구조는 간결한 오량가로 결구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올린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끼웠으며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안에는 범종을 포함하여 운판, 북, 목어 등 사물을 안치하였다.
[보림사 대적광전...]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는 보림사는 중심 불전으로 대적광전과 대웅보전 두 곳을 두었다. 두 불전은 직교축으로 자리 잡았는데 남북축은 일주문과 사천왕문, 대적광전이 있고 대적광전과 직교한 동서축에 대웅보전이 배치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안에는 철조비로자불상(국보 117호)과 신중탱 2점을 걸고 철불 후벽에는 홍지바탕에 금니로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권속들을 묘사한 비로자나후불홍탱을 봉안하였다. 현재 건물은 1996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다시 지었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붉은 기운이 강한 널찍한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과 평방을 끼운 뒤 다포계 공포를 짜 올렸다. 포는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짰다.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한 우물천장인데 중앙부와 외곽에 단차를 둔 층급천장이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건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팔작으로 만들고 기와골 끝은 막새를 끼웠다. 정면 출입문은 모두 분합문이며 상부에 고창을 두었다.
문짝은 하부에 궁판을 두고 문살은 꽃살로 짰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을 각각 걸었다. 내부에 봉안한 철불은 새로 조성한 불단 위에 연화좌대를 놓고 봉안하였으며 머리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한 아자형 닫집을 걸어 장엄하였다. 닫집은 다포계 공포를 내외로 짜고 내부 천장에는 용과 구름 등을 새겨 걸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국보 제117호)...]
경내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 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보림사 장서각밑 주지실...]
[장서각앞 커다란 바위엔 무수한 바람들의 형상이...]
[보림사 동국선원...]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보물 제158호)...]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3.46m, 비신 높이 2.64m, 너비 1.37m. 귀부와 이수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김영의 찬문에 김원, 김언경의 서자로, 자경은 2.4cm이다. 첫행부터 제7행의 ‘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로 썼으며,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다. 내용은 보조선사에 관해서 전하며, 보조의 휘는 체징, 속성은 김, 804년(애장왕 5) 웅진(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조형은 신라 전성기의 것이지만 귀두는 용두화하였고 목은 직립하여 생경한 인상을 준다. 이수도 정연하게 규격을 갖추었으나 세선각문 등에서 형식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각부는 완존해 있으며, 다른 비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매우 높고 큰 당대 비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의 아름다운 이수 부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보물 제157호)...]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보림사는 보조선사 체징이 신라 헌안왕의 명으로 860년경에 건립된 대가람이다. 6·25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아직도 동서 양 3층석탑·석등·석불 등의 많은 유물이 남아 있고, 보조선사의 유적도 이 묘탑 이외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가 남아 있다. 인도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람사와 더불어 불교 가지산파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이 탑은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으로, 보조선사는 헌강왕이 내린 시호이며, 창성은 탑호이다.
일제강점기에 사리구를 절취당하면서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8각 원당형을 따른 이 탑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고, 지대석 윗면에는 얕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 뒤에 팔각 석재가 2중으로 놓였는데 손상이 심하다. 탑신도 8각이며 너비는 상대석과 거의 같다. 상륜으로는 보륜)·보주 등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조루가 섬려하고 그 형태도 정돈된 편이다. 조성은 보조선사가 입적한 880년의 4년 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조선사 창성탑은 하대석, 상대석이 유난히 아름다워...]
[옆비석엔 보물 157호 보조선사(普照禪師)임을 알리는...]
보조선사는 체징(體澄)으로 804(애장왕 5)∼880(헌강왕 6). 신라시대의 승려.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제3조(祖). 성은 김씨(金氏). 웅진(熊津 : 충청남도 公州) 출신. 어려서 출가하여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 밑에서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827년(흥덕왕 2)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 있는 염거(廉居)의 밑에서 일심으로 정진하여 법인(法印)을 받았다. 837년(희강왕 2) 정육(貞育)·허회(虛懷)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전국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나,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840년(문성왕 1) 귀국하였다.
이 후 많은 승속(僧俗)들에게 선도(禪道)를 가르쳤으며, 무주(武州 : 光州)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859년(헌안왕 3) 왕이 궁중으로 청하였으나 병을 빙자로 사양하였고, 그 해 겨울에 다시 청하자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겼다. 860년 김언경(金彦卿)이 제자의 예를 취하고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여 안치하였고, 861년(경문왕 1)에는 보림사를 증축하여 더욱 많은 제자들을 교화하였다. 880년 문인들에게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보림사 미타전(彌陀殿)...]
여기 미타전 안에 모셔진 석불입상은 시도유형문화재 191호로써, 원래 전라남도 장흥읍 제암산 중턱에 있는 의상암 절터에 있던 것인데, 1994년부터 보림사로 옮겨 모시고 있다. 몸 뒤의 광배(光背)와 목 부분에 약간의 파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게 표현되었고 얼굴은 계란형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위까지 U자형 주름을 이루고 있다. 양 팔에 걸쳐진 옷자락은 물결 모양의 주름을 만들면서 무릎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타여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원만한 얼굴, 높은 머리묶음, 상체의 옷주름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 전의상암지 석불입상(長興 傳義湘庵址 石佛立像)...]
[장흥 전의상암지 석불입상...]
[보림사 조사전...]
조사전은 대웅보전 뒤쪽 석축 위에 있는 건물로 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내부 불단에는 보조선사(普照禪師)와 도의선사(道義禪師) 그리고 염거선사(廉居禪師)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좌측 벽에는 보우화상(普愚和尙)의 진영을, 우측 벽에는 매화보살(梅花菩薩)의 진영을 모셨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전각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초석을 놓고 민흘림으로 치목한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을 결구하고 주간에는 소로로 받쳤다. 내부는 연등천장으로 구조를 볼 수 있는데 3량가로 결구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얹은 겹처마로 구성하고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로 만들었다.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고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다. 정면 3칸에는 모두 띠살로 짠 분합문을 달았다.
[보림사 경내에 자리한 감로수...]
[시원한 감로수가 철철...]
[보림사 천왕문옆엔 커다란 보호수가...]
[담넘어 살짝...]
[보림사 전통찻집...]
[보림사 주차장 약수터...]
[보림사 서부도(보물 제156호)...]
보림사 서부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6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8각 원당형(圓堂形)으로 기본형태는 같으나 장식수법에 차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4각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변형된 이색적인 복련(覆蓮:아래로 향한 연꽃) 8엽(葉)이 놓였으며,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여의두(如意頭)무늬와 비슷하다. 중대석 또한 8각으로, 각 우각(隅角)의 연주형(聯珠形)으로 우주를 대신하고, 각면에는 원형 안에 4곡(曲)이 있는, 통식(通式)을 벗어난 안상(眼象)이 있고,상대석에는 단판(單瓣) 8엽의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이 있다.
판 안에는 타원형 윤곽 속에 4화형(四花形)이 첨가되었으며 윗면에는 탑신 받침 1단이 있다. 탑신도 8각으로 우각 표시가 없고 옥개석(屋蓋石)은 좁다. 상륜부 복발이 있고 그 위에 크고 작은 2개의 여의보주가 중첩되어 있다. 형태는 아름다우나 조식 수법이 섬약하고 장식성이 지나치다. 조형은 단정한 편이고, 특히 상륜부까지 모두 완형을 보존하는 귀중한 유품이라 할 수 있다. 원만한 비례와 규칙적인 결구 수법으로 보아 이 두 탑의 조성 연대는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이며, 고려 중기를 내려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림사 서부도 기단부...]
[상륜부...]
[기단부...]
[보림사 서부도 옥개석...]
[호랑나비까지 가세해서...]
[보림사 서부도의 진수...]
[보림사 서부도를 보고 돌아가는 길가엔...]
[멋진 까치수염이 넘실 넘실...]
지금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부도탑 들의 아름다움, 물론 여러 군데서 본 비슷 비슷한 섬세한 아믈다움이 지만 지난번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보조선사창성탑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움직일 것 같은 조각들이 보는 이를 놀라게 해준다. 많은 시간을 하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행거리에 비해 고생수치를 생각해봐도 결코 뒤지지 않은 그런 멋진 곳이다. 아니 사찰이나 역사를 좋아 하는 이들은 꼭 가보아야 할 그런 곳이라 말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