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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47강 (枝末法會, 彌伽長子)]
1. 依敎趣求
爾時에 善財童子가 一心正念法光明法門하고 深信趣入하며 專念於佛하며 不斷三寶하며 歎離欲性하야 念善知識하며 普照三世하야 憶諸大願하며 普救衆生호대 不着有爲하며 究竟思惟諸法自性하며 悉能嚴淨一切世界하며 於一切佛衆會道場에 心無所着하고 漸次南行하야 至自在城하야 求覓彌伽하니라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제 63, 입법계품 제39지 4라고 되어 있는데 입법계품(入法界品)만 21권이 되지요. 21권 중에서 세 권이 이제 끝이 나고 옛날 책 권수로 네 번째에 들어간다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39지 4는 화엄경이 전체 39품으로 되어 있는데 39번째 품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 공부할 선지식은 선지식으로는 다섯 번째인 미가장자(彌伽長子)이시고, 십주(十住) 중에서 네 번째 주인 第四 생귀주선지식(生貴住善知識)이라고 되어 있어요.
십주(十住) 선지식, 십행(十行) 선지식, 십회향(十回向) 선지식, 십지(十地) 선지식, 등각(等覺), 묘각(妙覺)선지식으로 53선지식을 그런 식으로 배정을 해 놨습니다. 물론 경문에는 제4 생귀주선지식(生貴住善知識), 이런 말은 없어요. 그러나 전체 구성으로 볼 때 그렇게 파악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십(十)바라밀로 배대를 하면,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네 번째이니까 정진(精進)바라밀에 해당돼요.
이시(爾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그 때에 선재동자가
일심정념법광명법문(一心正念法光明法門)하고, 일심으로 정념(正念), 바르게 생각을 했다는 거지요.
우리가 정성을 드려 기도를 한다, 참선을 한다, 할 때 일심으로 한다는 말을 잘 쓰지요. 일심으로 한다는 건 참 중요한 말입니다. 일심으로 해야 돼요.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다 갖춰져야 돼요.
바르게는 하는데 일심으로 안하고 어쩌다 한 번씩 하면 별 효험이 없지요.
일심으로는 하는데 삿되게 한다면 그건 큰일이에요. 안 하는 것보다 더 못해요. 잘못 가는 거니까요.
차라리 출발을 안 하고 있으면 나중에라도 가는 일이 크게 힘들지는 않은데 다른 방향으로 이미 멀리 가 있다 생각하면, 되돌아와야 하니까 힘이 들지요. 그래서 바른 생각 정념(正念)이 중요합니다.
일심으로 바르게 생각했다, 무엇을?
법광명법문(法光明法門)을 바르게 생각했다.
진리의 어떤 광명법문이지요. 선재동자가 앞에서 다른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는 진리에 대한 광명법문을 일심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그리고
심신취입(深信趣入)하며, 깊이 믿고,
또 깊이 믿다 보면 이제 거기에 나아가게 되는 거지요. 취입(趣入)이라는 것은 거기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전념어불(專念於佛)하며,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며
부단삼보(不斷三寶)하며, 불법승 삼보를 끊지 않는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자신은 부처님을 따르는 대중이 되지요. 승속을 막론하고 승가(僧家), 불교 단체에 해당되니까 삼보가 성립이 됩니다. 그것을 끊지 아니하고 지속을 시킨다.
탄이욕성(歎離欲性)하야, 이욕성을 찬탄한다, 참 뜻이 깊으면서도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욕심이란 게 다 있지요. 표면으로 보면 모든 인간에겐 욕심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저 깊은 마음, 우리의 청정한 마음의 세계에는 본래 욕심이 없어요. 그것이 이욕성(離欲性)입니다. 욕심을 떠난 성품의 세계이지요.
그것을 자꾸 우리가 찬탄하고 들추어 내고 일깨워야 되지요.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주 청정한, 욕심을 떠난 이욕(離欲)의 세계가 저절로 자꾸 드러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습성이 있는데 그 습성 중에서 어떤 것을 키워 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교육이란 바로 그런 거지요. 자녀들 교육도 마찬가지인 것이 예를 들어서 시험지를 받아 왔는데 50점을 받아 왔다면 반은 틀렸고 반은 맞은 거지요.
그런데 바람직한 부모는 맞은 것을 이야기 하는 거지요. “아, 이렇게 어려운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며 잘 된 것을 자꾸 일깨워 주는 거예요.
그런데 못난 부모는 잘못된 것만 지적하는 거예요. “이것도 모르나” 하고는 꿀밤을 딱 주고, “내가 저번에 가르쳐 준 것도 못하냐”고 또 꿀밤을 딱, 주지요.
어리석은 부모는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자꾸 반대 방향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악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르는 거지요.
계속 그러 짓을 밀고 나가는 거예요, 안 된 것만 지적하는 거예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속성이 많지요. 악한 면도 있고 선한 면도 있고 부처인 면도 있고 아귀나 축생, 마구니의 면도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지요.
좋은 점을 자꾸 들추어 내고 그것을 장려하고 성장시키고 키워내는 작용을 하고, 그런 쪽으로 인도를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말한다면 한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 속에는 욕심이 없는 청정한 본심도 있다는 거지요. 아무리 욕심 투성이인 사람도 아주 청정한, 순진무구한 마음도 있다 이거예요.
아주 조그마한 양보라도 했을 때 “아, 이런 것도 양보할 줄 아느냐”고 말해주면 그 사람은 두 번, 세 번 양보합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한다고요.
그런데 조그마한 잘못을 자꾸 들추어내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고, 훌륭한 쪽을 들추어내어 칭찬하면 훌륭한 면만 발전하게 되어 있어요.
탄이욕성(歎離欲性)이라,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이욕(歎離)의 성품, 욕심투성이이지만 그 속에 있는 욕심 없는 마음을 자꾸 찬탄하는 겁니다. 찬탄하면 그것이 자라나요, 자라나서 욕심은 조그만해지고 욕심이 없는 청정한 마음은 커지는 거지요. 그렇게 수행해 나가는 거예요. 수행도 별 것 아니지요.
탄이욕성(歎離欲性)해서
념선지식(念善知識)하며, 선지식을 생각하며
보조삼세(普照三世)하야,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널리 잘 관찰한다.
비춘다고 하는 말은 불빛으로 비추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으로 그것을 다 관찰하는 것이지요. 삼세를 다 관찰해서
억제대원(憶諸大願)하며, 큰 원력을 기억해 내며,
우리가 그동안 많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인데 그런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모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 가운데서 아주 훌륭하고 큰 원(願)을 기억해 내는 것이 중요하지요.
억제대원(憶諸大願)입니다. 과거에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갈 것을 보조삼세(普照三世)하여, 우리가 굽어 봤을 때 그 중 무엇을 장려해야 하며 무엇을 기억해 내야 하느냐?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러한 면들이 너무 많지요?
우리가 살다보면 고의적으로 저지른 일도 있고, 본의 아니게 저지른 일도 있고, 불가항력으로 겪은 그런 일들도 있고, 참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일들도 많습니다만 여기에서 기억해 내야 할 일들은 뭐냐? 큰 원력, 대보살님의 원력과 같은 그런 큰 원력을 자꾸 기억해 내는 것이지요.
보구중생(普救衆生)호대, 중생을 널리 구제하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되고 보탬이 되는 그런 일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지요.
불착유위(不着有爲)하며, 유위(有爲)에 집착하지 않는다, 유위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지요. 허망한 일은 꿈과 같은 일이야. 다 환상(幻想)과 같은 일이거든요. 살아가는 일들의 거의 99%가 유위(有爲)라서 지나고 난 이 시간에 생각해 보면 꿈이야 꿈.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요. 거 아무 것도 사실은 아니야.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야, 고로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가지고 아웅다웅 하고, 그냥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을 흘리며 별별 아픔을 되새기게 되는 거지요.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해서 그래요.
한 순간 헤어나 버리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면, 그러면 간단한 거예요.
여기서는 불착유위(不着有爲)라 했지요. 아무 것도 아닌 허망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거지요.
성큼 뛰어나 가지고 어린아이의 장난을 보듯 관조할 수 있는,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여유, 마음의 여유를 말합니다.
정말 성숙하고 철든 사람은 그런 어떤 마음자세가 되거든요.
구경사유제법자성(究竟思惟諸法自性)하며, 끝내 깊이 있게 제법의 자성을 사유한다.
제법자성(諸法自性)이라는 것은 모든 도리의 진정한 성품, 변하지 않는 어떤 진리의 성품인데 그것이 뭔고 하면 공적(空寂)을 말합니다.
제법자성(諸法自性)이란 것은 공적한 것이지, 공적(空寂)한 것 이외는 제법자성(諸法自性)이 있을 수가 없어요.
공적이 제법자성이야.
어떤 사물이나 건물, 산 등 그렇게 눈 앞에 보이는 그런 것이 모든 존재의 자성이 아니라, 모든 존재 이면(裏面)에 있는 텅 비고 고요한, 공적(空寂)한 그런 것이 모든 존재의 참된 성품이지요. 그걸 이제 생각하는 거지요.
원?에 집착하지 아니 해야 그게 조금 눈에 보이지요. 눈앞에 보이는 어떤 허망한 일, 그것이 좋아가지고 거기에 허둥대면 그런 실상을 이해할 겨를이 없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에서 허우적대더라도 ‘이것은 허망한 것이다, 꿈과 같은 것이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꿈을 꾸어야 그 꿈이 가벼워요.
기도를 많이 하거나, 공부를 좀 많이 하거나 정신이 좀 맑을 때 꿈을 꾸면 꿈 속에서도 ‘아, 이건 꿈이다’ 하는 것을 알면서 꿈 꿀 때가 있어요. 우리는 경험을 여러 번 했는데 그럴 때는 꿈을 깨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꿈인 줄 알고 꿈을 꾸거든요, 그럴 때는 위험한 꿈을 꾸어도 ‘이거 꿈인데 뭐 괜찮아’, 이러면서 꿈을 꾼다고요. 그런 꿈을 꾸고 나서 생각을 해 보면 참 기분이 좋아요.
우리 인생도 한낱 꿈이지요. 정말 꿈인 줄 알고, 또 꿈같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알면, 그때는 정말 홀가분하고 기분 좋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요.
그때는 불행도 불행이 아니고 어떤 영광도 뭐 장난스런 영광이지요. 어떤 큰 위치에 올랐다손 치더라도 하나의 장난이지요. 전부 다가 장난입니다. 그럴 때 기분이 좋지요.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껌뻑 넘어가고 푹 빠져버리면, 좋을 때는 무진장 좋은데 아플 때는 또 무진장 아프지요. 한없이 아프다고요.
그런데 꿈인 줄 알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좋을 때도 가볍게 좋아요, 아플 때도 ‘이까짓 것 꿈인데 뭐’ 하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꿈 속에서 경험해 보면 그건 틀림이 없습니다.
꿈을 꾸면서 ‘아, 이건 꿈이다’ 하는 것을 체험하면, 총을 맞으면서도 ‘이건 꿈이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서 총알을 빼어내는 그런 꿈도 꾸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이러한 법문은 결국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줍니다. 우리 마음자세를 어떻게 갖느냐 하는 거기에 삶의 관건이 달려 있지요.
그래서 제법자성(諸法自性)을 철저히 구경사유(究竟思惟)한다.
아주 깊이 사유한다, 공적(空寂)한 것, 텅 빈 자리임을 사유한다고 했습니다.
실능엄정일체세계(悉能嚴淨一切世界)하며, 그래서 일체 법계를 아주 장엄하고 깨끗하게 한다.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엄정, 아주 장엄하고 깨끗하게 한다. 결국 깨끗하게 장엄한다고 하는 것은 실상(實相)을 꿰뚫어 아는 것이지요. 실상을 꿰뚫어 아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일체불중회도량(於一切佛衆會道場)에, 또 모든 부처님의 모임, 그 모임이 있는 도량을 말합니다. 우리가 모여 있으면 이것이 바로 일체 중회도량이에요. 대중들이 모여 있는 도량이지요.
심무소착(心無所着)하고, 모였다 하더라도 집착할 바가 아니지요. 부처님 도량에서 부처님이 직접 법문하는 거기에 참석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집착할 바가 없는 거지요.
그것 역시 꿈이 아닐 게 뭡니까?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꿈이에요. 거기에 참석을 해요, 참석을 하지만 꿈인 줄 알기에 집착하는 바가 없는 거지요.
우리는 과거 어떤 과분한 모임 자리에 한 번 갔으면 평생을 두고두고 이야기꺼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만약 정말 부처님회상에 참석을 했다면 평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에요.
불착유위(不着有爲), 꿈과 같고 환상과 같은 그런 유위이기 때문에 심무소착(心無所着)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지요.
이렇게 하면서
점차남행(漸次南行)하야, 선재 동자가 점점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가지요. 그래서 어디까지 갔느냐?
지자재성(至自在城)하야 구멱미가(求覓彌伽)하니라, 자재성에 이르러 미가장자를 이렇게 찾아다녔다.
앞에 선지식이 자재성에 가서 미가장자를 찾아보라, 그럼 틀림없이 너에게 좋은 가르침을 내릴 것이다, 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에 그대로 한 것이지요.
2. 見敬諮問
乃見其人이 於市肆中에 坐於說法師子之座하사 十千人衆의 所共圍遶로 說輪字莊嚴法門하고 時에 善財童子가 頂禮其足하며 遶無量帀하고 於前合掌하야 而作是言호대 聖者여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而我未知菩薩이 云何修菩薩行이며 云何修菩薩道며 云何流轉於諸有趣호대 常不忘失菩提之心이며 云何得平等意하야 堅固不動이며 云何獲淸淨心하야 無能沮壞며 云何生大悲力하야 恒不勞疲며 云何入陀羅尼하야 普得淸淨이며 云何發生智慧廣大光明하야 於一切法에 離諸闇障이며 云何具無碍解辯才之力하야 決了一切甚深義藏이며 云何得正念力하야 憶持一切差別法輪이며 云何得淨趣力하야 於一切趣에 普演諸法이며 云何得智慧力하야 於一切法에 悉能決定分別其義리잇고
그 다음은 견경자문(見敬諮問)이라, 친견을 하고 공경을 갖추고 묻다.
법에 대해서 묻는 그런 내용이 이 단락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내견기인(乃見其人)이, 미가장자를 찾다가 이에 보았다.
미가장자가
어시사중(於市肆中)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시중에, 자리 사(肆) 자에요.
좌어설법사자지좌(坐於說法師子之座)하사, 설법하는 사자자리에, 설법하는 법상에 턱 앉아 계시사
십천인중(十千人衆)의, 천이 열이니까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소공위요(所共圍遶)로, 죽 둘러쳐 가지고서 말하자면 미가장자가 설법을 하는데 그 설법을 듣기 위해서 대중이 그렇게 모여 있고,
미가장자가 설법을 하는데 뭘 하는고 하니,
설윤자장엄법문(設輪字莊嚴法門)하고, 윤자장엄법문(輪字莊嚴法門)이라고 하는 것을 설하고 있더라. 이것은 비로자나경(經)에 나온다고 합니다. 윤자(輪字)라고 하는 것은 범어로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는데 바퀴 륜(輪)입니다.
부처님의 법의 바퀴를 법륜(法輪)이라고 하지요. 바퀴는 말하자면 본래는 전쟁에 쓰는 큰 무기에 해당되는 그런 거대한 바퀴입니다. 그것을 높은데서 돌을 굴리듯이 굴려버리면 거기에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그런 무기였는데 부처님의 법의 바퀴를 거기에다 비유를 합니다.
그 법의 바퀴를 만나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 부처님의 교화의 덕을 입는다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요.
그리고 또 윤전(輪轉)이라고 할 때는 말하자면 생사를 윤회하는 그런 의미가 또 있어요.
윤자장엄법문을 미가장자가 설하고, 시에 설하는 것을 보고, 경(敬) 자를 거기다 새기지요. 그런 것을 보고는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그때 선재동자가 그 분 앞에 떡 나아가서
정례기족(頂禮其足)하며, 발에다 이마를 조아려서 예배를 올리고
요무량잡(遶無量帀)하고, 한없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어전합장(於前合掌)하야, 그 사람 앞에 합장하고 서 가지고서
이작시언(而作是言)호대, 이런 말을 했다.
성자(聖者)여, 성인이시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나는 이미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습니다. 보리심을 발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발심을 했다는 거지요.
이아미지보살(而我未知菩薩)이, 그러나 나는 아직 이런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운하수보살행(云何修菩薩行)이며 운하수보살도(云何修菩薩道)며,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또 어떻게 보살도를 닦고
운하유전어제유취(云何流轉於諸有趣)호대, 또 어떻게 하면 모든 존재의 갈래에 흘러 다니고 유전하되
상불망실보리지심(常不忘失菩提之心)이며, 항상 보리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말이지요. 지금 우리가 하루 24시간 중에 여덟 시간을 잠을 잤다고 합시다. 잠자는 그것도 제유취(諸有趣) 중의 하나예요. 여덟 시간이 삶의 제유취 가운데 하나야.
그럼 식사를 한다고 합시다. 식사를 하는 것도 제유취 중에 하나지요.
하루 24시간 중에 우리가 흘러 다니는, 유전하는 그 갈래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행히도 오늘은 법문하고 공부하는 데 이렇게 흘러 왔어요. 잘만 흘러 다니면 또 그러는 수도 있어요.
그런데 잘못 흘러 다니면 이 좋은 시간에 엉뚱한 곳에 흘러가 있는 수가 있지요. 그게 제유취(諸有趣)라.
우리가 죽어서 지옥 · 축생 · 아귀 · 아수라 · 인도 · 천도를 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죽어서 어딜 가든지 말든지 그거 지금 우리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살아서, 아니 오늘 하루 중에, 아니면 한 달 가운데서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저기에 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루 중에서도 이 시간에는 여기, 저 시간에는 어디, 24시간 중 매 시간마다 우리의 관심사가 다르고 집착하는 데가 다르고, 가는 장소가 다르고, 만나는 사람이 다르지요.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 되는 상황이 또 다르지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런 여러 상황들이 다 제유취(諸有趣)예요. 여러 가지 존재의 갈래이지요. 이것이 또 전혀 엉뚱한 데에는 안 가지지요. 작더라도 자기와 만 분의 일이라도 인연이 있어서 오게 된다고요.
그 인연이 좋은 인연 같으면 잘 키워나가야지요. 만 분의 일의 인연이 천 분의 일이 되고, 백 분의 일이 되고 십분의 일이 되고, 그래가지고 자기의 인생의 길로 그렇게 만들어 갈 수가 있지요.
또 안 되는 인연도 그래요. 한 번 어쩌다가 만 분의 일로 안 좋은 것과 인연이 되었을 때 그것을 막 키워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을 성장을 시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서는 자기 인생 중에서 나쁜 것을 크게 만들어 놓는 그런 사람도 있고 그래요.
우리가 살면서 어떤 인연을 어떻게 키워가야 하는가를 부처님 법문을 배우면서 스스로 생각해서, 말하자면 잘 가려서 흘러가도록, 유전(流轉)하도록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요.
유전어제유취(流轉於諸有趣)라는 이것만 가지고 이야기 하며는 그런 일도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가면 그런 일을 해야 되지요.
아무리 거역할래야 거역할 수 없는 그런 일상사가 또 있지요. 상불망실보리지심(常不忘失菩提之心)이라, 보리심을 잃지 말아라.
우리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 별별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하루가 그렇고 한 달이 그렇고 일 년이 그렇고 일생이 그렇습니다. 그런 고약한 삶 속에 흘러 다니더라도 상불망실보리지심(常不忘失菩提之心)이라, 보리심을 잃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느냐? 이게 말하자면 선재동자가 미가장자에게 질문한 내용 중의 하나이지요. 참 중요한 말입니다. 할 수 없이 사업을 해야 되고, 장사를 해야 되고 또 별별 사람을 만나야 되지요. 그럴 때 정말 바람직한 마음을 잃지 않는 도리가 무엇이냐는 거지요.
운하득평등의(云何得平等意)하야, 어떻게 하면 평등한 뜻, 평등한 마음을 얻을 수 있느냐?
이것도 사실 우리에겐 어렵지요? 평등한 마음을 얻어서
견고부동(堅固不動)이며, 그것을 굳게 굳게 가져가서 움직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아무리 평등하게 가지려고 해도 금방 또 어떤 상황에흐르고 인정에 흐르고, 자기와 인연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 거기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그렇지요.
운하획청정심(云何獲淸淨心)하야 무능저괴(無能沮壞)며, 어떻게 하면 청정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얻어 가지고 그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가 있으며, 라고 또 하나를 물었고
운하생대비력(云何生大悲力)하야, 큰 자비의 힘을 내어서
항불노피(恒不勞疲)며, 항상 피로하거나 싫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는 피로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노피라고 했어요.
좋은 마음을 한 번 내기는 쉬워요, 그런데 그것을 계속 내고 있으면서도 싫증을 안 내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루에 한 두 번이야 부처다운 생각을 모두 하지요, 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되고 또 지속되는 것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피로해하지 않는 이런 자세가 이제 어려운 것이지요.
운하입다라니(云何入陀羅尼)하야 보득청정(普得淸淨)이며, 어떻게 하면 다라니, 총지(叢智), 모든 뜻을 다 기억해 가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청정함을 얻을 수 있느냐.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느냐.
운하발생지혜광대광명(云何發生智慧廣大光明)하야, 어떻게 하면은 지혜의 광대한 광명을 발생해서,
지혜는 광명이지요. 광명도 지혜를 뜻하는 것이라고 제가 늘 말하지요. 그것도 이제 큰 광명의 지혜를 발생해서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이제암장(離諸闇障)이며, 일체의 법에서 모든 어둠의 장애를 떠날 수 있느냐.
그러니까 광명과 어둠, 지혜와 삶의 장애인 고통과 문제는 늘 함께 합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빛하고 어둠 이것은 늘 따라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에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이 바로 그거지요.
보살(菩薩)이 심주어법(心住於法)하여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입암(如人 入闇) 즉무소견(則無所見)이라, 만일 집착을 해 버리면, 어떤 사람이 깜깜한데 들어가서 아무 것도 못 보는 것과 같다.
심부주법(心不住法) 이행보시(而行布施) 여인(如人) 유목(有目) 일광명조(日光明照) 견종종색(見種種色)이라, 만일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활을 할 것 같으면 태양도 밝아지고 눈도 밝아져서 뭐든 사물을 환히 분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차가 오면 차를 피할 수가 있어요. 자기 앞으로 와도 피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눈이 어두우면 가만히 서 있는 차에 제 발로 가서 부딪쳐서 머리가 깨진다고요. 그런데 눈이 밝으면 오는 차도 피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항상 광명(光明), 광명 하시면서 지혜를 강조하고 광명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시는 겁니다. 광명은 우리 마음의 빛이니까요.
그래서 여기서도 암장(闇障)이라는 말을 썼지요.
우리가 어떨 때 상처를 받았다면 내가 어두웠고, 어두웠기 때문에 다칠 수밖에 없었어요.
마음을 다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천만에요. 달려오는 차도 피할 수가 있는데 눈이 밝고 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어요.
말은 쉽지만 당하면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문을 마음 속에 늘 깊이 새김으로 해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어려운 상황에서 좀 더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 자세를 준비해 둬야지요.
나는 끄떡없다고 하지만, 아 끄떡없으면 좋지만 그러나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서 지혜의 마음을 항상 갈고 닦아 놓는 게 필요합니다.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이제암장(離諸闇障) 모든 법에서 어둡고 장애되는 것을 떠나며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운하구무애해변재지력(云何具無碍解辯才之力)하야 결료일체심심의장(決了一切甚深義藏)이며,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떻게 하면 걸림 없는 이해의 변재의 힘을 갖춰가지고서, 걸림 없이 이해하고 걸림 없이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갖춰 가지고서, 매우 깊은 진리의 법장(法藏),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의 내용들을 결요(決了), 시원스럽게 막힘없이 해결할 수가 있느냐.
그렇게 해결하려면, 예를 들어서 경전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해 놨다면 바로 걸림 없이 이해를 해야 해요, 또 이해만 하고 설명을 못해 답답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무애해변재(無碍解辯才), 걸림 없는 이해와 걸림 없는 변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말도 필요해요.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말솜씨는 필요한 겁니다. 그냥 뺀지르르 하게 남한테 사기 치는 그런 말을 잘 해야 된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변재는 필요하다는 겁니다.
무애해는 자기가 이해하는 것이고 변재는 그것을 설명해 주는 그런 힘을 갖춰가지고서 경전의 깊은 뜻, 부처님이 말씀하신 깊은 뜻, 아니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삶의 이치, 생활의 모든 이치라고 해도 되겠지요. 일체심심의장(一切甚深義藏)이라는 것은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이치를, 운하구무애해변재지력(云何具無碍解辯才之力), 어떻게 하면 막힘없이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느냐.
운하득정념력(云何得正念力)하야, 어떻게 하면 바른 생각의 힘을 얻어서. 이건 또 바른 기억의 힘이라는 뜻도 돼요. 정념 할 때의 념(念)자는 기억한다는 그런 의미가 많아요. 바르게 기억하는 것. 전화번호 하나도 바르게 기억을 해야지, 만약 엉뚱하게 기억을 하면 전화 한통화가 날아가는 거요. 미련한 사람은 딴 데 또 건다. 자기가 기억을 잘못했다 싶으면 정확하게 알아가지고 걸어야 할 텐데 무턱대고 막 걸지요. 걸어가지고는 대여섯 통화는 그냥 날려버리지요.
정념력(正念力), 바른 기억의 힘이란 중요해요.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적당히 듣고는 거기다 또 자기 생각을 붙여가지고는 선전을 하고 그러지요. 참 중생들이 그러고 보면 재미있어요.
억지일체차별법륜(憶持一切差別法輪)이며, 억지(憶持), 기억해서 가진다.
바른 기억의 힘을 얻어가지고서 일체 차별 법륜, 금강경이 이렇고, 화엄경이 어떻고 법화경, 천수경, 반야심경이 어떻고 일체 차별법륜이 그거예요.
그 전에 금강경 할 때와는 또 다르고, 임제록 할 때와는 또 다르고, 다르면서도 뭔가 통일성이 있어요. 그러나 그 다른 것을 우리가 알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체차별법문이란 게 그겁니다. 그것을 억지(憶持), 기억해 가진다.
무책임한 불자들은 보면 아이고, 기독교나 불교나 그게 그거다, 비슷비슷하다고 하고 좀 더 나가면 똑같다고 그래 버린다고요. 불교 안에서도 별 별 차별한 이야기가 수두룩한데 어째서 불교가 기독교하고 같으냐는 거지요.
앞산하고 뒷산하고 같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앞산과 뒷산은 천지차이예요. 앞산은 어디까지나 앞산이고 뒷산은 뒷산이지요. 모양도 다르고 다 달라요.
눈이 와보면 알아요. 눈이 온 날 눈을 떠보면 모든 것이 차이가 난다고요. 예를 들어서 집을 제 자리에 앉혔다면 앞산이 북쪽이 되면 뒷산은 남쪽이 된다고요. 남쪽으로 집을 앉히니까요. 그러면 뒷산 눈은 다 녹았는데 앞산은 눈이 아직도 허옇게 쌓여 있거든요. 자기 집 뒷산은 잎이 다 피었는데 앞산은 아직 잎이 필 생각도 안한다고요.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도 그게 똑 같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그런 것을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는 것을 알기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정념력(正念力)을 얻어서, 바르게 기억하는 힘을 얻어서라고 했습니다.
요즘 애들은 보면 어른들보다 많이 발전했어요, 궁금한 것은 그냥 덮고 못 넘어가지요. 옛날사람들은 그냥 대충 넘어가 버린다고요, 그러니 아는 것이 적지요.
요즘 애들은 조금만 궁금해도 그저 부모에게 따지고 묻잖아요. 자기가 납득이 되는 해답을 얻은 그때서야 물러선다고요. 그건 어떻게 보면 좋은 습관이지요.
바르게 기억하는 힘을 얻어서 일체차별법륜(一切差別法輪)을 억지(憶持), 기억해 가지며
운하득정취력(云何得淨趣力)하야, 정취력(淨趣力)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한 내용 중 여러 가지 제취(諸趣)에 나아간다는 말이 있었듯이 아주 훌륭한 갈래, 훌륭한 갈래의 어떤 힘, 말하자면 좋은 환경에 대한 힘이 있으면
어일체취(於一切趣)에, 모든 다른 그 보다 좋지 않은 환경에 대해서 보연제법(普演諸法)이라, 여러 가지 법을 능히 연설할 수가 있으랴.
예를 들어서 정취력(淨趣力)을 사람이 사는 단계라고 합시다. 사람의 단계가 사실 정취력이지요. 사람이니까 다른 축생이라든가 아귀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 말할 건덕지가 되지요, 축생으로 우리가 태어나면 사람에게 어떻게 뭐라 할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힘이 안 되는 거예요.
정취력(淨趣力)이라는 게 그런 겁니다. 좋은 자리, 사람의 자리이지요.
또 사람도 천차만별이지요. 지혜가 있고 부처님 같은 그런 스승님 아래서 공부를 해야 그보다 낮은 단계의 사람들, 낮은 단계의 기호와 낮은 단계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뭔가 이야기 할 꺼리가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순 엉터리 가르침에 의해 생활했던 사람들은 불자들 만나서는 할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왜냐? 자기 지식이 짧으니까요.
자기 견문이 좁고 지식이 적고 지혜가 그것뿐인데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뭔 이야기를 하겠어요. 정취의 힘을 얻어가지고서는 다른 갈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연제법(普演諸法)이라, 널리 모든 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생쯤 되면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초등학생에게 뭔가 이야기 할 꺼리가 있겠지요. 그러나 초등학생이 되어가지고는 대학생에게 뭔 이야기를 하겠어요. 고등학생에게도 이야기 할 게 없고, 중학생에게도 이야기 할 게 없어요. 대학생쯤 되어야 저 밑에 있는 고등학생, 중학생에게 이야기 할 것이 있지요.
보연제법(普演諸法)이란 말이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등한 면은 물론 평등한대로 있지요. 그러나 요는 차별된 것이 문제이니까요.
사람 사람들이 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기상천외(奇想天外하)게 차별되어 있어요. 별 차이가 많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너무 커요. 잘 들여다보면 전부 특별해요, 전부 특별합니다. 여러분들의 식구들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구 우리집 애는 특별해, 특별해.” 하시지만 우리집 애만 특별한 게 아니라 딴 집 애도 특별합니다. 다 특별하다고요. 왜 자기 아이들은 특별한지를 압니까? 자세히 아니까요. 자기가 낳고 자기와 같이 생활을 하니까 너무 잘 알아. 너무 잘 아니까 너무 특별한거야. 남의 집 애는 그렇게 잘 알 수 없지요. 모르는 거예요. 모르니까 평범한 거예요. 그런데 그 아이의 어머니는 또 자기 아이는 너무 특별한 거야. 왜냐? 속속들이 잘 아니까 특별하지.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은 전부 특별합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특별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면요. 아주 기상천외할 정도로 특별해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아는 그 세계는 잘 아니까 특별하다, 특별하다 하는데, 다 특별해요.
부처님의 경전을 가만히 보면 다른 존재의 이야기를 많이 해 놨거든요. 모든 존재가 다르고, 사람 사람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다른 것을 우리가 어떻게 수용해야 하느냐가 인생의 제일 큰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다 기상천외(奇想天外)할 정도로,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일단 우리가 감안하고 사람을 대해야 되는 거지요. 그 기상천외할 정도로 다른 존재를 내가 얼마만치 이해하고 얼마만치 수용할 것인가, 이게 이제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 제일 큰 관건이 됩니다.
운하득지혜력(云何得智慧力)하야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어떻게 지혜의 힘을 얻어서 모든 법에 있어서
실능결정분별기의(悉能決定分別其義)리잇고, 다 능히 결정코 그 도리를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럴 때의 의(義) 자는 진리, 또는 이치, 도리, 그런 뜻이 됩니다. 그 이치, 그 도리를 잘 분별할 수가 있습니까.
이 지혜력이 없으면 모든 법에 있어서 그 이치를 분별할 수가 없지요.
오늘 배운 내용은 선재동자가 묻는 일 중에서 상당히 많은 내용이지요.
선재동자만 궁금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큰 과제가 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선재동자가 지적을 했습니다.
첫댓글 바르게 기억하는 힘을 가지고 싶습니다. ^^ 잘 읽고 갑니다.()
은우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離慾 不着有爲 定進바라밀... 고맙습니다. _()()()_
그러니까 부처님의 이러한 법문은 결국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줍니다. 우리 마음자세를 어떻게 갖느냐 하는 거기에 삶의 관건이 달려 있지요._()()()_ 고맙습니다 _()_
歎離欲性해서 念善知識하며 普照三世하야...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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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읽습니다. 고맙습니다. ()()()
보살(菩薩)이 심주어법(心住於法)하여 이행보시(而行布施)하면 여인입암(如人 入闇) 즉무소견(則無所見)이라, 만일 집착을 해 버리면, 어떤 사람이 깜깜한데 들어가서 아무 것도 못 보는 것과 같다.......고맙습니다._()()()_
云何流轉於諸有趣호대 常不忘失菩提之心이며... 어떻게 하면 모든 존재의 갈래에 흘러 다니고 유전하되 항상 보리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며...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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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착유위(不着有爲),심무소착(心無所着)......유위에 집착하지않고,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은우님,고맙습니다_()()()_
○다섯 번째 선지식[ 第四 생귀주선지식(生貴住善知識)] 미가장자(彌伽長子) =>○성자(聖者)시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호니 : 나는 이미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습니다마는 ○이아미지보살(而我未知菩薩)이 云何修菩薩行이며 云何修菩薩道 입니까? : 저는 모르고 있나니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또 어떻게 보살도를 닦습니까?
1.云何流轉於諸有趣호대 常不忘失菩提之心이며 : 어떻게 하면 모든 존재의 갈래에 흘러 다니고 유전하되 항상 보리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2.云何得平等意하야 堅固不動이며 : 어떻게 하면 평등한 뜻[마음]을 얻고 그것을 굳게 가져서 움직이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3.云何獲淸淨心하야 無能沮壞며 : 어떻게 하면 청정한 마음을 얻고 그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4.云何生大悲力하야 恒不勞疲며 : 어떻게 하면 큰 자비의 힘을 내어서 항상 피로하거나 싫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5.云何入陀羅尼하야 普得淸淨이며 : 어떻게 하면 모든 뜻을 다 기억해 가질 수 있는 그런 마음[총지(叢智)]의 세계에 들어가서 청정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6.云何發生智慧廣大光明하야 於一切法에 離諸闇障이며 : 어떻게 하면 지혜의 광대한 광명을 발생해서 일체의 법에서 모든 어둠의 장애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7.云何具無碍解辯才之力하야 決了一切甚深義藏이며 : 어떻게 하면 걸림 없이 이해하고 걸림 없이 설명할 수 있는 힘을 갖추어서 매우 깊은 진리의 부처님 가르침[法藏;決了]을 시원스럽게 막힘없이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8.云何得正念力하야 憶持一切差別法輪이며 : 어떻게 하면 바른 생각의 힘[바른 기억의 힘]을 얻어서 일체차별법륜(一切差別法輪)을 기억해 가질 수가 있습니까? 9.云何得淨趣力하야 於一切趣에 普演諸法이며 : 어떻게 하면 훌륭한 갈래의 어떤 힘을 얻어서 모든 환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법을 능히 연설할 수가 있습니까? 10.云何得智慧力하야 於一切法에 悉能決定分別其義리잇고 : 어떻게 하면 지혜의 힘을 얻어서 모든 법에 있어서 다 능히 결정코 그 도리[義, 진리, 이치]를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_()()()_
감사합니다
기상천외할 정도로 다른 존재를 내가 얼마만큼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어떻게 하면 밝은 마음을 계속 지킬수 있겠습니까? 집착을 하면 깜깜한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과 같고, 어디에도 집착않는 생활을 하면 밝아져 모든 사물을 환히 분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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歎離欲性이라,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이욕(歎離)의 성품, 욕심투성이이지만 그 속에 있는 욕심 없는 마음을 자꾸 찬탄하는 겁니다. 찬탄하면 그것이 자라나요, 자라나서 욕심은 조그만해지고 욕심이 없는 청정한 마음은 커지는 거지요. 그렇게 수행해 나가는 거예요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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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욕심을 떠난 성품의 세계를 자꾸 들추어내고 찬탄해야 그것이 드러난다
-歎離慾性
--좋은 면을 장려하고 일깨우는 것이 불교다
--욕심 투성이 인간이지만 마음속의 욕심 없는 자리를 자꾸 찬탄하면 욕심은 줄어들고 밝은 세계가 성장한다
선재 동자는 유위에 집착하지 않고 제법의 실상-공을 깊이 사유했다
--현실에 허둥대더라도 :아 이것은 꿈이다:라고 하면 홀가분하고 기분좋게 인생을 살 수 있다
-무서운 꿈을 꾸어도 꿈인줄 알면 놀라지 않듯이
꿈인 줄 알면 아플 때도 덜 아프고 좋을 때도 푹 빠지지 않는다
일체 세계를 장엄한다는 것-일체 세계를 꿰뚫어 아는 것-제법 실상,공을 아는 것
일상 생활중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보리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究竟思惟諸法實相
常不忘失菩提之心
나무 입법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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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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