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개신교는 금교령과 영아소동 등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복음 전파의 장애 가운데서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에 한국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성장에 고무되어 기왕에 중시되었던 순회전도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당시 전도여행은 결코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참으로 힘겹고 고된 여행이었다. 하지만 전도여행만큼 중요한 교회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지적한 것처럼 첫 선교사들이 수행한 긴 순회 전도여행이 중요한 선교사역 정책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장·감 선교사들의 순회 전도 노력에 힘입어 1880년대 말 복음은 전국적으로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다.
1. 순회전도
1)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후 북부지역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 조용히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복음을 전해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맺었고, 다시 언더우드와 다른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조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해서 한국의 복음화는 주로 한국인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것은 1893년 제1회 선교사 공의회가 한국선교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채택한 10개의 선교 정책 가운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선교 정책은 노동자계급에 우선 전도할 것, 가정주부의 개종을 중요시할 것, 지방도시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교육을 실시할 것,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유의할 것, 성서 역간에 힘쓸 것, 모든 종교 서적을 한글로 출판할 것, 자급·자치의 교회를 만들 것, 신자
는 누구나 전도자가 되게 할 것, 의료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료하여 환자를 감화시킬 것, 그리고 지방 환자의 경우 왕진의 기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할 것 등 민중을 대상으로 한 선교 정책이었다.
처음부터 복음이 한국인에 의해 저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은 신학적인 훈련을 먼저 마친 후 임명하는 과정을 취하지 않고 임명한 후 훈련시키는 과정을 밟았다. 이와 같은 순서는 본래 전통적인 장로교의 입장은 아니었다.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의 과정에서 감리교가 사용했던 순회전도사 제도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도입한 것
이었다.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2년 전도구역을 세분하여 의주 전도사 김관근에게 평안북도 일대를 그리고 평양 한석진에게는 평안남도 일대를 관할하도록 맡겼다. 이들은 초기 한국교회의 설립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를 충실하게 실행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를 실시한 것은 감리교도 마찬가지였다. 감리교는
1888년 강재성, 조한규를 전도사로 임명하여 조한규에게는 배재학당의 파견근무를 맡겼고 강재성에게는 지방 전도사업을 맡겼다. 특히 강재성은 1892년 인천 전도사로 파견되어 인천교회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복음은 한반도 전역에 놀랍게 저변 확대되어 나갔다. 선교지 분할 협정이 비교적 충실하게 수행되어 남·북감리교가 서울을 거점으로 제물포, 수원, 송도, 원산, 원주 등 경기 중부와 충청남북 지역으로 선교를 확대해 나간 반면, 남·북, 호주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는 서울, 대구, 부산, 전주를 비롯한 남부 전역과 소래, 의주, 평양, 원산을 거점으로 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북부 전역에 널리 복음을 전했다.
(1) 북부지역의 복음 전파
한반도의 북부에 복음의 확장이 급속히 진행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에 의한 복음의 준비와 그 결실 때문이었다. 또한 북부지역의 복음의 확장을 가져다준 두 번째 이유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소래와 평양을 비롯한 상당수의 관서 지방에서 그 전쟁의 피해는 대단히 컸다. 일본과 청나라,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격전지가 주로 북부지역이었고, 때문에 이들 지역에는 전쟁의 상처가 깊게 패여 있었다. 전쟁의 공포와 상처는 지역 주민들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복음의 문을 여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더구나 전쟁의 피해 속에서도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했던 선교사들로 인해 민중은 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북지역에 복음을 확산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이들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국내의 어느 다른 지역에서보다 부흥운동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장로교와 감리교 모두 마찬가지였다. 개척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물론 평양, 의주, 선천, 재령에 정착한 맥코믹신학교 북장로교 선교사들, 원산에 거점을 마련한 로버트 하디와 저다인 그리고 개성에서 사역하던 남감리교 크램, 스톡스, 갬블, 리드 모두 뜨거운 부흥운동의 열정을 소유한 이들이었다. 원산에서 활동하는 한국침례교의 아버지 펜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후에 입국한 동양선교회도 부흥운동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이 지역의 복음의 확장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친히 역사를 이끌어 가셨는가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① 의주 지역 순회전도
의주와 평양과 소래는 타 지역에 비해 선교사들의 순회가 잦고 비교적 두드러진 성장을 이룩한 지역이었다. 의주는 조선과 중국이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조선과 청국의 밀접한 관계상 청국에 인접한 의주는 오랫동안 중요한 국경도시로 자리잡아 왔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던 중국과 접촉이 많았고, 그 중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오랫동안 접촉한 이들도 있었다. 의주 출신 이응찬이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난 후 같은 의주 출신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포함한 네 사람이 1876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의 동료 존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1883년 백홍준이 자신의 고향 의주로 돌아와 권서인 겸 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의주에는 일찍이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1888년 11월에는 아펜젤러가 북부지역을 순회전도하면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가서 백홍준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박상모, 송상하 두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때 아펜젤러는 의주에서 1명의 세례교인과 14명의 학습교인을 얻어 감리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 교회 건물로 사용할 집도 구입했다. 이들 외에도 당시 의주에는 여섯 명의 장로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 의주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어느 지역보다도 높았다. 1888년 11월 25일에는 감리교가 지방 전도사로 두 명을 임명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부부가 신혼여행의 일환으로 송도, 소래, 평양, 강계, 의주를 여행하면서 2개월 동안 600명의 환자들을 돌보았다. 비록 이 여행은 동료들도 반대할 정도로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다행히 언더우드 부부는 한국 정부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행 허가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1889년 4월 27일 신혼여행 중 의주에서 세례받기를 지원하는 자들 백여 명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언더우드
는 한국 안에서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여행증명서에 기록된 규칙대로 국내에서 이들에게 세례예식을 시행하지 않고, 세례 지원자 100여 명 가운데 김이련, 김관근 부자를 비롯 33명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데리고 가 그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도 거행했다. 언더우드에게 100여 명이 세례를 지원했고, 그 중에서 무려 33명이나 한 번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 그리고 이성하, 백홍준이 뿌린 복음의 씨가 얼마나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선교사들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다가 1891년 5월 마펫이 동료 선교사 게일과 전도인 정공빈, 최명오를 동반하고 관서를 순행하면서 송천을 거쳐 8월에 평양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고, 의주에 도착하여 지방을 시찰하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압록강을 넘어 봉천에 이르는 1,400마일의 긴 전도여행을 강행했다.
이 여행에서 마펫과 게일은 1889년 언더우드가 33명에게 세례를 주었던 의주에서 2년 동안 선교사의 지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공동체가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했고, 또한 봉천에 가서 한국선교의 개척자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며 서로 간의 깊은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 선교사들의 놀라운 복음의 열정, 선교적인 잠재력을 확인한 로스는 1892년 의주 청년들을 통해 이미 많은 결실로 이어진 자신의 한국인 선교사역을 한국 북장로교 선교회로 이첩시켰다.
이처럼 1891년의 전도여행은 북부지역 선교 확장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마펫과 게일은 만주의 봉천에서 다시 동만주까지 전도여행을 계속해 한국인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고려촌을 순방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함흥에 들렀다. 서북 각 도와 만주 각 현까지 순찰하고 지방 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등 그 여행은 기대 이상의 성적을 얻은 전도여행이었다.
의주 지역에 복음이 놀랍게 확장되자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의주에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전도인의 주택 겸 본부로 쓰면서 순회하는 선교사들의 임시 숙소로도 사용했다. 1892년 빈톤(C. C. Vinton)과 함께 의주를 방문했을 때 마펫은 한석진, 김정현, 김석례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평양에 새 선교부를 개설할 계획 하에 이 중 한석진을 평양에 거주하도록 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1896년까지 마펫이 평양에 거주하면서 의주를 순회하다 휘트모어(N. C. Whittemore) 선교사가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 의주는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주 순방하는 북장로교 선교회의 거점이 되었다.
(2) 평양에서의 복음의 확장
선교사들에게 평양은 여러모로 관심의 대상이 된 지역이었다. 첫째로 평양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땅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관심이 집중된 도시였다. 둘째로 평양은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도시로 불렸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이래 평양은‘한국의 소돔’,‘ 한국의 사악한 도성’이라 불렸고, 실제로도 평양에는 건달과 기생들이 많아서
음란하고 부패한 도시로 불렸다. 셋째로 평양은 인구가 10만명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고, 상업적이라서 비교적 번성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다. 넷째로 지리적으로 평양은 서울과 중국 베이징을 잇는 도로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육로 사정도 괜찮고, 해상교통도 편리한 도시였다. 위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선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평양을 관서지방의 선교기지로 삼기 위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했다.
① 장로교의 평양선교
토마스가 1866년 평양 대동강 쑥섬에서 순교한 후 21년의 침묵을 깨고 1887년 4월 24일 북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세관원 헌트(J. H. Hunt)를 대동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였고, 그해 가을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역시 처음으로 평양과 의주를 방문했다. 그리고 1888년 봄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함께 평양에 갔다가 4월 28일의 금교령으로 미국 공사가 갑자기 소환하는 바람에 되돌아와야 했다.
1885년부터 1892년까지 여러 서울주재 선교사들이 그 지역을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전도하고 기독교 서적들을 반포하였고, 1887년과 1889년 2년 사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평양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방문할 정도로 평양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외에도 제임스 홀, 그레이험 리, 사무엘 마펫, 조지 존스를 비롯한 장·감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결혼식 다음 날 아내와 함께 9주간 동안 평양을 포함한 압록강 내륙지역으로 신혼여행 겸 전도여행을 감행하였다. 또한 1890년 1월에 서울에 도착한 마펫은 그해 8월 28일 아펜젤러, 헐버트와 함께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듬해 1891년 5월 마펫은 게일과 함께 소래-평양-의주-봉천-함흥-원산-서울에 이르는 1,400마일의 역사적인 전도여행을 진행하면서 두 번째로 평양에 들렀다. 그 후 마펫은 관서지방 선교부 개설 예정지를 탐색하기 위해 1892년까지 네 차례나 더 평양을 방문하여 정황을 살폈다.
1893년 1월 북장로교 연례회에서는 지리적 여건상 평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의주의 활발한 성장에 힘입어 평양과 의주 어느 곳에 먼저 선교사를 상주시킬지에 대해 고심하다가 평양을 거점으로 삼기로 결정하고, 마펫, 그레이험 리,스왈른을 관서지방의 개척 선교사로 임명하고 평양에서의 사업개시와 점거를 위임했다.
1893년 3월 마펫과 리, 스왈른은 평양으로 떠났으며, 서경조가 자기 대신 천거한 한석진과 함께 평양 사역을 시작하였다. 저들은 평양에 체류한 지 열흘 만에 저들의 목적에 적당하고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가옥을 한석진의 명의로 구입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부동산을 살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리교 선교사도 1주일 전에 가옥 두 채를 한국인의 명의로 구입한 바 있었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가옥을 매입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평양감사는 그 가옥을 원소유자에게 돌려 주라고 명령하였으며, 심지어 집을 판 사람들은 집을 도로 물릴 때까지 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해서 결국 구입했던 집을 물러 줄 수밖에 없었다.
선교의 기지로 활용할 주택 구입에는 실패했지만, 저들의 순회전도는 사랑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가정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랑은 선교사들, 권서인, 복음 전도자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전도 장소였다.
1893년 가을 대동강변에 정착한 마펫은 그해 10월 복음을 전해들은 22명을 대상으로 첫 학습반을 조직하여 성경과 기독교 기본 교리를 가르치고, 그 이듬해인 1894년 1월 8일에 그 중 일곱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처음으로 평양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일곱 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평양에서 제일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영접한 길선주의 절친한 친구 김종섭도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7개월 동안 평양에서 상주하면서 전도한 결과 선교사들의 거처도 마련하고 선교사업도 진척되었다.
② 감리교의 평양선교
1892년 8월에 열린 북감리교 선교사 연회가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박사 부부를 평양주재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면서 평양 선교사업은 새로운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홀의 평양행은 1892년 3월 노블과 함께 평양 지역을 순회전도하면서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홀이 자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혼한 지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홀은 평양주재 선교사로 임명되고 불과 일주일 만에 단신으로 평양을 향해 떠나서 평양 선
교의 개척자가 되었다. 1892년 9월 30일에 평양 시내에 들어가 셋방 하나를 얻어 다섯 주간 동안 체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런 후 서울에 올라와 열흘을 지낸 홀은 12월 5일 그레이험 리와 마펫과 함께 다시 평양에 가서 1893년 2월 기생학교 교사로 쓰이던 권번과 언덕 위에 위치한 행정관의 집을 구입하였으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입주하지 못하다가 그해 말에 입주하여 하나는 선교와 의료사업 목적으로, 다른 하나는 주거목적으로 사용했다.
홀은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헌신적인 의료 사역으로 강퍅한 평양의 민중과 그 지방 행정관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팔매를 던지며 선교 활동을 방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의료 활동에 호의적이었고, 적대감을 갖고 있던 민중들과 감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홀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에 감동을 받았다. 심지어 평양 감사는 서양인을 추방해 달라는 청원을 거절하고 오히려 서양인을 박해하는 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아들 셔우드 홀이 지은‘닥터 홀의 조선회상’에 따르면‘그(제임스 홀)는 하루 50-60명의 환자들을 보고 있다. 의료봉사가 이처럼 커진 것은 평양감사의 덕분이다. 감사는 홀 의사를 쫓아내 달라고 요청한 주민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 외국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사다.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냐? 서울에서도 외국인이 여기에서처럼 병을 고쳐 주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를 겁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외국인은 국왕으로부터 내지(內地)에 여행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으니 누구든지 그를 방해하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관청으로 잡혀 올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홀 의사는 한 3년쯤 지나야 고쳐질 주민들의 거부감이 이렇게 빨리 무마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들 셔우드 홀이 지적한 대로 평양 시료소에서도 닥터 홀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더 잘알게 된다. 그는 조선인처럼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왔고,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받으러 왔다. 어떤 목적으로 왔든 떠날 때는 참으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간직하고 돌아갔다.
의료 사역을 통해 민중과 행정관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다 타고난 성자다운 성품은 평양 사람들의 심령을 옥토로 만드는‘그리스도의 향기’가 된 것이다.
1893년 3월부터 서문통에서 예배를 드리며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착실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그것은 그해 6월부터 널다리골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 장로교에 비해 3개월 앞선 것이었다. 곧 소학교를 개설해 성실한 교사 1명을 확보하고 학생 13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시작했고, 이들에게 아침과 저녁에 교리문답을 공부시켰다. 이 같은 선교의 결실이 있기까지 그 배후에 홀 옆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김창신 전도사, 홀 박사가 개강한 학교의 영어교사 노병선, 홀의 어학선생 황정모, 강서 사람 오석형, 이향선, 김낙선, 박관수, 조한수, 김재선, 주경조, 전용기, 조용순, 전삼덕, 리은성 등 신실한 평신도 동역자들이 있었다.
한편 홀 부인도 남편이 없는 서울에서 열심히 일했다. 홀 부인이 일하고 있었던 보구여관(정동여성전문병원)은 홀 부인이 부임한 이래 날로 번창하여 원근을 가리지 않고 환자들이 몰려왔다. 환자가 너무 많아서 보구여관에 다 수용할 수도 없는데다 멀리서 오는 환자들이 많았으므로 감리교선교회는 1893년 동대문에 분원을 설치하였다. 홀 부인은 그해 3월 15일부터 주 2회씩 이곳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동대문 시료소(이화여대부속 동대문병원의 전신)의 사업도 계속 번창해 갔다.
정동부인병원을 맡아 사역할 후임자가 오지 않아서 신혼이었던 닥터 홀 부부가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지게 되자 닥터 홀 부부와 그들과 한집에 살고 있던 노블 목사 부부가 저축했던 돈을 홀 부인의 후임으로 오게 될 의사의 여비와 일 년간의 체재비로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감리교 선교부에 하게 되었다. 이에 1893년 감리교 선교부의 연례회의에서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닥터 버스티드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정동부인병원(보구여관)에서 홀 부인의 후임으로 일하게 되었고, 닥터 홀 부부에게는 평양개척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해 11월 10일에 홀 부부의 첫 아들이 서울에서 태어남으로써 그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1894년 5월 7일 로제타 셔우드 홀은 5개월 된 셔우드 홀을 안고 평양에 도착하여 남편과 함께 평양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③ 기독교 박해와 평양선교의 위기
•박해의 발단
평양에서의 선교가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1894년 마펫이 미국에서 아내와 어머니를 대동하고 입국한 그레이험 리를 맞이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가고 없는 사이, 5월 8일에 기독교를 반대하는 박해가 발생했다. 김낙구는 평양 감영 직원이었던 아들 김영호를 통해 가족들을 데리고 온 제임스 홀에 대해 음모를 꾸며 평양 감사 신덕균에게, 신덕균은 다시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양인들이 평양에 들어와 이교를 수입하여 다수 양민들을 협잡배로 만들고 있으니 이를 방지해야 한다”며 양인 추방을 건의한 것이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은 명성황후의 종씨 친척관계로 다른 관찰사보다 세력이 막강했다. 민병석은 선교사를 체포하면 국제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지만 한국 교인들을 체포한다면 그 배후의 서양 선교사들을 평양에서 몰아낼 수 있고, 또 이들로부터 돈도 뜯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침 마펫이 조사 한석진의 명의로 대동문 안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하자 선동을 받은 일부 평양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해 선교사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도 발생한 터라 민병석은 그때가 호기라고 여겼다.
•박해의 경과
1894년 5월 10일 새벽 1시에 체포령이 내려져 북감리교 선교사 홀의 조사 김창식, 마펫의 조사 한석진 그리고 한석진에게 집을 판 집주인 등 세 사람이 불시에 체포되었다. 한석진과 일행을 체포한 포졸들은 현장에서 돈을 요구해 최치량이 300냥을 건네 최치량, 신상호, 우지룡, 송인서 4명을 석방했으나 집을 판 홍재응과 한석진을 투옥시키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이날 새벽 2시에 신자 이향선과 오석형이 홀을 찾아와 이 사실을 알렸고, 아침 6시 30분에 홀이 평양감사를 만나려고 찾아갔으나 만나 주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셔우드 홀은‘닥터 홀의 조선 회상’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침 6시 30분에 닥터 홀은 감사와의 면회를 신청했다. 7시 30분까지 기다렸으나 하인들은 감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닥터 홀이 관청에가 있는 사이에 관리들이 찾아와서 엽전 10만 개를 내면 아침에 창식이가 맞을 매를 감해 주겠다고 했다. 나(닥터 로제타 S. 홀)는 그렇게 많은 돈을 집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한테 닥터 홀에게 말하라고 했다. 닥터 홀은 아침 8시에 돌아왔다. 그는 그 사이에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왔다. 창식이는 수갑(칼)을 너무나 조여 놔서 매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씨는 닥터 홀과 함께 집에 왔었는데 닥터 홀이 잠시 집안에 들어간 사이 우리 집 마당에서 군졸들에게 잡혀 갔다. 그는 도둑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혀 있다. 홀은 서울에 있는 닥터 스크랜턴에게 전보를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창식 구금됨. 오씨와 한씨 구타당함. 세 가옥의 전주인 모두 감옥에 구금됨. 이곳 가족과 하인들의 보호 요망.”그리고는 감사와 면담하기 위해 다시 관청으로 갔다. 닥터 홀은 중국 전신소의 영어 통역인과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감사와 면담하는 데 통역을 부탁했더니 그는 고맙게도 응락해 주었다. 닥터 홀은 오전 11시와 오후 2시 사이에 감사를 만나러 갔다.’
닥터 홀이 감사를 만나러 간 사이에 군졸들이 김창식과 오석형을 끌고 홀의 집에 와서 10만 냥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구경꾼들이 북적대는 중에 불쌍한 창식이가 군졸에게 끌려 집으로 왔다. 군졸들은 엽전 10만 개를 내놓지 않으면 또 곤장을 치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조금 있자 오씨도 끌려왔다. 그는 매우 기상이 높아서 관리들이 곧 자기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될 것으로 믿고 있어서 내가 돈을 지불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창식이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는 이미 오씨보다 오래 갇혀 있어서 족쇄와 수갑이 조이는 엄청난 고
통 때문에 용기가 꺾여 있는 듯했다. 오후 1시경에 행정관의 부하 한 사람이 와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그는 한문으로 쓴 종이를 주었다. 에스더(김점동)는 전에 내게 조선인 관리들은 우리가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 종이가 우리를 쫓아내는 명령서일 것으로 짐작되어 나는 문서를 읽을 줄 모르므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문서를 대문에 붙여 놓고 갔다. 닥터 홀의 친구는 그 문서를 번역해 주었다.“ 이것은 감사 다음으로 높은 행정관이 쓴 것으로 이 지역 담당관 김씨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집은 전 주인에게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이는 이미 오래 전에 내렸던 명령이다. 닥터 홀이 그의 아내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은 여기에서 오래 살겠다는 표시다. 그러므로 전 주인은 즉시 이 집을 반납 받으라. 많은 구경꾼들은 큰 환난을 초래한다. 고로 환자들만 그곳에 갈 수 있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근접을 금한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해악이 되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로 설교를 듣지 못한다.”문서에는 관인이 세 개 찍혀 있었다.’
오후 2시에 닥터 홀은 집으로 돌아왔고, 닥터 스크랜턴으로부터 “공사관 움직이겠음. 자세한 말 전보로 불가능”이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에 대해 닥터 홀은“마펫과 나에게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감옥에 갇혔음. 이유 설명 없음. 감사는 면회, 청원, 보호를 거절함. 집을 반납하라는 명령받았음.”이라고 전보를 다시 보냈다.
오후 4시, 닥터 홀은 총영사 가드너 씨로부터“조선 외무관리에게 조선인 하인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전보로 쳐 주기를 요청하겠음. 당신과 당신 가족의 적절한 보호를 요청하겠음.”이라는 전보를 받았다.
감옥에서 일하는 자들이 집으로 와서 다시 돈을 요구했고 돈을 주지 않으면 감금된 사람들 모두 다시 매를 맞을 것이라고 했다. 뒤따라 이 지역 담당관 김씨의 하인이 집으로 와서 대문에 붙여 놓았던 문서를 도로 달라고 요구했으나 닥터 홀이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담당관 김씨가 마치 미친 소가 울부짖으며 땅을 박차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달려와서 펄펄 날뛰다가 박유산(김점동-에스더 김박의 남편)을 보자 그가 의사의 하인 중 한 사람이라며 달려들어 그의 상투를 잡고는 발로 차고 심하게 때렸다. 결국 그 종이를 주자 사탄과 같은 김씨는 만족해서 돌아갔다.
5월 11일 아침 7시, 감사가 보낸 심부름꾼인 담당관 김씨의 아들이 와서 서울에서“닥터 홀은 나쁜 사람이니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오늘 다 참형에 처하라”는 전보가 감사에게 왔다고 전했다.
닥터 홀 일행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김창식을 절도범 감방에서 사형수 감방으로 옮기고는 칼을 씌워 놓았으며, 군졸들은 그를 계속 심하게 매질하고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사 서울에서 전보로 석방 명령이 감사에게 내려진다 해도 석방을 일부러 늦출 승산이 커 보였다. 특히 김창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관리들이 그에게 석방시켜 주면 또 예수를 전하겠는가 물었을 때 그는“석방되어도 계속 예수를 전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오전 9시 이 구역 담당 관리는 우리에게 물을 길어줄 경우 태형을 받을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서 집에 물 공급이 전면 중단 되었다. 사태가 점점 더 급박해져 가고 있을 때, 닥터 홀은 고향에 편지를 보냈다.“ 이제 조선에서 신교가 맞이할 자유의 날이 가까워졌는가 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식 몇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희생에는 충분한 은총
이 따를 것이다.”라는 결연한 내용의 편지였다.
조선 정부의 외무부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전신으로 평양에 발송했으나 이 명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닥터 홀은 이런 상황을 전보로 가드너 영사에게 알렸고, 정부는 평양 관찰사에게“즉시 수감자들을 석방하라. 석방 여부 보고 바람. 만일 석방하지 않으면 책임 추궁이 있을 것임.”이라는 명령을 보냈고, 결국 평양 관찰사는 투옥자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박해 사건의 한국교회사적 의미
박용규 교수는‘한국기독교회사①’에서 평양에서의 기독교 박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유익을 한국교회에 안겨 주었다고 정리하였다.
첫째로 기독교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장·감을 초월하여 선교사들과 선교사들, 선교사들과 한국인 동역자들 그리고 한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신앙적 유대가 이전보다 깊어졌다. 노블이 고백한 대로“조선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업무를 다 제쳐두고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에 모여 기도를 했다. 각자 이 위기가 자신들과 깊이 관련된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둘째로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위기를 방관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처럼 최선을 다해 해결함으로써, 한국인 동역자들에게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 주었다.
이후 한국인 조사들과 전도인들은 선교사들을 더욱 신뢰하고 따랐으며, 후에 김창식은 홀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선교사 없이 평양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 후 평양의 감리교 사역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김창식의 희생과 헌신이 크게 작용했다. 평양 지역의 감리교 선교사역의 성공을 대변하는 김창식은 감리교에서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07년 조지 존스(George Heber Jones)가 말한 대로‘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사가 되었다.’
셋째로 이 사건을 통해 선교사들이나 한국인들 모두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관찰사와 감사가 왕에게 홀과 그 일행이 ‘동학의 일당’이고,‘ 조선의 방방곡곡에 집을 지어서 동학을 돕는다.’고 거짓보고를 했다. 더구나 관찰사 민병석은‘왕비의 친척’으로 대단한 힘을 가진 관찰사였다.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민병석과 감사 신덕균이 좌천되었고, 행정관 김영호, 김낙구도 평양에서 추방당했던 것이다.
그 후 더 이상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거나 투옥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즉시 홀과 마펫이 바라던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④ 제임스 홀의 순교
•청일전쟁과 평양선교
제임스 홀은 스크랜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아내를 데리고 6월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들이 서울에 도착한 후 동학도들의 반란이 발생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계속해서 서울로 들어오고, 청군이 서해안에 상륙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1894년에 호남에서 일어난 동학운동은 전국의 농민들에게 불길처럼 번져갔고, 정부군은 이 봉기를 진압하기에 역부족임을 깨달아 중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반도에 세력을 뻗칠 구실을 찾던 청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3천의 군사를 파견하였고, 청나라와 경쟁을 해오던 일본은 이에 뒤질세라 즉각 7천의 병력과 군함 7척을 보냈다. 이 두 나라의 병력이 한국에 상륙했을 때는 이미 동학란이 평정되고 난 후였으므로 남은 것은 양군의 충돌뿐이었다. 1894년 7월 23일 요란한 총소리가 나더니 서울의 7개 성문이 일본군에 넘어갔고, 궁궐도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감리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은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로 가득 찼다.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홀은 지칠 줄 모르고 이들을 돌보았다. 1894년 9월 15일 큰 전투가 벌어져 평양은 전쟁터로 변했다. 전쟁은 일본군의 승리로 돌아갔고, 곧 일본은 청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평양의 소식을 들은 홀, 마펫, 리는 10월 1일 서울을 떠나 흩어진 양 떼들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평양의 감리교 선교회의 건물은 잘 보존되었으나 장로교에 속한 건물들과 물품들은 완전히 파괴되고 없어 장로교의 동료 선교사들이 닥터 홀의 집에서 거주했다. 10월 8일자 홀의 일기 중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라는 기록은 전쟁의 참상이 얼마나 컸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당시의 참상에 대해 그레이엄 리 목사는‘…이 전쟁터의 잔해 중 어떤 상황은 참으로 몸서리가 쳐진다. 도시 가까이에 있는 시체들은 대개 흙으로 덮어 놓았으나 좀 떨어진 곳에는 그대로 널려 있다. 스무 명 이상의 시체들이 총을 맞아 죽은 상태 그대로 층층이 쌓여 있는가 하면, 어떤 곳에는 만주의 기병과 일본 보병과의 살육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수백 명의 사람들과 말들의 시체가 너비 수십 미터, 길이 수백 미터의 대를 이룬 곳도 있다.
이것은 전투가 있은 지 3주일이 지난 후의 광경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평양에서의 제임스 홀의 순교
이 같은 청일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평양에 돌아온 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평양에서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보면서도 진료사업과 교인지도와 남학교의 재건과 저녁마다 예배 인도하는 일로 밤낮 한결같이 분주했다. 북장로교의 마펫과 북감리교의 홀 그리고 남장로교의 테이트는 평양에 남아서 평양 사람들에게 식량과 필수품들을 보급해 주었다. 박해와 전쟁 속에서도 변함없는 우정과 사랑을 보여 준 선교사들에게 감동되어 가난할 대로 가난한 이들의 심령 속에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닥터 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평양에서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대나무 침대로 환자를 실어 날랐다. 그의 기독교인 동료들은 들것 나르는 일을 맡아 주었다. 그는 학교(학생 13명으로 시작한 광성학교)를 다시 열고 조선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매일 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계속된 강행군으로 닥터 홀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닥터 홀과 함께 있었던 마펫 목사는 그의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지난 해 여러 번 평양을 왕래하면서 너무 심한 혹사를 당해 그의 건강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터였던 이 도시 안팎의 극히 비위생적인 환경에 저항할 힘을 잃게 되었다. 시체가 썩는 냄새, 가축들의 잔해가 곳곳에 널려 있어서 어느 곳으로 가든지 이런 것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악취와 불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들은 말라리아를 앓았다. 닥터 홀의 병세가 더욱 심해져 우리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교통수단을 이용, 서울까지 가도록 조처했다. 우리는 대동강을 따라 65킬로미터 쯤 내려가서 약 6백 명의 병든 군인들을 실은 배를 탔다. 군인들은 이질이나 각종 열병들을 앓고 있었다. 우리를 실은 배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닥터 홀은 열이 다 내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후 발진티푸스에 걸린 모양이다. 제물포에서 하루를 지냈을 때 그의 병세는 상당히 좋아진 것 같았는데 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갈 작은 기선을 기다리는 동안에 다시 열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배는 오후에 출항했다. 어두워질 무렵 강화도 건너편 지점에 도착하였으나 거기서 배가 암초에 걸려 거의 다 뒤집히게 되었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닥터 홀을 해안으로 옮겨놓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조선집 오막살이에 그를 눕혀 두고 돛단배를 찾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배를 구했다. 느린 항진 끝에 서울에 닿은 것은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거기에서 닥터 홀은 아내에게 맡겨졌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다했다. 우리는 그가 회복되기를 기원했다.
1894년 11월 19일 월요일 아침에 닥터 홀은 서울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닥터 홀은“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가 집에 돌아온 첫날은 표정이 밝고 유쾌해 그토록 위독한 병에 걸려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도 열은 섭씨 40도를 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은 옆에 놓아둔 변기에 혼자서 소변을 볼 수가 있었는데 그 다음 날 밤에는 갓난 아기처럼 용변을 가리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수요일 아침에는 연필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노블 씨에게 이번 여행 중에 쓴 비용을 항목별로 알려 주었다. 그 외의 다른 회계 기록은 그의 기록 책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지경에서도 공무에는 철저했다. 공무가 끝나자 그는“이제 죽든 살든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하나님의 뜻이 날 원한다면 더 오래 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마비되어가면서 목의 근육까지도 기능을 잃어갔다. 다섯 명의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려는 것 같아 보였다.…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편안히 잠자기 위해.’라고 홀 부인은 당시 상황을 기록하였다.
닥터 홀이 이 세상을 떠난 후 기록된 노블 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요일,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를 커다란 조선식 관에 넣고는 아름다운 한강의 둑으로 가서 매장했다. 그곳은 잠들기에 평화로운 장소다. 그가 생명을 바쳐 일한 조선 땅, 먼저간 사람들 사이에 묻힌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무엘 마펫이‘한국 교회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던 가장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스러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예찬했던 제임스 홀은 한국선교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1894년 11월 27일, 서울 배재학당 강당에서 노블 목사의 집례로 닥터 홀의 장례식을 치룬 홀 부인은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임신 7개월째의 몸으로 뉴욕 주 리버티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때 홀 부인은 그의 조수로 일하던 에스더 박(김점동)과 박유산을 함께 데리고 가서 에스더에게 의학 공부를 하게 해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가 되도록 도왔다. 1897년 2월 1일에는 홀 기념 병원이 평양에 개원되었다. ‘이 건물은 선교회로부터 아무런 경제적 원조도 받지 않고 고 닥터 홀의 자기 부정과 의사인 그의 아내, 조선의 친절한 친구들, 그리고 고국 친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닥터 폴웰은 조이스 감독과 조선선교회에 보고했다. 홀 부인은 1897년 가을, 조선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한국에 왔으며, 딸 에디스를 잃은 후에도 한국을 위해 43년간(1890-1933년) 봉사하였다.
• 평양 선교의 확산
홀의 죽음이 대변하듯 전쟁의 와중에도 사투를 불사하며 생명을 담보로 한 헌신적인 선교 결과 청일전쟁 후 평양 지역의 교세는 놀랍게 신장하기 시작했다. 1895년 1월 마펫과 리가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한석진을 통해 산 집을 다시 물러야만 했으나 수년 후 이들은 후에 평양의 선교 종합시설이 들어선 80에이커(약 8만 평)에 달하는 참으로 목 좋은 대규모 터를 구입할 수 있었다. 1895년 마펫과 그레이엄 리가 평양으로 돌아오면서 평양의 선교사역은 이들을 통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1895년은 평양의 두 선교사들에게 매우 분주한 한 해였다. 순회 전도여행이 이루어졌고, 기독교 문서들이 보급되었으며, 사경회가 개최되었고, 그리고 복음 듣기를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 해, 1895년 겨울 유명한 작가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가 평양을 방문해 현장을 직접 목도했다. 평양의 선교사역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녀는 그 이듬해, 1896년“내가 지난 겨울 목도하였고, 현재 상당히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평양 선교사역은 지금까지 내가 세계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 목도했던 것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선교사역이다.”라고 자신이 받은 평양 선교사역에 대한 인상을 피력했다.
이어 한 영혼에 대한 사랑, 복음에 대한 열정, 희생적인 봉사정신을 갖춘 탁월한 선교사들이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의료 선교사 웰즈(J. Hunter Wells)가 1895년 10월 평양에 도착해 의료 선교사역을 시작했고, 그 이듬해 5월에는 그레이엄 리와 합류하기 위해 그의 아내와 어머니 웹(Webb Wells)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홀 박사가 세상을 떠난 뒤 김창식이 1년여 동안 그 사역을 관리했다. 선교사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는 북감리교 선교사들이 놀랄 정도로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다. 그러다 1896년 8월 31일 홀과의 우정으로 한국에 파송된 노블과 의료 선교사 폴웰(E. D. Follwell)이 평양에 부임해 홀의 사역을 인계받았다. 노블 선교사 부인이 1897년 11월부터 매년 가을 여자 사경회를 열어 김세디, 김더커스, 노살롬, 김다비다, 이세벨, 리수산나를 비롯한 수많은 전도부인들을 양성해 이들을 통해 황해도와 평안도 전역에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들 전도부인들은 이미 감리교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창식, 황정모와 더불어 황해도와 평안도 선교사역에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평양감리교회의 경우 1896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불과 8개월 만에 교인이 51명에서 263명으로 증가했고, 다시 1898년에는 525명으로 늘어나 새로 교회당을 건축했는데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성장했다. 김세디 전도부인 한 사람의 전도로 예수 믿는 사람의 총수가 수천 명에 달하고 복음을 받고 완전히 그리스도인이 된 남녀 교우의 수를 도합하면 적게 잡아도 칠, 팔백 명이나 되었고, 김더커스를 통해
전도받고 목사, 속장, 권사, 전도사가 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김창식은 48개의 교회를 설립하였고, 황정모도 세 개의 지교회를 설립했다.
(3) 소래에서의 복음 확장
•소래와 매켄지 선교사
의주, 평양에 이어 황해도 소래(松川, 솔내)도 한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초기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서경조와 서상륜 형제가 이곳에 복음을 전한 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캐나다 출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89년 봄 3개월 동안 머물렀음), 말콤 펜윅(M. C. Fenwick, 1891-1893), 그리고 윌리엄 매켄지(W. J. McKenzie, 1894-1895)는 그 대표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소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선교사는 한국교회 토착화의 거보를 내딛었던 윌리엄 매켄지(1861-1895)였다. 그의 희생적인 사랑, 한국인들과의 완전한 동화 그리고 한국인들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소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매켄지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케이프 브레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캐나다 동북의 래브라도에서 개척 선교의 경험을 했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할리팍스의 한 교회에서 인정받는 목회자로 사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 선교지 한국에 대해 접하게 되면서 영적인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에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돈 100달러를 한국을
위한 선교비로 보내고, 자신의 뜻과 희망을 캐나다장로교선교부에 알렸다. 하지만 캐나다장로교선교부는 당시 해외선교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해 왔다. 뜻하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기도 중에 “한국으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만약 캐나다장로교선교부가 재정적으로 그를 후원해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여러 후원자들이 그의 한국선교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그는“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서 그들과 같이 살다가 마지막 나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들과 같이 일하리라”는 결의를 새기며 한국에 들어왔다.
서울 도착 후 그는 선교사들과 교제하며 선교지를 탐방하고, 한국어를 배우다가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를 자신의 사역지로 정하고 그곳으로 갔다. 한국인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소래에 도착한 것은 1894년 2월 3일 금요일이었다.
매켄지는 서경조에게 한글을 배우면서 서양 생활습관을 완전히 버리고 한국인의 생활양식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가 소래에서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은 마태복음 13장의‘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비유였다. 이 말씀을 통해 그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과 준비된 자의 축복에 대해 설교했다. 그는 어떠한 것보다 먼저 순수한 복음을 한국인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소래에 거주하면서 한국식 옷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한국인들과 함께 뒹굴고 호흡했다. 그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보면서 소래 주민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이것은 그가 소래 주민들과 비교적 쉽게 교제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복음을 보다 쉽게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894년 2월 6일 고향의 친구 바빗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제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지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해 주겠소. 나는 지금 솜씨 있게 짠 조선식 카펫인 멍석 위에 앉아 있고 방바닥과 벽은 흙으로, 그리고 지붕은 짚으로 깔려 있다오…내가 먹는 음식이 무슨 음식인지 아오? 래브라도에는 감자와 우유가 있지 않소? 조선은 감자도 우유도 버터도 없는 곳이라오. 나는 벌써 두 주 동안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맛을 보지 못했소. 끼니마다 먹는 것이라고는 마냥 쌀이오.’라고 하였다.
언더우드의 지적대로 매켄지는 소래에서‘자립하여 한국인으로 살고자 시도했으며, 검소한 생활과 인격적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가르치고자 하였던 것이다.’심지어 그는 언더우드의 아내가 만들어 준 서양음식까지 한국생활 적응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한국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또한 매켄지는 성경을 열심히 읽는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한 시간 반씩 성경을 읽어 두 달 만에 구약과 신약을 다 읽을 정도로 성경 읽는 일에 시간과 정열을 쏟았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해서 언더우드와 마펫을 비롯한 한국선교의 개척자들은 매켄지가 독립선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저하지 않고 그를 진정한 동료 선교사로 생각했다.
•동학혁명
매켄지가 만난 가장 큰 시련은 동학운동과 청일전쟁이었다. 소래에 도착해 얼마 후 1894년 봄, 동학운동이 시작되어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소래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본래부터 외세의 간섭을 반대하고 서양문화의 유입을 반대했던 동학과 기독교는 조화를 이루기 힘들었다. 동학군들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교의 교리가 모두 무로 돌아갈 것이며 결국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성경은 미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동학도들은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수십 명이 서경조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동학은 서북지역에서 특히 더 세력을 떨쳐 이 지역 동학도들의 수가 100만 명이나 되었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겨우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1894년 11월 25일 생명의 위협이 있으니 서울로 피신하라는 종용을 받았으나 매켄지는 이를 거절하고 서경조와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교회에 남았다. 1894년 12월부터 동학도들은 거리낌 없이 살인을 행하면서 부유한 자들과, 동학에 비협조적인 주민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그 즈음에 매켄지 선교사는 홀 선교사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매켄지는 큰 도전을 받게 되는데, 자기도 언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결단과 각오를 다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교인들이 동학에 동요되지 않도록 말씀으로 지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동학도들에게서 보호해야 할 이중적인 사명을 잘 감당했다. 동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켄지는 찾아오는 동학군들에게 친히 관용의 본을 보여 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동학도들에게도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매켄지는 기독교 예배당이 다른 신당과 같지 않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모양의 성 조지의 십자가(St. George''''s Cross)를 그린 깃발을 만들어 1894년 12월 12일 수요일,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예배당에 달았다. 이후 이 표식은 한국 전역에서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편화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사랑을 알게 된 동학군들은 그에 대해 우호적인 자세를 갖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동학군의 요새를 찾아가 전투중에 입은 부상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학군 영수와 동학군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이후 동학군 지도자들은 소래를 지나갈 일이 있거나 서울의 소식을 알고 싶을 때는 일부러 그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 결과 소래마을은 주변에서 최고의 안전지대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으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소래교회의 신자라는 것은 신변안전을 위한 보증수표와 거의 마찬가지였다.
서경조의 사랑채에서 모이던 소래교회는 위와 같은 시대적 정황, 매켄지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 흔들리지 않는 서경조의 신앙과 리더십에 힘입어 날로 성장을 거듭하여, 수요기도회에 50명 정도, 주일예배에는 부녀자들만 60명 이상이 모이게 되었다. 해서 1895년 3월부터 순수 한국인의 힘으로 교회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1895년 2월 26일에는 조그만 방에서 아이들을 위해 학교도 시작했다.
•매켄지의 죽음
매켄지는 장연읍과 각처 순회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1895년 5월 17일부터 말라리아가 발병하여 고열과 두통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그의 건강은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상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그 이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4월 22일 마펫에게 보낸 편지에서“당신은 내가 얼마나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아시면 놀랄 것입니다.…약이 다 떨어져 갑니다.”라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4월 하순 혹은 그 이전부터 그의 건강에는 이상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6월 들어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6월 1일 매켄지는“양산을 쓰지 않고 세 발자국만 걸어도 나는 일사병 증세를 느꼈다. 그리고 심한 구토를 했다.”고 했다. 이날 일기에“나는 나의 사명이 커 갈수록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생활을 해 왔다.”고 쓴 것을 보면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 같다.
6월 18일 매켄지는 피곤하고 몸이 아파 키니네 15알을 복용했다. 19일 그의 몸에는 하루 종일 열이 떠나지 않았다. 이날 그는 토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으며,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하루 종일 고통스럽게 보냈다. 6월 20일에는 스스로 병마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6월 23일 매켄지는 그의 어머니에게“나의 마음은 더 이상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6월 24일 주일 아침 매켄지는 생사를 넘나드는 높은 고열 속에‘큰 고통을 겪은 후 아주 갑작스럽게’세상을 떠났다. 서경조에 의하면 고열로 인한 정신착란으로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매켄지는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찾아온 갑작스러운 병세의 악화와 그로 인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매다 정신착란을 일으켜 순간적으로 생명을 끊은 것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소래교회 교우들은 물론 인근에 있는 외인들까지도 애석해 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자살로 마감한 매켄지의 죽음은 그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선교 업적에도 불구하고 덕스럽지 못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인을 사랑하여 한국인과 같이 먹고 자고 입고 생활하며 죽기까지 소래교회를 위해 사랑과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과 그로 인해 소래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해서 저들 스스로의 힘으로 예배당을 신축했으며, 소래교회가 관서지방 복음 확산에 중요한 몫을 감당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매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소래로 달려온 언더우드에 의해 1895년 7월 3일에 소래교회 헌당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언더우드는 소래교회를 맡아 사역하면서 소래 인근의 각 군에 다니며 대사경회를 삼 주일씩 인도하며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소래교회를 거점으로 한 인근 일곱 개 지역에 수십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소래는 관서지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4) 원산에서의 복음 확장
서북지역에서 복음이 조용히 확대되고 있는 동안 원산에서도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원산은 1898년 당시 약 1만 5천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고, 경관이 참으로 빼어나고 수려한 항구 도시였다. 원산항은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0년 일본에 개항했고, 1883년 11월 3일에 다른 나라에도 문호를 열었다. 원산항은 동해안의 가장 멋진 항구요, 한반도의 주도적인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원산은 여러 선교회에서 점거하려고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교 지역이었다. 북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892년 4월에 게일을, 1894년에 스왈른(W. L. Swallen) 부처를 이곳에 파송했는데, 스왈른은 함흥을 자주 방문하고 북쪽 끝에 있는 함경북도의 행정수도인 경성까지 순회전도를 나갔다. 거의 같은 시기에 북감리교도 선교를 시작해 올링거와 의료 선교사 윌리엄 맥길(William McGill)을 이곳에 정착시키고, 기독교 서적도 팔고 병자도 치료하고 지방사업도 개척하였다. 맥길은 원산주재 외국인을 진료하면서 선교 활동을 펼쳐 나갔고, 하디도 1892년 11월 독립 선교사로 원산에 정착해 맥길의 시료소에서 잠시 거주하다 펜윅의 집 방 한칸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1893년 3월 맥길은 원산에 거주하면서 시약소를 차리고 환자를 치료하는 등 의료 선교와 복음 전도를 병행했지만, 선교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을 가지고 민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불과 1년 만에 원산지역 에는 학습교인 15명과 주변 지역 학습교인을 포함해 219명의 결신자가 생겨났다. 이 숫자는 1년 동안의 선교 결실치고는 대단한 결실이었다.
1895년 원산을 방문한 스크랜튼은 오전에 방을 가득 메운 60명의 신자에게 설교하고 남자 8명, 여자 5명, 어린이 6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놀라운 복음의 확장은 장차 원산 지역에서 발흥할 원산부흥운동을 예견하는 듯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한 결실도 매우 많았다. 1894년 8월 5일 4명의 여인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후 결신자가 계속 생겨나 1896년에는 34명이 세례를 받았고, 24명이 문답을 받았으며, 평균 출석 교인이 90명이 되었다.
1896년 원산으로 돌아온 펜윅은 그 이듬해 소래를 방문, 그곳에서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그곳 선교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가 시도한 원산의 모범 농장은 새로운 모델로 주목을 받았으며, 1903년 남감리교 선교사 페니 힌즈(Fannie Hinds)와 결혼, 더욱 안정된 사역을 추진할 수 있었다.
원산 지역은 일찍부터 복음과 일치된 삶을 강조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지역이었다. 게일은 이곳에 거주하는 동안, 원산 지역 기독교인들에게 조상숭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지역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조상숭배는 신약의 가르침과 반대된다.”“우상 제사는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의견을 피력해 게일로 하여금 조상숭배를 금지하도록 하는 데 큰 힘을 실어 주었다. 원산에서 철저하게 실시된 조상숭배 금지는 그 후 한국교회에 일반적인 종교 정책으로 채택되었고, 해리 로즈(Harry A. Rhodes)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이들 초기 원산 기독교인들이 올바르게 결정했다.”고 믿었다. 스왈른은 원산을 선교 거점으로 삼고 수차례 선교여행을 떠나 광범위한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원산 지역의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원산 지역을 넘겨 주었다. 얼마 후, 북감리교 선교회도 선교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원산 지역 선교사역을 남감리교 선교회에 넘겨주었다. 안식년 휴가를 떠났던 맥길이 1899년 복귀했으나 북감리교는 일손 부족으로 그 동안 원산에서 진행하고 있던 선교 사업을 정리하고 그것을 남감리교회 형제들에게 이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 1900년에 이양했다. 남감리교 하디가 1900년 12월 15일에 도착해 맥길의 의료사업과 복음사업을 인수해 이듬해 4월부터 원산교회를 맡아 예배를 인도했고, 7월에는 맥길의 시약소도 인계받았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촉발되면서 이 지역이 놀랍게 성장하고,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증원되면서 자연히 이 지역은 남감리교 선교 지역으로 조정되었다.
(5) 함경도에서의 복음 확장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가 선교구역으로 삼은 곳은 함경도였다. 소래에서 활동하던 매켄지(McKenzie)의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죽음이 계기가 되어 1898년 9월 7일 윌리엄 푸트(William Fufus Foot) 부처,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부처, 던칸 맥래(Duncan M. Mcrae)가 내한, 함경도를 선교구역으로 삼았다.
맥래와 푸트는 그리어슨과 함께 10월에 열린 장로교 공의회에 참석해 정식 회원으로 인정받고, 장로교 공의회가 선교지로 제시한 부산과 원산 두 곳을 놓고 상의한 후 이미 캐나다 출신 게일과 펜윅 그리고 하디가 수년 동안 사역했던 원산을 택했다.
일행 중 푸트가 11월 12일에 제일 먼저 원산으로 떠났다. 그리어슨과 맥래는 곧바로 원산으로 가는 것보다는 순회 전도여행을 경험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언더우드와 함께 5주간의 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다. 이 전도여행 동안 맥래와 그리어슨은 소래에서 언더우드와 4일간 머물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전의를 다질 수 있었다.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맥래와 그리어슨은 서울에서 한글을 배우며 그 해 겨울을 지낸 후 1899년 2월 5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6일간의 여행 끝에 2월 11일 원산에 도착했
다.
북장로교 선교회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아직 한글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에서 활동하던 스왈른과 게일을 당분간 그곳에 계속 상주시키며 그들의 정착을 지원하였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봉수동 혹은 베이컨 언덕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언덕의 땅을 매켄지가 유산으로 남긴 2,000달러로 구입하고 이곳에 정착했다.
1899년 6월까지 세 명의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 지역을 면밀히 조사 검토하고 크게 북부와 남부 둘로 대별한 후 푸트가 원산에 상주하면서 남부지역을 맡고, 그리어슨과 맥래가 원산에 거주하면서 함흥을 중심으로 북부지역을 맡기로 했다. 이미 스왈른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인 함흥의 차을영은‘매우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고, 스스로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해 회심 1년 후 세례도 받기 전에 전도지와 성경을 들고 먼 산악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형제에게 복음을 전할 만큼 신앙이 성숙했다. 스왈른의 말대로 그는‘많은 사람을 구원한 위대한 복음 전파자’였다. 다만 함흥이 아직 개항하지 않은 관계로 함흥에 상주하기까지는 그로부터 수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윌리엄 스캇의 말을 빌린다면 캐나다 선교사들은 1900년 한 해를 탐사와 발견의 해로 보냈다. 푸트는 남부지역에 있는 각 교회들을 적어도 한 해 한 차례 방문했고, 중심지역에서 수차례 지역사경회도 개최했다. 맥래와 그리어슨은 함흥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함께 방문해 기도회를 열면서 새해를 시작했다. 얼마 후 맥래와 그리어슨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맥래는 교회를 둘러보면서 함흥으로 떠났고, 그리어슨은 미국에서 주문한 자전거를 타고 원산 가까이의 마을과 동리를 방문했다.
1900년 8월 맥래는 자신의 약혼자 에딧 서더랜드(Edith Sutherland)를 일본에서 만나 8월 13일 결혼하고, 9월 16일 캐나다 선교사로 임명받은 루이스 맥컬리(Louis H. McCully)와 함께 원산에 도착했다. 윌리엄 스캇이‘지금까지 한국에 온 가장 능력있는 여자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예찬했던 트루로(Truro)출신 맥컬리는 미셔너리 연맹(Missionary Alliance)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받았다가 1900년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더 이상 중국
에서 사역할 수 없어 한국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대부분의 캐나다선교사들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해외선교와 전천년설, 부흥운동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19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 그녀의 이와 같은 복음주의 열정은 이미 원산에 정착한 같은 배경의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 하디를 비롯한 여타 다른 장로교 선교사들과 어울려 수년 후 원산에 놀라운 영적각성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녀가 캐나다 선교회에 합류한 것은 그런 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1900년 11월 맥래와 그리어슨은 원산과 소련과의 국경 사이에 있는 외국인에게 새로 개방된 성진항으로 역사적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리어슨은 성진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그곳이 선교지로 적소임을 발견하고 선교 거점으로 삼기로 결심한 후 12월에 열린 캐나다 선교회 모임에 이를 건의했고, 선교회는 이듬해 봄 성진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하였으며, 1901년 5월 18일 그리어슨 부부가 그곳으로 떠났다. 맥래는 함흥 사역 책임을 맡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901년에 이르러 원산을 거점으로 시작한 캐나다 선교회는 원산, 성진, 함흥 세 곳으로 확장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901년 럽(A. F. Robb) 부부와 케이트 맥밀란(Kate McMillan)이, 1903년에는 제니 럽(Jennie Robb)이, 1905년에는 캐더린 마이어(Catherine Mair)가, 1906년에는 영(L. L. Young)이 그리고 1907년에는 로스(A. R. Ross)가 입국해 이들 세 지역을 중심으로 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캐나다 선교는 선교사 수의 상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선교확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앞서 선교를 시작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세 장로교 선교회가 시행해 오던 네비우스 선교 정책과 기타 선교 정책을 받아들여 그들의 노하우를 자신들의 선교에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선교사로서는 축복이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이미 장로교 선교회가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는 순회전도를 받아들여 함경도 산간지역까지 복음을 전했다.
캐나다 선교회 역시 가장 강조된 사역 가운데 하나가 사경회 원리에 따른 성경공부와 지도자 훈련이었다. 유능한 한국인들을 발굴해 이들에게 설교를 맡기는 일은 선교사역을 공유하는 유익과 더불어 이들을 교회 지도자들로 양성하는 이중적인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지도자 육성으로 어느 지역에서나 한국인에 의한 전도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평신도들의 활동에 힘입어 전도 활동은 더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예수를 믿는 원산의 한 나이든 사람은 새신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8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한겨울을 보냈고, 또 다른 교인은 원산에 있는 자신의 집을 팔고 아예 안변으로 이사해 그곳에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01년 그리어슨이 선교지를 개설하기 위해 성진에 갔을 때도, 1년 전 원산에서 이사한 한 교인에 의해 성진교회가 이미 설립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범한 한국인에 의해 깊숙한 북부지역에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중해 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복음은 북쪽 함경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1899년 3명의 남자 선교사와 2명의 여자 선교사, 총 5명의 선교사와 15명의 초등학생, 14개의 신앙그룹, 63명의 입교인을 포함 총 308명이던 교세가 10년 후 1909년에는 6명의 남자 선교사, 4명의 선교사 아내, 4명의 여자 선교사, 총 14명의 선교사와 87명의 한국인 사역자, 9명의 신학생, 110명의 고등학생, 712명의 초등학생, 134개의 교회, 1,141명의 입교인, 1,108명의 학습교인, 전체 5,594명의 신앙의 공동체로 놀랍게 발전했다.
만주 지역은 1891년 게일과 마펫이 처음 방문한 곳으로 1892년 존 로스(John Ross)가 자신에 의해 시작된 선교사역을 북장로교가 인계받을 것을 요구해 왔고, 한국교회는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이곳에 관심을 가진 후 1924년 이전까지 장로교 총회가 이 선교지를 관할하다 그 후 감리교와 선교지를 분할하여 선교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