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일승보성론 제4권
8. 신전청정성보리품(身轉淸淨成菩提品)
≪논≫ 이미 때[垢]있는 진여를 설하였고, 여기서부터는 때 없는 진여를 설함이니, 알아두라.
때 없는 진여란, 이를테면 모든 부처님ㆍ여래가 번뇌 없는 법계 가운데에서 일체 갖가지 모든 때를 아주 여의고 잡된 더러운 몸을 바꿔 청정한 몸을 얻는 것이다. 여덟 글귀의 뜻에 의지하여 대략 저 진여의성품인 번뇌 없는 법신을 차별해 설하겠으니, 알아두라.
그 여덟 가지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하게 얻음과 멀리 여의는 것과 자타의 이익에 상응(相應)하는 것과 깊고 쾌하고 큰 것에 의지함인 시간[時]과 수효[數]가 저 법과 같음이네.
이것이 이른바 여덟 글귀의 뜻이니, 차례대로 한 게송으로써 여덟 가지 뜻을 나타내 보이겠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진실한 체[實體]이고, 둘째는 인(因)이고, 셋째는 과(果)이고, 넷째는 업이고, 다섯째는 상응하는 것, 여섯째는 행(行)이고, 일곱째는 항상한 것이고, 여덟째는 부사의한 것이다.
진실한 체이란, 앞서 여래장이 번뇌장의 얽매임을 떠나지 않는 것을 설하였는데, 그 모든 번뇌를 아주 떠남으로써 몸을 바꿔 청정함을 얻는 이것을진실한 체라 하나니, 알아두라. 게송에 이른바 ‘청정’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승만경(聖者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한량없는 번뇌장이 여래장을 얽어맨 것에 의혹하지 않는이라면 그는 한량없는 번뇌장을 벗어난 법신에도 역시 의혹이 없겠나이다”고 하였다.
인(因)에는 두 가지 분별없는 지혜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지혜이고, 둘째는 세간을 뛰어난 지혜를 의지하여 세간에 의지해 행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을 인(因)이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얻음’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과(果)란, 곧 이 얻음을 의지하여 지혜의 과(果)를 얻어 증(證)하는 이것을 과(果)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멀리 여읨’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업이란, 두 가지 멀리 여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는 것이고, 둘째는 지혜의 장애를 멀리 여의는 것이다. 이러한 차례이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것이라 하고, 이같이 멀리 여의는 것이 곧 스스로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성취하기에 이것을 업이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자타의 이익’이란 것이 이 때문이다.
상응(相應)하는 것이란,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그것이 한량없는 공덕을 얻어서 항상 끝까지 주지(住持)하기에 이것을 상응이라 하나니, 게송에 이른바 ‘상응’이란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여섯째의 행과 일곱째의 항상함과 여덟째의 부사의한 것이란,
이를테면 세 가지 부처님의 법신이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항상 쉬지 않으신 그것이 부사의한 것이니, 게송에 ‘깊고 쾌하고 큰 데에 의지함이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이런 뜻이기 때문에 대략 게송에 말하였다.
진실한 체와 인(因)ㆍ과(果)와 업과 또는 상응하는 것과 행과 항상함과 부사의한 것을 부처님 지위라 하나니 알아두라.
또 진실한 체에 의지하고 인(因)에 의지하여 부처님 지위 가운데에서 저 방편의 인을 얻는지라. 이 때문에 세 게송을 설한 것이다.
앞서 부처님의 법신인 그 자성의 청정한 체가 모든 번뇌의 때와 객(客)ㆍ진(塵)의 더럽힘이 되는 것을 설했으니
마치 가운데의 때를 여읜 청정한 해와 달이 저 두텁고 빽빽한 구름의 그물에 덮인 것과 같음이라.
부처님의 공덕은 때가 없고 항상하고 또 변하지 않고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시어 번뇌 없는 참된 지혜를 얻으셨네.
이 세 구절의 게송을 네 구절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몸이 청정한 참된 묘법을 떠나지 않음은 마치 허공의 해와 달 같아서 그 지혜가 더러움을 떠남이 둘이 아니니
항하사를 지난 부처님 법의 밝고 깨끗한 모든 공덕은 조작하는 법의 상응이 아니고 저 진실한 체를 떠나지 아니하네.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인 저 법은 사실 체가 없어서 항상 객ㆍ진의 더럽힘이 됨으로 이 때문에 구름의 비유를 설함이라.
저 두 가지 인(因)을 아주 떠나 가지 분별없음을 향하여 분별없는 참된 지혜를 저 과(果)에 의지해 얻는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앞서 몸을 바꾼 진실한 체의 청정함을 설하였는데, 또 청정이란 것이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그 두 가지란, 첫째 자성의 청정한 것이고, 둘째 때를 여읜 청정한 것이다.
자성의 청정함이란 이를테면 자성의 해탈이 버리거나 여의는 것이 없음이니, 저 자성인 청정한 마음의 체가일체 객ㆍ진 번뇌를 버리지 않는 것은그것이 본래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를 여읜 청정함이란, 이를테면 해탈을 얻는 것이고, 또 저 해탈이 일체 법을 여의지 않는 그것이 마치 물이 모든 먼지와 때를 여의지 않음으로써 청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성의 청정한 마음도 모든객ㆍ진과 모든 번뇌의 때를 아주 여읨으로써다시 남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 저 과(果)를 의지해 때를 여의어 청정함이니,
이 때문에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마치 청정한 못[池]물이 조금도 더러운 티가 없는데다가 가지가지 꽃나무들이 그 주위를 항상 둘러싼 것과 같고
또 라후(羅睺)를 여읜 달과 구름의 가림을 여읜 햇빛과 같이 때 없는 공덕을 갖추어서 나타나시는 그것이 곧 저 몸이라.
벌의 맛 좋은 꿀과 견실하고 청정한 진금(眞金)과 보배 광과 큰 과일 나무와 때가 없는 저 진금의 형상이고
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몸과 미묘한 보배 여래의 형상인 이러한 등등의 모든 법이 바로 여래의 몸이시네.
이 네 줄의 게송을 여덟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탐욕 등 객(客)번뇌는 마치 흐린 물의 먼지와 같고 분별없는 훌륭한 지혜의 그 과(果)법은 못물과 같으매라.
부처님 법신의 일체 공덕을 나타내되 저 지혜를 증한 과(果)에 의지하여 이 때문에 이렇게 설한 것이네.
탐욕이 흐린 물의 먼지와 같아서 청정한 법은 먼지에 섞어 더럽히고 교화해야 할 모든 중생은 마치 못을 둘러싼 연꽃 같은지라.
선정의 습기로 스며들어서 진심[瞋]의 덮임을 멀리 여의고 대자대비한 마음의 물로써 모든 중생을 두루 이익케 하시며
마치 저 보름달이 구름이 덮인 그물을 멀리 여의고 그 광명이 중생들에 비추어서 능히 모든 어두움을 제거하듯
부처님의 때 없는 해와 달도 어리석은 구름의 실 그물을 여의고 지혜 광명이 중생들에 비추어서 모든 캄캄한 어두움을 제거하시며
견줄 이 없으면서 같은 법을 얻어 능히 미묘한 법 맛을 내시니 모든 부처님은 꿀처럼 굳어서 벌 찌꺼기의 장애를 멀리 여의시네.
진실 미묘한 공덕이 능히 모든 빈궁을 끊고 능히 해탈의 세력을 주시니 이 때문에 금과 나무의 비유를 설한 것이며
법 보배의 진실한 몸이 더 훌륭한 양족존(兩足尊)의 거룩한 빛을 필경 성취하시니 이 때문에 뒤의 세 비유를 설한 것이네.
또 앞서 두 가지 지혜가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업에 의지하는 것을 설하였으니,
그 두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지혜이고, 둘째는 세간을 뛰어난 분별없는 지혜에 의지하여 몸을 바꿔 몸을 얻는 것이니, 그 수행의 인(因)이 번뇌를 멀리 여의고서 지혜의 과(果)를 증(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란, 해탈을 얻어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고, 지혜의 장애까지를 멀리 여의고서 장애 없는 청정한 법신을 얻음이니, 이른바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함이다.
남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란, 이미 자신의 이익을 성취한 후 처음이 없는 세계로부터 자연 저 두 가지 법신을 의지하여 세간의 자재한 힘과 행을 나타냄이니, 이것이 이른바 남의이익을 성취함이다.
또 스스로가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에 의지하여 업을 성취하나니 이런 뜻으로 네 게송을 설한 것이다.
샘이 없고 두루 이르러서 없어지지 않는 법을 더불어 항상하고 정량하여 변하거나 다르지 않아서 그 적정(寂靜)한 곳을 물러나지 않으신지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몸은 허공의 모양 없는 것과 같으시면서도 모든 수승한 지혜를 갖춘 이를 위하여 여섯 감관의 경계를 지으시나니
미묘한 빛을 나타내어 보이기도 하고 미묘한 음성을 내어 듣기기도 하고 부처님의 계향(戒香)을 맡게 하고 부처님의 묘법 맛을 주시며
삼매의 감촉을 깨닫게 하기도 하고 깊고 묘한 법을 알아서 자세히 번뇌의 숲을 생각하게 하기도 하되 부처님은 허공의 모양까지를 여의셨네.
이 네 줄의 게송을 여덟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략 두 가지 법을 설하건대 업과 지혜가 그것인 줄 알지니 만족한 해탈의 몸이고 청정한 참된 법의 몸이라.
해탈의 몸과 법의 몸이 둘이고 또 하나인 줄 알지니 이를테면 샘이 없고 두루 이르고 마지막 함이 없는 몸이기 때문이네.
번뇌가 다 되어 샘이 없음은 모든 습기를 멸했기 때문이고 거리낌이 없고 장애가 없음은 지혜의 두루 이르는 것인 줄 알지며
함이 없음은 멸하지 않고 진실한 체는 허물이 없고 허물이 없는 그것을 근본이라 하나니 이것이 항상이란 글귀의 해석이라.
이 항상이란 글귀들에 상대되는 네 가지 허물이 있는 것을 알지니 죽음과 무상과 전환하는 것과 헤아릴 수 없는 물러남이 그것이네.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고 항상하기 때문에 청량(淸凉)하고 전환하지 않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고요하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나니
저 구경(究竟)의 발자취와 청정한 지혜며 깨끗한 법의 체와 구족한 빛ㆍ소리 등등으로 모든 감관을 나타내 보이시는지라.
허공이 모양이 없으면서도 그 빛 등의 모양을 나타내듯 법신도 역시 그러하여 여섯 감관의 경제를 구족하셨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경 가운데 설하기를, “허공의 모양처럼 모든 부처님도 그러하시다”고 하였다.
이는 제1의 이치에 의지한 모든 부처님 여래 청정하신 법신의 그 자체 모양이 공동하지 않은 법에 의하기 때문에 이는 같이 설한 것이다.
또 이런 뜻이기 때문에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에 문답하기를, “수보리(須菩提)여, 네 생각엔 어떠하냐, 서른두 가지 대인의 모습을 성취함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는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해석하는 대로는, 대인의 모습을 성취함으로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겠나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러하니라. 수보리여, 모습을 성취한다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라. 만약에 모습을 성취함으로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응당 여래이어야 하리니, 이 때문에 모습을 성취한다 해서 여래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여래의 제1 이치에 의지한 청정하신 법신이기에 이런 뜻을 밝힌 것이다. 또 상응하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허공처럼 부사의하사 항상하고 또 청량하고 변하지 않고 고요하사 모든 분별을 두루 여의시며
일체 곳에 집착하지 않으사 거리끼고 거친 감촉을 여의시니 역시 보고서 잡을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 때 없는 것이네.
이 두 줄의 게송을 여덟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해탈의 몸과 법의 몸이 역시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나니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함에 의지하는 것이 저 곳에 상응(相應)하는 이치이네.
일체 모든 공덕은 부사의한 것인 줄 알고 세 가지 지혜의 경계가 아님으로써 일체 갖가지의 지혜인 줄 알라.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체이어서 미세하기 때문에 듣고 얻는 경계가 아니고 제1의 이치이기에 생각해 얻는 지혜도 아니니 이것이 곧 세간을 뛰어난 깊은 비밀이네.
세간의 닦는 지혜로선 알지 못하나니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은 본래 일찍 볼 수 없어서 빛을 못 보는 소경과 가고
이승(二乘)은 마치 어린 아이가 해ㆍ달의 바퀴를 못 보는 것과 같나니 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고 멸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그대로이며
둘을 여의기 때문에 청량하고 법 성품으로 머물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멸(滅)을 증하기 때문에 고요하고 일체를 깨닫기 때문에 두루하며
머물지 않아서 분별하지 않고 번뇌를 여의어서 집착하지 않고 지혜의 장애가 없어서 어두움을 여의고 부드러워서 거친 것을 여의며
빛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모양을 여의어서 잡을 수가 없고 자성(自性)이기 때문에 청정하고 더럽힘을 여의기 때문에 때가 없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허공의 비유로써 모든 부처님 여래의 그 함이 없는 모든 공덕이 부처님의 법신을 떠나지 않는 것을 밝힘이니, 모든 세계 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승한 큰 방편의 업과, 수승한 대비(大悲)의 업과, 수승한 큰 지혜의 업을 얻어서, 일체 중생들에게 즐거운 모양을 주기 위한 그 때 없는 청정한 세 가지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실한 부처님과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는 부처님과 또는 화신(化身)의 부처님이 항상 쉬지 않고 항상 끊이지 않은 채 자연히 수행하여 일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니,
알아두라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오직 부처님, 여래의 법신만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이 몸에 의지함으로써 모든 행의 차별에 상응하는지라, 이 때문에 여덟 게송을 설한 것이다.
처음이 아니고 중간도 뒤도 아니어서 파괴하지 않고 다르지도 않고 세 세계[三界]를 아주 떠나서 때가 없고 분별이 없는지라
이 깊고 깊은 경계는 이승(二乘)들의 알 바가 아니니 수승한 삼매의 지혜를 갖춘 이러한 사람이라야 볼 수 있으며
항하사[恒沙]보다 더 지나친 그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오직 여래만이 성취하셨으므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공동하지 않으시네.
여래의 묘한 형상 몸[色身]은 청정하여 때가 없는 체이어서 그 모든 번뇌란 번뇌와 일체의 습기를 아주 여의시고
갖가지 수승한 묘법의 그 광명으로 몸을 삼아서 중생들을 해탈케 하기 위해 항상 쉴 사이가 없으시네.
하시는 일의 부사의함이 마니 보배[摩尼寶]와 같아서 능히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는 저 몸은 진실한 몸이 아니시고
세간을 위해 법을 설하사 고요한 곳을 나타내 보임은 교화하여 순숙(純熟)하게 하기도 하고 수기(授記)하며 도에 들게 하기도 하시네.
여래는 거울 형상의 몸이시되 본체(本體)를 떠나지는 아니하시니 마치 일체의 빛이란 빛이 허공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네.
이 여덟 줄의 게송을 스물다섯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한다.
앞서 설한 바 부처님의 법신과 일체 갖가지의 지혜와 자재함과 열반과 제1의 이치인 진리와
또는 헤아릴 수 없는 법과 응공(應供) 등등의 공덕은 자신이 안으로 증할 뿐이니 응당 이와 같이 알아야 할지라.
저 세 가지 몸의 차별은 법신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 등 이른바 깊고 쾌하고 큰 한량없는 공덕의 몸이 그것이고
그 중에도 진실한 체의 몸을 밝힘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을 말한 것이니 대략 설하자면 다섯 가지 모양과 다섯 가지 공덕이 그것인 줄 알라.
함이 없고 차별이 없어서 두 가지 치우침을 아주 여의고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와 또는 삼매의 장애를 벗어나셨네.
일체의 때를 여의었으므로 이 때문에 성인의 경계이니 청정한 광명 비춤이 곧 법성[法性]으로써 그러한지라.
한량없는 아승지(阿僧祗)의 그 셈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견줄 이 없는 모든 공덕으로써 제1의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셨네.
진실한 법신의 상응(相應)은 그 쾌함을 셈할 수 없으므로 생각하는 경계가 아니고 또 습기를 아주 여의었으며
그지없는 모든 불법은 차례차례 보신(報身)을 떠나지 않으므로 가지가지 법 맛을 수용하되 모든 묘한 빛을 나타내 보이며
청정한 자비(慈悲)의 습기는 허망한 분별이 없으므로 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자연 휴식(休息)하는 일이 없네.
마치 여의 보배 구슬[如意寶珠]이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케 하듯 즐거움을 주는 부처님으로서도 그와 같이 신통의 힘이 자재하신지라
이 자재한 신통의 힘을 대략 다섯 가지로 설하겠으니 법을 설함과 볼 수 있음과 모든 업을 휴식하지 않음과
또는 휴식하고 은몰(隱沒)함과 진실하지 않은 몸을 나타내는 이러한 것을 요약해 말하되 다섯 가지 자재한 힘이라 하네.
마치 마니 보배 구슬[摩尼寶珠]이 가지가지 모든 빛을 의지하듯 본생(本生)과 다른 모든 모양은 일체가 다 진실하지 않는지라
여래도 역시 이와 같이 방편의 힘으로 나타내 보이시기에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내려와서 차례로 모태여 들어가 태어나고
모든 기예를 배워 익혀 어린 아이로서 왕궁에 들어갔다가 모든 욕심의 모양을 싫어 여의고 출가(出家)하여 고행을 행하며
모든 외도들을 찾아 묻고는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서 마군의 무리를 항복 받고 큰 묘각(妙覺)의 높은 이를 이룩하시매랴.
더 없는 법 바퀴를 굴리고 남음이 없는 열반에 드시어 청정하지 않은 국토에서 이러한 일들을 나타내시되
세간에서 휴식하실 사이 없이 그 무상(無常)과 괴로움과 무아(無我)와 적정(寂靜)과 방편의 지혜 힘을 펼쳐 설하사
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세 세계의 괴로움을 싫어 여의게 하고 그 뒤엔 열반에 드시어 적정(寂靜)한 도에 들어가시네.
그런데도 성문(聲聞)사람들은 이 허망한 모양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열반과 법화(法華)등 모든 경전을 얻었다고 말하는지라.
그들에게 다 여실한 법을 설하사 지혜의 방편으로 거둬 주시되 과거의 허망하던 마음을 돌려서 최상의 승(乘)에 순숙하게 하시고
묘한 보리기(菩提記)를 수여하되 미세하고도 큰 세력으로써 저 어리석은 중생들로 하여금 험란한 나쁜 길을 벗어나게 하시며
다시 깊고 쾌하고 큰 것을 차례로 설하시나니 알아두라 첫째는 법 몸의 여래이시고 둘째는 형상 몸의 부처님이시라.
마치 허공 가운데에 일체의 형상 몸이 있듯이 처음 부처님의 몸에서나 최후 부처님의 몸에서도 역시 그러하네.
여기서부터 아래는 곧 이러한 세 가지 부처님 몸을 의지하여 중생들을 즐겁게 하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대략 두 게송을 설한 것이다.
세존의 체는 항상 머무사 한량없는 인(因)을 닦음으로써 중생계(衆生界)가 다하지 않는 한 자비하신 마음으로 뜻대로 하시며
지혜는 상응(相應)함을 성취하사 법 가운데 자재함을 얻음으로써 모든 마군을 항복 받으시나니 그 체가 고요하기 때문에 항상하네.
이 두 줄의 게송을 여섯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뚱이와 목숨과 재물을 버리고 모든 불법을 섭취(攝取)하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필경 본래의 원을 원만케 하시는지라.
청정한 부처님 몸을 얻고는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일으켜 네 가지 뜻대로[四如意]를 수행하사 저 힘을 의지해 세상에 머무시네.
미묘한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열반이 있다는 그 마음을 여의고 항상 마음의 삼매를 얻으사 즐거움의 상응함을 성취하시며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의 법에 더럽히지 않고 청정한 감로(甘露)의 곳을 얻기에 이 때문에 일체 마군을 여의시네.
모든 부처님이 본래 생멸하지 않음을 그 본래부터가 적정(寂靜)하기 때문이고 언제 누구이건 귀의할 수 있으므로 이 때문에 나에게 귀의하라고 말씀하심이라.
처음의 일곱 가지 비유는 여래의 형상 몸의 항상한 것이고 뒤의 세 가지 비유는 선서(善逝)의 법 몸의 항상한 것이네.
이 게송이 무슨 뜻을 밝힘인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법 몸을 의지해 나아가선 더없는 몸을 얻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알아두라.
그 헤아릴 수 없음을 의지해 이 때문에 두 게송을 설한것이다.
말로써 설할 것이 아니고 제1의 이치 진리에 해당하며 모든 각(覺)ㆍ관(觀)의 자리를 떠났으므로 비유로써 설할 수도 없는지라
최상의 수승 미묘한 법은 열반이 있다는 것을 취하지 않나니 이는 삼승(三乘)들의 알 바가 아니고 부처님만이 아시는 경계이네.
이 두 줄의 게송을 다섯 줄 게송으로써 대략 해석하겠으니, 알아두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란 언어(言語)의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고 언어의 모양을 떠난 것은 제1의 이치에 해당하기 때문이며
제1의 이치에 해당하는 것은 사량(思量)하는 경계가 아니고 사량하는 경계가 아님은 비유로써 아는 것이 아니며
비유로써 아는 것이 아님은 가장 수승하여 위없는 것이고 가장 수승하여 위없는 것은 열반이 있음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공덕과 과실(過失)인 이 두 가지를 취하지도 않나니 앞서 다섯 가지 비유가 바로 그 미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고
여래의 법신이 항상함이란 그 다음 여섯째의 비유한 것이니 법신이 자재함을 얻기 때문에 여래의 형상 몸도 항상하기 마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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