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8-9절)
이 말씀대로 되기를 항상 사모하지만 가장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기도하다. 죄인은 하나님과 떨어져 있고 싶은 본성으로 하나님 앞에 머물지 않는다. 다른 대용품만 하나님 앞에 드리고 몸은 얄개처럼 빠져나간다. 그래서 죄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고, 비록 죄의 본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주의 은혜 안에 항상 머문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을 받아 깨달음으로 듣고 또 듣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몸부림이 있은 후에야 가능하다.
보물이 아무나의 것이 아니듯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믿음이 아무나의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까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자녀들을 위한 영원한 기업이 그만큼 귀하고 귀하다는 말이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보면 처음에는 차선이라든가 여러 규제가 귀찮지만 점점 그 통제가 자연스럽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신앙에 있어서도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던 죄인으로 출발해서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안기고, 강아지처럼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것이다. 정상적인 관계다.
나는 어떤 분들이 평생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을 사셨다기에 생각하기를 ‘어떻게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벌서듯이 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일이 오히려 쉽다. 아니 그 분을 앞에 모시지 않으면 당장 마음이 혼란스럽고 복잡해지며, 자신감이 떨어지고, 육신의 피로가 다가온다. 전에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불편하다가 이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기능과 역할이 엉망이 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진짜 ‘주 없인 살 수 없네’ 고백할 수밖에 없다. 체질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주님이 인생의 음식이고 공기이며 물이다. 그 분이 나의 에너지이다.
다윗은 일찌감치 그런 사람이 되어 우리를 앞서서 진리의 길을 걸어갔다. 시범을 보인 모델이다. 이런 증인이 인류역사상 없었다면 우리는 우왕좌왕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분명히 모범 답안을 썼다. 성령에 감동이 되어 비록 짐승과 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의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항상... 그는 언제나 그렇게 했다. 그럴 때마다 여호와는 그의 의가 되셔서 그의 오른 팔을 붙들고 들어 주셨다.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또 육신이 성령의 감동에 전율한다. 마음이 가볍고 기쁘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 노래가 나온다. 육신이 새의 깃털과 같아진다. 나는 이 복 외에 얼마나 더 큰 복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첫댓글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아! 그래요.. 주님은 나의 에너지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