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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제외한 경기, 충청, 강원 일부 지역 선교에 처음부터 관심을 기울인 선교회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선교회였다. 북감리교 선교회는 1889년부터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를 분산 주재시켜 본격적으로 지방 선교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1892년 8월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감리교 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된 스크랜턴은 서울, 제물포, 평양, 원산으로 선교구를 대별하고 존스를 제물포로, 홀 박사를 평양으로, 맥길 의사를 원산으로, 그리고 자신은 서울 상동교회를 담임하면서 동대문교회를 개척했다. 지방에 세워진 선교부에서는 주로 세 가지 사업에 집중했다. 첫째는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설립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둘째는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교회 지도자나 사회와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고, 셋째는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장로교 선교회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다만 장로교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일관되게 사용하여 전 선교사역을 이와 연계하여 추진하였다는 점이 차이점이었다.
원주 지역도 북감리교가 일찍이 관심을 가졌던 곳이다. 1888년 8월 아펜젤러는 15일간 존스와 함께 강원도 원주를 경유하여 경상도 대구와 부산 등지를 순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첫 번째 여행지 원주에서 아펜젤러와 존스는 한국인들이 이전보다 상냥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1년 전 아펜젤러가 헌트와 떠났던 북부 지방 전도여행 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후에 원주가 중요한 감리교 선교구로 정착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개척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감리교 선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부지역에 복음이 확장되면서 북감리교는 공주, 해주, 원주에 선교사를 주재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 외에도 평안도 의주, 경상도 대구, 충청도 청주, 전라도 전주에 선교사 혹은 한국인 전도사에 의해 예배 처소가 설립되었다.
(1) 인천, 강화에서의 복음 확장
제물포와 강화 지역은 처음부터 북감리교 선교회의 중요한 선교 전략지였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물포를 통해 입국했기 때문에 자연히 제물포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는 선교사가 상주하지 않아 선교에 어려움이 있었다. 1889년 아펜젠러가 제물포에 한옥 두 채를 구입하고 노병일 권사를 권서인으로 파송하여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면서 제물포교회가 시작되었다. 노병일은 군·관·민의 박해 속에서도 2년 반 동안 이곳에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해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1891년 굿셀(D. A. Goodsell) 감독이 아펜젤러 목사를 이 지방 책임자로 임명하여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존스
(G. H. Jones)가 서울에 거주하면서 인천지구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다 1893년 강화도와 황해도를 인천지구에 편입시키면서 존스는 인천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우각동에 거점을 마련한 존스는 교회를 담임하면서 제물포, 강화도, 황해도 연안 등지로 순회전도를 하는 한편 1892년 4월 영화학당이 설립되었고, 8월에는 영화학교가 설립되었다. 영화학교는 철저하게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여자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후에는 남학교도 세워 교육하였다. 소학교는 신자와 불신자 자녀들을 모두 받아 교육시키면서 일반 교육과정과 더불어 종교 교육도 실시하였고, 특별 성경반을 조직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하는 일도 병행했다. 백헬런을 비롯한 전도부인의 활약에 힘입어 김기범, 이명숙, 이승환 등이 입교하면서 존스는 1893년에 32명의 교인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1894년 18명의 입교인과 42명의 초
신자가 생겨났고, 그 해에 한국인들의 힘만으로 지은 최초의 감리교회인 제물포예배당을 세웠다. 이 예배당은 두 가지 면에서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이 교회가 부인들을 위한 부인예배당으로 건립된 것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이 예배당이 감리교회에서는 자력으로 건립된 첫 예배당이었다는 점이다. 1894년에 세워진 제물포 부인교회당은 이미 건립된 남성들의 예배당에 이어 여성들을 위해 건립된 것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상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렸다. 정동교회가 휘장을 치고 뒤에서 설교자가 설교해 교인들이 인도자의 소리만을 듣고 예배를 드린 반면 동대문교회는 남녀 좌석 사이에 휘장을 쳐서 여신도들이 설교자만 보고
남신도들을 볼 수 없도록 하였고, 장대현교회는‘ㄱ’자로 교회당을 건축해 남녀 좌석을 분리시켜 예배를 드렸다. 이 면에서 제물포교회는 진일보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인천에 목사 주택과 강화에 전도사가 거주할 작은 집 한 채를 샀으며, 교인 수도 증가했다. 이렇게 해서 인천 제물포 지역은 백낙준 박사가 지적한 대로, 감리교 선교부에서 자력유지(自力維持)하고 자진전도(自進傳道)하는 가장 유력한 교회 구역이 되었다.
제물포 지역 외에 존스가 정열을 쏟은 곳은 강화도였다. 강화도 서사(西社, 시루미, 현 양사면)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선교사 존스로부터 복음을 받고 인천내리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세례를 받으라는 권고에‘나는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거절하였다. 첫째는 연로하신 어머님보다 먼저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막집을 경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몇 달 지난 후 존스 목사는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이승환 모친께 세례를 베풀기 위해 배를 타고 강화에 도착하였으나 그 곳 토박이이며 전통 양반 가문 출신으로 유학자인 김상임을 필두로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배에서 내려 강화 땅을 밟을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승환은 모친을 등에 업고 배로 올라가 선상세례를 받게 하고 자기도 곧이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강화 선교의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이어 존스 목사는 전도인 이명숙을 파송하여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4-5인이 모임으로 강화에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강화 서사교회(현 강화 교산교회)이다. 후에 김상임은 존스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보고 그를 만나 하나님을 영접하고 개종하게 되고, 그의 개종은 부녀자와 천민들이나 믿는 종교로 여기고 천시하던 주민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어 가신과 신당을 불사르고 믿음과 말씀공부에만 전념하여 교인 수는 폭발적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양반과 지식층의 합세로 시루미 공동체는 서민층과 어우러져 균형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하여 시루미 공동체에서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후에 김상임은 신학을 마치고 목사 후보생이 되었으나 목사안수 한 달을 앞두고 열병 환자를 심방한 후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교산교회는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1894년 존스의 보고에 의하면 제물포와 강화 지역의 경우, 1년 동안 장년 18명과 어린이 8명이 세례를 받았고, 입교인 13명과 학습인 45명이 생겼다. 이 중에 강화 지역 교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다.
교산교회 이명숙은 1896년 그 지역에서 서당을 경영하던 영향력 있는 유지 박능일의 가정에서 홍의교회를 개척했다. 박능일은 존스의 전도로 신앙훈련을 받은 신실한 사람으로 자신의 집에 새로 설립된 교회의 예배 인도까지 담당했다. 이어 평신도들의 헌신적인 전도열에 힘입어 1898년 고비교회가 조직되었고, 고비교회를 통해 상도교회와 위량교회가, 이어 교동교회, 교동
산이포교회, 그리고 1900년에 강화읍 잠두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강화읍 잠두교회의 설립은 이 지역 감리교 선교의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1901년까지 아직 초보 단계에 불과하던 강화 선교가 외국인 선교사들이 머물면서 섬 전체를 순회할 수 있는 넓은 집, 잠두교회를 설립하면서 이 지역 선교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 옹진군 영종도에도 복음이 전파되었고, 1901년 존스의 매서인 김군선에 의해 덕적도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부터 화성군 남양에도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북감리교는 서울, 인천 제물포, 강화를 중심으로 후에 이천, 여주, 장호원, 충주 지역으로 지경을 넓혀 북장로교에 이어 가장 큰 교세를 가진 선교회가 되었다.
1896년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 F. Reid)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이후 남감리교 선교회가 선교 거점으로 삼은 곳은 서울, 송도, 원산, 충주, 춘천, 철원이었으며, 서울 북부지역 고양, 문산, 파주 역시 초기에는 남감리교 선교구역이었다. 이 중 송도와 원산은 남감리교 선교 지역 가운데 가장 놀라운 신장을 보였다. 리드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협력으로 상동교회 김주현과 대영성서공회 권서 김흥순을 지원받아 이들과 함께 서울 북방 벽제, 고양 지역에 서적을 판매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2) 고양, 서울, 개성에서의 복음 확장
1896년 12월 8일 윤치호, 콜리어(C. T. Collyer), 캠벨(J. P.Campbell)이 참석한 가운데 첫 남감리교연회가 열렸고, 그 해 김주현, 김홍순 두 사람이 고양읍에서 전도해 1897년 5월 장년 24명, 유아 3명에게 세례를 주고 유사와 속장을 임명하여 첫 남감리교회를 설립했다. 고양에서 두 가정이 서울로 이사 왔고, 지방에 사는 세례인과 학습인들이 주일에 자주 서울에 와 있게 되면서 서울에도 정기 집회처를 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897년 6월 17일 수요일 밤 고양교회의 기도처로 시작한 것이 서울 광희문교회였다. 리드는 첫 1년 반 동안 윤치호의 도움을 받으며 한국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897년 9월에 제1회 지방회가 열려 송도와 서울 두 지역으로 전도구역을 나누어 조직을 확대할 수 있었다.
자교교회와 종교교회의 모체가 된 배화학당 설립에는 10년간 중국 소주에서 활동하다 한국으로 전임된 여선교사 캠벨(Mrs.J. P. Campbell)의 역할이 컸다. 10월 9일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중국에서 데리고 온 중국인 수양녀 여소저의 지원을 받으며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여선교사 캠벨이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인 윤웅렬이 연루되어 입장이 난처해지자 상해로 망명겸 유학길을 떠나 남감리교회가 운영한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며,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그곳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면서 켄들러 박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가 모은 돈 200불을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켄들러와 엘랜 중서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의 선교를 요청하였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 중인 리드(C. F. 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리드 선교사는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고,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되었고 1897년 캠벨부인이 입국하여 1898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학교 내에 예배처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자교와 종교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캠벨 부인은 어학 선생 김세라와 전도부인 백루이스와 함께 배화학당 학생의 가정을 심방하며 전도하고, 전도한 이들을 데리고 배화학당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교회 설립 3년 후 1901년 9월 14일 학당 안에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을 봉헌하게 되었고, 그 후 교회가 계속 성장해 1910년에 자교교회
와 종교교회로 분리하게 되었다.
고양, 서울에서의 전도에 이어 1897년 1월 입국한 남감리교 선교사 콜리어 박사에 의해 개성에도 복음이 널리 전해지기 시작했다. 1897년 9월 10일 제1회 지방회 때 경성(서울) 구역과 개성구역으로 나누고 경성은 리드 박사가 맡고 개성은 콜리어가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경성과 개성은 남감리교의 중요한 선교지가 되었다.
실제로 남감리교 선교회는 1899년 송도에 남문교회를 설립하고 1901년에는 북부교회를 설립하여 이들 교회를 중심으로 다시 주변으로 복음을 확장시켜 상당한 결실을 보았다. 이처럼 경성과 개성을 남감리교 선교 거점으로 삼았던 이면에는 윤치호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윤치호의 활동 무대가 개성과 서울이었기 때문에 윤치호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또 그의 요청에 의해 남감리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고, 게다가 국내외의 훌륭한 교육을 이수해 시대를 읽는 탁월한 역사적 안목과 미래를 예견하는 선견지명이 있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또한 개성은
''''''''북쪽으로는 함경도 원산까지 연장할 수 있는 선교구역과 동으로 춘천까지 연장할 수 있는 선교구역을 설계’할 수 있어‘매우 유망한 선교처’로 판단되었다.
서울과 개성을 선교 거점으로 삼은 남감리교는 이후 이 두 지역에 모든 선교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1897년 11월 15일 개성에 부임한 콜리어는 이건혁의 도움을 받아 개성 북구 산지현에 있는 삼포막을 구입, 개성 지역 인삼 재배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부임 1개월 만에 여러 명의 원입인과 9명의 학습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서울 지역 복음이 배화학당을 중심으로 꾸준하게 확대되어 나갔고, 고양을 중심으로 한 남감리교 선교사역도 벽제, 문산
포, 적성, 연천, 강원도 김화 등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렇게 남감리교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앞선 장·감 선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인 사역자들이 큰 기여를 했다. 이미 고양교회와 광희문교회 설립 과정에 크게 기여한 김주현, 김흥순 두 사람이 개성 지역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외에도 한때 소경 점술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백사겸과 고양 벽제 출신으로 1904년 새술막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복음 전파에 헌신한 윤승근도 남감리교 선교에 크게 공헌했다.
둘째는 선교사들의 보강이었다. 콜리어와 캠벨 부인 외에도 후에 원산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하디가 1898년 5월 15일 남감리교 선교사로 부임했고, 그해 12월에 힌즈(Miss Fanny Hinds)가 부임했다. 한국선교의 개척자 리드가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귀국했지만 패니 힌즈와 아레나 캐롤(Miss Arrena Carroll), 무스(J. R. Moose), 콜리어(C. T. Collyer), 하디(R. A.
Hardie)가 보강되어 1900년부터는 서울, 송도, 원산을 중심으로 남감리교 선교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디가 개성에 의료사업을 시작해 남성병원의 기초를 놓았고, 힌즈는 개성에서 여성사업을 착수해 남감리교는 콜리어의 직접 선교, 하디의 의료선교, 힌즈의 여성사역을 통해 균형 잡힌 선교를 착수할 수 있었다.
셋째는 교육과 의료 사역을 중시하면서도 복음 전도를 가장 긴요한 사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북감리교와 달리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부흥운동과 복음전파에 더 열심이었다. 심지어 의료 선교사 하디의 경우 의료 사역을 중단하고 복음 전파 사역에 전념할 만큼 복음의 열정이 남달랐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얼마 후 원산부흥운동의 발흥과 저변 확대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특히 하디는 원산 지역을 남감리교 선교구로 만드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맥길로부터 원산 사역을 인계받은 하디는 1901년 3월 강원도 철원 지경터에 머물면서 지경터교회를 설립했다. 이곳은 북장로교 오월번 선교사가 먼저 선교를 착수한 곳이고, 소경 백사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윤승근이 정성, 마전, 연천, 포천, 김화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했기 때문에 선교지로서는 적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경터교회는 1901년에 15명이 세례를 받을 만큼 성장했으며, 그 후 계속해서 성장했다.
원산 지역의 복음화는 1901년 11월 23일 첫 개성 구역이 조직될 때는 원산 지역의 복음화가 상당히 진척되어 이미 교회당 건축이 완료된 원산시 중앙에 세워진 원산항교회 외에 학익동, 사기동, 봉눈, 지경터, 새술막의 예배처에서 예배를 드렸다. 원산 지역의 복음 전파는 캐롤과 노울즈(Miss M. Knowles)가 임명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03년부터 여학교와 광명보통학교의 전신 소년학교를, 1906년에는 보혜성경학원을 설립해 복음 전도와 더불어 학교 교육도 병행했다. 이렇게 해서 원산에서도 하디의 의료 사역과 복음 전도 그리고 교육이 동시에 시행되기 시작했다.
(3) 춘천, 강릉에서의 복음 확장
고양에서 시작된 남감리교 선교사역은 서울과 개성과 원산으로 이어졌고, 다시 춘천과 강릉으로 확대되었다. 남감리교 선교회가 춘천구역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04년 무스가 이곳에 파송되면서부터이다. 무스 선교사는 미 캐롤라이나주에서 출생하였고, 6세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으며, 1892년에 트리니티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899년 9월에 한국에 입국하여 주로 서울과 개성에서 사역을 하였으며, 1908년부터는 강원도 중남부를 순회전도하다가 아예 춘천에 머물면서 많은 사역을 하였다.
춘천은 무스 선교사가 오기 6년 전부터 복음이 전파되었던 곳으로, 1898년부터 고량포 교인 이덕수가 춘천 지역에 복음을 전하다 1902년에는 춘천읍에 가옥을 마련하고 춘천읍교회를 설립했던 곳이었다. 무스의 부임으로 탄력이 붙기 시작해 1905년 춘천 지역에는‘세례교인이 있는 8개의 예배처소’가 있고, ‘그 예배처소 중에는 교인이 50명이 넘는 곳도 있어서 이 지역의 사업은 머지 아니하여 크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1905년 들어 춘천 지역을 거점으로 도내 75개 기도처가 생겨났고, 경기도 가평, 강원도 원주, 충북 제천까지 복음이 확장되어 나갔다.
러일전쟁 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가운데 사할린으로 강제로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소문이 돌면서‘한국인들이 강제로 이주를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교회로 들어오는 이가 많아진 것도 부흥의 한 요인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이들의 입문 동기가 순수하지는 않지만,‘ 동기야 어떻든 우리의 모임에 나아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했다.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철원 지역에 일찍이 복음이 전해지다 1901년 하디에 의해 활성화되었고, 장·감이 선교지를 분할하면서 이 지역이 남감리교 선교구역이 되어 1909년부터 남감리교가 맡게 되었다. 이 지역 남감리교 전도사로 파송된 이화춘이 얼마동안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애국자 조종대의 약국 마루에서 30여 명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남감리교 춘천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