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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justice)란 과연 무엇인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정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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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의 정의 게임
한 가지 게임을 해보자. 정말로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생각해보는 게임이다. 여기에 게임 테이블과 게임 말 한 세트가 있다. 당신과 나는 게임 운영자로서 게임에 참가한 모든 사람을 위해 최선의 규칙을 정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 조건에서 출발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정된 지역에서 함께 산다. 즉, 우리의 게임 테이블이다. 그 지역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모두 있다. 충분한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각자에게 필요한 공간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고 나이 든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최상의 사회를 건설할 때 무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게임 테이블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한다. 자신이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예쁜지 못생겼는지, 강한지 약한지, 젊은지 늙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들은 전혀 모른다. 그들의 성격, 취향 그리고 능력 위에는 ‘무지의 베일’이 덮여 있다. 그 사람들은 비유하자면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 상태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서로가 잘 지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서로 잘 지내기 위해서는 혼란이 일어나거나 무정부 상태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규칙을 정해야 한다. 그들도 누구나 제일 먼저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음용수를 확보하려고 하고, 잘 먹고 잘 자기를 원한다. 그 밖의 욕구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무지의 베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도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의지가 될 수 있는 규칙을 정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
당신은 이 사람들이 어떤 원칙에 제일 먼저 의견일치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정하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무지의 베일 아래서는 자신이 실제 삶에서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없다. 무지의 베일은 개개인의 이해가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보장해준다. 베일 밖 실제 세상에서는 자신은 상당히 불리한 조건에서 살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장 약한 자의 입장에서 보편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래야만 극단적인 약자가 피해를 입지 않는 공정한 규칙을 정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어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이 몇몇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모든 주요 재화의 분배 규칙을 정할 때에도 이에 관한 모든 의견을 모아 일단 목록을 만들고, 그런 다음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자유와 기본재화를 보장해주는 규칙이 무엇인지, 가장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은 순서에 따라 규칙의 순위를 정한다. 그 누구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더 많은 혜택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칙이 정해진다.
①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이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된다. 단,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경우에만 제한될 수 있다.
②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과 같이 제거되어야 한다.
a) 목표로 삼은 복지 수준은 가장 불리한 사람에게도 최선의 이익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b) 기회는 공정하고 균등하게 주어진다. 모든 재화는 원칙적으로 누구나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이러한 규칙이 효과가 있으리라 확신하는가? 아니면 적어도 이에 동의는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와 정신적인 계보가 같은 사람이다. 이 모델은 그가 만든 것이다. 롤스는 철학자가 되기까지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아왔다. 그는 다섯 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두 형제는 디프테리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존에게서 디프테리아가 전염된 막내 동생이었다. 롤스의 부모님은 정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어머니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민주당 당원이었다.
존 롤스는 부유층을 위한 사립학교를 나온 후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에 진학했다. 바로 그 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롤스는 입대하여 태평양의 뉴기니와 필리핀에서 보병으로 복무하였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직후에 롤스는 일본으로 갔고, 그는 히로시마에서 끔찍한 상황을 목격했다. 군에서는 그에게 장교가 되기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곧바로 군을 제대하였다.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윤리철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그의 논문 주제는 ‘인간의 특성에 의한 판단’이었다. 롤스는 철학자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964년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교에 있는 명문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롤스는 훌륭한 연설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더듬었고 매우 수줍어했고, 동료와 학생,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겸손했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는데 주로 신발을 벗은 발을 소파 모서리에 얹고 무릎에는 메모장을 대고 있었다. 그는 상담할 때에는 언제나 메모를 했고, 메모한 내용을 나중에 정리하여 상담 받은 사람에게 주었다. 그는 결코 스스로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학은 평범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심사숙고’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1995년부터 몇 번에 걸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로 인해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다. 존 롤스는 2002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수많은 책과 논문을 썼지만, 그 중에서 단 한 권의 책으로 철학사적인 의미를 획득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나온 윤리 서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에 속하는 『정의론』은 실제로는 현대 도덕철학의 기념비적인 시도인데, 그 이론의 배경이 되는 원칙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것이 정의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낸 사회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이다. 그러므로 사회질서는 개개인 모두가 그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에 찬성할 때 비로소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 원칙은 공정한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기본적인 자유를 소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재능은 각기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므로 그런 사회에서도 점차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능력이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사업적 감각이 뛰어나고, 또 단지 운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셈이다. 이 현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국가가 공정한 원칙을 지속적으로 지키도록 하기 위해 롤스는 또 하나의 규칙을 제시했다. 즉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피할 수 없지만, 그 불평등을 가장 불리한 여건의 사람이 그로 인해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때에 한해 불평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규칙이다.
롤스가 훗날 밝혔듯이 『정의론』은 원래 몇몇 친구들만을 대상으로 쓴 책이었지만 23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만 2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롤스는 큰 명성을 얻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30년에 걸쳐 끊임없이 갈고 닦았다. 철학사에서 롤스의 『정의론』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상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에 따르면 국가는 쌍방의 계약관계에서 시작되고 이상적인 국가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계약으로 확정된 국가라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존 로크는 이러한 사상을 17세기에 받아들여서 면밀하게 가다듬어, 그 결과를 계약이론의 초안으로 제시하였다. 루소도 이를 근거로 일종의 사회계약론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서 사회계약이론은 이미 더 이상 가치가 없는 낡은 사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지어 윤리론 자체를 철학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들은 그에게는 비논리적으로 들렸고 무의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해보면 롤스가 1960년대 말에 사회계약이론의 오랜 전통을 다시 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회정치적인 격동의 시대에 롤스의 이론에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71년 베트남 전쟁이 정점에 이르렀고, 그로 인해 대규모의 반정부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어디서나 국가와 재산권뿐만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서로의 화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립하였고, 두 이념 모두 베트남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 흉측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롤스의 책이 출간되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반응이 나타났다. 즉, 그의 저서를 위대한 화해의 시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균등을 지향하는 롤스의 체제는 우익에게는 너무 좌파적이었고, 좌익에서 그는 여전히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소심한 진보주의자였다. 이와 같이 상반된 입장 차이로 인해서 아군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태도가 횡행하였기 때문에 매우 세심하게 집필된 『정의론』은 철학 분야의 다이너마이트가 되었다.
보수적인 비판가들은 롤스가 고안한 가상의 ‘원초적 상태’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허구적인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원초적 상태란 이미 루소가 인식했듯이 일종의 사상적 구상인데, 그것에 대한 평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정의와 공평성은 인간이 가진 진정한 추진력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는 롤스가 밝혀놓은 원초적인 상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롤스는 가상의 원시상태를 바탕으로 정의를 향한 인간의 욕구가 위대하다고 주장했지만, 비판가들의 의견은 롤스의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기주의와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무제한적인 욕망의 추구이며, 이러한 추진력은 모든 사회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18세기의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사회를 경제적 또는 윤리적으로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이기주의라고 자신있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이유는 푸줏간 주인의 휴머니즘 덕분이 아니라, 그가 거기서 이익을 얻을 가능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푸줏간 주인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은 자기 상품을 남들보다 싼 값에 팔든지 아니면 적어도 고객의 경제 수준을 고려해 공정한 값에 파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자유시장경제’ 내에서도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소유욕은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를 이끌어서 “의도하지 않게, 심지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사회의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롤스의 하버드 대학 동료인 로버트 노직을 필두로 20세기 애덤 스미스의 팬들은 이러한 논리로 모든 사회현상을 변호하고 나섰다. 인간 사회의 진정한 추진력은 이기심이지만 이를 통해서 도달한 결과가 언제나 상이한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손이 그때그때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기주의 이외에 다른 추진력은 한 사회의 설계도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직은 롤스가 사회의 규칙을 공평성의 원칙에 따라 정하고자 한다면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스스로 타고난 재능을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고, 자연적 또는 사회적 재화를 얻기 위한 경주에서 우연히 차지한 유리한 출발선을 남에게 넘겨주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노직에게 롤스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변장한 사회주의자에 불과하였다.
롤스가 사회주의자인가? 그의 견해를 사회주의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자 하면 악의에 찬 비웃음이 돌아올 뿐이었다. 여기서도 비판의 발단은 역시 가상적인 원초상태이다. 인간이 아무리 무지의 베일에 덮여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언정, 그들은 모두 자유로운 인격체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를 정의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모든 면에서 동일한 자기결정권과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 어린아이들과 중증 정신지체 장애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의 이해능력은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결정에 참여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정상적인 의사표시 능력이 있는 개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고아 또는 중증 정신지체 장애자들을 참여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출발점은 아무리 가상적인 사상이라 하여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원칙적으로 동일한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평등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롤스의 가상적인 원초상태라는 도식을 서로 상이한 여러 나라 또는 지역에 적용해보면 평등의 문제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이익을 균등하게 분배해주는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의 성공과 행복을 증진시켜준다고 하여도, 그것이 곧 그 사회가 여타의 사회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공평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보장은 아니다.
피터 싱어는 부유한 나라의 주민들은 모든 잉여이익을 끼리끼리 나누자는 데는 쉽게 합의할 수 있지만, 이를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데는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이 공평한 이익을 누리는 경우의 수는 롤스가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 싱어가 제기한 반론의 핵심이다. 롤스의 주장 중에서 재산과 관련된 문제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노직이 볼 때 롤스의 좌파적인 주장은 좌익 비평가들의 눈에는 지나치게 우편향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롤스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정치적인 기본 자유로 간주했는데, 재산은 인간이 개인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동시에 자기존중에 기여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도 존중할 수 있고, 이러한 사람이 곧 도덕적인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롤스의 도덕론에 대해서 일부 비판가들은 재산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았지만, 롤스는 이 논쟁을 더 확대시키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롤스의 『정의론』에는 매우 자세하게 분류된 용어색인이 붙어 있지만 거기에 ‘재산’과 ‘소유’라는 개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롤스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모델을 만들고자, 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원칙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에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철학책이 이 세상에 나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롤스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핵심이 되는 세 가지 논점을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배제한 채 중립적으로 고찰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논란이 되는 첫 번째 문제는 가상의 사고 구조에 바탕을 둔 사회모델, 즉 원시상태의 가치에 대한 문제다. 여타의 사회계약론과는 달리 롤스의 원시상태는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의 상태다. 이를테면 토머스 홉스가 지적한 전형적인 자연 상태의 특징, 예를 들면 폭력이나 무정부 상태 또는 무법 지대 등은 롤스의 모델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롤스의 원시상태는 오히려 문명화된 협동조합에 가깝고, ‘모두에게 충분한 재화’를 보장하는 롤스의 물질적 기반은 경제적인 안정을 구가하는 스위스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롤스의 원시상태에서 사하라사막 남부의 척박한 땅 또는 홉스가 염두에 두었던 가난하고 비참한 17세기 영국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롤스는 인간의 본성은 자유롭고 온유한 방향으로 발전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 자연과 결핍에 내재된 어두운 면은 일단 배제해놓는 세심함을 보였다.
만일 롤스의 원시상태가 파국적인 사태나 결핍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아무리 무지의 베일로 가려놓은 상태라 하여도 단결심이 형성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곧 홍수가 닥치는데 기회균등을 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구명보트에 먼저 올라타려고 싸울 것이 분명한 것이다.
두 번째 논점은 롤스가 주장하듯이 정의가 사회에서 실제로 지배적인 요인이냐 하는 문제이다. 원시상태의 으뜸이 되는 자리는 자유가 차지하고, 자유는 제2위의 자리에 있는 정의에 의해 제한되는데, 정의는 기회균등과 사회적 균등에 의해서 규정되고, 제3의 순위에 효율성과 복지가 자리한다. 정의를 높은 자리에 앉혔다는 점에서 롤스는 많은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론도 호감을 얻었다.
이를 테면 쿠웨이트 같은 독재 복지국가는 롤스에게는 가난한 민주주의보다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롤스와는 다른 견해를 지닌 사회비평가들은 정의보다는 다른 덕목을 더 중요시하였다. 정의롭지만 가난한 사회보다는 정의롭지 않더라도 안정적이고 잘사는 사회를 선호하였던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이 복지로 향상된 행복에 한 표를 던질 때에 롤스는 정의를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정의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롤스는 “정의로운 것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논의를 거듭해도 단 하나의 가치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사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호감이 더 많이 가는 가치 또는 호감이 덜 가는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치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롤스의 이론처럼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심사숙고한 이론도 이 문제에서 예외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세 번째 관점은 이성에 관한 문제이다. 철학자로서 롤스의 입장은 입법자와 마찬가지이다. 그는 보편적 효력을 지닌 규칙을 만들어내고자 모든 남성과 여성의 요구사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하였고, 그 논리와 정당성을 꼼꼼하게 검토하였다. 유감이라면 단지 중증 정신지체 장애자는 여기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롤스는 자의 원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견해를 밝혀놓았지만, 문제는 과연 모든 사람들이 롤스의 주장처럼 그렇게 현명하고 강직하며 또 이성적인가라는 점에 있었다.
롤스의 저서 『정의론』의 내용은 재산에 매우 큰 비중을 할애하였고, 그 이론의 출발점은 정의감이라는 감정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에 실린 색인을 살펴보면 ‘재산’ 및 ‘소유’와 마찬가지로 ‘감정’ 또는 ‘정서’라는 용어도 아예 제외되어 있다. 재산과 정의감이라는 것이 롤스의 이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원시상태에서도 정의감의 원천은 혹시 자신의 이익이지 않을까? 이렇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닥칠 수 있는 위험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이 두려움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두를 보호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찾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롤스의 정의감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열려 있다. 감정에 대해서는 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감정을 언급하는 대신에 롤스는 단지 ‘정의에 대한 감각’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심리적 원천에 대한 설명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질투나 시기처럼 정의감을 부연 설명해 줄 수 있는 여타의 감정들도 역시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다. 롤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의론이 하필이면 감정을 바탕으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프로이트는 “불이익을 당하는 자만이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하였으나, 롤스는 마크 하우저와 유사한 관점에서 도덕감각을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롤스는 자신의 이론에 바탕이 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그 이상으로 상세하게 밝혀놓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필시 그가 이 본능을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칸트와 같은 관점에서 타고난 이성의 법칙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의 가치가 높은지, 아니면 복지의 가치가 높은지를 판단하는 문제에서 롤스는 공리주의자들과 입장을 달리하였다. 제러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개인의 행복에 있었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정의로운 사회에 도달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던 반면에 롤스는 정의사회가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를 설득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벤담이나 밀에게 국가는 필요악인 반면에 롤스에게는 도덕적 입법자였다. 바로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정치 일선에서 노선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정의는 일차적으로 국가의 과제인가? 아니면 개인이 다해야 할 도덕적 의무인가?
오직 개별적인 인간의 이익이 문제가 될 뿐, 그러한 개인의 행위가 다른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국가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벤담과 밀의 견해였다. 국가의 소임은 야간경비 소임과 같아서 급할 때만 경보를 울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롤스의 국가는 여기저기에서 균등하고 정당한 이익을 관리하고 감시한다. 국가는 현명한 독재자이고 열성적인 교육자다. 사회 전체의 다원성이 위협을 받거나 위험에 빠지면 개인적인 삶의 다원성은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롤스의 의견이었고, 이는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룬 주제였다. 정치와 종교 또는 여타의 세계관과 관련된 파벌형성에 무제한적으로 관용을 베푸는 국가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다원성은 정치사회적인 다원성을 해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 및 롤스의 이론은 국가사회주의의 획일화에 공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하나의 획일성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며 결국 답보하거나 멸망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들의 정신적인 아버지격인 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펼친 견해도 이와 마찬가지의 것이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자유로운 발전도 더 이상 논의될 수 없다.”
롤스의 이론을 비롯해 모든 정의론에서 정의와 행복을 거의 같은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서, 정작 행복 철학에서는 정의를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롤스는 행복을 정의함에 있어서 매우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추어서 자신에게 가장 현명한 장기적인 인생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이러한 인생계획 그 자체가 곧 복지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러한 인생계획을 실행에 옮김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성공한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다.”
정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짓을 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짓을 당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은가?
사람들은 ‘정의Justice’ 또는 ‘진리’ 같은 낱말을 들으면 전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정의가 무엇인가, 또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정의나 진리 같은 낱말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즉 거창한 낱말들이기는 하지만 분명하고 일정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정의’나 ‘진리’ 같은 용어의 의미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매우 일반화된 태도는 다음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질문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이 경우에는 어떤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떤 구체적인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정의로운지를 말하는 것보다 정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구체적인 경우에 무엇이 참인가를 말하는 것보다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이 진리와 정의 같은 ‘거창하고’, ‘어려운’ 낱말을 꺼리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또 다른 원인은 사람들이 정의라는 낱말이 서로 상충되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유럽의 사상사에서 저명한 철학자들이 정의라는 낱말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했으며, 일상에서 사용되는 의미도 서로 다르다고 느낀다. 여기서 근본 의미를 소개해보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정의라는 명사, 또는 ‘정의로운’이나 ‘정의롭지 못한’이라는 형용사의 의미 말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의미를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그 말을 사용한다. 즉 “그것은 정의롭다” 또는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의 ‘정의’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상기시키려는 게 이 논의의 목적이다.
‘정의’의 세 가지 의미
이 의미들 가운데 첫 번째는 평등의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이다. 이 의미의 정의(공평)는 대등한 것을 대등하게, 대등하지 않은 것을 대등하지 않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몇 가지 예로 설명하면, 먼저 경미한 절도를 범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사람은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반면에 다른 사람은 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정의로운 것인가, 아니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 만일 어떤 범죄와 그를 둘러싼 정황이 모두 같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같은 정도의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같은 정도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한 사람은 경미한 절도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은 중절도에 폭행까지 저질렀다고 가정해보자. 중함이 서로 같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이 두 사람에게 같은 벌을 내리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더 중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 더 중한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정의로운(공평한)’이라는 표현을 대등한 것을 대등하게, 대등하지 않은 것을 대등하지 않게 취급한다는 의미로 단순하게 사용한다.
다른 예를 보자. 민주주의에서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든 성인들이 정치적인 권리이며 특권인 참정권을 갖고 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투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정의롭다고(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즉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시민권을 허용하고 다른 사람들은 인종과 성별, 종교, 재산의 적음 등을 이유로 배제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고(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성인은 동등하며, 이 동등성을 바탕으로 동등한 법률상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동등한 지위가 바로 시민의 지위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동등하게 대하려면 당연히 모든 인간에게 동등한 시민의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의’를 동등의 의미로 사용하는 또 하나의 예는 불공정 거래의 반대인 공정 거래의 경우이다.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준 것이 여러분이 그 대가로 내게 준 것보다 가치가 더 크다면 그 동등하지 않은 거래는 불공정한 거래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정의롭지 못하다고(불공평하다고) 규정한다.
정의의 두 번째 의미에 대해 말해보자. 사람들은 정의에 대해, 각 개인에게 그가 받아야 마땅한 것을 그에게 주는 것, 즉 각 개인에게 그에게 속하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빚을 갚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것이 있던 그가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둑질하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그 사람에게서 가져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정부를 정의로운 정부라고 부른다. 우리가 자연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며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이 누려야 마땅한 것을 개인에게 주지 않는 정부는 정의롭지 못한 정부이다. 반면에 개인의 자연권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정부는 같은 이유로 정의로운 정부이다.
그럼 정의의 세 번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법을 지키는 사람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즉 정의로운 사람은 법을 지키는 시민인 것이다. 반면에 범죄자와 같이 법을 어기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다.
정의의 세 가지 의미를 서로 조화시킬 수 있다
이제부터는 정의의 이 세 가지 의미가 서로 잘 조화된다는 것, 즉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거나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정의’라는 근본 개념이 제기하는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정의와 불의의 세 가지 의미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의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우선 그는 정의의 개념을 이른바 일반 정의와 특수 정의로 나눈다. 그가 말하는 특수 정의는 인간이 상품 거래를 하거나 재화를 분배할 때 서로에게 공평하기 위해 지켜야 할 특별한 덕목을 가리킨다. 우리가 공정 임금, 공정 계약, 공정 가격, 공정 거래 등의 말을 할 때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으로서, 특히 경제 분야에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품과 서비스의 거래 또는 지위와 부담과 특권의 분배 등과 관련된 특수한 정의의 미덕인 것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일반 정의는 특수 정의와 상당히 다르다.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내는 행동과 관련된다. 즉 공익을 위해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런 사람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로운 사람이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에서나 공익 또는 공공복지에 기여하는 면에서 덕이 있는,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일반 정의’라는 개념의 기초는 무엇일까? 그것은 행동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근본적인 정의로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 즉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그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두 가지 의미의 정의에는 거래의 공정성이라는 의미의 정의와 함께,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해 훌륭하게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준다는 의미의 정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의미의 정의, 즉 법의 준수라는 의미를 가진 정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세 번째 의미의 정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 정의의 일부로 다룬다. 그 같은 사실은 그가 일반 정의와 특수 정의의 관계는 준법과 공정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을 준수하는 한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롭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공정 가격, 공정 임금 등의 공정 거래 같은 것에 대한 규범은 우리가 속한 국가의 법률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공정한 거래만을 다루는 특수 정의는 준법, 즉 사회의 법률들을 전체적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일반 정의의 일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법률 자체의 정의의 문제이다. 만일 법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 법을 지키는 것이 곧 정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재 국가나 전체주의 사회, 또는 파시스트는 정의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런 나라의 법률을 지키는 것이 사람과 행동을 정의롭게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여러분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법을 지키는 것은 그 법 자체가 정의로울 경우에만 정의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란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법을 지키는 사람은 법 자체가 정의로워야만 정의롭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정의롭다.”와 “법이 정의롭다.”는 말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사람에게 적용된 ‘정의롭다’는 그가 법을 지킨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의 ‘정의롭다’는 “그가 지키는 그 법은 정의롭다.”는 말에서처럼 법에 적용된 그 낱말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자연에 근거한 정의와 협약에 근거한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법이 정의롭다.”고 할 때의 정의와 어떤 사람이 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의미로 “그가 정의롭다.”고 할 때의 정의가 서로 다른 의미라는 사실에 직면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했는데, 즉 자연에 근거한 정의와 협약에 근거한 정의를 구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사회에는 교통법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길모퉁이에서는 차를 멈추고, 어떤 속도로 운전하며, 도로의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주행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이 사항 중 어느 것도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사회의 협약을 토대로, 예를 들어 입법부나 교통위원회가 어떤 내용을 교통 규칙이라고 결정하면 그때부터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 이것은 그 법이 그가 사는 사회의 법규 또는 규정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원래부터 좌측 주행이 옳고 우측 주행이 그르다든가, 반대로 우측 주행이 옳고 좌측 주행이 그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도나 살인에 대해서는 설사 아무 법도 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는 행위는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절도를 금지하는 법의 정의는 협약에 근거한 정의가 아니라 자연에 근거한 정의라는 것이다. 즉 이 정의는 절도나 살인 같은 행위들의 자연적인 옳고 그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법의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는 자연에 근거한 정의의 원칙일 수밖에 없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법을 지키는 사람에 대해 정의롭다고 말할 때의 정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법이 정의롭다든지, 그렇지 않다든지 하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자연에 근거한 정의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에는 법이 정의롭다든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어떤 사람이 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그를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즉 이 경우에는 정의로운 법이라든가 정의롭지 못한 법이라든가 하는 말을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의 토대가 되는, 또는 법에 선행하는 정의가 없다면 법의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사회의 법 자체, 즉 현행법이 정의의 유일한 척도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한 사회에서 정의로운 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자연에 근거한 정의’라는 기준 또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유효할 테고, 따라서 우리는 그 원리를 기준으로 어느 사회의 법이든 그것의 정의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의 행동이 정의로운지 또는 정의롭지 못한지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무언가가 법의 배후에 또는 법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에 근거한 정의가 있는가?
우리가 법을 지킴으로써 정의로울 수 있는가, 또는 그럴 수 없는가를 최종적으로 좌우하는 법과 정부의 정의의 문제는 서양 사상사에서 정의의 개념과 관련하여 나타난 가장 심각한 정치적 문제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입장에 대해 설명해보자.
국법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정의가 있을까?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있다. “정의란 전적으로 국가의 법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국가의 법률이 명령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옳은 것을 하도록 요구하는, 자연에 근거한 정의가 있어서 그것이 법률과 정부, 즉 국가 자체의 정의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로마 시대, 중세, 근대의 몇몇 철학자들은 자연에 근거한 정의가 존재하며 이 원칙이 법과 정부의 정의의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편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천부적인 반성 능력을 통해 절도와 살인 같은 짓은 나쁘고,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정의롭지 못하며, 그런 짓들을 금지하는 법은 정의로운 법임을 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의 개념은 모든 개인에게는 양도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가 있음을 내포한다고 주장한다. 그 천부의 권리는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에 언급되어 있는 권리들과 미국 「독립선언서」에 언급되어 있는 기본권리들로, 모든 개인의 행복 추구권과 자유권, 언론과 사상의 자유 등을 말한다. 이 권리는 인간이 천부적으로 소유하는 권리이며 인간의 존엄성의 일부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이 권리를 존중하고 지켜주는 정부와 법은 정의로운 반면에 이 권리들을 침해하는 정부는 정의롭지 못한 정부라는 의미의 나쁜 정부라고 주장한다. 「독립선언서」에서도 정의로운 정부는 이 기본적이고 천부적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보장하는 정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법률은 우리에게 옳은 것을 명령하고 그른 것을 금지할 때에 정의롭다. 그리고 정부와 헌법은 인간의 자연권을 보장하고 존중할 때 정의롭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와는 반대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에 근거한 정의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어느 사회에서든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와 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법과 정부는 각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도 각 사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즉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법에서 정의로운 것이 그리스의 법에서 정의로운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에는 토마스 홉스나 베네딕트 스피노자 같은 정치 철학자들이 법과 정부에 앞서는 어떤 정의도 없으며, 모든 정의는 정부의 성격이나 법의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힘이 정의다
홉스는 정부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사는 인간, 말하자면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는 정의와 불의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이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전쟁에서처럼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홉스에 따르면 정의와 불의의 개념은 사회 속에 사는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없는 곳에는”, 즉 정부를 갖춘 시민 사회가 아닌 곳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홉스에 따르면 정의의 본질은 자신이 속한 주권 국가의 법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국내법을 위반하는 행위는 불의인 반면에 그것을 준수하는 행위는 정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밖의 것은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것은 원래부터 자신의 생존력과 영향력만큼 권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자연상태에서는” 즉 사회가 아닌 자연의 상태에서는 “우리가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 정의와 불의의 구별은 시민 국가, 예를 들어 미국처럼 정부가 지배하는 사회에만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스피노자도 홉스와 마찬가지로 정의는 단지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일 뿐이고 불의는 그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는 어떤 법이든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가 집행하는 법률 자체가 정의롭다든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률 자체의 정의나 불의 같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원칙이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어떤 법을 제정하든 그것은 법이며, 그 법이 곧 그 사회에서 유효한 정의의 기준이다. 우리는 이 법 자체가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이 두 번째 입장은 흔히 “힘이 곧 정의이다.”라고 표현된다. 이것에 의하면 사람들이 가진 모든 권리는 국가가 법률에 따라 그들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국가는 그 권리를 그들에게서 다시 빼앗을 수 있다. 양도할 수 없는 천부적인 권리는 없다. 모든 권리는 법에 따라 부여된 권리이므로 법의 변경을 통해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정의롭다는 것은 기회주의와 같다. 즉 법을 지킴으로써 정의롭다고 봐야 할 사람은 단지 자신의 이익을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법 자체가 옳아서가 아니라 벌이 두려워서 법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은 단지 자신의 이익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국제 관계에서의 정의, 즉 국가 간의 정의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정의는 개인이 속한 개별 국가 내에서만, 즉 개별 국가의 법 아래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가 사이에는 어떤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법은 주권 국가들의 서로에 대한 행동이나 국제 문제에 대한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정의와 법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이 주요 입장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즉 자연에 근거한 정의가 존재한다는 견해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전해져 왔듯이 자연에 근거한 정의는 없다는 이 견해도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 제1권에는 특징적인 구절이 나오는데, 위대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쿠스는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정부의 형태에 따라 법은 민주적이기도 하고 귀족주의적이기도 하고 전제적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각각 강자들의 특수한 이익에 따를 뿐이다. 이렇게 강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이 법률들이, 바로 그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정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법률을 위반한 사람을 범법자이며 정의롭지 못한 자로 처벌한다.” 법 자체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에 주의하라. 법은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정하며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다. 트라시마쿠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모든 나라의 정의의 원칙은 같으며, 그것은 정부의 이익이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에 대해 힘을 가진 존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 결론은 어디서나 정의의 원칙은 오직 하나이며 그것은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힘이 곧 정의이며, 정의는 기성 권력에 따르는 것이고, 힘이 있는 곳에 정의가 있으며, 우리는 힘의 법에 복종하거나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정의와 법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견해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갈등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자연에 근거한 정의가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서로 다투는 양쪽 중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오직 힘이 정의라는 두 번째 견해를 취한다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또는 민주주의 국가들과 전체주의 국가들 사이의 투쟁은 단지 권력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 갈등은 최종적으로는 오직 힘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으며, 옳은 쪽이란 단지 이 투쟁에서 승리한 쪽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정의와 법에 대한 쟁점은 ‘정의’라는 근본적 개념과 관련된 유일한 문제는 아니지만, 정치 철학 전체에 걸쳐 정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법과 정부의 정의, 개인의 정의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의에 관한 다른 문제들까지 확장하면 이 논점이 전부는 아니다. 한 예를 들자면,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짓을 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짓을 당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이 제기하는 기본적인 윤리 문제가 있다.
정의(justice)를 깊이 있게 철학적으로 따져본다.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에서 옳다(디카이오스 divkaio/dikaios)란 우선 무엇보다 관습적인 결정과 풍습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의(디카이오쉬네 dikaiosyne)란 이러한 결정이 깨졌을 때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오디세이아 Odysseia』에 이런 대목이 있다.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을 침해하는 것은 ‘정의’를 거스르는, 즉 관례에 반하는 것이다. 음, 이것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는 정의를 풍습에 맞고 맞지 않고 하는 따위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도 정의는 폴리스의 정치적 개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를 달라진다. 여기서 정치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폴리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대립되는 이해관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하는 방법들을 말한다. 그리고 정의는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이루어진 최선의 균형이라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말한다. 부정은 이러한 균형이 결여된 상태, 즉 불균형 상태이다.
요컨대 정의를 행하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균형이 깨졌을 때 바로잡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간단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균형이 깨지는가,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실은 고대부터 오랫동안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현대철학에서는 존 롤스의 『정의론』이 참고가 된다. 롤스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 경우 이를 회복하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 여기서 사회의 공동선은 자유이다.
그는 ‘혜택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혜택 받은 사람’의 자유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회복적인 정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전제를 요구했다. 타자의 생활도 성별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회계약을 맺는다. 이로써 사회 전체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의 기본구조는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용 가능한 기본재를 극대화하고 만인이 향수하는 평등한 기본적인 자유를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만 한다. – 롤스 『정의론』
롤스는 의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개념에 가까이 서 있다. 사회에서 불평등한 입장의 사람은 유리한 입장의 사람을 희생시켜 불이익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미국의 정치와 경제정책에 직접 영향을 끼치면서 여러 논쟁을 유발했다.
롤스의 이론에 대해서 노직 R. Nozick은 일찍이 로크가 생각한 소유권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반론한다. 사회계약의 원리에서 보면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회복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유지만 모두 자유를 행사하면 전쟁상태가 되고 각자의 자유도 피해를 입는다. 이것을 인식한 인간은 사회를 형성한다. 최소한의 제약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의 자유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서다. 사회계약의 기본 사고이다. 그러므로 롤스가 말한 것처럼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늘리기 위해 다른 구성원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사회 형성의 원래 목적을 잃는 셈이다. 즉 정의에 반한다. 이것이 노직이 주장하는 요지이다.
언뜻 대립되는 듯이 보이지만 롤스와 노직의 이론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사회가 형성된다고 생각한 점이다. 롤스가 가장 우선시하는 원칙은 인간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직도 사회의 임무는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을 넘어서 불평등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의에 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근대 초기 국가이론인 사회계약론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적인 계약 개념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가령 인간이 계약으로 사회를 형성한다는 전제에서는 인간이 우선 사회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 속에서 성장하고, 인간과 인간의 유대관계 속에서 개인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사회적인 프로세스를 무시한 ‘무지의 베일’과 사회계약이론을 사회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가 있다.
매킨타이어도 비판하듯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라는 전제도 위험하다. 사회의 역사적 배경을 배제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은 역사 속의 특정 사회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사회의 배경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현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령 전후에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해서 생전의 일본군의 행위에 대해 아무 잘못도 없고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풍요로운 나라에서 태어났는가 그렇지 못한 데서 태어났는가는 역사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음, 점점 ‘정의’의 어려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 사회계약론에서 사회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정의를 자유의 카테고리에서 생각해도 되는가. 너무 당연한 일인가.
레비나스의 사상을 예로 들자. 그는 인간의 최고 목적이 자유 추구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에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로서 행동하지 못한다. 우리는 부모나 아이, 남편이나 아내, 친구나 이웃이다. 그런 자격으로 다른 사람들과 만난다. 이 타자와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유의 원칙이 아니다. 타자를 배려하는 것도 배려를 요구하는 타자에 대한 바람 때문이 아닌가.
여기서 인간은 자유 이전에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그리고 책임을 다함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때 정의는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곳에서 정의가 가능한 것이다. 주체가 자신의 자유에 심문을 가하여 자신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이는 곳에 도덕성이 생겨난다. 정의는 이렇게 타자와의 관계(성)에서만 생겨난다. 레비나스의 주장이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생각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는 정의는 ‘완전한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법을 정하면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는 것도 있다. 그곳에는 이미 폭력성이 숨겨져 있다. 미국의 헌법을 보자. 사회계약의 전형이며 롤스의 정의론도 이를 기초로 삼는다. 하지만 헌법에서 보호되지 않는 주체도 많이 있다. 가령 원주민과 동물, 그리고 미국의 자연 등이 모두 배제되어 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다른 나라의 법률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법은 하나의 사회에서 한 지방 언어를 사용하여 정한 것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한 사회의 관습, 풍습, 언어를 모르는 ‘타자’를 그 사회의 법률로 벌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된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법이 없으면 정의는 소멸한다. 그러나 법 가운데는 폭력이 있다. 하나의 결론은 없다. 하지만 정의를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사상이 사회계약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다. 데리다의 정의는 ‘모든 계약에 앞서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