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1절을 맞아 온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38년 간의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행각을 벌인 인사들의 명단이 발표된 것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문화, 예술, 경제, 언론, 학계 등 각계 각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고 친일로 돌아섰지만 그러나 반대로 또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소양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일제 강점기 동안에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도자요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수호운동을 선도하다가 마침내 일제에 의해 고문 끝에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 학생 주기철과 민족정신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에서 주현성 장로의 4남 3녀중 4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그는 춘원 이광수의 애국강연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춘원은 오산학교의 학생모집을 위해 부산에서 마산으로 가던 중 우연히 웅천을 들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변절하기 이전이었던 춘원의 이때의 강연은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일제의 탄압에 대한 분노를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강연에서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주기철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그가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로까지 가게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남강 이승훈 장로와, 고당 조만식 장로 그리고 유영모 선생 등과 같은 민족의 선각자들의 지도하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오산학교에서의 시절은 기독 신앙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하는 것이 민족과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며 깨닫는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목사가 되기까지
1916년 19세에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남강과 고당의 권유에 따라 헐벗고 굶주리는 민족을 배불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채 1년도 지나지 못해 눈병이 악화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고향인 웅천으로 돌아와 웅천교회의 집사로서 봉사하는 동시에 야학과 청년운동에 힘을 쏟게되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한국 청년들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총독부의 세입 증대를 위하여 도시마다 홍등가를 만들고 공창제를 운영하는 한편, 아편 재배를 허용하고 담배생산을 장려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일제의 계략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금주와 금연을 강력하게 권면하였고, 일제는 이런 운동의 선봉에 섰던 길선주 목사를 구금함으로 한국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더욱이 1917년 그가 존경하던 춘원 이광수의 변절과 그가 공개적으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본 주기철은 한국교회와 또 민족에 대한 생각을 더욱 깊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주기철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1930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에 <부산진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 부흥회 이적이 나타났다>라는 보도기사를 보면서부터 였습니다. 이 기사를 본 주기철은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그의 생애동안 그 때까지 경험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되었습니다. 집회도중 그는 자신을 압도하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없이는 자신은 너무도 나약한 피조물이요 죄인일 뿐임에 대한 깨달음이었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나서려고 하는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인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불의와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주독립과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 또한 어떤 능력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회개와 헌신의 마음으로 1922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1925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26년 1월 1일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주기철 목사는 1936년 여름 평양의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받게 되었고 이 교회는 그의 순교적 항일 투쟁에 그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울 만큼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교회들이 있었으며, 산정현 교회는 그런 평양에 있는 기독교회들 중에서도 단연 중심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산정현 교회는 일제의 탄압에서 그와 같은 평양과 기독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조만식 장로를 보내어 주기철 목사를 초빙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3. 신사참배거부운동과 일사각오의 신앙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더욱 노골적이고 억압적인 방법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일본 천황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를 위하여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여 외우게 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제정하여 학교와 관공서에서 아침 조회시간마다 하게 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조선인들에게 신도의식에 참여하도록 법을 제정하고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였으며, 살아있는 신이라고 일컬어 졌던 일본 천황의 사진과 일장기 사진 등을 학교 교실마다 붙여 놓고 매일 학생들로 하여금 경배하게 하였습니다. ‘신사’란 원래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의 제사장소로서 일본 역대 천황과 나라를 위해 순국한 군인들과 조상들의 위패를 한 곳에 모아놓고 참배하는 사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는 조선인들의 민족정신 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에 의해 조선인들에게 천황숭배와 내선일체(조선과 일본의 하나됨)를 강요하는 폭압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현재 조선 전국에 신궁 2곳, 신사 77곳이 세워져 있었고 면 단위에 세워진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있었습니다. 한편, 일제는 각 가정에까지 일본의 개국신인 '아마데라스 오오가미(천조대신)'를 받드는 가미다나(일명 ‘신책’)를 두어 그것을 보면서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습니다.
한국 기독교회는 처음에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날 뿐 아니라 한민족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본의 계책임을 알고 산발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속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를 폐쇄하였으며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목사들을 내세워 교회들을 다니며 찬성 설득 강연을 하게 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회유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강요를 이기지 못한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신사참배강요에 굴하게 되면서 점차 노회들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고 마침내 1938년 9월 한국 장로교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은 한국 기독교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사건이었습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당에서 열린 제27회 한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되어온 목사, 장로, 선교사 등 총 223명의 총회 대의원들이 모여 총회장소 안팎을 둘러싼 97명의 일본 경찰의 감시아래서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이 때, 총회장은 신사참배안이 상정되자 가부를 묻지 않은채 서둘러 신사참배의 가결을 선포하려 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몇 선교사들과 총대들이 그 불법성에 항의하자 이들은 곧 총회장소를 둘러싸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제에 맞서 주기철 목사는 이미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때에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가결케 함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였고, 1935년 9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개최되었던 선교 50주년기념 부흥사경회에서 행한 [일사각오] 요한복음 11:16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의 중요 대지는 “1.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2.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3. 부활진리를 위하여의 일사각오” 였습니다. 이 설교에서 그는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예수를 환영하던 한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고 외침으로 한국교회와 기독신자들에게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어나 일제의 압박에 항거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의 설교와, 같은 해 금강산에서 열렸던 목사 수양회에서의 [예언자의 권위]의 설교에서는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또한 한국교회의 신앙의 순결을 위한 신앙정신이 어떠한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4. 투옥과 순교
1938년 2월 8일 산정현 교회당을 새로이 건축하고 헌당식을 드리는 당일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를 평양 경찰서에 검속하였습니다. 이는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는 주 목사의 입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1944년 순교하기까지 5차례에 걸쳐 총 5년 4개월간 계속되었던 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관련한 투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일제의 고문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춧가루를 푼 뜨거운 물을 코에 부어 넣는 고문으로 식도가 부어 식사는커녕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드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알코올을 먹인 심지를 성기 요도에 쑤셔 넣음으로 요도가 붓고 소변을 볼 때면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랫배의 통증으로 뒹굴게 만드는 성기고문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고문과 그로 말미암는 고통가운데서도 주 목사는 찬송하면서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함으로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하였습니다.
1940년 2월에 잠시 석방되어 평양 산정현 교회로 돌아온 주기철 목사는 주일날 그가 입던 옷 그대로 강단에 섰고 소문을 듣고 달려온 성도들로 산정현 교회는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한편 평양 3개 경찰서 형사들이 교회 안과 밖을 둘러 싼 가운데 주 목사는 [5종목의 나의 기도]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도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이 어디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드립니다....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 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 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내 어머님은 나를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셨는데 춘풍추우(春風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 들면 어머님 생각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라는 설교를 하였는데, 이는 그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늘 하던 5가지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설교한 것으로 그의 유언적 설교가 된 것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투철한 신앙과 민족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마침내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30분경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비록 몸은 온갖 고문으로 찢겨졌지만 얼굴에는 천국의 소망으로 인한 밝은 웃음을 머금은 채 평양 형무소에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운명을 다하였습니다. 다음의 글은 그의 유언적 설교의 한 부분으로 그의 일사각오의 신앙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과 영광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遺産)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