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당벧엘교회 구요셉목사님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 들어서 세계 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세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쟁 뿐 아니라 화산 폭발, 지진, 해일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뉴스가 다발적으로 나온 때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가슴 아픈 것은 미국의 교회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미국 교회는 주류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원래 미국은 크리스찬이 70~80%였습니다. 지금은 48%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줄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은 교회에 청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도 영국 교회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교회는 비워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숫자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분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자기의 본분을 하지 못한 것에서 원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진짜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다른 일에 집중하는 순간에 안에서부터 교회가 썩기 시작했습니다. 내부에서 무너지고, 코로나를 통하여 곪아있던 것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은 굉장히 인격적으로 선한 분이십니다. 교인이 3천 명이었는데, 성도 이름을 거의 다 외우고 계셨습니다. 가족들 인적사항도 다 알아 안부를 물으시며, 성도분께 잘하셨습니다. 당시 교인수 3천명에서 1만명되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도 너무 잘하시니 당연히 만 명은 거뜬히 모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도 교회는 성장 추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은 소식은 교회가 정체상태에서 코로나 이후로는 천여명 정도 출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무너지는데 코로나가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왜 이렇게 무너지고 있을까? 목사가 성도 한 분 한 분 사랑으로 돌보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요? 상상도 못했었는데, 참 많이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을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제가 보기에 세 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고 복을 내려주신다는 복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가 제일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복을 내려주시고 함께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예배를 잘 드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따놓은 당상이고, 너희의 삶과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너희를 성공시켜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위에서 말한 교회가 그런 쪽이었습니다. 다들 좋아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은사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기도에 집중하고, 하나님께로 부터 많은 은사를 받고 예언과 방언과 통변, 그리고 병 고침과 수많은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역사하시고 또 내 죄를 씻고 천국도 가고 이 땅에서 잘 되는 것, 은사교회 역시 알고 보면 잘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교회는 오로지 말씀 쪽으로만 들어가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여 말씀을 잘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제가 보기에는 다른 두 교회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더 낫습니다. 그런데 말씀 중심으로 가는 교회도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 중심적인 교회는 잘 믿으려고 하고 말씀 중심인 건 좋은데 은사를 부정하고 또 축복의 부분도 부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칫 판단과 정죄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 쉽습니다. 제가 이런 교회를 어릴 때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어릴 때 다녔더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목사님 설교할 때마다 자꾸 꾸중만 하고 뭐라 하니까 교회 안 다니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이 다니니까 할 수 없이 다녔지만, 저는 그 교회 탈출하는 걸 꿈꿨습니다. 교회 갈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진짜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갔다가 땅만 쳐다보다가 요즘 같이 핸드폰이나 있으면 핸드폰을 볼 테지만 없으니, 온갖 상상을 하다가 끝나면 빨리 도망왔습니다. 말씀이 중심되는 교회는 너무 드라이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세 부류 중 어떤 교회도 사실은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믿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에 왔다가 자꾸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에 교회가 부흥할 때, 천주교에서 시행했던 정책이 있습니다. 그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천주교가 먼저 한국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당시 3%가 안 됐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15% 가까이 성장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수환 추기경이 회의를 소집해, 천주교가 한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기독교가 주류가 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결론은 근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 선한 일을 하고 많은 좋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과 사회 전체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데 주력을 하자 그러면 많은 분이 우리 천주교로 올 것이라는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고 지금 천주교는 한국의 종교의 1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약 한 18%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의 따라붙은 것이니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추구했을 때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떠날 때 일부 불교로 가기도 했지만,천주교로 가는 분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근본을 추구하는 그쪽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럼,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가 오늘날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이유는 숫자를 늘려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숫자가 늘어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회복되고 전 세계 교회가 회복되려면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축복에 대해 살펴봅시다. 성경은 축복에 대해서 말씀 안 하고 계실까요? 아니요. 축복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축복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미국은 축복하는 교회가 없을까요? 미국도 이런 교회가 주류입니다. 사람은 똑같습니다. 예전에 ‘긍정의 힘’이란 책이 얼마나 히트했습니까? 저도 그 책이 너무 좋아 두 번 읽다가 아닌 것 같아 그만 두었습니다. 미국 교회는 하나님이 내 삶 속에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고 나를 이끌어주신다. 그리고 나에게 복을 주신다. 이것을 좋아합니다. 미국 교회의 주류로 오순절 교회가 이런 쪽에 많이 속해 있습니다.
은사 쪽도 사람이 많이 몰리게 돼있습니다. 은사도 결국 따지고 보다 보면 복입니다. 이 땅에서도 복 받고 내세에서도 복 받고 여기도 사실 알고 보면 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은사도 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순서를 밟고서 가느냐입니다. 정확하게 순서를 밟고 가지 않으면, 잘못하면 미혹 당합니다. 지금 인터넷상에서는 오히려 은사 교회가 축복 교회보다 훨씬 많습니다. 기도, 방언, 축사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저는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뿌리 없는 은사는 미혹에 들어가기 쉽습니다. 굉장히 위해(危害)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오늘 메시지의 중심은 어떻게 믿어야 진짜 제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7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성경을 축약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제일 중심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말씀을 찾는다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볼 때 관점을 고정시키면 성경보기가 쉽습니다. 이방인의 관점은 너와 나의 관점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나의 관점으로 봅니다. 그래서 언어 체계도 하나님과 나의 관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나와 너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 성경이 너무 어려운데 관점을 하나님과 나로 관점을 바꾸면 쉽습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을 할 때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했다고 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린애도 있고 농부도 있고 어부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 일반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어렵게 설교했을까요? 쉽게 설교하셨을까요? 쉽게 하셨습니다. 관점 바꾸면 쉬워집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늘 하나님과 나의 관점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고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 누구 앞에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대는 단어가 몇 개 있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 현대는 단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분리돼 있고 분석적이고 현대인들은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어가 많습니다. 고대인들은 아주 단순한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언어와 단어가 단순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복잡해진 우리 시대에 이 단순했던 과거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완벽하게 오류가 발생합니다. 이 단순한 단어 하나를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때 하신 쉬운 설교를 이해하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요? 첫째 관점을 하나님과 나의 관점으로 바꿔야 되고, 둘째는 단순한 언어인 것 같지만 이 언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읽으셔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그 당시 이미 2천년 전의 사건입니다. 2천년 전의 말씀을 우리 때로 다시 해석을 해야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을 달리 해석하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복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이 복은 우리 관점에서의 복과 다릅니다. 한국에 가장 많은 교회가 축복교회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을 외우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요? 복받으려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 아닙니다. 복의 히브리어는 [바라크]입니다. 무릎을 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점입니다. 내가 복을 받으려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딱 애들도 다 압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분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복이 있도다’ 할 때는 이미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마음이 가난해야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심령은 마음입니다. 영혼일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뜻은 뭘까요? 하나님께 무릎을 꿇은 상태인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돼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도 어떤 상태여야 천국을 간다고 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상태여야 합니다. 가난은 히브리어로 [아니]라 하고 낮다,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남보다 돈이 없다는 뜻의 가난과는 좀 다릅니다. 히브리어에서 낮다는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상태, 겸손한 상태입니다. 고통을 받다 억압을 받다, 점령당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점령당하여 눌려진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상태가 된 자는 천국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얘기했을 때 다 알아들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은 구약의 십계명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은 십계명의 1계명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구약 전체를 다 아우른 말씀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즉 나의 얼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 마음에 혹은 네 눈앞에 있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온 상태입니다. 복이라는 언어에는 놀랍게도 복과 저주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고, 이것이 복 받은 상태인데, 나왔으되 다른 신들을 두고 있으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나한테 나와서 나에게 얼굴을 대면하고 있으면서 내 얼굴 외에 딴 걸 쳐다보고 있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어떻습니까? 어떤 여자와 만나 대화를 하는데, 다른 여자가 보인다면 이 여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왔으면서 딴 거 보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가 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 다른 여자를 보고 있는 것이 간음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신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물질, 재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우상입니다. 그런 것들을, 헛된 것들을 보고 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란 말씀을 할 때 다 알아 듣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뜻을 좀 더 보면, 하나님 앞에 나가 무릎을 꿇었는데, 고통받고, 억압당하는 상태여서 딴 것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 자는 천국을 갑니다. 십계명의 1계명과 지금 예수님의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 안에 들어와서 다른 것은 안 보고 있습니까? 그러면 천국 갑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서 이 상태가 지속돼야 합니다. 당시 고대 언어는 지속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 갈 수 있을까 보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부터 5절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라함이 99세 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놀랍게도 이 말씀은 출애굽기 20장 3절 말씀,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행하라는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의 안에 거하라’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안에 거하는 자는 천국 갈 것이라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내 안에 있으라 하십니다. 그 안에 있다는 뜻은 뭘까요? 행함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너는 내 안에 있으며 완전하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왜 완전하라 하셨습니까? 언약 때문입니다. 십계명도 언약입니다. 지금 마태복음 산상수훈도 언약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때까지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교리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저는 계속 말씀드릴 것입니다. 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에 얽매여야 됩니까?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만나셨을 때 아브라함이 왜 구원받게 됩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구원받게 된 이유는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왜 구원받습니까?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약속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말고 그 안에 있으라고 자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을 어기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간단합니다. 너는 나와의 약속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밑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놀랍게도 축복받으려고 그렇게 할 필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언약을 맺고 있고 그 언약을 지키고 있으면 번성케 하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줄게 말씀하십니다. 원래 기독교에 수도 없는 복을 말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 복이 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복은 어떤 복일까요? 언약은 국가와 맺었고, 국가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개인과 언약을 맺고, 개인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가장 중요하고, 국가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그런 국가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국가의 백성 각자가 또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언약 안에 있으면 복을 받습니다. 내가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언약 안에 있다면 축복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안에 들어오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떠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만의 아버지입니까? 열국의 아버지입니까? 모든 국가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도 합니다. 왜 믿음의 아버지입니까? 약속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약속을 같이 받았습니다. 구약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행하십시오. 그럼, 여러분을 하나님은 세우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그 말씀 안에, 그 언약 안에 있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것입니다. 오셔서 점점 일어나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처음에 오실 때는 힘들다 하시다가 점점 좋아지십니다. 왜요? 언약 안에 있으면 약속대로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 받는 거 간단합니다. 이제 복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마십시오. 복 받으려고 기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님께서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바로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고, 너희가 내 말대로 행하면 준다고 하십니다. 천대까지 준다고 하십니다. 영원히 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여야 복을 주셔도 큰 그릇에 받지 않습니까? 종재기 만큼 받으시겠습니까? 종재기가 아니라 장독대 만큼, 수영장 만큼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삶 속에,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축복드립니다. 기독교도 알고 봤더니 복 받는 종교입니다. 복이 당연히 따라옵니다.
산상수훈의 두 번째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 애통은 히브리어로 [페사흐]입니다. 헬라어로는 [펜데오]라 하는데, [페사흐]의 뜻은 유월절이라는 뜻입니다. 즉 애통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바라보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구나. 내가 눈물로 그 앞에 무릎을 꿇을 때 내가 너를 위로할 것이라 하십니다. 곧 성령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지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은 대강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시작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교회라면 떠나십시오.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축복 교회, 은사 교회는 십자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 안에 들어오는 자는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은혜 앞에 예수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믿어지는 자 이때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병상에서 구원을 받는데 구원은 십자가의 은혜 앞에 나올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요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들어오셔서 거듭나게 하고 구원시키십니다. 거듭났다는 의미는 십자가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십자가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다는 마음이 들어서 너무너무 감사할 때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을 치십니다. 그래서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뜻합니다. 은사의 시작입니다. 알고 봤더니 제사법만 빼면 구약과 신약은 똑같은 책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라 하십니다.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진짜로 너한테 말하니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심에도, 오늘날 교회가 자꾸 성령만 말합니다. 성령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예수를 믿게 하는 영입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곧 물과 피와 성령이니라. 성령은 무엇을 증거합니까? 예수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를 증거하고 계시고, 성령도 예수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집중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는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믿게 하십니다. 굳건히 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펑펑 우는 자, 십자가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되는 자, 내가 아무리 고난을 받고 그리고 내가 죽음을 당할지라도 십자가를 만났기 때문에 다 괜찮은 자, 이런 자가 구원받습니다. 십자가가 네 삶의 중심이 되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네가 예수를 만났느냐 아니냐는 십자가가 중심이냐 아니냐와 같은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물은 베드로전서(3:21) 말씀처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께 가는데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나가야 합니다. 왜 선한 양심이라고 했을까요? 인간 중에 선한 사람, 착한 사람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선한 마음, 착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어야 선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착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고, 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곧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네 심령 안에 다른 것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나, 네 짐을 내 앞에 내려놓으라는 말씀은 똑같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올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거듭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령론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부터 17절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거듭나게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란 말씀과 같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은 자,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굳건히 믿고 그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맡긴 자가 구원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부터 21절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저를 믿는 자마다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습니다. 복 주는 예수, 병 고치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십자가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이 오나니, 어떤 자가 구원받습니까? 빛으로 오는 자, 진리를 쫓는 자,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입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를 내가 반드시 구원할 것이다. 나의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구원할 것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어도 죄를 짓습니다. 마음속에서 죄짓고 분노하고 욕할 때도 많습니다. 신경질 내고, 원망할 때도 많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나님 말씀에 순종 안하고 내 맘대로 살려는 마음이 계속 올라옵니다. 그래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이 싸움을 능히 이기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 반드시 구원받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구원의 시작점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끝은 어디일까요?
성령은 첫째 예수를 믿게 하는 영이고, 둘째는 예수를 가르쳐 알게 하는 영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란 말씀이 중요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순하고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 온유는 [아나와]입니다. 대답하다는 뜻이 있고, 억눌리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바로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대답한다는 것은 누가 자꾸 말을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매일 말을 걸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못 듣는 게 문제입니다. 성령님은 항상 말을 걸고 계십니다. 그럼, 무엇으로 말을 걸고 계실까요? 말씀을 통하여 말을 거십니다. 기도도 알고 보면 말씀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악과 싸워 이기게 하셔서 악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알고 봤더니 말씀, 일용한 양식을 먹으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이유와 목적도, 은사의 이유와 목적도 무엇입니까? 예수를 알기 위해서, 예수를 먹기 위해서입니다. 왜 먹고 알아야 합니까? 자라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믿음이 성장한 자로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립니다. 들리니까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가 뚫린 여러분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대답하시는 여러분 되길 축원드립니다. 이게 성령론입니다. 성령을 받아 뭔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고, 기도하며 더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더 깊이 받고, 대답합니다. 대답은 바뀐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점점 말씀을 들으며 대답하고 억눌리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 하였습니다. 과연 모세가 성질이 없었습니까? 아마 저보다 더 심했던 분 같습니다. 저는 주먹으로 쳐서 누굴 죽인 적은 없습니다. 모세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다섯 번 안 가겠다고 버틴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같이 온유한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왜 온유하다고 합니까? 순종입니다. 전적인 순종입니다. 여러분 순종을 잘할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답하고 그 말씀에 억눌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온유와 가난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분간할까요? 헬라어는 분간하려고 다르게 쓰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가난은 [프토코스]라 합니다. 빌어먹는 거지, 빈털터리입니다. 먹을 것을 구걸할 정도의 가난입니다. 구원받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먹을 것을 구걸할 정도로 가난해야 한다고 헬라어로 풀이를 했습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스]라 하는데 길들여진 야생마란 뜻입니다. 야생마 같았던 모세가 길들여졌습니다. 여러분 길들여진 야생마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이런 사람이 온유한 자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어떤 복이 있습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땅 부자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받습니다. 땅 분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곧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계가 다 다릅니다. 애통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온유한 자는 성장한 자로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 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이제 막 구원받아서 천국 갔다면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온유한 자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병실에서 막 구원받고 천국 간 사람은 새 예루살렘 성에서 살지 못합니다. 방문은 합니다. 여러분은 방문객이 되고 싶습니까? 성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습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너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보좌에 함께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뭐라 하십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끝판왕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자마자 쉬게 될 것이니 처음부터 짐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짐을 내리라는 것이 내 남편 맡아주세요. 내 자식 맡아주세요. 내 짐 맡아달란 뜻이 아닙니다.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짐,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혼자 메지 않습니다. 함께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함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라오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믿음의 성장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는 내 짐은 쉽고 가벼움이라 예수님께 짐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주시는 짐을 다시 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언약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약의 말씀을 따르려 할 때 어렵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쉽고 가볍다고 했는데 우리 마음엔 어렵습니다. 욕도 안하고 참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니까 쉽고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언약의 말씀, 그리고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가지고 너를 억압하는 자, 너를 누르고 대답하고 순종하는 자,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여 나에게 올 것이라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예수께 나아갑시다. 이게 은사입니다. 은사를 한 명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다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응답하셔야 합니다. 길 가다가 힘들면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께 하나님 나한테 왜 이래요? 그러면 대답해 주실까요 안 해주실까요? 대답해 주십니다. 말씀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자꾸 이상한 말에 귀 기울이지 말기 바랍니다. 죄지었다고 정죄하는 것은 모두 마귀 음성입니다. 마귀는 죄지었다며 여러분을 질책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주님이 주려고 하는 짐은 평안입니다. 우리 주의 평안 안에 거합시다. 그리고 말씀을 잘 지킵시다. 말씀을 잘 지키는 건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이게 성령론입니다. 진짜 성령 받고 싶습니까?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억눌러 주님을 따라갑시다. 말씀을 통하여 대답하는 자 됩시다. 반드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한국교회에 팽배해 있는 축복의 말씀과 은사가 사실은 주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 거하면 모두 다 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주님! 주님 안에 거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신 짐을 주님이 주신 언약을 지고 가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주님 안에 살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 성도 한 명 한 명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