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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
2. 건축의 실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1~2)
어제 저녁에 신성한 건축은 신성한 계시에 따른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하나님은 창조하고 건축하신 분이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나는 왜 있는가, 하나님은 나를 왜 창조하셨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다.
우리를 그냥 지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지어 놓으셨다는 것이고, 오늘 현실 안에 오면 우리는 왜 교회로 부름 받았는가? 이것은 건축을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다. 이 속에는 무엇을 강력하게 배제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는 하늘로 가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하는 사상을 완전하게 배제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늘로 가 버리면 건축이 안 되기 때문이다. 건축은 땅에서 이루어지지 하늘에서는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늘로 갔으면 좋겠다는 인간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땅위에서 건축을 해서 불렀다는 것에 뿌리를 박아야 하고 닻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떠돌이가 되어서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곳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서 헛된 인생을 보내게 되고, 죽은 후에 보자는 늘 그런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은 후에 볼 것이 아니고 살아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영화롭게 할 것인가, 살아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만족이 될 것인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시편의 기자는 말하였다. 내가 살아서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면 여호와를 송축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 찬송은 살아서 하는 것이지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죽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하는 일이다. 왜 나를 살게 했는가, 왜 내 목숨을 주고 있는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송축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목숨을 주고 있다. 목숨이 감사한 것은 여호와를 찬송할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이 목표에서 우리가 조금도 벗어나면 안 된다.
오늘은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서 ‘건축의 실예’를 들어서 생각해보겠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을 했다. 이 말씀처럼 놀라운 말씀도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말씀이 없다면 이 우주는 어디로 갈 것이며,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이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속에 모든 대답이 함축되어 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 안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의 어떠함이 믿음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 분이 창조했기 때문에 그분이 완성할 것이다. 우리가 시작했다면 하다가 못하면 그만이고, 당연히 물론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이 시작했으니까 그분이 마친다는 것이다.
사람도 자기 집을 지으면서 이 집을 마치기까지 돈이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을 해 보고 건축을 시작한다. 돈에 맞게 집을 짓게 된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무조건 땅을 파놓고 보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어리석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집을 지을 때 비용이 얼마 들 것인가 미리 계산을 하고 그 비용을 갖고 집을 짓기 때문에 집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에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창조하셨겠으며, 건축을 생각하지 않고 창조를 하셨겠는가. 창조하실 때 이미 벌써 건축을 생각하시고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하나님은 시작을 하신 분이니까 마치시는 분이구나, 계획을 하시는 분이니까 완성하시는 분이구나 하는데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근원적인 믿음이다.
내 인생은 하나님이 불렀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겠구나, 하나님이 불렀으니까 당신의 용도에 맞도록 그렇게 만들어지겠구나 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리석지 않으면 공연한 사람을 불러 놓겠는가. 더군다나 문제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문제가 많은 사람을 왜 불렀겠는가. 괜히 속 썩으려고 불렀겠는가. 분명히 계획이 있고 방법이 있으니까 불러놓았다.
우리가 지금 잘 생각해 보면 우리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괜히 불렀지, 실수했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도 안 되고, 10년이 지나도 안 되고, 20년이 지나도 안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실수했구나하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아무래도 하나님이 실수를 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저히 자기를 보니까 가망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것은 실수하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능히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불렀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포하였다.
그런데 2절에 가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 중에 하늘은 이상이 없지만 땅에는 무슨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것은 땅은 깊은 물에 잠겨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땅은 육지에 드러나 있으면 여러 식물이 나고, 동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되지만 물속에 잠기면 아무 용맹이 없다. 얕은 물속에 잠기면 그래도 미나리라도 나지만 아주 깊은 물속에 잠기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말씀은 깊은 물에 잠겼다는 뜻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말은 깊은 심연이라는 뜻이다. 깊은 물속에 잠겼다. 태평양 한 가운데 가면 무지하게 깊은 수천 미터가 되는 곳이 있다고 한다. 그런 곳은 빛도 없고 깜깜한 곳이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그런 곳이다. 흙(땅)은 물에 덮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정이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창조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고, 계획을 방해하는 세력이 이 우주 안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도 우리 주변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건축하려고 할 때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추측컨대 하나님을 거역하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땅을 강탈하기 위해서 내려왔고, 그들이 땅을 점령해서 땅을 유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사탄이 땅을 자기가 점령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밭에 밀을 심으려고 밭을 잘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방해자가 와서 거기에 물을 잔뜩 부어서 미꾸라지를 키웠다. 주인은 물을 말려서 밀을 심을까를 연구하고 있고, 이 원수는 어떻게 하면은 물을 채워서 미꾸라지를 키울까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우주는 밀을 심으려는 농부와 미꾸라지를 키우려고 하는 어부하고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밀 농사꾼이라 할 수 있고, 사탄은 땅에 물을 채우기만 하면 미꾸라지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부이다. 농부와 어부의 싸움이다. 참 이상한 것은 성경은 어디에도 하나님을 어부에 비유한 곳이 없다. 농부에 비유한 곳은 많지만 어부에 비유한 곳은 없다. 오늘 아침에 생각해 보니 사탄은 어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돔이나 이런 것을 키우는 어부는 좋지만 미꾸라지 키우는 어부는 그렇다. 건축을 할 때 제일 안 되는 것이 미꾸라지처럼 쏠쏠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리 붙여도 안 되고 저리 붙여도 안되고 빠져나간다. 그래서 사탄은 미꾸라지 키우는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그렇지만 이런 방해자가 있다 해서 당신의 신성한 계획을 포기하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이 계획을 더 강화시키고, 더욱 완전하게 해서 이 사탄이 결국은 손을 들도록 땅위에서 자기의 거처를 포기하고 나가도록 하는 분이다. 우리는 전 성경을 통해서 이 전쟁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지어진 후에 사탄은 이 일을 시작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어서 동산에 거하게 하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놓았는데 사탄이 들어와 선악과를 먹여서 아담을 그 동산에 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창세기 1장 2절의 문제는 땅에 물을 덮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어진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여서 동산에 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아담의 후손들은 나가서 무엇을 하게 되었는가? 애녹성이라는 성을 쌓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속에 들어있던 문제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도 감추어져 있는 말이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일도 감추어져 있는 일인데, 애녹의 성을 건축한 일은 드러난 일이 되었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1장 2절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서 성을 건축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애녹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것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이 지은 성이 아니고, 사탄이 타락한 아담을 조정해서 지어 놓은 성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일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데, 사탄은 자기가 유린한 사람을 통해서 애녹성 다음에 성들을 계속해서 건축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 對 성의 건축의 싸움>
이제부터 성 對 성의 건축의 싸움이 되게 된다. 이 애녹성을 건축한 세대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서 방주를 건축하게 한다. 방주도 하나의 건축이다. 애녹성도 건축이고 방주도 건축이다. 애녹성은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성이고, 방주는 만물을 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성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잣나무로 방주를 지었다. 그리고 그 방주에 모든 생물을 다 들어오게 해서 홍수를 면하게 했고, 모든 생물을 다시 살게끔 만들었다. 이것이 부활의 시작이다. 다시 살게끔 했다.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는데 방주 안에 들어 있어서 다시 살게 했다는 것이 부활 사상의 시작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건축을 보게 된다. 한 건축은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한 것이고, 한 건축을 생명을 살게 하려고 한 것이라는 두 건축을 보게 된다.
그 다음에 시날에 모인 백성들은 바벨이라는 성을 건축하게 된다. 우리가 바벨탑이라고 말하는데 바벨이라는 성을 건축했다. 여기서 목표는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 높이 오르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 우리가 하늘에 오르자, 이것이 바벨의 슬로건이다.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는 뭉쳐서 강해지자 라는 말이다. 망대를 높이 쌓아서 하늘에 이르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빛내자, 이것이 바벨의 정신이다. 바벨의 정신이 오늘 세계의 정신이다. 세상 정신이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이 정신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상으로 빠져 나간다든지 세상의 유혹을 받는 원인은 모두 여기에 있다. 뭉쳐서 하나가 되자, 한 덩어리가 되자, 그리고 우리는 높이 오르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빛내자.
결국은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모두 세상으로 나간다. 교회에 있으니까 자기 이름이 빛나지 않고 자꾸 자기 이름이 없어지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세상에 나가면 자기 이름이 빛나야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 이름이 빛나는 곳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빛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것이 교회 정신이다. 세상은 남을 죽여서 내 이름을 빛내자는 것이 세상 정신이다. 남을 누르고 내가 높아지자, 남을 누르고 올라가자. 높아지자면 눌러야 올라가지 그냥 올라가는 법은 없다. 내가 남을 이겨야 올라가는 것이지 남을 도와주고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세상과 교회는 정신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혼이 완전히 다르고 영이 완전히 다르다. 세상의 영은 높아지자, 우리의 영을 빛내자는 것이다. 교회의 영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완전히 다른 영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불러서 장막을 짓게 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3대가 장막에 거했는데, 마침내 야곱을 통해서 벧엘(Bethel)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집 하나님’이라는 말도 된다. 야곱이 밧단 아람(Paddan-aram)으로 내려가기 전에 벧엘(Bethel)에서 꿈을 꾸었다. 돌을 베개하고 잠을 잘 때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는 사닥다리를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가 아니라 땅에서 하늘로 가는, 연결되는 사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꿈을 깨고 일어나서 하는 말이 여기가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구나. 베개 했던 돌에 기름을 붓고 내가 객지에 돌아다니다가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돌 세운 이 자리에 주의 전을 지을 것입니다’, ‘주의 전을 건축 할 것입니다’라고 맹세하였다. 20년 후에 야곱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곳을 엘벧엘(El bethel)이라고 불렀다. 엘(El)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원래의 이름은 루스(Luz)였는데 벧엘(Bethel)이라고 불렀고, 20년 후에 다시 돌아와서는 엘벧엘(El bethel)이라고 불렀다. 하나님, 집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앞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붙였다는 것은 야곱이 20년 동안에 자기의 과정을 겪어 온 결과이다. 그냥 벧엘(Bethel)만 해도 집 하나님, 하나님 집이 되지만, 20년의 세월을 겪은 후에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에 엘벧엘(El bethel)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는 이스라엘 사람의 조상이다. 우리 조상이라고 말 할 때는 이 3명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 3대는 모두 장막에 거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바벨과는 정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바벨은 크고, 높게, 위대하게 쌓아진 성을 말한다. 장막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장막 사상이 출애굽기에 나와서 다시 장막이 되고, 성막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는 것으로 변한다. 이 장막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교회라는 건축으로 이어져 가게 되고, 이것이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가면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는 장막이라고 한다.
이 장막 사상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바벨에 비해서 규모가 너무너무 작다. 바벨은 흙을 구워서 벽돌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성을 쌓은 것이다. 장막은 이동식 천막과 같은 것이다. 천막생활을 했다. 하나는 거대한 것이고, 하나는 초라한 것이다. 거대한 것 속에는 자기 이름 밖에 없고, 이 초라한 집안에는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집이라는 말이다.
이 장막의 노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었다. 장막의 노선에서 새 예루살렘이 건축된다. 새 예루살렘이 결코 위대하고 놀라운 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는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결코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회이다. 인생은 위대하고 놀라운 것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 내 인생을 내가 위대해져야 되겠다, 놀라운 사람이 돼야 되겠다, 능력 있는 사람이 돼야 되겠다고 하면 타락으로 가는 것이다. 그럼 바벨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든지 안믿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그렇게 되면 바벨로 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 처음 나와서 목회를 할 때 모든 사람의 생각이 우리 전도사님을 위대한 전도사님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한다. 참으로 사랑으로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되면 나는 바벨로 가 버린다는 말이다. 위대한 곳으로 가는 길은 바벨로 가는 길이다.
어떤 이유로도 위대해 지면 바벨로 가는 것이다. 원칙이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세상은 다 위대해지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 세상은 어떻게 하던지 우리는 장막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장막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생각을 해야지 바벨탑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생각을 하면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바벨탑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려다 보니까 국교가 되게 된 것이다. 로마 교회가 왜 생겨났는가? 그래서 생겨났다. 영국 교회가 왜 생겨났는가? 그래서 생겨났다. 독일 교회가 왜 생겨났는가? 그래서 생겨났다. 그런데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의 소망은 어떻게 하면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인들도 그럴 것이다. 그럼 보기 싫은 종교를 다 치워버리고, 기독교를 유일한 종교로 해서 국교가 되게 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국교가 되는 길은 위대해지는 길이고, 위대해 지는 길은 바벨이 되는 길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분명하다. 세상의 어떤 것도 마찬가지로 위대한 곳으로 가는 것은 전부 바벨이 된다.
처음에 기독교가 많은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겪었다.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결국은 국교가 되었다. 국교가 될 때 기독교의 대승리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것은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이고, 하나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기독교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 그것은 사탄의 승리다. 바벨로 가는 길이다.
그 안에 좋은 것 많다. 선한 것도 많고 좋은 것도 많고 위대한 것도 많고 좋은 것이 참 많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신이 바벨의 정신이다. 우리는 바벨을 절대적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도 내가 내 이름을 빛내려고 하면 나는 건축이 불가능하다. 내가 위대해 지려고하면 건축이 불가능하다. 전도를 하더라도 내가 내 이름을 빛내려고 하면 교회가 안된다. 전도는 될지 모르지만 교회는 안된다. 내 이름을 빛내려고 하기 때문에 내 패거리가 돼버리고 만다. 내가 위대해지려고 하면 나는 높아질지 모르지만 교회가 되지 않는다. 건축이 되지 않는다.
교회는 위대한 것으로 건축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것으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것으로 교회가 건축되기 때문에 바벨 정신을 갖고는 절대로 교회가 건축 될 수가 없다.
교회 안에서도 네 공로가 더 크고, 내 공로가 더 크고, 내가 더 크고, 네가 더 크고 하면은 교회가 갈라진다. 내가 더 위대하고, 네가 더 위대하고, 내가 더 낫고, 네가 더 낫다고 하다 보면 갈라진다. 그러면 건축이 되지 않는다.
바벨은 결국 혼잡이라는 의미이다. 왜 혼잡했는가? 서로 이름을 빛내려고 하니까 혼잡해졌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이것을 흩어버렸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됐는가?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고 한다.
바벨이라는 말은 혼잡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언어, 무슨 언어를 썼는가? ‘위대해지자’, 그 언어를 쓰고 있다. ‘우리 이름을 빛내자’, 그 언어를 동시에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 세상에 나가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종교도 있고 학문도 있고 기술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다. 다 있지만 그 안에 기본적인 정신은 ‘우리 이름을 빛내자’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빛내지 않고는 세상에서 절대로 안 된다. 세상을 잘하려면 이름을 빛내주어야 된다.
자본주의가 잘되려면 부자들의 이름을 빛내주어야 한다. 부자들을 깎아내려서는 자본주의가 안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자들을 깎아내리고 있는 중인데 깎아내리면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이다. 돈을 벌려는 사람이 생겨야 한다. 왜? 자기 이름이 빛나야 돈을 벌려고 한다. 오죽하면 돈 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려 한다. 이름이 정치인만 못하니까 그렇다. 옛날에 정주영씨가 대통령에 출마를 했다. 왜 출마했는가? 하도 정치한테 시달리니까 자기가 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정치인이 1번이니까 다 정치를 하려고 생각한다. 그 이름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러면은 자본주의가 안된다. 나라가 안 된다. 자본주의가 잘되려면 부자가 제일 이름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가 잘 된다. 그래야만 서로 돈을 벌려고 생각한다.
돈 번 사람을 죄인 시 하거나 악질로 생각하거나 돈 번 사람은 부정부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나라는 자본주의가 성행할 수가 도저히 없다. 이름이 빛나지 않으니까 안하려 한다. 다 검사되려 한다. 그 사람들 다 잡아 들여다가 심문하는 것이 검사니까 다 검사되려고 하지 돈 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안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젊은 사람들이 돈 벌려고 나가야 하는데 다 공무원이 되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라가 망조가 들어가는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지 전부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나라는 망조가 든다. 기업이 다 국영화 된다면 다 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안 된다. 공무원 할 사람이 없고 전부 기업에 나가서 기술을 개발하고 돈을 벌려는 사람이 생겨야 한다. 70년대 경제 개발할 때는 젊은이들이 모두 기업체로 나가서 공무원 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기업체로 가려는 사람이 없고, 전부 공무원이 되려 한다. 공무원은 100 대 1, 1000 대 1로 경쟁이 높아지고 기업은 사람을 뽑을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될지 모르지만 자본주의로서는 망해가는 길이다.
세상은 자기 이름이 빛나야만 열심히 일을 한다.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가? 돈을 번 사람이 자기 이름이 안나니까 돈을 벌 필요가 없다. 열심히 일한 사람의 이름이 안난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안한다. 다 똑같이 8시간 일을 하면 똑같은데 무엇하러 8시간보다 더 열심히 일 하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망한 것이다.
세상은 결국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 하고 있다. 세상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하면 교회가 안된다. 세상이 그러니까 교회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교회는 그 영이 전혀 다르고 그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교회는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지 세상 보고 잘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성행하려면 돈 버는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 이름이 높아져야 하고, 공산주의가 잘되려면 권력 있는 사람의 이름이 높아져야 된다.
교회는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다. 그러려면 장막에 거해야 한다. 이것이 장막 정신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3대에 걸쳐서 모두 헤브론에서 장막에 거한 사람들이였다. 이것이 출애굽에 와서 하나님의 장막이 된 것이다.
네 번째는 바로의 국고성을 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애굽에 내려갔다. 무엇 때문에 내려갔는가? 배가 고파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갔다. 그래서 결국은 붙잡혀서 노예가 되었다.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는 첫 번째 원리는 배를 채우려다가 들어간다. 항상 그 원리는 똑같았다. 아브라함 때도 이삭 때도 야곱 때도 항상 흉년이 들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양식은 많은데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한 역사이다.
야곱 대의 마지막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결국 거기서 가장 부유한 곳에 갔다. 아브라함과 이삭 때는 그랄이라는 곳으로 갔지만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은 그때 당시 가장 풍요로운 곳이었다. 가장 풍요로운 곳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눌러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바로의 국고성을 쌓는데 동원되었다. 바로의 국고성은 바로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성이라는 뜻이다.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내 이름을 빛내자, 그 사람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성을 쌓는데 동원되었다.
하나님의 장막에 거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족속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바로의 이름을 빛내는 곳으로 내려갔다는 말이다. 타락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타락이다. 멸망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멸망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문자대도 해석해서 이 땅에 불덩어리가 떨어져서 안믿는 사람들은 다 멸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거나 태양이 떨어지면 믿는 사람이건 안믿는 사람이건 할 것 없이 다 타 죽는다고 생각한다. 대구 시내나 서울 시내에 큰 별이 떨어졌다면 거기서 믿는 사람만 쏙 골라내고 안믿는 사람만 불타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있었지만 다 죽었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그런 우스운 해석을 하게 된다.
멸망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이 바로를 섬기면 그것이 멸망이다. 멸망이 다른 것이 아니다. 소리를 확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마이크가 탁구 배트로 사용된다면 그것이 멸망이다. 멸망은 일정한 것이 아니다. 스피커는 스피커로서의 멸망이 있고, 마이크는 마이크로서의 멸망이 있다. 전등은 전등으로서의 멸망이 있다. 전등은 불이 안켜지면 멸망이다.
우리 인생은 무엇이 멸망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 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어졌는데 바로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면 그것이 멸망이다. 의의 병기가 죄의 병기로 사용되면 그것이 멸망이다.
멸망에 대한 개념을 천당과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멸망은 천당과 지옥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바로를 섬기면 그것이 바로 멸망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바로의 국고성을 쌓는 사람들이 됐으니까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죽은 자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소용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400년 동안 애굽에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한번도 불렀던 적이 없다고 되어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이 한 곳도 없다. 400년을 살았다고 하지만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바로의 국고성을 쌓기 위해서 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은 자라는 말이다.
바울은 “내가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어디에서 산 사람인가, 무엇에 사는 사람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를 생각해야지, 숨 쉬는 것을 보고 살았나 죽었나 하는 것은 의사가 할 일이다. 의사는 숨 쉬면 살았다고 하고, 숨 꺼졌으면 죽었다고 한다. 심장이 뛰면 살았다고 하고, 심장이 꺼지면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의사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하는 말은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진 사람이 바로를 위해서 살고 있으면 그것이 죽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진단법은 그렇다. 요즘 뇌사니 심장사니 그런 말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응급실에 와서 죽었다. 의사가 와서 맥을 짚어 보고 콧김 맡아보고 가슴을 만져 보고 시계를 딱 보더니 몇년 몇월 몇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갔다. 그 의사는 사망선고 하러 온 것이다. 죽어도 요새는 의사가 죽었다고 싸인을 해야지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싸인 안해주면 화장터도 못간다. 싸인을 받기 위해서 시계를 보더니 몇년 몇월 몇일에 김 아무개가 사망했다고 하고 간다. 이것은 의사가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하는 말은 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는 말은 네가 바로의 국고성을 쌓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장막을 짓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네가 바벨성을 쌓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장막을 짓고 있느냐는 문제이다. 천당이냐 지옥이냐 문제가 아니다. 살았냐 죽었냐 하는 문제이다. 천당에 간다 해도 죽은 자는 천당에 가 봐야 소용없다. 천당에 가도 자기 밖에 모를텐데 천당에 가 봐야 소용이 없다.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종교인들처럼 자기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없다. 욕심이 많다. 맨날 기도하기를 뭐 해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욕심이 목구멍까지 다 차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그렇고, 절에 다니는 사람도 그렇다. 절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보다 욕심이 훨씬 더 많다. 욕심이 많으니까 절에 다니는 것이다. 물론 교회도 그렇다.
무엇을 위해서 내가 사느냐, 무엇에 살아 있느냐, 내가 어디에 살아 있느냐는 이 문제이다. 나는 오늘 어디에 살아 있느냐, 무엇을 위해 살아 있느냐는 이 문제이다.
<종교 對 그리스도>
다음은 종교 對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태종교라는 종교가 있었다. 이 종교는 분명히 거기는 하나님의 전통이 있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있는 종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은 백성들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종교가 되어버렸다. 전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목적을 위한 것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때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이것을 종교 對 그리스도라고 말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일 많이 부딪힌 것이 종교와의 부딪힘이다. 안식일 날 병을 고치니까 안식일인데 왜 병을 고치느냐고 했는데 이것은 종교와 부딪힘을 이야기한다. 성전을 헐어라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일으키겠다, 네가 채 50도 못 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 보다 크느냐는 이런 말들은 전부 종교 對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한 인격을 말하는 것이고, 유태인들은 인간의 소원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對 그리스도, 이렇게 대결이 됐다.
그분을 괴롭게 하고, 마지막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바로 유태종교였다. 세상이 매단 것이 아니다. 세상은 단지 빌라도는 유태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유태인들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지 자기가 예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자기는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예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유태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니까 종교가 예수를 죽인다. 종교가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다.
인간의 소원을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은 하나님의 소원으로 인해서 오신 것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 소원이 있으면 하나님의 소원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내 소원이 있으면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내가 거부하게 된다. 내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 목적이 없을 때만 그분의 목적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내 소원이 없을 때만 그분의 소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소원과 내 목적이 있으면 그 분의 목적이나 그 분의 소원은 받아들일 수 없다.
종교 對 그리스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인가? 아니면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인가? 비슷하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부르고, 유태인도 하나님이 불렀다. 하지만 둘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이었다.
하나는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이고,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내려오는 길이므로 길이 전혀 달랐다. 하나는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길이 영 달랐다. 예수님에게 왜 이를 갈았던가. 예수님이 큰 잘못을 해서 그런가. 그것이 아니고 그들의 소원에 대해서 그 기대를 어그러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소원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소원은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나라가 건국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닌 그 나라가 아닌 그들이 기다리는 그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전파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다른 나라를 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땅에는 다른 나라는 없다. 오직 다윗의 왕국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자본주의라고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를 퍼트린다면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를 퍼트리고 시인하고 동조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시인하거나 퍼트리거나 동조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공산주의에서는 지금도 그런 사람은 처형을 한다. 남한에서는 처형 안하고 어영부영 살고 있다. 무엇이 목적인지 잘 모르고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다. 공산주의를 잘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어름어름한 그런 시대에 놓여 있다. 북조선은 지금도 거기에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바로 박살내는 것이다. 왜 북한은 개방하지 못하는가? 자본주의가 들어 올까봐 개방을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왕국이 있었다. 자기들이 의도하는 왕국, 소원하는 왕국이 있었다. 그 포로 생활을 하면서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고생하면서 고대하고 고대하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그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전파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심이라. 완전히 다른 나라를 전파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예수의 나라는 유태인이 바라던 그 나라가 아니다. 똑같이 오늘 인간이 바라던 나라가 아니다.
예수의 나라는 인간들이 바라는 그 나라가 아니다. 잘 알고 보면 지금도 예수를 여전히 적대한다. 다른 나라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있는 것이지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추방하려고 생각할 것이다.
종교 對 그리스도! 이 세계는 다시 세상 對 교회로 다시 발전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낳게 되었고, 종교는 세상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 對 교회로 된다. 베드로는 많은 군중 앞에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한다. 이 말은 교회와 반대되는 세상을 말한다.
세상과 교회는 같이 한 땅에 있지만 그 근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원리가 전혀 다르고, 그 영이 전혀 다른 것이다.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애녹성로부터 - 바벨성 - 바로의 국고성 - 종교 - 세상, 이런 한 원리와 계열을 보았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서 장막으로 - 성막으로 - 그리스도로 - 교회로, 이런 한 계열을 보았다. 이것은 둘이 완전히 그 영이 다른 것이다. 근원이 전혀 다르다.
우리가 교회에 왔다는 것은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 온 것을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은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로 옮겨 온 것이 바로 구원이다. 교회로 옮겨 온 것은 교회 건축 안으로 옮겨 온 것이니까, 교회 건축 안으로 옮겨 온 그것이 바로 구원이란 말이다.
구속이라는 말이 있고, 구원이라는 말이 있다. 구속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했다는 것이 구속이다. 나를 대신했다, 내 값을 대신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구속이다. 내 대신, 내 갚을 빚을 그 분이 갚았다, 내가 죽을 것을 그 분이 대신 죽었다, 그래서 내가 살아났다는 것이 구속이다.
그런데 구원은 무엇인가?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것이 구원이다. 구속은 애굽에 있었다. 애굽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일에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 그냥 있고 광야로 나오지 못했으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다만 구속을 받았을 뿐이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구속을 받은 것을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 산다. 이것은 구속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구원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건축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구속을 받고 어디로 가는가? 천당(하늘나라)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하늘나라로 가기로 약속 됐다는 것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늘로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세상에서 교회로 오는 것이 구원이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구원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구원이다. 분명히 구원의 개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하도 구원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해서 다른 사람이 붙이기를 구원파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몇월 몇일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하도 많이 하니까 구원파라고 붙였다. 그런 계열이 많다.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도 있고 많이 있다. 미국에서 건너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고 구속을 말한다.
예수님 피로 내가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을 말한다. 구속을 아무리 받았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그냥 그대로 있으면 구원이 아니다. 건축이 되어야 그것이 구원이다. 건축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교회 안으로 구원이 되어야 된다. 건축이 되지 않는 재료들은 있어도 소용이 없다. 공사판에 가 보면 철근도 굴러다니고 벽돌도 굴러다니고 나무 조각도 굴러다닌다. 이것은 구속은 받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재료들이다. 용광로에서 구속을 받고 제재소에서 구속을 받고 벽돌 공장에서 구속을 받았다. 하지만 건축이 안됐기 때문에 굴러다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굴러다니는 것이다. 구속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희망을 물으면 하늘로 가는 것이다.
하늘에는 건축이 없다. 건축은 땅 위에 있다. 그리고 오늘 그 건축은 교회로 시작이 되고 있다.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교회를 그냥 말씀이나 들으러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친구 만나러 간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과 관계되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것과 같은 것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장막을 지은 것과 같은 것이고, 모세가 성막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교회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몸만 왔다갔다하는 것도 아니고, 성당만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로 건축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단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단체적으로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로 엮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내 개인의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로서 하나님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이것만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 누구는 미운 사람 있고, 좋은 사람이 있고 이래서는 안된다. 자기 목적 안에 있으니까 밉기도 하고 곱기도 한 것이지 자기 목적이 없으면 밉고 곱고 할 것이 없다. 아무개는 밉고 아무개는 곱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목적만 있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자기 목적과 자기 필요 때문에 어떤 사람은 밉고 어떤 사람은 고운 것이다.
교회 생활은 우리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영광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만일 그 분이 영광스럽게 되기만 한다면 내 이름은 없어도 된다. 누가 높아지냐 누가 낮아지냐 할 필요가 없다. 그 분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서만 우리는 존재하고 그 분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서만 우리는 쓰여진다.
월드컵 축구할 때 누가 찼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팀이 다 져버린다면 자기 혼자 차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거기서는 다른 사람하고 서로 연결이 잘돼서 공을 차야지 자기 혼자 차서는 소용이 없다. 자기 이름 낼라고 차서는 소용없다. 내가 골을 넣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골을 넣는다. 코너킥 하는 것을 보니까 생각 같으면 자기가 한 번에 넣어 버리면 좋을텐데, 그럼 자기 이름이 자연히 빛날텐데, 그렇게 안되니까 공을 돌아가게 차서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 사람이 받아친다. 잘하는 팀을 보면 여러 사람을 건너간다. 한 사람이 차면 바로 넣기도 하지만 철저히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돼서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까지 건너가서 넣는다. 그것이 정말로 잘하는 팀이다. 그때 나도 박수치고 싶었다. 첩첩이 방어하는 방어선을 뚫고 내가 안되면 너한테 주고 네가 안되면 나한테 주고 하다가 마지막에 들어간다. 자기 이름이 없다. 어찌하든지 골이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없어진다. 진정으로 자기가 없어지려면 교회 건축 안에 들어와야 자기가 없어진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수양하고 자기를 다듬고 자기를 어떻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세상에 많다. 그처럼 어려운 것이 없는 것 같다. 10년을 눕지 않고 앉아서 지냈던 위대한 분이 우리나라에 계시다. 10년을 눕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지금 여기 의자에 앉은 것이 편하고 좋지만 이것도 10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 허리가 뒤틀리기 시작할 것이고, 여기서 15시간 정도 앉아 있으면 돈을 주고 앉아 있으라고 해도 앉아있지 않을 것이다. 10만원씩 준다 해도 15시간씩 앉아있으라고 하면 앉아있을 사람은 몇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런데 10년을 등을 땅에 대지 않고 앉아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얼마나 독하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자기 수양이라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자기 수양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뭔가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처음부터 포기하길 잘했다. 나 같은 사람이 그런 것을 흉내 내려고 했으면 허리가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작 마음을 돌이키게 해주셔서 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여러분도 혹시 지금이라도 미련이 남아 있으면 해보면 된다. 해보지도 않고 미련만 갖고 있는 것 보다는 한 20시간이라도 앉아 있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후에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 자기 이름을 빛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수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오면 자연히 자기 수양이 된다. 수양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빛내려고 하니까 저절로 수양이 되어 버린다. 축구 선수들이 수양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기려고 골을 넣으니까 저절로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빛내려고 하니까 저절로 우리가 없어져 버린다. 나는 나를 없애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노력도 못하니까 처음부터 포기했다. 그런데 오직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니까 저절로 끌려 갈 수밖에 없다. 나는 할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끌려가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수양이 많이 됐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수양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여러분이 정말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건축 안으로 들어와야 온전한 사람이 된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 받으려면 건축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구원! 이것은 교회로 건축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 완성이기도 하다. 거기서 짜여져서 온전하게 자기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빛나게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 인격 따로 네 인격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인격 완성 따로 있고 네 인격 완성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의 이름이 완성되면 우리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다.
<바벨론 對 새 예루살렘>
성경의 마지막으로 바벨론 對 새 예루살렘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바벨론은 큰 성 바벨론이라고 이름 되어 있다. 큰 운명, 큰 성 바벨론. 많은 산 위에 있고, 큰 바다를 타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위대하는 뜻이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때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 자이다. 지금도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누가 지배하느냐는 것이 지구상에 누가 패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이다. 바다를 많이 가진 자가 패권을 많이 가진다. 지금은 미국이 가장 넓은 바다를 점령하고 있다. 바다의 패권을 잡고 있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록을 쓸 때 그 바다는 큰 세상을 의미한다. 바벨론은 어디인가? 큰 음녀로써 물을 타고 있다. 그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큰 성 새 예루살렘이 아니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하늘로조차 내려오더라, 신부가 남편 눈에서 단장한 것 같더라. 아름답다는 말이다. 거룩하고 아름답다. 크고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고, 거룩하고 아름답다.
교회는 크고 위대해 져서는 안되고,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교회는 여자와 같다. 여자는 크고 위대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아름다워져야 한다. 깨끗하고 아름다워져야 여자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크고 위대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아름다워져야 한다. 그것이 교회이다.
큰 성 바벨론과 얼마나 대조되는 성인가! 이 성이 마지막 결정체가 되게 될 것이다.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조차 내려오더라. 이 성은 내려오는 성이다. 올라가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갈 생각하신 분들은 하늘로 올라가면 거룩한 성은 내려오니까 거기에 가면 허당이다. 거룩한 성은 내려왔으니까 거기 가 보아야 아무도 없다. 내려온다는 것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이것은 내려온다는 뜻이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거룩한 성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다. 우리는 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사람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있어야 한다. 땅 위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전부 저 위로 올라갈 사람들만 있으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저 위로 올라가게 하려고 하는 것은 전부 사탄의 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우리가 건축의 일을 다 하고 나면, 그때 하늘로 올라가도 된다. 지금부터 미리 갈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 우리가 할 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땅 위에 건축의 일이 있으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땅 위에서 건축의 일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천당에 대해서 자꾸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나는 땅에서 할 일도 바쁜데 천당에서 자꾸 물어본다. 나는 할 일도 다 안했는데, 다 하고 난 다음에는 가도 된다. 하나님께서 다 하고 난 다음에 부르시지 않겠는가. 땅에서 필요 없으면 하늘로 부르실 것이다. 땅에서 필요할 때까지는 안부를 것이다. 땅에서 필요하지 않으면 불러 갈텐데 가만히 있으면 불러 갈텐데 왜 그렇게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땅에서 건축에 참여하고 건축을 하고 있으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저절로 불러 갈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불러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아도 불러간다. 기도하지 않아도 불러간다. 소원하지 않아도 불러간다. 조금도 염려할 필요 없다. 혹시라도 지금도 대구교회 다니다가 천당에 못갈까 해서 염려하는 분이 있다면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있어도 데려갈 텐데 왜 두려워하는가.
건축을 하라고 우리를 보냈다. 우리는 건축을 열심히 해야 한다. 불러 가실 분은 그분이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해서 올라가지는가? 불가능하다. 내가 올라간다고 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분이 끌어당겨야 올라가지 나는 올라 갈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땅위에서 걸음을 걷고, 발을 딛고 살고 있다. 여기서 할 일은 새 예루살렘으로 안으로 가는 것이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일은 우리에게 위임된 것이 없다. 맡겨진 것이 전혀 없다. 우리에게 약속 된 것도 없다. 그 다음 일은 그 분이 하실 일이다.
사탄의 계획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건축을 막으려는 것이다. 창조는 막지 못했다. 하나님의 창조는 막지 못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그분의 능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막을 수는 없다. 그런데 무엇은 막을 수 있는가? 건축은 막을 수 있다. 왜? 건축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막을 수가 없는데 사람이 하기 때문에 막을 수 있다. 사람만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면 이 일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 안에 있는 싸움은 건축에 관한 싸움이다. 창조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건축에 대한 싸움이다. 하나님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싸움이다. 그래서 교회를 변질 시킨다거나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사탄의 목표다. 예수 믿는 것을 못믿게 하는 것은 아니고,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다. 예수는 마음대로 믿으라는 것이다. 네 혼자 믿는 것은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네가 예수 믿는데 나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세상을 잘 살면 오히려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교회로 건축되는 것을 반대한다.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늘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오려니까 많은 문제가 생긴다. 걸리는 문제도 생기고 미운 사람도 생기고 여러 가지 생긴다. 내가 교회를 무엇하러 왔던가하는 생각이 나기도 하고 교회만 안왔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텐데 교회에 와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하기도 한다. 나 혼자 예수 믿을 때는 그런 문제가 없다. 조용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덮어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아주 편안하게 예수 믿으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 건축이 안 되기 때문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건축에 들어오려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건축을 막으려 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건축을 포기했다는 것에 대해서 인상 받아야 한다. 건축을 포기하고 천당을 창조했다. 땅위에서는 안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땅위에서는 안된다. 죽은 후에 밖에는 안된다고 되어 버렸다. 이것은 패배주의이다. 땅위에서 패배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사탄에게 패배했다는 뜻이다.
오늘 교회의 회복은 이 패배의 역사를 종식시켜야 한다. 땅위에서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선포해야 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려고 했다. 사람들을 모두 천당으로 모집하러 왔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다. 그는 패배주의를 전파한 것이 아니고 승리를 전파했다. 땅위에서의 승리를 전파했다.
우리는 패배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승리의 노선에 서야 된다. 교회 건축의 노선에 서야 된다. 세상을 대하는 교회 건축의 노선에 서야 된다. 그래야만 세상도 교회를 보고, 건축된 교회를 봐야 그 세상이 손을 들지 건축된 교회가 없으면 세상은 절대로 손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세상으로 흡수해 버린다. 구라파 같은 곳은 다 그렇게 되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자기 나라 안으로 흡수해서 정부 안에 종교부 같은 것이 있어서 정부 속에 흡수 시켜 놨다. 패배의 역사다.
오늘 이 패배의 역사를 끝내야 한다. 이것을 끝내려면 우리가 하늘에 올라간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땅위에서 죽든지 살든지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땅을 주었고, 땅 위에 나를 내려 놨다. 전쟁하는 사람은 비행기에서 떨어뜨려 두면 거기서 죽든지 살든지 전투를 해야 한다. 돌아 올 길이 없다. 게릴라 작전을 하면 헬리곱터로 실어다주면 거기에서 죽든지 살든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다음 부대가 도착할 때 까지 땅을 정복하고 있어야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땅에 투입된 사람들이다. 땅에 떨쳐 놓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땅으로 내려오신다. 땅에 우리가 자리를 잡아 놓지 못하면 예수님이 오실 수 없다. 자기 나라가 없는 데 어디로 오시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재림하시면 어디로 오시겠는가? 올 곳이 없다. 중앙청에 가서 이것이 내 집이라고 하고 오겠는가. 청와대에 가서 이것이 내 집이라 하고 오겠는가. 주님이 거하실 집이 있어야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건축을 해서 그 분이 거할 수 있는 장막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분이 오신다. 이스라엘 백성에 오신 하나님은 장막에 오신 하나님, 장막을 지어 놨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장막에 가득했더라, 덮혀있더라고 말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장막에 와서 계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려면, 주님이 다시 오시려면 그분의 장막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그분의 장막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가 부름 받아 나온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세상을 건축하는데 일조를 해서도 안되고, 우리가 땅을 버리고 하나님의 건축을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버려도 안된다.
우리는 꼭 여기 주어진 이 땅 안에서 하나님의 건축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건축이 되기 위해서 너무 크면 잘라야 하고 너무 작으면 높여야 하고 너무 뚱뚱하면 다이어트 해야 하고 너무 날씬하면 밥을 먹어야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한테 확실한 소망을 주시고 길을 주셨으니까 이 노선에서 우리가 한치도 어그러짐이 없이 모든 사람이 패배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서 성취하는 이 소망을 갖고 나갈 수 있게 되기 바란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땅위에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땅을 맡기시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지배하라 다스리라. 이렇게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직분을 유임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다 버리고 우리가 패배자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제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왕국을 다시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건축 안으로 다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땅위에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이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게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이 궁극적인 소원 안으로 들어가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이 일만이 오직 우리의 유일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